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63화
그들끼리의 원한 관계라 말리는 것을 망설였지만 악소연의 일장은 결국 황성에게 저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화.. 아니 악소저. 곡내 법규를 잊으셨소? 곡 내 모든 사람들의 생사는 곡주님께 달려 있소. 이 곳에 있는 한 사사로운 원한으로 살인할 수 없소.”
“..소가가! 이자를 죽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기… 결국 선택권은 나에게 돌아오는 군.
“어서요. 어찌 이렇게 달라 지셨나요. 비화곡의 주인에게 비수를 들이댄 자에게 어째서 치료까지 해 주시고…”
아깐 나도 순간적으로 열 받아서 죽이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내가 뭐 원판 ‘극악..’인 줄 아니? 기분 좀 상했다고 진짜로 사람을 죽이게?
“어서 날 죽여주시오, 곡주.”
왜 당사자인 왕정 너까지 난리야? 제기, 일단은….
“후후~ 지금 널 죽이면 넌 본래의 뜻을 달성하는 것. 그렇게 간단히 죽여 줄 수야 없지.”
“곡주, 진정 잔인하시구려. 언제까지 내 앞에서 소연을 농락하며 날 괴롭히려는 거요.”
잔인하다고?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이!
“호호호! 말 한번 잘했어요. 그럼 당신 말대로 당신 눈앞에서 소가가의 사랑을 받아야겠어.”
에-? 이봐, 왜 또 훌렁 벗고 난리야. 진짜 구경꾼들 앞에서 그 짓을 하자구?
“이, 이봐. 내가 깜박했는데 오늘은 더 이상 시간이 없어.”
“말도 안돼요!”
대뜸 내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이화, 아니 악소연. 미치겠다. 원판 녀석 도대체 애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담? 제기… 결국 혈랑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악소연의 손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녀가 하도 거길 꽉 잡고 버텨서 아파 죽겠다.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서.. 으- 쪽팔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코리아 교 전통의 제사를 지내야 해. 소소매를 하도 오랜만에 봐서 잊고 있었지만 그건 시간을 잘 지켜서 지내야 하는 거라…”
또 한 번 코리아 교를 팔아먹고 나는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매우 천천히 걸어서(아직 중요한 곳에 통증이 남아있어서) 소호루를 나서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거리에 되었을 때, 방안에서 서럽게 울며 원망하던 악소연이 마음에 걸려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번과 똑같은 모습으로… 백의 자락을 휘날리며 날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우~ 표면적인 모습은 지난번과 같지만 이번엔 기분이 영 말이 아니군.
본래의 납치사건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지만 오늘은 나도 그런 사연을 가진 소녀를 단지 쾌락의 대상으로 만 대했지 않은가..라는 죄의식이 들어서 곡에 돌아오는 내내 우울했다.
또 하나, 끝내 ‘로리 변태’ 짓을 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절망감(?)이 엄습하여 처소에 돌아와서 나는 또 술을 마셨다.
오늘 당번병인 소령이..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서 있는 소령이에게도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고.. 하여간 근래 드물게 엄청나게 마셔 버리고 기절하듯 잠에 빠지고 말았다.
악소연과의 일이 마음에 걸려 심란했던 며칠을 보내고 나는 지금 또 그녀를 생각해본다.
‘로리 변태’에 대한 사항은 ‘자포자기’ 상태여서, 나중 20세기로 돌아갔을 때도 누가 나 보고 ‘너 변태지?’ 그러면 ‘응! 나 변태 맞아!’라고 대답할 생각이다.
그나저나…. 5년 동안이나 꾸준히 기다렸다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엉뚱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괜히 신경이 쓰인다. 혹시라도 이번 일 때문에 ‘이 놈 이젠 영영 안 올 것 같아’ 그러면서 은장도(?)로 자결을 해 버린다거나, 뭐 그런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오기 전에 따듯한 말로 위로라도 해주고 올걸 그랬나?
다시 만나서 잘 다독거려 주고 싶기도 했으나 그렇지만 만나기만 하면 거부하기 어려운 육탄 돌격을 해 올 것이 뻔하고, 원판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불쌍한 아이를 농락하는 건 도저히 할 짓이 아니고…
오전 내내 창가에 앉아 줄연초(줄담배) 피워대며 심란한 표정인 나를 자매들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전히 저 아이들을 보는 내 시각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 아직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 있어. 진유준, 넌 아직 정상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곡주님…”
소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입을 연다.
“요 며칠 계속 심화가 있으신 듯 합니다. 곡 내 시찰 중 무어 좋지 못한 일이라도….”
짜식 시침 딱, 떼고 묻는 군. 가경촌의 이화 생각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소교야.”
“예, 곡주님.”
“..너라면 말이야, 널 욕보이고 또 너의 어머니를 욕보이고- 그래서 결국 어머니는 자살하고 아버지는 폐인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런 일을 겪고도 널 욕보인 자를 사랑할 수가 있겠니?”
“………..”
“제기-! 그런 상황에서 ‘사랑’씩이나? 웃기는 얘기 아니냐?”
내 격정적인(?) 말에 소교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소녀는 그 당사자가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 특히 남녀간의 ‘사랑’이란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건 너무한 거 아냐? 전후 사정을 모르고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니고 지 어머니와 같이 당해 놓고… 그게 말이 돼?”
“…송구스럽습니다. 소녀는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소교는 내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무슨 큰 죄라도 되는 양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훗-! 솔직한 아이다.
그저 내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머리를 짜내 내가 좋아할 만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대교와 가장 비슷한 면이 있는 아니, 섬세한 면에 있어서는 그녀보다도 앞서는 소교라면….
멀찍이 문가에 서있던 소령이와 미령이가 저희들끼리 조그맣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텔레파시 비슷하다는 ‘전음밀법(傳音密法)’은 아니라도 내 청각으로는 가까이 다가가도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내게는 전천후 만능 ‘몽몽’이 있다. 음성증폭..!
“..그럼, 소령언니는 곡주님께서 같은 질문을 하시면 어떻게 대답할 거야?”
“으응..? ..글세 난 뭐 잘은 모르지만 좋아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정말로 그런 일을 당해도..?”
“…..몰라. 너무 어렵다 얘. ..곡주께선 왜 저런 고민을 하실까?”
“..본래 위대한 분들은 고뇌가 많다고 했어.”
…안 들을 걸 그랬다. 그려, 역시 말 좀 통하는 건 대교밖에 없… 음, 지금 이 주제를 가지고 대교와 얘기하는 건 어째 내키지 않는다.
- 대교야 있잖아, 내가 어제 바람을 피웠는데 말이지.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이차 저차해서 이러쿵저러쿵 사연이 그렇거든, 아- 그 여자 불쌍해서 어쩌지?
이랬을 경우 대교는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지 동생들처럼… 이 인간이 본래 그렇지 뭐.. 라는 식으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일까? 혹은 매우 친절하게 상담을 해주는 ‘천사표 대교’의 모습을 보일까? 아니면 질투를 하여.. 음, 그렇다고 설마 당장 내게 청명 검을 휘두르진 않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대교에게 악소연과의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심란해있는 원인 두 가지가 모두 대교와도 상의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첫 번째가 악소연과의 애매한(?) 섬씽 이야기. 두 번째는 갑자기 미래여자 ‘진’이 등장할 경우의 난처함.
- 대교야, 나 이만 가봐야 하거든? 어디 가냐고? 20세기 서울의 우리 집. 대충 1000년 정도 후의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있는 곳인데, 하여간 난 가니까 여기 일은 니가 대충 알아서 처리해라. 알아서 장청란 해치우고, 알아서 살아남고, 알아서 괜찮은 놈 하나 건져서 연애를 하던지 말던지, 하여간 잘 먹고 잘 살아라 대교. good by~~!
썰렁하군.
가경촌에서 돌아온 이후 며칠 동안 고민을 해 보았으나 당장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일을 벌이지 않으면서 현재 가장 큰 일인 대교의 ‘안전’이 보장되는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진’이 오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후- 그런 생각하면 심정 참 복잡해진다.
물론 처음부터 몽몽은 지금까지의 ‘시간 여행 실험’에서 얻어진 결과로 보면 본래의 자기 시간대로 돌아가는 건 잘해야 몇 분 정도의 오차가 있을 뿐이었으나, 다른 시간대로 가는 경우에 거기가 이미 가봤던 곳이라 하더라도 최소의 오차가 3년이었다고 했었다.
그 말 들었을 때는 ‘이론~! 썩을! 제대하자마자 또 3년을 타지에서 게겨야 하는 거야?’라고 분노했었는데, 지금은 당장 올까봐 걱정하게 되었으니…
그리고 또 한 가지 기분 찝찝한 일이 있다.
알고 봤더니 내가 처음 나갔던 그날 내가 복귀하자마자, 혹은 그 전일 수도 있지만 하여간 곡 내 인간들을 비밀리에 감시하고 관리하는 비밀부서에서 소호루와 이화의 내력을 조사하여 확인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당연히 내 경호담당의 혈랑대와 소교 이하 자매들에게 보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혈랑들과 미령이도 내가 알면서도 ‘장난’을 친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정말로 이화(악소연)를 잊었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하여간 결국 소호루에서는 나 혼자 생쇼를 한 셈이었다. 빌어먹을-!
으휴-! 내 힘으로 당장 해결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공부’할 기분도 아닌데, 뭐 기분 전환할 일 좀 없나? 이제 겨우 오시(午時, AM 11:00 – PM 01:00) 인데 벌써부터 술 마시기도 그렇고…
난 상체를 창가에 걸친 채 창 밖을 무심히 바라보며 등뒤의 자매들에게 물었다.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저어-!”
어-? 웬일로 소령이가 먼저 입을 열었네? 나는 웬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녀에게 몸을 돌려 앉았다.
“주방에 연대(連帶) 홍포도주(紅葡萄酒)가 입수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보석처럼 맑고 고운 색깔과 그윽한 향기의 술로써, 도수가 높지 않아 이런 시간에도 부담이 안 될 것..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냐’는 말을 하고싶니? 어이구- 소령아 나도 술 좋아 하지만 그게 ‘재미난 일’이냐? 더구나 너하고 술을..? 사양하겠어.
소령이는 알아서 소교 뒤로 슬그머니 찌그러지고 이번엔 미령이가 나섰다.
“장명을 보러 가신지 오랩니다. 오늘 거기 가보시는 건 어떨지요. 이번엔 아예 구월화를 대동하고 말입니다.”
지옥전에 갇혀있는 장명에게 간다..? 하긴, 사실 그 동안 나는 가끔씩 장명에게 가서 공연히 약을 올리고 오곤 했다. 니 마누라가 몸매가 어떻고 테크닉이 어떻고, 넌 혼자 외로워서 긴긴 밤 뭐 하고 노니 어쩌니, 뭐 그런 식의 유치한 내용으로 말이다. 물론 실상은 내 약올림(?)을 받으면서 공연히 분한 척하는 녀석의 표정을 보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녀석이 그 안에서 잔머리 안 굴리게 방심시키려는 의도도 있다.
“장명이라.. 그 녀석이 공연히 마누라 걱정하는 척, 분한 척하는 꼴 보는 것도 재미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 칙칙한 얼굴을 보고싶은 기분이 아닌 걸?”
미령이까지 실패(?)하자 마지막 보루 소교는 더욱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야후 장로의 거처에 한 번 가보시는 것이 어떨지…”
“!!??”
“지난 번 곡주님의 금제로 상심하신 듯 처소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일정이 없으시면 장로님과 담소라도 나누는 시간을 가지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뜻밖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소령이와 미령이까지 의아한 기색을 떠올린다.
“너도 그게 재미있는 일이라고 말한 거니..?”
내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으나 소교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야후 장로께서는 본시 성품이 호탕하고 밝은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호탕..? 두 번만 호탕하면 제자들은 며칠 못 가 뼈도 못 추리겠다. 밝다..? 밝은 건지 주책인지 몰라도 하여간 다른 장로들처럼 음침하지 않긴 하다.
“그래서 예전부터 곡주님과도 많은 술자리를 같이 하시며 형제와 같이 친밀한 관계였다고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사적인 자리를 하시는 것도…”
“…….”
사실, 내가 ‘싸움 금지’를 시킨 후의 상황이 궁금해서 주변에 몇 번 물어 보기도 했고, 한 번 찾아가서 내 금제에 대한 그의 반응을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었다. 이런 저런 일로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소교가 일깨워 줬군.
“어리석은 소녀의 얕은 소견이었습니다.”
말을 마치고 살짝 고개를 숙이는 소교.
“아냐, 좋은 의견이야. 흠- 그럼 소령이하고 미령이는 가서…”
소령이와 미령이에게 몇 가지 ‘준비’를 시킨 다음에 일명 야후, 야황살후 소진광 장로에게 가기 위해 처소를 나섰다.
기분 좋게 나서긴 나섰는데.. 제기- 그러고 보니 아홉 장로들은 모두 가까운 데 안 산다. 고룡촌의 기괴한 마인들처럼 본단 건물들이 모여있는 지역에서 꽤 떨어진 계곡(내 처소에서는 일부 내려다 보이지만…) 너머 어딘가에 짱 박혀 산다고 들었는데 깜박했다.
야후 장로를 비롯한 4-5명 정도는 자주 본단에 들락거리는 편이나 다른 장로들은 내(원판)의 호출이라던가 특별한 일이 없으면 1년이고 2년이고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했다.
으으- 그렇다고 이런 대부대(?)를 이끌고 나섰는데 이제 와서 산길 걷는 것이 싫어서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곧 가마를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그냥 가.”
길 안내로 뒤늦게 나선 총관의 말을 반사적으로 거절하고 말았다. 에구, 항상 이 놈의 존심 때문에 스스로 망가진다니까.
길 안내하는 총관, 세 자매, 젊은 요리사 한 명과 주방 보조 3명 등은 룰루루 걷고 나는 헥헥 거리며 1시간 넘게 뺑이 쳐 간신히 야후 장로의 거처에 당도할 수 있었다.
계곡을 넘은 다음에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와서 본단 건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야트막한 산 중턱의 공터였다. 대충 100평 정도의 공터의 안쪽으로 싸리나무 울타리에 쌓인 작고 초라한 오두막이 그의 거처란다.
총관이 먼저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청년 하나가 마당 구석에서 일어서며 그를 반긴다.
“총관 어른 오셨습니까? 어쩐 일로 여기까지.. 아?”
헥헥 거리며 땀 닦으며 들어서는 나를 발견한 남자, 야후 장로의 세 제자 중 막내는 놀라며 황급히 자신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빼내어 등뒤로 감춘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보았다. 그의 얼굴 아니 정확히 말해 코에서 빼낸 것은 분명 작게 말려진 천조각이다.
“고, 곡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하고 고개를 들던 그는 갑자기 더욱 당황한 얼굴이 된다. 자신의 코에서 쌍코피가 주르르 흘러 나왔고 그 모양을 내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 사부님-! 곡주께서 납시었습니다.”
그는 소매로 코피를 닦으며 허둥지둥 오두막 안에다 대고 고함을 쳤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인기척도 없었다. 이 노인네, ‘금제’를 어기고 또 제자들 두들겨 팬 다음, 내가 오니까 어디로 튀었나?
계속 몇 번을 불러도 아무런 대꾸가 없자, 쌍코피 청년은 내 쪽을 돌아보며 엄청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저기, 그 것이… 아, 그렇군요. 사부께선 아까 친구 분 만나신다고 나가셨는데 제가 그만 깜박하고…”
그는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했는지 민망한 얼굴로 쭈볏거리고 서있기만 했다. 그런 그를 구해 준 것은 총관의 목소리였다.
“그 총명하던 자네가 오늘 왜… 가서 곡주님 드실 냉수나 한 사발 떠오게나.”
쯧쯧-! 불쌍한 청년이로다. 어쩌다 그런 막가파 사부를 만나 가지고 젊은 나이에 저런 꼴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 사이 집안 스캔을 완료한 몽몽의 보고가 들어왔다. 예상대로 야후 장로는 집안에 있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준비해 온 것을 실행하도록 했다. 내 명령에 떨어지자 따라온 요리사와 그 보조 삼인은 익숙한 손길로 자신들이 싸 짊어지고 온 요리 도구를 마당에 척척 설치하기 시작했다.
야후 장로의 셋째 제자, 아직 강호 경험이 없어 명호는 없고 이름이 ‘전책’이라던가? 그가 당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이게 무슨.. 저, 곡주님. 사부께선 한 번 외출하면 하루 이틀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후후.. 뭐, 아무려면 어떻겠어. 기왕 온 거 우리도 먹고 자네도 간만에 포식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 생각에 소장로는 곧 돌아올 것 같아.”
“그, 그런…”
전책은 멍한 얼굴로 별로 넓지도 않은 마당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마치 야외에 파견 나온 뷔페 식당 같은 분위기가 꾸며지더니 요리사는 능숙한.. 아니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른 듯한 환상적인 손놀림으로 요리를 시작한다. 보는 재미에다가 향기만 맡아도 진짜 죽인다.
“소령아, 술은 네가 준비했지?”
“예, 연대(連帶) 홍포도주(紅葡萄酒), 사천성(四川成) 특산인 검남춘(劍南春), 오량주(五糧酒) 세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모두 작년 곡주님의 생신 때 진상된 특급의 명주이옵니다.”
야후 장로는… 사천성(四川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