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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 –

뭐… 어쨌거나, 간단히 모용사랑을 회유한(?) 나는 오히려 그녀의 위로까지 받으며 선실에서 푸욱~ 쉴 수 있었다.

월영당의 야영들과 점심식사를 겸한 회동이라도 한 건지 사영은 오후 늦게 돌아왔는데, 그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동행이 된 모용각, 상관웅 일행을 확인하고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 보다 갔던 일은 요?”

“무사히 접촉한 후 지시하신 대로 전달했습니다.”

내가 사영을 통해 월영당에 전달한 건, 강호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극악서생’ 떴다는 소문이 나게 해 적들을 혼란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사영은 성동격서(聲 東擊西)라는 한자성어를 들먹였지만, 뭐… ‘늑대와 양치기 소년 작전’ 정도로 해두자. 이미 어제 부로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가짜 행렬은 예정대로 비화곡으로 철수해 버렸고,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강호인들에게 이 두 번째 작전은 또 어느 정도나 먹힐지 모르겠다. 신수성녀를 만날 때까지 만이라도 시간을 벌어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비인사기의 노림을 받으며 모용세가와 무림맹 감찰단 신진 고수들의 호위라… 꽤 재미있는 여행이 될 것 같군요.”

배가 출발한 후, 나에게 대충 상황 설명을 들은 사영의 반응은 그저 말뿐이 아니었다. 이 넉살 좋은 전직 살수께서는 선원으로 변장한 모용각과 상관웅에게 사근사근 말을 붙이는 것 같더니 저녁 무렵에는 서로 꽤나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 정도가 되어 있었다. 음… 그런 측면은 나도 남의 말 할 처지가 아닌가? 나 역시 그동안 모용사랑과 더 친해져서 언니 동생하며 정답게 수다를 떠는 사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모용사랑에게 듣고 싶었던 얘기는 당근 모용란에 관한 얘기였는데, 이리저리 돌려가며 묻느라 시간은 꽤나 걸렸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그다지 새로운 내용을 들을 수 없어 조금 실망이었다. 모용세가의 현재 가주이며 모용사랑의 아버지인 모용성이 과거 모용란의 약혼자였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녀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그녀를 증오하며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는 얘기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모용각과 상관웅, 그리고 모용사랑은 갑판 한쪽에서 지들끼리 모여 무슨 대책 회의 같은 걸 모양이었고, 그 사이 나도 사영과 선실에서 오늘 결산(?)을 했다.

“음… 아무리 모용세가의 핵심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18년이나 지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단서를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소녀를 통해 알고자 한 건 좀 안이한 발상이었을까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쳇, 그렇다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잘라 말할 건 뭐유, 사영.

“그보다… 정말 모용란의 과거 얘기를 알기 위해서 모용사랑을 지목했던 겁니까?”

“그래요. 현재의 내 입장으로는 이명환 같은 경우도 걱정되고 해서, 모용각이나 상관웅과 오래 얘기하는 건 내키지 않아서요.”

“그런가요? 음… 그렇군요.”

“응…? 왜 표정이 그래요? 아, 무대가께서도 모용각, 상관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던데 뭐 들은 얘기 있어요?”

“별로, 알려진 것과 특별히 다른 얘기는… 음,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그러네요. …근데, 계속 왜 그래요? 새삼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저들을 태운 건 신수성녀를 만나기 전에 내가 사라지는 순간의 목격자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했잖아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쉬운 건 아니겠지만… 그게 그렇게 걱정돼요?”

“아뇨, 아가씨께서 진행하시는 일인데 틀림없이 모두의 이목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다만 뭐요?”

“저의 딸, 네 명이 생각나서요. 그리고 그 중 큰 딸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 생각이 특히 나는군요.”

이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야? 지금 우리와는 전혀 다른 코스로 비무장소로 향하고 있는 대교와 동생들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게다가… 쑥스럽게 왜 대교와 내 관계를 강조하고 그래?

“그럼, 편히 쉬십시오.”

사영이 평소와 달리 무뚝뚝한 태도로 인사하고 나가자 잠시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얼마가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아- 오늘도 너무 피곤한 하루였어요. 오늘밤만이라도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죠, 하연 언니?”

모용사랑은 선실로 들어오자마자 주저 없이 겉옷을 벗어 제기고 있었다. 으… 그 생각을 못했다. 배 안에 독립된 선실은 여기뿐, 여자는 단 두 명(?)… 당근 난 모용사랑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어머-? 이 분은 왜 여기 있어요? 설마 잠자리에서까지 언니 호위를 서요?”

지난번 배부터는 짱 박히지 않고 내 근처에 보이게 대기하고 있는 흑주를 보고 한 말이다.

“그게, 음… 실은 그…녀도 여자야. 이름은… 그냥 ‘주아’라고 부르면 돼.”

얼결에 흑주를 여자라고 해버렸다. 어차피 두 눈 외에는 모두 철저히 가려고 사는 인물이니 상관없겠지?

“그랬었군요. 미안해요, 주아님.”

흠… 이 모용사랑도 무림인이라 그런지, 신분은 어떻든 엄청 고수인 것이 느껴지는 사영과 흑주에게는 첫 대면부터 공손한 편인 것 같다.

“흐흥~ 며칠 동안 그 요녀들을 추적하느라 목욕도 변변히 못했네. 이렇게라도 하잖으면……”

허걱~! 이 아이, 왜 물통을 안으로 들고 들어왔나 했더니… 오, NO-! 안돼! 벗지마!

“자, 잠깐! 바람 좀… 조금 있다 들어 올게.”

“어머…? 잠깐 등 좀 닦아주고 가면 안돼요?”

“어, 그게, 어… 나, 갑자기 배 멀미가 나서… 미안, 지금 바람을 쐬어야 해.”

“…그러세요. 정말 안색이 좋지 않아요.”

이런, 제기랄! 갑자기 발생한 일이라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 왜, 밖으로 나오십니까? 흐음~! 무슨 좋은 걸 보셨기에 그렇게 얼굴이 상기되셨는지요? >

배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사영이 보내 온 전음(傳音)이었다. 흘끔 살펴보니 배 앞머리에는 모용각이, 선미 쪽에서는 상관웅이 각각 자기 측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꼬지 말아요. 이런 상황은 미쳐 생각 못했을 뿐, 다른 의도는……”

“그러시겠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 사영에게 다가가 조그맣게 말하는데, 사영은 퉁명스럽게 내 말을 끊고는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아가씨 뜻대로 하시는 일에… 제가 뭐라겠습니까.”

< …대교는 지금도 전심전력으로 곡주님의 뜻을 받들고 있겠지요. 그 아이가 본래 한 번 정을 주면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 아마 잠자는 시간마저 아까워하며 비무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오직 곡, 주, 님, 을, 위, 해, 서. >

이 양반아. 전음으로 말하는 건 뭐라는 게 아니야? 그리고… 처음 알았다. 전음으로도 특정한 말을 강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음… 주아님은 저와 선실에서 함께 지내니 괜찮지 만 무대가께서 불편하시겠네요.”

내 눈짓을 보고는 사영도 재빨리 ‘주아’가 흑주에게 붙인 가명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저는 본래 잠자리를 가리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흑주가 어디 곡주의 일에 참견하거나 그 일을 외부에 언급할 인물입니까? 그건 그렇고, 굳이 변명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웅은 호색이라 하였거늘, 대교도 곡주께서 조금 한 눈을 판다고 화를 낼 아이는 아니지요. 뭐… 그 건 밑의 세 동생들도 마찬가지일 테니 부, 담, 갖, 지, 마, 십, 시, 오. >

으… 더 부담된다, 부담돼.

“그, 그래도 걱정은 되네요. 그리고 선실 주변을 호위하는 많은 분들도… 수고가 많겠어요.”

“하하, 저들이야 본래 뜻한바가 있고 다들 젊고 용맹한 젊은이들이니 오히려 보람을 느낄 겁니다.”

< 과거 화산파 장문인의 어린 손녀가 자신의 가문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도록 만들 정도로 방중술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니, 저 순진한 모용세가의 소녀가 곡주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밖으로 비명을 지를 것 같지는 않군요. 음, 그래도 순결한 소녀이니 다른 의미의 비명은 조심하시길…… >

뭔 다른 의미의 비명…? 으~ 이 아저씨, 정말 큰일 날 소리하고 있네.

“혹시… 코리아 교라고 알고 계세요?”

“예. 최근 꽤 유명한 사마외도의 거물이 심취해 있다고 알려진 종교지요.”

< …곡주께선 ‘가능하면 교리를 지키고 살자.’가 방침이라 들었습니다. 가, 능, 하, 면. >

“으휴~ 정말, 그렇게 못 믿겠어요?”

“예.”

…우이쒸-! 다른 때는 무지 냉철한 사람이 자기 딸이 관련된 일이라고 엄청 감정적인 것 같다. 나중 대교 자매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자기 생각대로 떠벌이겠다는 협박이 섞여 있는 말투(전음투?)인데… 제기, 나 보고 어쩌라는 거야. 지금 와서 모용사랑더러 남자들만 있는 선실로 가라고 할 수도 없고 나도 그럴 처지가 아닌 걸 알면서 왠 심술이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과 사영의 과민한 반응에 질린 나는 어찌 처신을 해야하나 고민하느라 모용사랑이 선실에서 함께 저녁 먹자고 부르는데도 배 멀미를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정작 나를 그렇게 난처하게 만들어 놓은 사영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태연하게 창고 겸 선원들의 처소로 가버렸다. 제기-!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은데다 배 위라 그런지 갑판 위는 너무 춥다. 그렇지만 않으면 갑판 위에서 게기며 밤을 보내도 될 텐데… …아니,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기,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열 받는다. 게다가 사영이 아무리 대교 자매의 아버지라지만, 공적인 신분은 어디까지나 내가 까마득히 위인데 저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이거?

“…하연 언니, 바람이 너무 차지 않아요? 식사도 정말 안 하실 거예요?”

선실 문을 비죽이 열고 고개를 내민 모용사랑이 다시 물었을 때,

나는 속으로 ‘나중 대교에게 꼰지르거나 말거나. 나만 떳떳하면 되지 뭐.’라고 중얼거리며 선실로 들어와 버렸다.

오옷- 선실 안은 이렇게 훈훈한데 괜히 밖에서 떨었다.

“이제 괜찮으세요? 저는 이미 식사를 했으니 언니도 어서 드세요. 아하암~!”

계집애, 같은 여자들 앞이라고 그러냐? 늘어지게도 하품을 해버리는 군. 응…? 뭐, 뭐야?

[ 선실 내 공기에 다량의 휘발성 마취성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분 분석 결과는…… ]

“모두 숨을 멈춰.”

“예?”

“숨쉬지 말고 빨리 문을 열어!”

나의 다급한 고함소리 끝에 꽝! 하는 커다란 소리가 겹쳐지며 선실 문이 바깥으로 떨어져 나갔다. 흑주가 내 명령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문 열기, 즉 문 부셔버리기를 실행한 것이다. 모용사랑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듯했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 재빨리 자신의 손바닥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미 눈빛이 몽롱해지고 있는 모용사랑을 부축해 선실 바깥으로 나오자 갑판 위에서 보초를 서던 모용세가의 청년 한 명이 황급히 다가왔다.

“누군가 선실 안에다 몽환향(夢幻香)을 썼어요.”

청년에게 간단히 설명하고 그에게 차츰 더 늘어지기 시작한 모용사랑을 맡기고 나는 흑주와 함께 배 뒤쪽을 살피러 가보았다. 그 사이 그 방향에서 또 무언가가 거칠게 부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었기 때문이었다. 앞쪽과 마찬가지로 부서져 있는 출구, 그리고 거기서 뛰쳐나왔으나 이미 중독이 된 후인 듯 갑판 위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간신히 몸을 가누고 있는 사영이 보였다.

“치이- 내가 이런 실수를…! 무사하신 겁니까, 아가씨?”

“전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 선실은 몽환향일 뿐이었는데, 이 쪽은 설마……”

“무색무취(無色無臭)의 독연(毒煙). 아무래도 보통 독이 아니… 우웃-!”

사영이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비틀대는 사영을 부축하며 몽몽에게 분석을 지시했다. 그때, 머리 위쪽에서 화악-! 하고 불꽃이 솟구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런, 제기! 누가 돛에 불을 붙였잖아? 응-? 뭐야, 불길이 사방으로 번진 것도 아니고 이제 막 붙었을 뿐인데 벌써 선장과 선원들이 배 밖의 강으로 뛰어들어 도망을 쳐…? 이런 썅! 저 새끼들이었구나 독을 쓴 건. 으으~ 침착하자, 침착해, 진유준. 빌어먹을, 침착하자!

“뭐해요! 모두 숨을 참으며 선실 안의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요!”

내가 소리치자 연이은 사태에 어쩔 줄 몰라하며 버벅대던 두 사람, 갑판 위에 있어서 중독되지 않은 청년 두 명은 그제야 선원용 선실로 들어가 그 안의 사람들을 밖으로 옮겨내기 시작했다. 갑판에 쓰러진 채 처절한 신음소리를 내며 꿈틀대는 사람들… 그래도 엄선된 고수들이어서 인지, 아니면 사영이 빨리 눈치채고 문을 부수어 환기가 된 탓인지 즉사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모용사랑은 몽환향 기운이 아직 남아있을 텐데도 눈앞에 사랑하는 대사형과 형제들이 피를 토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에 놀랐는지 안타깝게 울부짖으며 모용각에게 매달려 있었다.

모용사랑은 독에 중독된 것이 아니니 일단 되었고, 흑주는 나 때문에 선실에 있었던 시간이 짧았던 데다 내공이 깊어서 그런지 멀쩡한 것 같다. 이미 불길은 돛을 거의 다 태운 상태지만 더 이상 다른 곳으로는 번지지 않을 듯 싶었고… 사영도 스스로 몸을 가누고 앉아 운기조식으로 독을 해독하기 시작해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마취시키려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독을 썼다 이거지? 나만 덜렁 살려 놓고 돛을 없애 배는 멈춰 놓으려 한 건데, 선장과 선원 모두가 튄 걸로 보아 그들은 하수인에 불과할 것이고… 제기랄, 역시 그 재수없는 여자가 꾸민 음모라는 결론인가?

“저, 저 것은……?”

중독되지 않은 모용세가 청년의 놀란 음성이었다. 그의 시선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우리가 탄 배 뒤쪽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불빛들로 모아졌다. 많은 수의 작은 불꽃들이 무리를 지어 허공에 뜬 채 서서히 다가오는 형상은 공동묘지의 도깨비불처럼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사랑 동생… 가서 먹을 물을 떠와요.”

“예, …예?”

“빨리 시키는 대로 해요! 그리고 거기 두 사람도 함께 사람들에게 물을 먹여요. 모두 서둘러욧!”

몽몽이 알려 준, 물을 먹여 독기를 누그러트리는 응급처치 방법이 어제 선원들의 해독법과 정반대라는 사실이 오히려 재수 없는 여자 음혼귀모의 소행이라는 예상을 더 강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도깨비불… 아니, 뱃전 곳곳에 횃불을 세운 배가 빠르게 우리 배로 접근해 오는 것을 노려보았다. 내 눈에는 그 배의 난간에 선 인물들의 윤곽만이 어느 정도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사영이 피곤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음혼귀모였군요. 하지만, 그보다 큰일입니다. 모용란과 음혼귀모 옆의 인물들… 한 명은 거구에 낭아봉을 쥐고 있고, 또 한 명은 매우 왜소한 체형이며 음침한 인상을 가진 노인. 아무래도 비인사기 전원이 등장한 것 같군요.”

사영의 말이 끝나자 우리측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 아니 강물에 떨어져 허우적대는 분위기에 쌓이고 말았다.

싸워보기도 전에 전멸 일보 직전이 되어 버린 모용세가와 무림맹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이번엔 나 역시 난감한 기분이었다.

역시 대단한 사영은 그 사이 스스로의 힘으로 어느 정도 중독을 치유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당장 100% 온전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모용사랑과 중독되지 않은 두 명은 비인사기에 비하면 너무 약했다.

흑주가 멀쩡한 것이 가장 큰 위안인데, 저 인간은 나 빼곤 심지어 동료인 사영이 위험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이다.

…솔직히 자존심 접고 사영과 흑주에게 ‘우리끼리 튀자.’고 하면 우리는 죽을 일 없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을 이대로 버리는 건 도저히 내키지가 않았다.

아무리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라지만,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제기랄, 그래… 까짓 거 먹고 죽… 아니 먹이고 죽자. 나는 그렇게 독한 결심을 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나는 매우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배의 갑판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있게 되었다.

손발은 거의 움직일 수도 없고, 눈앞의 상황은 꿈속에서 떠다니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있었지만 의외로 머릿속은 맑아서 비교적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모용각과 모용사랑, 그리고 또 한 명의 모용세가 인물들이 연합해서 음혼귀모와 싸우고 있었다.

말이 삼인 합공이지 독에 의한 내상이 채 회복되지 못한 모용각을 나머지 두 명이 보호하며 싸우는 형편인 것 같았다.

그건 상관웅도 마찬가지여서 동료 두 명의 도움을 받아가며 독수사갈로 여겨지는 창백한 안색의 노인이 퍼붇는 공격을 견뎌내고 있다.

쌍라이트의 조춘처럼 빡빡 머리에 근육질 사내, 탐동음마를 상대하고 있는 것은 사영이다.

역시 회복이 덜 되었는지 본래의 날카로움은 보이지 못하고 있지만 결코 탐동음마에 밀리지 않는 것 같다.

전황은 위태위태해 보이면서도 계속 평형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양측 히든카드(?)들의 행동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인사기 중의 한 명, 그들 사인 중 최강의 고수인 모용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안정된 정통파 테크니션이자 강력한 슈팅력까지 갖춘 그녀가 공격진에 가담했더라면 우리 팀의 수비는 당장에 거덜나 순식간에 몇 골을 먹으며 패색이 짙어졌겠지만…

팀에 필요한 포지션에 가 있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측 선수 흑주도 만만치 않았다.

철벽 수비수에 초특급 슈팅력으로 저격수 역할도 가능한 흑주가 골문인 내 앞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선 채 골키퍼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싸움 초반에 비인사기들의 제자인지 그냥 부하인지 몰라도 허접한 인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흑주의 칼 날아래 우수수 낙엽처럼 떨어질 때만 해도 우리측이 분위기를 잡는 듯도 했다.

근데… 그게 끝이었다. 눈치 빠른 비인사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흑주가 내 주변으로부터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쪽은 아예 무시한 채 다른 이들의 공격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흑…주, 임마… 눈치껏… 저쪽도 공격을… 좀 해라… 응?”

혼자서 자그마치 다섯 명에게 피를 뽑아먹이고 무리해서 왔다갔다하며 해독 작업까지 한 탓에 말하는 것도 힘들었건만 예상했던 대로 씹힌 나는 하는 수없이 흑주는 없는 거로 치고 관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기껏 생피 바쳐 살려 놓은 이들이 벌써 세 명 죽었다.

사영을 뺀 나머지도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위태롭고… 우이쒸- 이제 나도 한계인가? 점점 눈앞이 심하게 흐려지고 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또 들려오는 것을 끝으로… 그러나 나는 몇 마디를 내뱉고 나서야 의식의 끈을 놓았다.

“비인사기… 니들… 죽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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