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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23화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던 예언자는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조금 후 예언자는 기시감이 아니라 진짜 보았던 광경임을 깨닫고는 맥 없는 웃음소릴 냈죠.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이 어제와 비슷한 자세로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루릴은 눈인사를 보냈지만 예언자는 그 인사를 무시했지요. 그는 그대로 이루릴의 옆을 지나쳤습니다. 그러면서 흘리듯 말했죠.

“가겠습니다.”

이루릴은 집 밖에서 기다렸죠.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단속적으로 나더니 잠시 후 예언자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어깨에 간단한 가방 하나를 멘 예언자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이루릴을 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여행이 시작되자 예언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이루릴은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언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나직이 중얼거리며 허공을 어루만졌지요.

그러자 그녀의 손에 닿은 공간이 결빙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언자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얼어붙은 공간이 직경 5큐빗 정도의 원이 되자 이루릴은 뻗었던 손을 끌어당겼습니다. 그러자 공간 은 살얼음이 깨지듯 갈라지더니 갑자기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공간의 파편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엔 어두컴컴한 구멍만 이 남았지요.

틀림없었습니다. 그것은 마법사가 그 존재 자체로 권세였던 고대의 위대한 마법임이 분명했지요. ‘핸드레이크 시절에나………….. 라는 말을 떠올렸던 예 언자는 갑자기 엘프가 굉장히 오래 산다는, 영원히 산다는 풍문까지 따르는 종족임을 떠올렸습니다. 예언자가 자신의 의문을 전달하자 이루릴은 다 소 기묘하게 들리는 대답을 했어요.

“나는 일 년 내내 친구를 추도해야 하죠.”

“네? 일 년 내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늘 이날 죽은 친구는, 당장 떠오르는 건 세 명이군요. 30여 년 전에 한 명, 그리고 140여 년 전에 두 명이에요.”

여러분도 가족이나 친구가 죽은 날짜는 기억하겠죠. 이루릴에겐 일 년 전체가 다 그런 날이었어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기일만 따져도. 그 사실이 암시하는 장구한 연륜에 예언자는 압도당했지요. 하지만 이루릴은 자신보다 더 인상적인 것이 있다는 눈으로 예언자를 보았습니다.

“나는 정말 오랫동안 살았어요. 그런데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나는 예언을 싫어하는 예언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랬나요?”

“물론 자기가 본 미래에 절망하고 자신의 능력을 저주했던 이가 없었던 건 아니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들이 싫어한 건 끔찍한 미래나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어요. 그들에겐 예언이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였죠. 그런데 당신은 예언이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라 말하지요. 왜 그런 차이가 나 타나는지 생각을 좀 해보았어요. 별 증거 없는 가설일 뿐이지만, 내 결론은 이래요. 그건 당신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예언자이기 때문이에요.”

예언자는 우쭐거리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 채 긍정했습니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당신은 내 나이에 놀라지만 나에겐 당신이야말로 신비한 존재예요. 그녀도 그 사실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녀의 처지 때문에 그건 힘 들 것 같군요. 하지만 그녀가 당신을 존중하기 어렵다 해도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예요.”

“그녀요? 누구 말입니까?”

“저편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를 말하는 거예요. 나를 제외하면 창세 이래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존재예요. 당신이 역사상 두 번째 목격자가 되 겠군요. 내 손을 잡아요.”

예언자는 얼떨떨한 기분 속에서 이루릴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루릴은 그를 허공에 생긴 구멍 안으로 인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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