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94화
군림천하 (994)
제402장 단심봉황(丹心鳳凰)
정소소는 어느새 조용히 사라져 있었고, 넓은 주루 안에는 두 남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동안에도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이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집요하리만치 따가운 시선에도 진산월의 담담한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단봉공주는 한동안 의미를 알기 힘든 시선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당산에서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동안 진 장문인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군요.’
“무슨 말씀이시오?”
“기세나 기도가 한층 더 가다듬어졌을 뿐 아니라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달라진 게 느껴지는군요.”
진산월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 달라졌단 말씀이오?”
단봉공주의 두 눈은 여느 때와 달리 묘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이한 마력이 담긴 눈빛이었다.
“예전에 진 장문인의 눈은 항상 나를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 뒤의 누군가를 향해 있군요.”
의외로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셨소. 나는 공주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소.”
“그 사람이 누구인가요?”
진산월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소. 그래서 혼자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일의 배후는 누구이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인지……………..”
“궁금하군요. 어떤 일들을 말하는 건가요?”
“왜 내 사매는 강호에 나온 후로 줄곧 공격을 당해 왔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조익현을 언급하며 계속 그와의 대결을 부추기는지, 왜 처음 만난 모용 대협이 존재조차 모호했던 음양쌍반진을 익혀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는지…. 정말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소.”
단봉공주의 두 눈이 어느 대보다 영롱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해답을 찾았나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안 건 아니오. 다만 한 가지, 이 일들에는 누군가의 분명한 의도가 숨어 있고, 그 일의 배후는 오직 한 사람뿐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소.”
“무척 흥미로운 결론이군요. 그 사람이 누구인가요?”
진산월의 시선이 단봉공주의 아름다운 두 눈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바로 당신이오.”
단봉공주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가볍게 웃어 보였다.
“호호. 그것 참 재미있군요. 나와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면서 모든 일의 배후자로 나를 지목하다니.”
“내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단봉공주가 아니오. 단봉공주라는 허울 좋은 가면을 쓰고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하는 백모란, 바로 당신이오.”
그 말에 처음으로 단봉공주의 두 눈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면사 너머로 고개만 까닥거렸다.
진산월은 그녀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밝혔다.
“내 사매가 처음으로 암습을 당한 것은 사 년 전이었소. 일면식도 없던 목극등이란 자의 습격이었는데,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는 습격에 모두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소. 처음에는 우리 일행을 노린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나는 그의 목적이 사매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소. 그자에게 당한 구음향 때문에 사매는 강호에서 제대로 행도하지 못하고 구궁보에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으나, 그 음성 속에는 한 줄기 비통함과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 습격 이후로 임영옥은 정말 파란만장한 굴곡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구음향의 음기는 그 뒤로 계속 임영옥을 괴롭혔다. 다른 사람에게는 단순한 음약이나 독물일지 몰라도 태음신맥을 타고 난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극독인 셈이었다.
그녀는 구궁보에서 천양신공을 익히고 나서야 겨우 구음향의 음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으나,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했을 뿐이다. 천양신공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체내에 잠복되어 있던 음기가 양기에 격발되면서 그녀의 몸을 공격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의 몸을 몇 번이나 살펴본 후에 진산월은 칠음진기만이 그녀의 몸을 완벽하게 치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나 악산대전에서 비성흔을 상대하느라 그녀는 간신히 억눌러 놓았던 음기의 폭발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진산월은 강일비와의 거래를 통해 칠음진기의 반쪽 요결을 얻어 그녀의 음기를 잠시나마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무당산을 떠나 종남파로 귀환하는 도중에 그녀는 또 다시 쾌의당의 습격을 받고 억지로 무공을 끌어올리느라 체내의 음기를 다시 분출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마치 모든 일이 사매로 하여금 음기를 계속 일으켜 스스로의 수명을 단축시키도록 만들게 하는 것 같았소. 한 번이라면 우연일지 몰라도 이런 일이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었으니 이제는 나도 이것이 누군가의 치밀한 의도가 숨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소.”
“그 누군가는 사매가 태음신맥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손을 써 왔던 거요. 그러고 보니 나는 과거 무림에서 태음신맥을 지닌 여인이 태어나면 얼마 살지 못하고 단명하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그것이 단순히 태음신맥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교묘한 계획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오.”
사실 태음신맥 자체는 보유자에게는 축복에 가까운 일이었다.
태음신맥의 보유자는 천성적으로 두뇌가 영특하고 체내의 경맥이 모두 뚫려 있어 무공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체질이 된다. 게다가 음공을 익히게 된다면 그 효능은 가히 놀라워서 어렵지 않게 절정의 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백 년 전의 어느 날부터 태음신맥을 타고난 여인들은 모두 스무 살이 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숫자가 지극히 적었기에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누군가가 태음신맥의 보유자를 노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소. 다만 나는 그 사람이 자신이 익힌 음공을 자신 외에 천하의 누구도 익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오.”
진산월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면사 너머로 보이는 단봉공주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사람은 비선 조심향 이후 유일하게 칠음진기를 완벽하게 익힌 백모란, 바로 당신이오. 내 생각이 틀렸소?”
단봉공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눈으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문득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거두어 들였다.
사르륵!
면사가 흘러내리며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이 드러났다.
그린 듯 고운 아미 아래 별처럼 반짝이는 두 개의 눈동자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오뚝하니 솟은 콧날, 피처럼 붉은 입술과 혈색 좋은 두 뺨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보는 순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가히 절대적인 미모였다.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여인!
지난 백 년간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단언하는 천하제일의 미녀!
그리고 비선 조심향 이후 처음으로 칠음진기를 완벽하게 익혀 음공에 관한 한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절세의 여고수!
그 모든 건 오직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치 않는 외모 때문에 단봉공주라는 또 하나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녀의 참다운 면모는 바로 백모란이라는 이름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진산월은 단봉공주가 아닌 백모란을 만나겠다고 한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처음으로 진산월에게 드러낸 백모란은 어느새 말투 또한 달라져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아이로구나. 네가 내 정체를 알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언제부터 나를 의심했던 것이냐?”
진산월은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도 전혀 흥분되거나 떨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면사 속의 얼굴을 보게 되면 틀림없이 마음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 그의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았다. 그녀의 미모는 그의 마음에 작은 돌멩이 같은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예전부터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조금씩 작은 의혹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누군가에게서 늙지 않는 외모의 여인에 대한 말을 듣자 흩어졌던 생각들이 하나로 귀결되더군요.”
그녀를 대하는 그의 말투도 어느새 변해 있었다.
격식을 차린 그 말투는 그녀를 단순한 선배 여고수로 대접하겠다는 의사의 분명한 표현이었다.
백모란도 이를 짐작했는지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엷은 미소를 흘렸다.
“호호. 확실히 비범하구나. 너의 그런 모습 때문에 너를 눈여겨보게 되었지.”
단순한 웃음이었으나, 그 속에는 보는 사람의 심혼을 앗아버릴 만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웃음을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진산월조차도 한순간은 가슴 속에 미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나 단지 그뿐. 진산월은 곧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순간적으로 흔들린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일 뿐이었다.
백모란은 그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너무 평범해서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너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네가 석동 이후 처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남자가 되었구나. 그러니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다른 여자라면 낯부끄러워 하지 못할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녀가 자신의 외모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용법에 대해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나 음성에 특별한 기교나 꾸밈이 없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녀는 남을 유혹하겠다는 생각이나 의사를 일부러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마음먹는 순간 자연스레 그렇게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열다섯 살 이후 전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진신월이 자신의 외모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그녀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마음을 먹든 결국에는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난 백 년간 그녀가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