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98화
군림천하 (998)
제403장 월광천추(月光千秋)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진산월이 제일 처음 느낀 것은 너무나도 그리운 그녀의 향기였다.
사라옥정향의 은은한 내음을 맡자 진산월의 마음은 그 자신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울렁거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솟구쳐 오른 진한 감정은 이내 그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방은 겉에서 볼 때보다는 크고 정갈했다.
창문이 달린 벽 쪽에 침상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침상에 누워 있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침상 옆에 선 채 진산월은 한동안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그사이에 그녀는 부쩍 야위어 보였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금시라도 떠져서 영롱한 눈망울이 보일까 봐 진산월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으나 눈은 뜨여지지 않았다. 대신 옅은 숨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진산월은 침상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흡사 자기 때문에 그녀의 깊은 잠이 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모양새였다.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날이 점차 어두워졌다. 창문 너머로 희미한 월광 한 가닥이 흘러 들어오자, 방은 한층 더 적막해지고 고요한 침묵은 끝없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음영이 드리워지는 모습을 진산월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달빛 아래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월궁(月宮)의 항아(姮가 내려온 듯 아름답고 고적해 보였다.
콧등과 입술에 달빛이 머물며 더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끝에 차가운 냉기가 스치자 진산월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의 얼굴이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진즉에 맥문을 확인해 볼 생각을 못 했을까?
그녀의 몸에는 생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극음의 한기만이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한기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대신에 그녀의 몸속에는 한 톨의 진기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람이라면 의당 가져야 할 진원지기마저 사라져 있었다.
무당산에서 헤어졌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몸속의 한기는 칠음진기의 반쪽 구결만으로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가 있었고, 체내의 진기는 비록 미약하게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녀의 한 몸을 지탱하기에는 충분한 상태였다.
그걸 확인했기에 진산월은 그녀를 낙일방과 성락중에게 맡기고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시일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그녀의 몸은 생기가 모두 빠져나간 고목(枯木)처럼 변해 버렸다. 지금의 그녀는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던 것이다.
진산월은 순간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 했다. 미친 듯한 고함이라도 내질러 마음 한구석을 뚫고 나오는 이 억눌린 감정과 가슴속의 답답함을 모두 털어 내고 싶었다.
그때 그녀가 눈을 떴다.
마치 닫혀 있던 장막이 걷히듯 그녀는 몇 차례 눈꺼풀을 깜박이다가 이내 달빛보다 더욱 영롱한 눈으로 진산월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울분이 가득 차서 금시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던 가슴이 그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급격히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대신 그 안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따스하고 아련한 감정이 조금씩 들어차고 있었다.
그 감정은 폭발할 듯하던 그의 가슴을 달래 주듯 어루만지며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임영옥은 진산월의 얼굴만 보아도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다시 한 차례 눈을 깜박거렸다.
“언제 왔어요?”
낮게 소곤거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듣자 진산월은 하마터면 왈칵 눈물이 흘러나올 뻔했다.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간신히 대꾸했다.
“조금 전에.”
“깨우지 그랬어요.”
“너무 곤하게 자고 있기에.”
그녀는 진산월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빼내 반대로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일으켜 줘요. 사형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어요.”
진산월은 그녀의 몸을 안아서 자리에 앉힌 다음 자신도 그녀의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코앞으로 바짝 내밀었다.
“자. 실컷 봐.”
임영옥은 살포시 웃으며 그의 이마를 가녀린 손가락으로 밀었다.
“너무 가깝잖아요. 심술부리지 말고 조금만 떨어져요.”
자신의 이마에 닿은 손가락 끝이 너무 차가워서 진산월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임영옥은 진산월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낮게 소곤거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한참 기다렸잖아요.”
“미안. 빨리 오려고 했는데, 걸리적거리는 게 너무 많았어.”
임영옥은 뱅어같이 하얀 손으로 그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진산월은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으나, 임영옥은 몇 군데를 지적했다.
“앞가슴과 옆구리에 심한 상처를 입었었군요. 명치 부근에도 상처가 있고.”
진산월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임영옥은 잔잔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어깨와 목덜미 쪽에도 상흔이 남아 있네요. 왼손도 다쳤지요? 내 손가락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더군요.”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진산월의 몸을 모두 살펴본 임영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은데, 다치지 않은 곳이 없군요. 이제 오른손을 내어 보세요.”
진산월은 지금까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임영옥은 그의 오른손을 조심스레 잡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음.”
참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입술을 뚫고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찢기고 갈라져 귀면상을 이루었던 그의 손바닥이 다시 크게 찢겨진 흔적이 생생하게 드러난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된 단련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더 이상은 흠집 하나 날 것 같지 않던 그 강철 같은 손바닥이 거의 절반 가까이 갈라져 있었다. 그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는지 갓 돋아난 새살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어 세게 쥐면 지금도 핏물이 뿜어 나올 것만 같았다.
“세상에. 얼마나 세게 격돌했기에 손바닥이 이렇게 되었죠?”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었어. 상대가 너무 강했으니까.”
“누군데요?”
“사효심.”
임영옥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점창파의 그 사효심 말이에요?”
“그래.”
“사효심이 비록 점창파 사상 제일 고수라고 해도 사형의 손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 외에 또 있었죠?”
진산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 더 있었지.”
“그들이 누구인가요?”
“위지립과 섭소심.”
임영옥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들은 모두 쾌의당의 용왕들 아닌가요? 그들을 모두 동시에 상대했단 말이에요?”
“한 사람 더 있었어.”
“누군데요?”
“쾌의당주.”
진산월의 말에 임영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거의 알아듣기 힘들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진산월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영옥은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런 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오느라 늦었군요. 용서해 줄게요.”
“늦어서 미안. 더 빨리 오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되더군.”
임영옥은 고개를 숙여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녀의 얼굴은 몸만큼이나 차갑고 냉기가 가득했으나, 진산월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두툼한 손을 들어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릿결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임영옥은 그의 품에 반쯤 파묻힌 자세로 두 눈을 감았다.
마치 어미 새의 품속을 파고든 어린 새처럼 그녀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 자세로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요새 잠이 늘었어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잘 때도 있어요. 그래도 깨어나면 늘 사형을 기다렸어요. 창문 밖으로 인기척이 날 때마다 사형이 왔나하고 가슴 설렜지요.”
“저런, 그런 줄 몰랐군.”
“나는 이미 오랫동안 기다려 와서 기다리는 게 힘들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난 며칠간은 많이 힘들었어요. 정말 사형이 보고 싶었거든요.”
진산월은 그녀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걸 몰랐군. 나는 역시 바보인가 봐.’
“사형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네요.”
“이제 조금씩 하면 돼. 앞으로 같이 있을 시간이 많으니까.”
“정말 그럴까요?”
“그럼 지금부터는 사매 옆에 찰싹 붙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야.”
임영옥은 가늘게 웃었다.
“바보. 아직도 할 일이 태산이면서.”
“아니야. 어떤 일도 사매와 같이 있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정말이야.”
“믿어 줄게요. 그런데…………….”
임영옥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고개를 내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뺨에 손을 대어 보고는 그녀가 다시 잠이 든 것을 알았다.
몸에 남은 기운이 워낙 적어서 그와 잠깐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모든 기운을 소모해 버린 것이다.
진산월은 잠이 든 그녀를 침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그녀의 맥문을 손으로 잡았다.
형산파의 오결검객인 비성흔을 쓰러뜨린 놀라운 검법을 펼쳤던 여인이 불과 한 달 만에 스스로의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는 것은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그의 손안에 잡혀 있는 그녀의 손목은 너무도 가냘프고 연약해서 살짝 움켜쥐기만 해도 그대로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얼마 전에 입수한 칠음진기의 구결을 떠올리고는 칠음진기를 끌어 올려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칠음진기의 구결을 모두 얻은 것이 불과 며칠 되지 않았기에 겨우 입문한 수준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그것만이 음기로 가득 찬 그녀의 몸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추궁과혈(推宮過穴)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지금 그녀의 몸은 너무도 취약한 상태였기에 진산월은 체내의 기혈이 잘 통하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기를 유입해 그녀의 맥을 부드럽게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