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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16화


형장에 선 사형수처럼 처연하게 기둥에 묶여져 있는 세 자매를 보니 당장에 달려가 구출해 내고 싶은 것은 물론이고, 하다 못해 몽몽에게 내 시력을 강화시켜 자매들의 상태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조금의 힘이라도 아껴두어야 할 때였다.

세 자매가 묶여 있는 기둥을 일으킨 홍초명은 바로 그 앞에서 검을 뽑아 든 채 이쪽을 더욱 경계하기 시작했다. 사영을 포함한 우리 측의 어떤 고수도 홍초명의 검보다 빨리 자매들을 구해낼 수 있는 거리에 있지 못한 상태였다.

사영은 인질이 되어 있는 자신의 딸들을 발견하고 놀라는 한편 무언가를 동시에 깨달았는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로 납치되어 온 과정까지야 낸들 알겠는가마는 어쨌든 사영의 딸들을 인질로 잡아 놓은 것을 보면 처음부터 저 노인네는 사영을 믿고 있지 않았다는 거다.

“놀랐느냐, 일호? 어리석구나…! 난 오래 전부터 네가 어떤 의도로 혈의문에 입문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인질들을 확인하여 이미 잔득 높아져 있던 사영의 살기 그래프가 혈의승의 말에 움찔하고 반응했다.

“지금 그 말… 내가 혈의문에 들어간 목적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오?”

“후후- 그렇다고 하면 이제 와서 네가 어쩔 것이냐. 임무와 함께 준 계집과의 사랑 놀음으로 무뎌지고 녹슨 너의 검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사영의 살기 그래프가 맹렬한 기세로 급상승!

뭐야 이거, 이 두 사람… 내가 모르는 무슨 원한 관계라도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어이, 사영. 지금 흥분하면 곤란하다구.

“…다시 묻겠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양주(凉州)의 천씨 가문을 이유도 없이 멸문시킨 것은 당신이었소?”

“이유가 왜 없었겠느냐. 너의 부친이자 당시 가문의 장자(長子)였던 ‘천무성’이 천씨 가문의 비전(秘典) 현무진경(玄武眞經)을 순순히 내놓았더라면 자신의 목숨을 잃는 일도, 식솔들과 함께 멸문지화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통속적인(?) 과거지사가…? 사영이 천씨면 대교는 천대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 아이고~ 안 돼지, 안 돼! 인질이고 나발이고 당장에 혈의승에게 달려들려는 기색의 사영에게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어서 내 입 밖으로 뛰쳐나갔어야 할 “안 돼!”라는 외침보다 사영이 한 박자 빨랐다.

“들어라! 나의 딸들아!”

계곡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사영의 비장한 외침이었다. 순간적으로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다행이다.

“이 아비를 원망하고 있을 줄 안다! 그래, 미워해라! 마음껏 원망하거라! 모든 것이 이 아비의 탓이다!”

제기랄! 사영이 고함을 지르지 않고 그냥 뛰쳐나갔으면 인질인 자매들이 아작 날 뻔했다는 생각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더니 이건,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지키지 못해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되었다. 내가 못나 너희들의 어머니도 꽃다운 나이에 지고 말았다.”

사영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거센 감정이 끓어오르는 음성으로 외치던 그는 아주 잠깐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세 자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이 못난 아비는 너희들도 지킬 수 없게 된 것 같구나. 아비가 약속해 줄 수 있는 것은… 가문의 원한을 갚고 나면 곧 너희를 따라가겠다는 것뿐……”

이 아저씨가 미쳤나, 뭔 소리하는 거야, 지금?

“닥쳐-!”

“……!”

별안간 일갈하며 끼어 든 나를 돌아보는 사영의 눈에 투명한 액체가 처연하게 매달려 있었다. …빌어먹을!

“이씨…!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표정을 하고… 대체 뭐 하자는 거요! 과거 가문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몰라도 그 원한으로 당신과 당신의 딸들까지 오늘 다 함께 죽겠다고? 이제 와서 저 늙은이 한 명 죽이자고 그 짓을 하겠다고? 대체 원한을 갚겠다는 거요, 말겠다는 거요?”

제기, 나 자신은 설득을 하자는 말투인 건지 말자는 말투인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도 당신이 천하제일의 살수라는 거야? 엉? 옛날에도 그렇게 대책 없이 하는데도 다들 얌전히 죽어 줍디까?”

오버다~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감정의 조절이 쉽지 않았다.

아무리 가끔 내게 능글맞고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던 사람이지만 대교 자매의 아버지요, 천하제일의 살수가… 첫 만남 때, 그 초연한 풍모로 날 매료시켰던 이 멋쟁이 아저씨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곡주께는 방법이 있다는 것으로 들리오 만……”

“쳇-! 난들 이 상황에서 저 정정한 노인네를 칠 방법이야 있겠소.”

“…그렇다면?”

“뭐, 아쉬운 대로 당신 딸들을 구출할 길은 있을 것 같소.”

사영은 아직 내 말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느 사이 조금 전의 그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 표정에서는 벗어난 듯 보였다.

그에 조금 안심하며 나는 다시 혈의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처음부터 당신은 날 싱겁게 해치울 생각이 없었는데… 나와 재미있는 내기나 한 번 해보시겠소?”

‘이 판국에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냐. 내가 네 목을 따면 모든 상황 종료, GAME OVER 이니 까불지 말고 목이나 쭈욱 내밀어라 따기 좋게…’ 이렇게 나올까 봐,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천인군도 살수 중 한 명에게 손짓해 그의 검을 건네 받았다.

“당신이 인질까지 준비한 뜻이 어디에 있든, 내가 받아 주겠다는 말이오!”

난 혈의승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나… 비록 천하 마인들의 주인이라고는 하나 스스로는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는 놈이 지금부터 혼자 힘으로 저 혈의문의 여자 살수를 제압하고 세 자매를 구해 내겠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검 끝을 들어 홍초명을 가리켰다.

홍초명은 이런 나의 멋진(?) 도전장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혈의승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문제의 혈의승은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내 쪽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 반응이 없었다.

사실, 내 딴엔 ‘에라 모르겠다…’는 식이 아니라, 그래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저 정도 ‘실력과 그에 따른 여유, 혹은 자만심을 품은 악당’이라면 이런 도발에 곧잘 걸려들어 자멸하기 마련이라는… 내가 본 무협물이나 액션 영화의 장면들을 기반으로 한 매우 근거 희박한 논리인 지라 속으로 매우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 행동에 우리 편인 사영과 흑주, 혈월 등이 놀람 반 어리둥절함 반인 표정이 되었을 것임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섣불리 내가 하는 일에 나서지 않고 있다. 제기… 나도 내 자신의 행동에 저들만큼의 믿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이런 저런 생각에 무지하게 초조하면서도 겉으로는 계속 여유 있는 태도에 ‘한판 뜨자니까 짜샤, 왜 쫄았냐?’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근데 제기- 이런 표정 연기도 길게 하려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에구, 이 징그러운 노인네야 빨리 가타부타 말을 하슈 말을~!

내가 갑갑함을 못 견뎌 할 때쯤에 혈의승은 비로소 시선을 돌려 홍초명을 향했고, 잠시 후 홍초명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다음에는 혈의승이 또 잠시 말이 없었다. 하는 꼴을 봐서 혈의승은 전음으로 저 놈(나) 진맥을 짚어 보았을 때 혹시 무공을 숨긴 기색이 있었느냐고 홍초명에게 물어 보았고 그녀가 아니라 고 대답한 것이라 추측되긴 하지만… 제기, 몽몽이 전음도 도청(?)할 수 있으면 이런 때 얼마나 편할까.

“…좋다. 네 말대로 싱겁게 죽이는 것도 재미가 없지. 어디 한 번 내 앞에서 재주를 피워 보거라.”

드디어 혈의승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비웃음이 노골적으로 담겨진 음성이었다.

당연한 반응인 거 알지만 그래도… 짱 난다.

후우~ 심호흡 좀 하고… 마음을 다잡고 나가자. 사실 천하에 공인된 원판의 이 허약무쌍한 몸을 가지고 혈의문 소속 여자 살수를 상대로 싸움을 건다는 건 씨름 선수에게 밥 먹기 시합을 하자고 게기는 짓만큼이나 미친 짓이다.

그건 당근, 나도 알고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안다.

“지금부터 내가 저 인질들을 구출할 때까지 누구도 나서지마! 명령이다!”

아까부터 웬 터무니없는 짓이냐는 표정이면서도 섣불리 나서 말리지 못하고 있는 내 일행들에게 나는 그렇게 한 번 더 못을 박은 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확실히 미친 짓이지만… 그래도 나는 한다. 왜? 멋있게 보이려고…? 택도 없다, 죽으면 말짱 황이지 않는가.

그럼 왜…? 당근, 승산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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