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1화 : 흑주(黑蛛)의 과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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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4-1화 : 흑주(黑蛛)의 과거 (1)


4. 흑주(黑蛛)의 과거 (1)

다음 날.

내가 탄 ‘초호화 고급 벤츠 모범 가마’가 향한 곳은 고룡촌(孤龍村)이었다. 강호에 나갔을 때 만났던 혈월(血月) 등의 자객 일행이 소속된 천인군도(賤人群島)라는 살수 집단의 전대(前代) 고수이자 흑주의 사부인 거두마군과 소살파파 부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천인군도… 나도 전부터 비화곡 성지의 문헌을 읽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혈월 일행에게 신세진 일도 있고, 흑주도 관련되었고 해서 강호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그곳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았었다. 어디… 벤츠 가마가 고룡촌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의 역사나 다시 더듬어볼까?

천인군도는 현재 머릿수만 여타 살수 집단 중 최고이고 구성원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좀 떨어져서 보통 2류로 취급되는 처지이다. 그러나 그곳 출신인 흑주의 사부들 수준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 과거에도 항상 썰렁한 집단은 아니었고, 특히 약 50년 정도 전에는 전 강호를 공포에 떨게 했을 정도로 끝발 날리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천인군도의 최초 구성 시기는 미상이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문헌에 의하면 본격적인 살수 집단으로 변한 건 약 500년 정도 전인 것 같았다. 지리상으로 남만(南蠻)과 인접해 중원인들의 시각으로는 소위 세외(世外)나 마찬가지로 인식될 만큼 매우 후미진 장소의 바다에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가 있다고 한다. 과거 가끔은 국가의 죄인들을 귀양보내는 유배지로 쓰인 적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국가로부터는 관심 밖인 지역이어서 언제부터인가 갈 데 없는 죄인들이 스스로 도망쳐 들어가거나 돌림병이 번질 때 사람들이 거기다가 환자들을 버린다거나 하는 일들이 거듭되면서 차츰 인구가 늘어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천인(賤人)라는 이름의 유래도 바로 거기서 온 것으로,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악인곡(惡人谷)처럼 차츰 마도인을 주류로 한 무림 출신들의 비율이 높아진 다음에도 강호인들은 그곳을 거대한 빈민굴 이상으로는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 비화곡처럼 정예 고수들로만 이루어지지는 못했어도 머리수가 많아지면 당근 거기에 고수가 포함될 확률도 높아지는 건 당연한 거고 빈민굴답게 경제 사정이 매우 썰렁하다는 기본 요건이 계속 작용하여 결국 나름대로 이어지던 천인군도의 무맥(武脈, 이런 말 있나? 하여간…)은 먹고살기 위한 살수(殺手)들의 배출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인데…

처음엔 지금은 양반일 정도로 수준 낮은 하급 살수들이 몸으로 떼우는 식으로 의뢰를 해결했던 모양이지만 차츰 노하우도 쌓이고 인재들도 하나 둘 등장하면서 발전을 거듭하게 된 모양이다. 그러다가 약 60년 전에는 마침내 흑주의 사부들을 비롯한 몇 명의 초 고수들이 뭉쳐서 천인군도 내에서 난립하던 군소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이때서야 겨우 강호인들은 천인군도의 저력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천인군도의 요즘 통태가 수상하다. 하지만… 뭐 별일이야 있겠어? 버러지 같은 놈들이니 감히 허튼 마음을 품을 주제도 못 되지.”

라는 식으로 전형적인 유교적, 중화사상에 물든 띨~한 강호인들이 태반이어서 천인군도 통일 5년 후에 강호는 한바탕 피바람을 맞게 되는 거다.

천인군도의 당시 사정은 우리가 임진왜란으로 쪽발이들에게 밟힐 예정이었던 쪽발이들 땅의 상황과 매우 유사했던 것 같다. 애초에 달랑 한 명의 무지막지 잘난 고수가 통일했으면 어땠을지 몰라도 거두마군과 소살파파에 버금가는 공동 두목이 네 명이나 더 있었기 때문에 통일 후에도 서로 자기가 전체 조직을 날로 먹으려는 불꽃 튀는 신경전이 있었던 모양이고 이때 거두마군과 소살파파 부부는 천인군도의 평화를 위해(과연?) 자진 사퇴하고 비화곡에 은거해 버렸다고 한다.

헌데… 두 부부가 떠난 후 남은 네 명의 짱들은 계속 욕심을 못 버렸는지 네 명이 공동으로 머릴 굴린 끝에 역사상 가장 흔히 쓰인 ‘국가(조직도 마찬가지)의 불평불만 세력 입막기’ 수법이며 추악한, ‘전쟁’이라는 카드를 쓰기로 한다.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오늘날~ ‘천인군도의 혈겁’ 혹은 천인혈란(賤人血亂)이라 불리는 참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우리가 조총과 기습에 뒤통수를 맞고 일찌감치 맛이 가서 고작해야 몇 만(들은 얘기다.)의 쪽발 병력에 전 국토가 밝혔던 것처럼 강호의 정파인들도 처음엔 엄청 싱겁게 수많은 고수들을 잃게 되는데, 천인군도의 본업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줄지어 암살되어 버린 각파 고수들의 소식에 놀란 정파인들이

“X됐다”

를 외치며 버벅대는 사이 몇몇 다른 군소 사마외도까지 나서서 설쳤고… 강호는 그들이 천시했던 살수집단에 의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무협지에서 꼭 등장해 주는 ‘무림의 구세주’, 슈퍼 히어로가 여기서도 등장해 재빠르게 사태를 수습해 버리는 바람에 결국 혈란은 반년도 채 끌지 못했다고 한다.

천인혈란을 진압하여 강호인들의 칭송을 받았던 이는 눈빛만 줘도 미녀들이 알아서 자빠지는 초꽃미남에다 온갖 기연이 알아서 기어주는… 그런 무협지식 영웅은 아니고 당시에도 이미 백발 수염을 날리던 한 늙은 승려였는데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소림사(少林寺)에서 파견된(?) 지공(指空)이란 법명의 고승이 그 주인공이다.

지공 대사께서는 놀랍게도 단신으로(무협지에서는 당연한 건가?) 천인군도의 당시 짱 네 명 중 세 명을 아작 내서 단숨에 천인군도의 기세를 꺾어 버렸는데 여기서 또 포인트는 한 명을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천인군도 살수들은 생성 과정의 특성상 대가리가 아무도 없을 경우 각자 뿔뿔이 짱 박혀 얼마든지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는 인간들이었지만 지공 대사가 살려 둔 한 명의 짱이 전쟁을 포기한 후 알아서 부하들 다 챙겨서 천인군도로 돌아갔기 때문에 수습이 훨씬 쉬웠던 것이다.

나중 지공 대사의 주도 아래 천인군도와 그에 협력했던 몇몇 군소 사마외도의 문파들을 대상으로 전범(戰犯)들 처리가 있었는데 이때 천인군도를 아예 몰살시키겠다고 뒤늦게 길길이 날뛰는 정파인들을 지공 대사가 설득하여 살생을 금하고 대신 상당수의 전쟁 원흉들을 불가에 귀의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게 된다.

천인군도의 짱들을 단신으로 격퇴한 놀라운 무공과 악인들을 참회시키는 과정에서 보여 준 높고 깊은 불심이 사람들을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안 그래도 명망 있는 고승이었던 지공의 법명을 갈수록 드높이는 계기가 되고 나중에는 아예 모두 그를 성승(聖

僧)으로 칭하며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최근에 나를… 아니 원판 극악 진하운이를 죽이려다 혈월, 흑주, 남해오신룡(南海五神龍) 등등 젊은 것들에게 몰매 맞고 쓰러진 소림 성승 그 양반이다.

“음… 천인군도의 역사를 더듬다 보니 수수께끼의 혈승(혈의문주+성승)이란 인물이 자동으로 나오는 군.”

현재 예의 ‘꽃이 피는 순간 지는 장소’에 묻혀있는 그 알 수 없는 인물에 관한 사항은 나도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다.

때때로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직도 강호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죽음을 굳이 들출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조사도 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세간에서 성승으로 추앙받던 것과 달리 남모르게 혈의문(血衣門)이라는 살수 집단을 만들어 주인이 된 그의 정체로 보아 천인군도의 혈란을 단숨에 진압할 수 있었던 것도 보나마나…

“음… 여기서 혈승 생각으로 넘어가면 또 거기서 길어지겠다. 그건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오늘 만날 사람들에 관한 거에나 신경을 집중시키자.”

일찌감치 은퇴하는 바람에 천인군도의 혈란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나중 천인군도가 당시의 지공 대사가 주도하는 정파인들에게 토벌될 때도 비화곡 안에서 유유자적했던 두 늙은 마두 겸 전직 살수 거두마군과 소살파파 부부…

그들에게 나는 흑주의 과거를 물으러 가는 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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