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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75화


음, 내가 왜 이렇게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냐면, 이야기가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 스토리의 다음 세대가 바로 내 곁에 있어서 그런지 느낌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대교와 그 동생들… 본래는 이걸 ‘영화화’하려고 했었는데, 요전에 총관 지천공 이야기 영화화하다가 질려서 잠시 보류 중이다.

“소교.”

“예, 곡주님.”

“너희 부모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니?”

“아니오. 과거 일은 잘.. 하지만 두 분이 보여 준 사랑은 잘 기억하고 있답니다.”

평소 자매들이 말하는 거 보면, 그녀들은 부모의 과거를 모른다. 비화곡 주민들은 말하자면 과거를 버린 자들이다. 처음 입주할 때 철저한 조사와 기록이 이루어지지만 그 문서는 ‘극비’로 취급되어 특수 계층이 아니면 열람할 수도 없다.

“과거에.. 그러니까, 두 사람은 원수였어.”

“………”

“너희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유혹했던 거야.”

“그런…”

“그녀의 목적은 자신을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 사실을 고백하는 것, 그래서 그가 그녀를 죽이던, 그녀가 그를 죽이던.. 똑같이 그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어.”

소교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거냐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후후- 근데, 문제는 그녀 역시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만 거지. 두 사람 다 힘든 사랑이 시작된 거지.”

어쩐지 좀 감상적이 되는군. 하지만 예전에 대교에게 들은 말도 있고… 어쩐지 이 아이에게는 부모의 ‘과거’를 얘기해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동안 눈치로 봐서 소교의 ‘이상형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인 것 같았으므로….

에- 그러니까. 대교에게 집안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대교가 성지에서 자신이 착용할 장비를 만들기 위해 교룡, 백원 등의 가죽을 재단할 때였다.
너무나 쉽게 재단이며 바느질하는 것을 보고 내가 감탄하자. 대교는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5년 전 비취각에 선발되기 전까지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제가 도맡아 했기 때문에 자연히 솜씨가 붙었답니다.”

12살 때까지..? 대교가 소녀 가장이었나?
그러고 보니 대교의 집안 일에 관해서는 별로 물어본 일이 없다. 이 비화곡의 방위사령부 격인 본단에 선발되는 것은.. 뭐 ‘극악..’처럼 울트라 변태살인마 가까이 지내는 게 진짜 좋기야 했겠냐마는, 일단은 매우 영광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인 것 같았다.
어린 소년 소녀들이 뽑혀오는 경우는 당근, 무공 재능과 용모가 기준이 되지만 그 밖의 조건은 부모를 잃은 고아이거나, 부모가 스스로 아이들을 맡기는 경우라고 했다.
흔히 생각하듯 처음부터 강제로 선발하는 경우는 없다고 해서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음.. 전에 물어봤을 때 어머니는 미령이 낳고 바로 돌아가셨다고 했지?”

“예, 그 이후 아버지는 한동안 조금 흐트러진 생활을… 하지만 반년 전 비취각주님의 배려로 집에 돌아가 보니 본단에서 새로 지어 준 집에서 잘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반년 전에 한 번 가본 게 끝이라고?”

“예.. 곡 내에 가족이 있는 경우 본래 1년에 며칠 휴가를 낼 수 있습니다만, 지난번엔 비취각주께서 미령이가 초경을 치룬 것을 축하해 주는 의미에서 특별히…”

아이들 선발된 집에 새 집 지어주고, 1년에 한 번 휴가에 초경 특박에… 여기도 알고 보면 인간 냄새가 꽤 나는 동네다. 짱이 좀 더러운 놈이어서 문제지!
그나저나, 난 그때에서야 깨달았다.

“어, 그 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그냥 항상 너희들이 곁에 있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좋아, 이번 일 끝나면 너희들 모두 긴.. 아주 긴 휴가를 줄게.”

“세심한 배려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긴 휴가는 바라지는 않습니다. 소녀도.. 동생들도 모두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아냐, 반드시… 음, 그래 너에겐 미안하지만 동생들은 그 전에라도 한 번 보내 줘야겠다.”

“..곡주님. 그래 주시면 소교가 특히 기뻐할 것입니다. 그 아인 동생들과 달리 아버지를 유난히 잘 따랐으니..”

제기, 다른 이들은 포상 휴가 보내 줄 생각을 가끔 떠올리고 그랬는데 왜 대교 자매들에겐 그 생각을 못 했던 거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무심한 나 진유준은 또 까먹었다.

다시 생각이 난 건, 요번에 무지막지 아프고 난 후였다. 내 병 수발 드느라 왔다 갔다 하는 소녀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번엔 휴가 보내 줘야지.
응..? 이번엔..? 아직.. 한 번도 안 보내 줬던가..?
그런 괴이한 연상 과정을 통해 나는 대교와의 약속을 떠올린 것이다.

“소교. 미안하다.”

“예..?”

물론,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내가 ‘미안하다’라는 소리를 하면 주변인들은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본능적으로 저 인간, 혹시.. 하며 경계를 하는 것이다.

“휴가 줄게. 동생들과 며칠 집에 다녀와.”

챙그랑-!

“어, 괜찮니?”

“죄송합니다. 소녀가 그만, 이를 어째..!”

접시 하나를 깨고 어쩔 줄 몰라하는 소교. 휴가란 소리에 이렇게까지 놀랄 아이가 아닌데?

미안해, (알아서 죽어!)
다 용서할게. (택도 없다. 몰아서 죽여!)
음, 맘에 든다. 근성이 좋군. (고문으로 근성이 어디까지 가나 확인하고 죽여.)
처음 보는 소녀로군. (밤에 데려와.)

생각나는 몇 가지가 저렇고, 웃는 표정과 태도에도 저런 웃기지도 않는 암호를 걸어 놓았던 원판.
측근들은 저런 목록 암기하면서 얼마나 썰렁한 기분이었을까.

집에 다녀와. (가서 같이 죽어.)

이런 암호도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젠 그런 암호 사용 안 한다고 공언했고 모두 이해한 줄 알았는데 왜 이러지..?

“………”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앞에서 소교는 부들부들 떨며 깨진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처음 내 처소에 배정되었던 대교가 꼭 저랬지, 아마..?

“무슨 일 있었니..?”

“그, 그럴 리가, 제가 그만.. 본분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은 그래도 이상하군. 접시 깨진 거 들고 나가는 폼이 영 평소 같지가 않다.
아니, 그러고 보니 나 몸 아픈 거에 정신 팔려 몰랐지. 요 며칠 다른 이들 반응도 어째 이상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흑주, 뭔 일 있었니..?”

“………………….”

아차차, 물을 놈에게 물어야지.

흑주는 혈랑대와 존재 의미는 같지만 수준 차이는 일반 보병(일명 땅개)과 휴전선을 넘나드는 최정예 특수 부대원(주로 사형수들을 훈련시켜 만든다는 그..)의 차이 이상일 것이다.
전에 가경촌에서 ‘식인왕’일당을 상대할 때, 우리 일행이 그 창고 안에 들어서기 전후의 짧은 시간 동안 각각 상당히 떨어진 위치의 매복자들을 모두 제압해 놓은 걸 보면 참으로 든든한 부하가 아닐 수 없다.
처음엔 하도 자주 내 앞에서 사람을 죽여대서 정떨어졌었지만, 갈수록 언제 한 번 복면 없는 맨 얼굴로 마주앉아 술 한잔 같이 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어떻게 된 놈이 지금까지 몇 달 동안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복면 쓴 모습이나마 내게 드러낸 것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게다가 다른 부하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건 녀석 나름대로의 경호에 있어 심지어 내 말도 안 듣는다는 점이다.
혼자 있고 싶다고 어디 좀 가 있으라고 하는 정도는 당근 씹고, 맛난 음식 시켜 놓고 같이 먹자고 꼬셔도 묵묵부답, 어느 날인가는 괜히 밖에서 누구 좀 잡아오라고 시켜 봤더니 천장 틈에서 쪽지 한 장이 떨어져 내려왔는데.. 不, 그 한 글자가 달랑 적혀 있었다.
아마도 녀석이 따라 올 수 없는 장소는 현실적으로 대교가 지냈던 지하의 ‘성지’와 비화곡 3대 금역 중 세 번째 와룡궁(臥龍宮), 두 군데뿐일 것 같았다.

톡! 톡! 톡!

“몽몽,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다른 아이들도 웬지 날 대하는 것이 달라진 느낌이 들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주인님이 조금씩 예전의 ‘극악서생’ 모드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

“참 내..! 그러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구.”

[ …………… ]

“뭐, 추정할 만한 정보 없어..?”

[ 소교는 현재 생리 중입니다. 심리가 불안정하므로 공포심을 더욱 느낄 가능성이…. ]

“죽을래, 새꺄~? 소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딴 사람들도 그런 것 같은데 무슨-”

[ …최근 주인님은 스스로 몸을 학대한 일이 있습니다. ]

“…계곡에서 냉수욕 한 거? 아, 거야. 이 육체와 좀 더 친해지려고, 에- 다소 무식한(?) 방법이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난 성공했다고 보는데..?”

[ 과거 ‘극악서생’이 타인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 위해를 가한 예가 몇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직후 이 곳과 바깥 세상, ‘강호’상에 살육전이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뭐.. 뭐야, 그게?”

[ 비화곡 당대 공식 기록입니다. ]

제기-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지금까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패턴이란 것이 있었다.
잘 분석해 보면 살인에도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고…
그렇지만 이건 무슨 패턴이지? 약해빠진 몸에 스스로 위해를 가하고는 이어서 광란의 살육을 지시..?
그냥, ‘미친 놈’이라고 해도 해석이 되긴 한다만, 최소한의 패턴은 알아야 주변에 해명을 할 수가 있을 텐데..?
사실상 나 자신은 안 그러면 그만이라고 해도 그걸 깨닫는 기간 동안 소교 이하 자매들의 맘 고생, 그리고 나도 좀 억울한가..?
제기- 별, 냉수욕 한 번 한 것이 무슨 위해를 가한 거라는 거야?
어쨌든 자매들에게 뭔 말만 해도 저렇게 무서워하는 거 보는 것도 부담되고, 또 다들 날 그렇게 여긴다면 처음 왔을 때처럼 자칫 말실수라도 하면… 아, 맞다. 제일 문제가 ‘흑주’다.

톡! 톡! 톡!

“흑주, 내 말 들리지. 지금까지처럼 내 직접적인 명령이 없으면 아무도 죽이지 마라. 알겠지..?”

이제 익숙해지긴 했다만, 그래도 조금 열 받기는 한다. 웬수야, 최소한 대답은 해야 할 거 아냐.

“명령..”

응? 뭐야, 지금 이 음성! 흑주 목소리인가..?

“..접수.”

오호~! 이 친구가 웬일로 대답씩이나..?
단 두 단어의 대꾸가 다소(?) 건방지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신기하기까지 하군.
흑주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이상으로 특이했다. 발음은 비교적 정확했지만 어쩐지 매우 힘들여 말한다는 느낌, 그리고 뭐랄까 매우 거친 느낌이 섞여 있고…
좀 더 흑주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호기심에 나는 그 날 저녁 내내 이런 저런 말을 걸어 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먼저 지쳤다.
괘씸한 흑주, 기필코 대답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질문을 찾아내어 다시 목소리를 듣고야 말리라!
그런 다짐과 함께 잠이 드는 나 진유준.
뭔가 생각해 놔야 할 일이 있었는데 잊은 느낌. 에구, 내일 생각하자,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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