군림천하 : 976화
군림천하 (976)
고경은 그가 서문연상과 유소응이 나타날 때부터 그들의 뒤에 말없이 서 있던 자임을 알아보았다.
“너는 누구냐?”
듣는 이의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살기로 뒤덮인 음성이었으나, 미소년은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들의 동문 사형제요.”
고경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두 눈에서 흉포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저 계집과 꼬마 놈의 동문이라고?”
“그렇소.”
고경은 턱으로 슬쩍 서문연상과 유소응 쪽을 가리켰다.
“그런데도 저놈들이 죽는 걸 지켜만 보고 있을 셈이냐?”
겁박하는 듯한 고경의 말에도 미소년은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할 수 있다면 해 보시오.”
뜻밖의 반응에 가뜩이나 험악한 고경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본 파의 제자들은 스스로 뽑은 검의 결과가 어떻든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러니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그들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요.”
미소년은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고경의 두 눈을 직시하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소?”
“어떻냐니? 그게 무슨 말이냐?”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소?”
그 말에 고경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소년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어떠한 결과를 맞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만약 그럴 각오가 없다면 당신들은 그저 파렴치한 짓이나 일삼는 졸장부들일 뿐이오.”
고경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미소년을 노려보다가 문득 물었다.
“어느 파의 제자냐?”
“우리는 종남에서 왔소. 내 이름은 방화라 하오.”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 어린 빛이 떠올랐다. 일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고경의 가뜩이나 굳은 얼굴에도 한 줄기 어두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종남파란 말이지? 오늘은 정말 재수가 옴 붙었구나. 하지만 너희의 재수도 결코 우리보다 좋지는 못할 것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경의 주먹이 사나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방화는 자신의 코끝으로 날아드는 고경의 주먹을 슬쩍 옆으로 피하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을 부드럽게 뽑았다. 그의 출수 동작은 유연하기 그지없었고,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팟!
검광이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방화의 검은 어느새 공간을 압축해서 고경의 목덜미를 향해 육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 깔끔하면서도 눈부신 일검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고경은 이제 십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방화의 검이 생각보다 더욱 날카로운 것을 깨닫고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시간을 끌면 좋을 게 없다. 만에 하나라도 다른 종남파의 고수들이 올지 모르니 무조건 속전속결로 해치우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 설사 이들을 물리치고 여기를 벗어난다 해도 앞으로 종남파의 추적에 시달릴 걸 생각하니 암담한 절망감이 밀려왔으나, 한편으로는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두 주먹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그의 장기는 파황권(破荒拳)이라는 것으로, 고가의 비전인 피운신권(破雲神拳)에 그동안 강호를 떠돌며 습득한 철산권(鐵拳)과 수라권(修羅拳) 등의 절초들을 섞어 직접 만든 무공이었다. 파운신권보다 변화나 다양성에서는 미흡하지만, 원래의 목적인 사람을 살상하고 빠르게 승부를 보는 면에서는 상당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방화의 눈에 비친 고경의 커다란 주먹은 진한 살기가 가득 담겨 은근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남과 싸워 본 경험이 수 없었다. 별로 많지 않은 그로서는 자신을 향해 노골적인 살심을 드러내며 거칠 것 없다는 듯 덤벼드는 상대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두려운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방화가 싸운 사람들 중 가장 강적은 종남파의 본산을 습격했던 마령도 곽추였다. 그때 방화는 상당한 고수였던 곽추와 거의 대등한 싸움을 벌이다가 막판에 서문연상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왼팔에 일도를 맞고 말았다.
당시의 상처는 대부분 완치되었으나, 그때의 패배는 그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종남파에 입문하여 소지산을 사부로 맞이해 불철주야 무공을 수련했음에도 본 파를 습격한 외적 하나조차 감당하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로 고련을 거듭하여 나름대로는 그때의 후유증을 완전히 털어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지금 또다시 자신을 죽이려는 살심으로 가득 찬 공격을 받게 되자 당시의 기억 때문인지 손발이 차가워지며 가슴 한구석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하나 고경은 곽추가 아니었고, 자신 또한 그때의 왼팔에 칼을 맞고 고통에 신음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문득 방화의 뇌리 속으로 자신에게 검을 가르쳐 주던 사부 소지산의 조용하면서도 힘이 담긴 음성이 떠올랐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겁을 먹지 않는 것이다. 겁을 먹지 않으면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고, 그 침착함이 마지막 순간까지 너를 살릴 것이다.’
방화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려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수중의 장검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내가 물러서는 순간 유 사형과 사매가 위험해진다.’
방화는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코앞으로 날아드는 고경의 무쇠와도 같은 주먹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혀있는데다 울퉁불퉁한 흉터로 뒤덮인 그 주먹은 강철이라도 박살 낼 듯했지만 방화는 더 이상 몸이 떨리거나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부족함을 채우려고 늦은 밤까지 혼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던 종남산에서의 어느 순간이 떠올랐을 뿐이다.
‘마음은 냉정하게, 판단은 빠르게, 손길은 거침없이………….’
그의 검은 수백, 수천 번을 거쳐 갔던 그 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여 갔다.
파앗!
시퍼런 검광 한 가닥이 그의 손에서 피어올라 허공을 찬연하게 빛내고 사라졌다.
고경은 자신이 전력을 다해 내지른 두 개의 주먹 사이로 무언가 차가운 섬광이 뚫고 들어와 앞가슴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쩌억 갈라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으나, 고경은 통증보다는 놀라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막연히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의 검은 훨씬 더 빠르고 날카로웠던 것이다.
‘이것이 종남파의 검인가?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찌 이런 검을………..?
그는 채 생각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피가 전신을 흠뻑 적셨으나, 싸늘하게 식어 가는 그의 몸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주위가 죽음처럼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노아삼수의 대형이며 산서성 북부에서는 나름대로 상당한 흉성을 쌓아 온 고경이 아직 홍안의 소년에게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훗날 어떠한 강적과 싸우더라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는 불퇴검(不退劍) 방화의 전설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방화는 한 차례 숨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신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크게 두 걸음이나 전진해 있었다. 그 덕분에 더욱 강력한 일검을 날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가 방금 사용한 것은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성진으로, 그로서는 남들 앞에서 천하삼십육검을 펼친 것도 처음이었고, 그 검으로 다른 사람을 죽인 것도 처음이었다.
손이 떨리거나 두려운 생각이 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음은 차분했고 손끝도 안정되어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려 보니 때마침 서문연상과 고취의 싸움도 거의 끝이 나고 있었다.
고취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강침도 어딘가로 사라지고 절혼투를 낀 왼손은 손목째 잘린 채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다가, 집요하게 쫓아온 서문연상의 검에 그대로 가슴을 꿰뚫리고 말았다.
“크악!”
고취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격하게 떨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져 버렸다.
“흥, 하루살이 같은 놈!”
서문연상은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을 세차게 잡아 뽑고는 검신을 한 차례 휘둘러 묻어 있던 피를 떨쳐 냈다. 그러고는 능숙한 솜씨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날렵하고 유연했던지 마치 한바탕 검무를 추고 검을 거두는 것처럼 화려해 보였다.
그녀는 가슴이 뚫린 채 쓰러져 있는 고취의 시선을 내려 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공언한 대로 주둥이를 도려내야 할까? 시신에 손을 댔다고 사부님께 혼나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 꼬마 사형과 방사형은 어떻게 됐지?”
한쪽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는 방화를 발견한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다른 놈은 어찌했어요?”
방화는 말없이 턱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서문연상은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고경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망설이다가 놓치면 어쩌나 했는데, 제법 멋지게 해치웠군요. 꼬마 사형은요?”
방화는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
그녀는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유소응과 고표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 사형이 의외로 잘 싸우는군요.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방화는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장내의 싸움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했던지 서문연상은 속으로 살짝 웃고 말았다.
‘꼬마 사형은 잘하고 있는데, 방사형은 여전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구나. 저럴 때 모습은 의외로 괜찮은걸’
아닌 게 아니라, 유소응은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고표를 상대로 전혀 물러섬이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자기 키에 가까운 기다란 장검을 두 손으로 잡은 채 기형도를 휘두르는 고표와 싸우고 있는 유소응의 모습은 의외로 어색하거나 불안하지 않고 상당히 능숙해 보였다. 게다가 고표의 무서운 공격에도 겁을 먹거나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기본이 정말 잘 닦여 있음을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체격적인 불리함과 그로 인한 신장과 팔 길이의 부족함, 그리고 내공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다채로운 초식의 운용과 사용하는 무공의 뛰어남으로 호각지세를 이룰 수 있었는데, 갈수록 힘이 달리는 모습이었다.
서문연상은 유소응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신체적인 불리함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구나. 유 사형이 한두 살만 더 나이를 먹었어도 진즉에 저놈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너무 어리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급격히 힘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던 유소응이 더 이상 고표를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고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숨에 유소응의 머리 위로 날아들며 수중의 기형도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앗?”
서문연상이 놀란 외침을 토하는 순간, 휘청이던 유소응의 몸이 옆으로 비스듬히 눕더니 빙글 회전하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수세에 몰려 있던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절묘한 동작이었다. 그와 함께 날카로운 검광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위에서 떨어져 내리던 고표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팟!
비명도 없었다. 고표는 아래턱에서 이마까지 검광에 관통당한 채 한 차례 몸을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유사형!”
서문연상이 달려들기도 전에 방화가 먼저 신형을 날려 바닥에 나뒹굴려는 유소응의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유소응은 그때까지도 견정검을 움켜잡은 채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과 눈꺼풀의 경련만 보아도 그가 지금 진력까지 소모해 내공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방화는 급히 그를 똑바로 앉히고 명문혈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태을신공을 운용해.”
유소응이 견정검에 의지한 채 억지로 몸을 바로 앉으려 했다. 서문연상이 재빨리 다가와 견정검을 빼앗듯 잡아들자 그제야 유소응은 눈을 지그시 감고 태을신공의 요상결(療傷訣)을 읊기 시작했다.
방화가 그의 등에 손을 댄 채 보조를 하자 서문연상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견정검을 내려 보았다.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는 견정검을 본 서문연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아직 어린 나이의 사형에게 이런 검을 선사하다니. 장문인 생각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나저나 유 사형이 마지막에 펼친 건 말로만 듣던 색혼검결 같은데, 나도 못 배운 걸 대체 언제 배운 거지?”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쓰러진 고씨 삼형제와 그들이 흘린 피의 여파로 만복당 안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의외로 커다란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싸움에 부상을 당하거나 끼어든 자들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죽은 자들이 산서성 일대에서 악행을 일삼던 흉한들이고 그들을 제거한 사람들이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종남파의 제자들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만복당에서 벌어진 일은 상당히 오랫동안 서안 일대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노아삼수를 꺾었다고 하여 이들을 종남삼수(終南三秀)라 불렀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손풍은 자신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느라 그 자리에 끼지 못했다며 가슴을 치고 원통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