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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40화


왕비는 이맛살을 찌푸렸죠.

“이런 무슨 억하심정으로?”

“왕비님의 주의가 전부 그 책에 쏠려 있는 것 같아서요. 이젠 제 말에 더 주의를 기울여주시겠지요.”

“무시하기 위해 번거롭게 여기까지 나오지는 않았소. 그런데 이마는 왜 그런 거요?”

“좀 다쳤습니다만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치료는 잘 받았습니다.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의 요구대로 예언을 하겠습니다.”

왕비는 잔인하게 하품을 했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그런 이야기라면 날 밝은 후에 해도 됐을 텐데?”

모욕을 당한 예언자는 목 주위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이마가 다시 욱신거렸죠.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고 호들갑 떨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마음이 다시 바뀔지도 몰라서요. 입 밖으로 내어버려야 할 것 같았습 니다.”

“알겠소. 그게 다요?”

“예언을 하는 데 조건이 세 가지 있습니다.”

왕비는 토끼에게서 ‘머리부터 삼켜질지 꼬리부터 삼켜질지 정도는 내가 정하게 해줘요.’라는 말을 들은 호랑이 같은 얼굴이 되었어요.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왕비가 턱짓을 하자 예언자가 말했습니다.

“첫째, 왕자의 미래는 보지 않겠습니다.”

“뭐요?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 말씀하진 마십시오. 저는 왕자를 위해서 예언을 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리고 저는 같은 이유에서 왕자의 미래는 보지 않을 겁니다. 전하. 왕자 가 예언자가 될 거라면 우대하고 예언자가 되지 못한다면 홀대하실 겁니까? 그런 꼴은 볼 수 없습니다. 왕자는 전하의 아드님이지만 또한 제 아들이 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제가 왕자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왕자가 예언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어린 자식이 모정 속에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제가 거짓말을 할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전하께서는 제 예언을 믿으실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제 예언을 믿으 실 수 없다면 그냥 기다리시는 편이,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동안에도 전하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예언자가 있을 테니 급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왕비는 예언자를 매섭게 바라보았어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군. 좋소.”

“둘째, 예언할 사건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계속해서 들어주기 힘든 조건이군. 내가 원하는 때와 장소의 일을 말해 주진 않겠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주도권을 제가 가지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미래가 아닌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께서는 당연히 바이서스의 역사를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전하께 아무 날짜나 장소를 지정하여 질문한다면, 이를 테면 316년 1월 24일 헬턴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질문한다면 어떨까요? 그에 대 답하기 위해선 전하께서도 대단히 많은 시간과 자원을 소모하셔야 할 테고, 그런 후에도 끝내 대답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예언도 그런 식이란 말이오? 유명한 사건일수록 알기 쉽다?”

“완벽하게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이해하기 쉬운 비유입니다. 역사책에 어떤 사건들을 기술할지 결정하는 것이 역사가의 일이라 생각하신 다면 미래에 일어날 일 중 어떤 것을 예언할지는 제게 일임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쓸데없는 예언을 남발할 생각이 없습니다. 왕자에게 위해가 갈 테니까.”

왕비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말이 되는 것 같았죠. 어쨌든 반박할 방도는 없었습니다. 미래를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녀가 아 니었으니까요.

“한시적으로 동의하겠소. 그 요구를 거절해야 하는 이유를 내가 알게 된다면, 아니, 의혹만 느끼게 되어도 그 동의는 철회될 거요. 그것이 내 대답이 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번복되지 않을 거요. 마지막 조건은 무엇이오?”

예언자는 볼에 골이 생기도록 어금니를 깨물고 나서 말했습니다.

“제가 원할 땐 공개적으로 예언하고 싶습니다.”

“뭐요?”

“제 존재를 바이서스 국민들에게 알려주십시오. 왕자의 탄생을 맞이하여 왕자의 복된 내일을 예언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제가 돌아왔다 정도면 될 것 같군요. 듣고 싶은 이들이 모두 모였을 때 열린 장소에서, 이를 테면 베란다 같은 곳에서 예언하고 싶습니다.”

“뒤늦게 명예욕에 눈뜨기라도 한 거요? 그런 되지도 않을 요구를 내가 들어줄 거라 생각하는 거요?”

“어째서 되지도 않을 요구입니까?”

“모든 사람이 아는 정보는 정보로서 별 가치가 없소.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정보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오?”

“길을 잃어버린 사람에겐 방위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정보입니다.”

“나는 왕의 적들이 모두 길을 잃길 바라오.”

“왕의 벗들도 길을 잃어 왕을 도울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은유법은 그만둡시다!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수락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보시오.”

“저는 항상 공개적으로 예언하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할 때 그러겠다고 했지요. 날짜를 정하셔도 좋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든가, 한 철 에 한 번이라든가 하는 식으로요.”

왕비는 잠시 예언자의 말을 숙고해 본 후 차갑게 웃었습니다.

“나에게 맞서려고 대중을 등에 업어볼 작정이요?”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온 세계의 권세를 다 손에 쥔 정복자도 자기 자식은 이길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제가 영원히 전하께 맞설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절대 반항할 수 없는 적에겐 관용을 보여주기도 하는 법이잖습니까? 과거 저는 사람들의 예언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이제 예언을 하기로 했으니 그들에게도 미래를 말해주는 것이 도의에 맞는 일인 것 같습니 다.”

“좋소. 일 년에 두 번, 예언 내용을 내게 사전 승인 받는 조건으로 허락하겠소.”

예언자는 두 번은 너무 적다고 항의했지만 왕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죠. 어쩔 수 없이 예언자는 그 안에 동의한 후 물러갔습니다.

왕비는 예언자의 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왕비에게 옴짝달싹 못하게 옭매이게 되자 바깥에서 협조 세력을 찾아보려는 그 시도에는 최악의 상황 을 순순히 인정하는 판단력과 무슨 해결책이든 일단 모색해 보는 불굴의 기상이 엿보였거든요. 둘 다 왕비가 꽤 좋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동족 혐오가 없다는 것은 확실했어요. 왕비는 침소로 돌아가 책이나 마저 읽다가 자기로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책으로 손을 뻗던 왕비는 그 손을 멈췄습니다. 그녀는 당혹감을 느끼며 책표지를 노려보았지요.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많이 식었다는 것 을 깨달았거든요.

‘범인은 영주의 아들입니다.

문득 왕비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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