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3화 : 흑주(黑蛛)의 과거 (3)
자기 제자를 무감정의 기계적 킬러로 완성시킨다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희생마저 당연히 여긴다…? 첫 만남에서부터 대충 알아보고 짐작도 했다지만 그때는 몇 발 정도 뒤로 물러선 구경꾼으로서의 입장이었고, 지금은 흑주라는 내 그림자를 통해 반 발 정도는 접근한 사람들을 만나는 거다 보니 처음 비화곡을 겪을 때처럼 새삼 불쾌감이 스멀거렸다.
제기, 저 인간들에게 정말 고급 술과 음식까지 먹여가며 친한 척 해야 되는 거야 뭐야?라는 갈등이 일었으나… 어쩔 수가 없다. 이 비화곡 내 모든 인물들의 인적사항이 기록된 극비서류에도 흑주에 관한 건 단 두 단어였다.
<천의(天意) 파기(破棄)>
기록을 없앨 때도 어떤 부서의 누가 했다는 게 나오지만, 하늘의 뜻이라면 뻔한 거다. 원판 녀석의 두뇌를 뒤져 과거 기억을 읽어 낼 능력은 몽몽도 없고, 운영체계가 다른 나 역시 원판의 데이터와는 따로 노는 처지이니, 결국 남은 건 달랑 저 노부부…
“대교… 상 차려라.”
내 굴복 선언과 함께 초라한 오두막에 어울리지 않는 초호화 만찬이 마당에 차려졌다. 야후 장로 말대로 소살파파는 식탐이 좀 있는지 내… 그러니까 비화곡주 전용 요리사의 비전 요리들의 향기에 넋을 잃었고, 거두마군은 내가 양하대곡(洋河大曲)이라는 강소성(江蘇省)의 특산주를 따라주자 감격하여 체면도 잊고 연신 군침을 삼켜댔다. 헌데 어느 순간, 갑자기 소살파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 웃는 표정인 건 여전한데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할까?
“곡주께서 이 쓸모없는 퇴물들에게 새삼 이토록 신경 써주시니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말투도 아주 약간은 변한 듯… 뭐라고 확실히 표현하기는 좀 그래도 원판의 육체가 먼저 쭈볏, 하고 솜털을 곤두세웠다. 이게 진짜 소살파파인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판과는 타입이 다르지만 어쨌든 웃다가 사람을 죽인다는 살벌한 할머니… 흠, 역시 묵을 대로 묵은 생강들을 상대로 어설프게 돌리는 거보단 정면 돌파가 나을 것 같다.
“뭐… 그리 감사할 필요는 없겠지. 나도 두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그쪽이 소살파파라면 이쪽도 공인 소살청년… 그것도 소대량살 청년이다. 내가 마주 씨익- 웃어주자 소살파파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고, 거두마군은 갑자기 도수 55도의 술 양하대곡을 혼자서 원샷! 해 버린다.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지는 것 같았지만 이 노마두들의 입을 열려면 이런 패턴의 진행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근데… 흑주가 이 둘을 넘어선 건 확실하겠지…? 만약의 경우 대교도 있고 하니까 일단 안심을… 음, 그래도 좀 무섭긴 하다.
“좋소이다~! 곡주, 기왕에 가는 거 화끈하게 먹고나 갑시다.”
거두마군은 방금 원샷한 양하대곡을 혼자 자작으로 연속 몇 잔을 더 들이켰고, 소살파파도 게걸스럽게 음식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반대편에서 이미 걸신들린 듯 음식을 먹고 있던 광박사와 접시를 다투기도 했다.
“저기, 좀 천천히 들지?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다시 나를 돌아보는 두 사람 앞에서 나는 대교만 남기고 모든 인원을 오두막 밖 멀찍한 곳으로 철수시켰다. 거두마군은 불구의 몸에 들이켜진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물었다.
“…이 두 늙은이를 정리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려면 나까지 뭐 하러 왔겠나. 설마 정말 정리당하고 싶어?”
“…흑주도 이제 거의 완성되었고, 달리 여한은 없습니다만…”
“거의…?”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이젠 흑주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뭐, 아무래도 좋은데… 난 당신들의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노부들이 쓸모가 있다는 말입니까?”
“쓸모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할 일, 어쨌든 두 사람은 앞으로 좀 더 오래 살아 주셔야겠소.”
이제 보니 비화곡에 망명한 후 별로 맘 편하게 산 것 같지도 않은데 앞으론 정말 편히 사쇼, 그게 남은 할 일…이라는 본심이 어쩐지 나오지 않았다.
“허어~ 곡주께서는 참으로 모진 분이구려. 끝까지 이 늙은이들을 부려먹으시려오?”
“그러게 말이에요. 이제 좀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나 했더니…”
아주 잠깐이지만 소살파파가 정말로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일단 두 사람이 천천히 술과 음식을 즐기기 시작하는 걸 보니 나도 마음이 좀 놓이는 기분이었다.
“뭐… 오늘은 사실 듣고 싶은 일이 있어서 온 것뿐이야. 난 말야~ 흑주의 신상에 대해 알고 싶은 소망이 있네~!”
응? 뭔가 또 이상한 말을 한 기분이 드네? 왜지…? 마치 지난달에 있었던 ‘오림비 사건’ 때처럼 왠지 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말을 무심코 한 듯한… 나, 오늘도 설마 그때처럼 맛이 가는 건 아니겠지?
“흑주에 대해서 말입니까?”
“으, 응…! 그래. 녀석이 두 사람에게 어디서 어떻게 거두어져 키워졌는지… 그런 얘기 말야.”
흠… 다행히 괜찮은 것 같다. 순간적으로 좀 쫄았지만 그때 연기자 미우노 개**를 만났을 때처럼 감정이 오버하지 않는다.
“역시… 최근 흑주가 변했던 건 곡주님 때문이었구려. 설마 곡주께서 흑주의 신상을 궁금해하실 줄은 몰랐소이다.”
술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거두마군은 그 괴이한 얼굴에 옛 추억을 되살리는 표정을 띄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허~ 벌써 15년이나 지난 일이구려, 당시 10세를 갓 넘긴 나이의 곡주께 흑주를 데려갔을 때, 곡주께서는 당시 비슷한… 흠……”
정말, 보안 개념 좋은 노인네다. 많이 풀어진 상태에서도 대교의 존재를 새삼 신경 쓰다니.
“괜찮소. 대교는 이미 나와 많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아이… 어쩌면 흑주 이상으로 내게 가까운 존재이니 말이오.”
말을 하고 보니 왠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대교의 반응을 살피지는 못했다. 녀석에게 처음으로 속마음을 보인 것도 아니면서 되게 쑥스럽네 그려. 제기… 이 노인네들, 왜 새삼 나와 대교를 번갈아 보는 거야? 암 생각 없이 식사에 전념하고 있는 저 광박사처럼 사소한(?) 일에는 신경 끊어달라구~!
“큼, 흠…! 그렇다면 계속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곡주께서는 흑주와의 일도 잊으신 모양이지만, 그때 곡주께서는 그러셨지요.”
“이 아이를 내 그림자로 키우겠다고?”
녀석은 당시 ‘비슷한 나이’의 흑주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예의 섬뜩한 미소를 씨익~ 그렸다고 한다.
“좋아,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게 맘에 들어. 단, 기간은 4년. 그 안에 만들어 와.”
흠… 만날 때 상황만으로도 우선 흑주의 대충 연령은 알았다. 원판 나이가 올해로 26살쯤 되니까 (이것도 확실한 건 아니다. 녀석의 사부도, 녀석도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밝힌 일은 없다고 한다.) 흑주도 대충 20대 중반으로 보면 되겠다. 전에 몽몽으로 측정해본 적이 있지만, 몸의 세포 샘플이 없으면 확실한 측정이 어렵고, 더구나 이 시대의 고수들은 나이 측정이 더 어렵다고 해서 궁금했었다.
“4년, 내가… 4년이라고 했었단 말이지?”
“예, 처음엔 그 뜻을 몰랐지만… 후일 사천대령신군께서 세상을 뜨셨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과연… 자기의 가장 막강한 후원자가 사라질 때를 미리 알았다는 거군. 원판 짜식, 참 대단한 놈이긴 했다. 응…? 가만, 그러고 보니 원판이 나보다 조금 연상일려나? …에이~ 확실한 나이도 모르는데 알아서 대접해 줄 필요는 없지 뭐.
“4년…! 완벽한 살수를 만들어내는 데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곡주와 우리 부부의 눈이 틀리지 않아. 흑주는 정말 빠르게 우리 부부의 모든 것을 흡수해 갔지요. 결국… 4년이 지나 곡주께 보냈을 때 흑주가 곡주의 마음이 흡족할 만큼 활약할 수 있었으니… 허허~ 다시 생각해도 보람이 느껴지는 일이었소이다.”
…신변을 지켜주는 일 말고도 반대파 암살이라던가 그런 일에도 쓰였다는 건가?
“우리 부부도 가장 놀랐던 것은 흑주가 당시 장로였던 ‘일혼위험(日魂危險) 고이준’을 제거하는 쾌거를 이룬 것인데……”
흑주가 당시 장로를 암살…? 이건 처음 듣는 얘긴데? 에구, 이거 정말 극비 사항인 것 같은데, 대교만 남기고 다 내보내길 잘했다.
“흠, 그건… 당시 상황은 그렇다 치고, 실은 그런 얘기보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그전의 얘기야. 애초에 흑주를 어디서 데려왔는가, 하는 거.”
다시 거두마군과 소살파파가 동요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는 진작부터 몽몽을 통해 흑주의 반응을 거짓말 탐지기 수준으로 살피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흑주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복면 아래의 표정이며 기타 생리적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빌어먹을 살수로서의 ‘완성’이란 역시 이런 의미였나?
“거기까지 물으실 줄이야… 흑주를 두 번째 보냈을 때, 아니… 첫 상견 이후 곡주께서는 두 번 다시 흑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거늘…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그려.”
역시 원판 녀석 능력은 둘째치고 정말 싸가지 없었군. 흑주 정도의 자기 심복을 그야말로 그냥 발 밑의 그림자 이상으로 보지 않았단 말인가?
“흠, 흠… 거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다 변하는 거 아니겠소. 더구나 난… 요즘 종교를 통해 마음을 닦고 있으니 말이오.”
“과연, 그 고리아 교가 어떤 것인지 꼭 알고 싶어지오.”
“에…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빨리 말해 보시오. 흑주가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두 사람을 만난 거요?”
말을 돌리다 보니 조금 성급한 태도가 된 것 같았지만 거두마군은 이미 내 변화(?)에 의문을 갖지 않게 되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인군도의 짱들이었던 거두마군과 소살파파가 혈란 전에 비화곡에 은거해버릴 수 있었던 건 당시 비화곡주였던 원판의 사부 사천대령신군의 배려 덕이었다고 한다. 워낙에 천인군도는 같은 사마외도에서도 따 당하는 처지여서 입곡이 쉽지가 않았는데, 인재를 중시 여기는 사천대령신군이 두 사람의 능력을 높이 사 일사천리로 입곡 시킨 것은 물론이고 대우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 은혜를 계속 품고 지내던 중 사천대령신군의 밀명을 받은 것은 20년 전, 사천대령신군이 쪼깐한 꼬마 녀석(원판) 하나를 비화곡에 데리고 온 직후였다고 하는데… 그 후 특별 외출까지 허가 받아 약 5년간을 그 임무에 맞는 인재를 찾아 천하를 뒤졌다고 한다. 달랑 둘이서 그만한 인재를 찾아 이 넓은 중원 대륙을 뒤지는 일은 5년이라는 세월도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 어려운 일이어서, 결국 그들이 흑주라는 보물을 찾은 장소는 땅끝의 오지… 다름 아닌 그들의 고향 천인군도였다나?
일찌감치 정식으로 빠졌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이 나온 후에 엄청 망가져 버린 자신들의 고향에 대한 마음의 부담 때문에 사천대령신군과 약속한 5년을 거의 다 허비한 시기에야 혹시나 하고 찾아 간 천인군도. 여기서 거두마군 부부는 지난 5년 동안 찾지 못했던 인재를 다섯 명이나 발견했다고 하니… 비록 끝이 나빴다고는 해도 한때 전 명문정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곳답다고 할까……?
당시 천인군도는 그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전쟁 후유증을 이겨내고 다시 체제를 잡아가는 참이었지만 과거 거두마군 부부가 떠날 때에 비하면 매우 형편없는 상황이어서 두 사람은 무거운 마음으로 천인군도의 섬들을 돌아보다가 과거 자신들이 지배했던 구역에 이르러 묘한 촌락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