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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 매우 부담스런 시선을 받으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혈월과 그 부하가 다급한 표정과 태도로 함께 돌아왔다.

“아무래도 남북쌍룡은 격전 끝에 동귀어진(同歸於盡) 한 모양입니다. 둘 다 생명까지 잃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때문에 더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

“흑기룡의 상세가 심각해서 그런지 다들 금방 떠날 것 같지 않고 더구나 지금 객점 밖에서 객점 주인에게 마차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엑? 무슨 일이 또 이렇게 진행되는 거지? 마주치기 싫어 피한 자들이 마차 구하는 경쟁자가 돼? 제기, 그럴 순 없잖아.

“현재 이 객점에는 마차가 한 대 있습니다. 헌데 그 마차의 주인이……”

나는 매우 껄끄럽고 불길한 기분으로 혈월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 앉아 생글거리 고 있는 이화와 시선을 마주쳤다.

“…소매가 바깥에 있던 그 마차 주인?”

얄밉도록 태연하게 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이쒸-! 내가 마차 구하는 데로 먼저 출발하겠다고 해도 별로 매달리는 기색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이 것이 그래서… 쳇! 내가 미쳤냐? 너처럼 과다 밝힘증 변태 소녀와 함께 마차를 타게? 그랬다간 나처럼 순진한 남자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아 참!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소매. 어서 나가서 마차를 그들에게 양보……”

“이미 늦었습니다.”

사영의 말에 흠칫한 내가 슬며시 문 쪽을 보니, 화산이협이 객점 주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객점 주인의 손짓을 따라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화산이협… 으아~ 하필이면 화산이협이라니, 이를 어쩔꼬. 내가 미쳤지, 바깥에 화산이협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자고 계속 이화와 마주앉아 있었던 거지? 빌어먹을! 이렇게 된 거 우리가 먼저 기습으로 치고 튈까? 사영과 혈월이 화산이협을 먼저 해치우면 적의 전력은 상당히 줄어든다. 사영이 영기진인을 맡아주면 나머지는 혈월들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실례하지만, 소저께서 바깥의 마차 주인이십니까?”

내 입으로 내려야 하는 살인명령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망설이는 사이,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하는 두 명의 사내… 화산이협. 이화는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제가 마차 주인이 맞습니다. 두 분은 무슨 일이신가요?”

“본인은 화산파의 제자 ‘안동’이라 합니다. 급한 사정에 의해 소저께 어려운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어…? 화산이협이 이화, 아니 악소연을 못 알아본다…? 화산파 인물들이 장문인의 손녀를 못 알아볼 만큼, 6년이란 세월이 그녀를 그만큼이나 변모하게 했다 는 건가?

“자약검(紫躍劍) 안동님이시라면 옆에 분은 지운검(摯雲劍) ‘우길’님이 틀림없겠군요. 천하의 화산이협께서 하시는 부탁이니 뭐든 도와드려야지요.”

화산이협은 이화가 자기들을 알아보고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흠… 여전히 이화를 못 알아보고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자약검 안동이 이화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하는 사이 지운검 우길의 시선은 차분하게 그녀의 일행인 우리 전체를 살피고 있었다. 수양이 깊어 그런지 아니면 이화의 옛날 신분을 모르고 있어서 그런지 사영과 혈월 등은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있는데 비해 왕정과 그 일파는 눈에 띄게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게 시선이 머물 때 우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 저 인간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화산이협이 마차를 선선히 내주겠다는 이화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한 후 객점 밖으로 사라지자 나는 사영에게 다시 바깥의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들이 절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니까.”

화산이협 앞에서 얼굴은 뛰어난 연기력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몽몽에게 내 심장 박동 좀 안정시켜 달라고 해야 했을 만큼의 긴장이 채 풀리지 않았던 나는 이화의 장담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옛날에 한 소녀가 있었어요. 세상 사람 누구나 아는 그런 대 문파의 장문인이 소녀의 할아버지였죠. 그렇지만 소녀는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10여 년을 살아야 했답니다. 왜냐하면… 소녀는 태어나자마자 그 문파가 있는 산에서 가장 외지고 인적 없는 장소에 격리되어 성장해야 했으니까요.”

음…? 이화 자신의 과거 이야기인가? 근데 뭔가 이상하잖아 이거.

“소녀에게는 본래 쌍둥이 오빠가 있었답니다. 헌데… 오빠는 태어날 때 이미 죽어 있었답니다. 소녀의 할아버지는… 그 소녀 때문이라고 생각했데요. 제 오빠의 생명을 갉아먹고 태어난 불길한 아이라고… 아마도… 소녀의 어머니가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서… 그래서 더 오래도록 소녀를 미워했나 봐요.”

조금 멍해진 시선을 탁자 위에 걸쳐놓은 채 이화는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고 있었다.

“소녀는 조금 커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매일 하늘에 빌었죠.

할아버지가 자신을 용서해 주는 날이 오기를… 그래서 모든 식구가 함께 살고… 그리고 소녀도 바깥 세상이란 곳을 볼 수 있도록… 정말 간절히… 훗-! 결국 나중에 소원이 이루어져 그 바깥 세상에도 나갈 수 있게 되지만, 그 이후 바로 자신의 짧은 꿈이 부서져 버린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에요.”

소녀의 꿈을 산산이 부셔버린 원흉인 전 하오문주 왕정은 새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새꺄! 그러게 왜 잘 노는 애를 납치했냐. 네 로리타 변태끼 때문에 결국 이화도 너도 함께 망가졌잖아.

“아무튼 그래서 그 소녀의 문파 제자들도 소녀의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지요.”

그랬었군. 태어나자마자 폐쇄된 격리생활이라… 이화가 원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는 해도 자기 할아버지인 악정보를 간단히(?) 부정하고 미워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화는 처음 자신을 납치한 왕정보다도 악정보가 바로 자신에게 닥친 모든 비정상적인 운명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자님, 조금 전 그들 일행은 모두 이 곳을 떠났습니다.”

이화의 불우한 성장기 얘기 때문에 분위기가 영 아니었는데 때마침 사영이 돌아와 주어 다행이다.

“흠, 이제 길을 막고 있는 자들도 없으니 떠나야겠군.”

“그 전에 공자님, 이 분 소저 일행은 지금부터 동행하게 되는 겁니까?”

당근 싫지.

“…에, 소매. 우린 서로 갈 길이 다르니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소. 나중 내가 소저의 본가에 들릴 터이니 그때 다시 보면 되지 않겠소.”

이화는 어떻게 든 나와 동행이 되고 싶은 눈치였으나 잠시 생각에 잠겨있더니 힘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저의 호위인들이 최근 약간의 죄를 범했답니다. 저와 같이 계시면 불편한 일을 보시게 될지 모르니 먼저 출발하도록 하세요.”

음, 왕정이 불연 듯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것으로 보아 정말 왕정 일파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마 이화도 화산이협 앞에서 왕정 일파가 불안정한 태도를 보인 것을 눈치챘었나 보다. 이화… 원판 때문에 응응응을 밝히는 성격이 된 것만 아니면 참하고 영특한 처녀아이인 것이 분명한 그 녀를 두고 밖으로 나오니 공연히 마음이 불편했다. 제기, 내가 버려 놓은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왕정, 왕정도 헤어지고 나니 왠지 불쌍하게 느껴지네? 왜지…? 음… 어, 맞다. 왕정은 간만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오늘 대사(?) 한마디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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