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1-2화 : 천년지애(千年之愛).(2)
5-8. 천년지애(千年之愛).(2)
나는 대교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대교, 지금부터 얼마간은 부딪치지 말고 피하는 데 주력해. 이 진식을 좀 더 분석해 봐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몸조심하고.”
“예. 아, 저… 조심, 하세요.”
응? 뭐지? 대교가 지금 뭔가 망설인 것 같은 걸? 혹시… 날 뭐라 불러야 할지 갈등한 건가? 뭐, 곧 ‘애초에 곡주가 아님’까지 알게 되면 호칭도 자연스럽게 결정이 되겠지만… 그러고 보니 난 이제 대교에게 곡주님이나 하사님 같은 것보다 좀 더 가까운 사이에서 쓰는 호칭을 듣고 싶었다. 딱히 생각해 둔 건 없지만… 보통은 ‘오빠’라고들 많이 하겠지? 그 밖에는 허니… 으윽~ 달링, 혹은 자기야- 으허억~ 오랜만에 닭살이 테크노 춤을 춘다. 아무래도 뭔가 덜 닭살스러운 걸로……
웃! 뻘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청아 화상의 지시와 함께 재출격한 솔로부대는 우리의 막강 러브리커플 염장 포스에 자극받아 극강 솔로방화 응징 파워를 발산하기라도 하듯 아까보다 더 강력한 기세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실은, 제가 생각해 본 것이 있긴 합니다만……”
“뭐?”
“…전방 2보에서부터 오행미종보 난화회답(欄華廻踏)을 펼쳐 주십시오.”
어- 대교 얘가 지금……?
“완보(完步) 직전 금생수(金生水)로 해왕노호(海王怒號)!”
나는 이어지는 대교의 지시가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연옥도에서도 몽몽이 무작위로 불러주는 초식을 즉각 펼치는 수련을 지겹도록 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놀라운 건 그런 나의 보법과 생사금마도결에 맞춘 듯 펼쳐지기 시작한 대교의 보법과 절기들이었다.
[…효과적인 대응입니다!]
몽몽의 알림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난 대교와 단 한 번도 함께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는데도 거의 위화감이 없었고, 그렇게 즉석에서 시전된 우리의 합공이 백팔나한진의 첫 번째 공세를 가볍게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줄곧 함께 강적을 물리치는 것을 상상해 왔는데…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교가 상기된 얼굴로 기뻐하고 있었다. 어쩌면 대교는 이미 내가 어떤 무공을 쓸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계속 둘이 함께 싸우는 법을 연구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인 약간의 반발심을 누르고 계속 충실하게 대교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했다.
거의 붙어 있다시피 가깝게 움직이면서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두 신형의 움직임… 내 도법의 무거움과 대교의 검이 펼치는 화려함이 교묘하게 조화를 이룬 우리의 커플신공(?)은 백팔나한진의 거듭되는 공세를 계속 어렵지 않게 피하고 막아낼 수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무서운 커플신공… 아니, 두 명이 이루는 ‘방어진’이 나한승들에게서 처음으로 동요의 빛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싸움이 반복되는 사이 나는 차츰 뭔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몽몽! 당장 내가 말하는 자료를 백팔나한진과 맞춰서 분석해봐!]
몽몽에게 급한 명령을 내린 직후였다.
“찬종념화(竄縱拈花)!”
청아 화상의 핏발 선(?) 음성과 함께 백팔나한진의 진세가 또다시 크게 변화했다. 역시 솔로, 그 것도 평생 공인마크(?)가 찍힌 솔로부대 앞에서의 염장질은 실수였던 걸까…? 잠시 주춤하는 것 같았던 나한승들의 기세가 불연듯 다시 불타오르며 폭풍처럼 우리를 치기 시작했다. 물론 커플부대 임시 사령관인 대교도 이에 지지 않고 차분하게 날 이끌며 눈부신 절기를 펼쳐 나갔다. 그러나… 한 시진(時辰. 약 두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쯤이었을까? 그녀의 보법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죄송해요! 저로서는 더 이상 진식의 변화를 감당할 수가……”
난감해하는 대교에게 나는 안심하라는 의미의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 사이 몽몽이 내가 원한 결과를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이제부터는 내게 맡겨!”
나는 자신 있게 커플부대 사령관 복직을 선언하고는 즉시 내 쪽에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대교는 아까의 나처럼 놀라면서도 재빨리 내 지시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커플신공은 좀 더 완전한 형태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방어만을 해 오던 것에서 일변하여 오히려 더 강력한 염장질… 아니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나한승들의 동요가 눈에 띄게 커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 완벽했던 진식의 흐름에 작은 틈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건… 이건……”
그제야 대교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아- 알고 보니 그 동굴에는 이런 뜻이 숨어있었군요!”
“그래, 대교. 단숨에 끝장을 내자!”
나는 스스로(분석은 몽몽이 했지만) 역전의 실마리를 잡아낸 것에 광분하여(?) 나한승들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소림사 백팔나한진을 내가, 아니 우리가 깰 수 있다는 확신이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 한 가지 불안한 점은……
“나한승들은 즉시 정진(靜陳)하랏!”
청아 화상, 솔로부대 사령관의 작전타임(?) 명령을 우리까지 받아들일 의무는 없겠지만… 사실 우리측도 전투 속행이 유리한 것만은 아니어서 나 역시 신형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리 커플부대 부사령관… 대교는 물론 나 못지 않은 내공을 지니고 있으며 전투 경력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여자의 몸이라는 선천적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데다, 내가 마군황이 되기 위해 겪었던 경험처럼 혹독한 단련의 기간이 없어서 그런지… 지금 너무 지쳐 있었다.
<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약해서 …님의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
대교는 미안해하는 마음과 분한 기분에 쌓인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아니야. 너니까, 대교 너였기 때문에 가능한 싸움이었어. 당금 천하를 통 털어도 나와 함께 백팔나한진을 몰아붙일 수 있는 여자는 너 하나 뿐이야! >
< …… >
< 후후~ 그보다 좀 전에 또 날 뭐라 부르려다 얼버무렸지? >
< 아, 그, 그건…… >
< …나중에 말해도 돼. 지금 넌 빨리 내력을 회복시키는 게 중요해. >
< 예. 알겠습니다. >
대교가 즉시 자신의 심법인 수라진경(修羅眞經)으로 컨디션 회복을 도모하는 것 같아서 나는 비로소 청아 화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청아 화상의 얼굴에는 ‘이 것들이 틈만 나면 염장질이야!’라고 쓰여있는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감정을 제어하며 입을 열었다.
“허허- 이제보니 두 시주는 본사의 나한진을 철저히 연구하여 준비를 해왔구려.”
“훗-! 소림이야말로 오랜 세월 생사금마도결을 연구해 온 거 같소만… 그거야 어쨌든, 사실 우리가 조금 전까지 백팔나한진을 궁지에 몰아 넣을 수 있었던 건… 패도광협과 청명신니… 두 노선배의 안배 덕분이었소.”
나는 대교에게 좀더 시간을 주기 위해 청아 화상이 궁금해하거나 말거나 나와 대교가 목야평에서 사갈서생의 습격으로 결국 어떤 동굴에 한동안 머물게 되었었던 사연부터 주욱 늘어놓았다. 뭐, 실상이야 우릴 위한 안배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두 올드커플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백팔나한진을 연구했던 건 사실인 듯했다. 동굴에 남겨져 있던 올드커플의 무공 흔적을 몽몽은 두 사람의 무공이 일부 합쳐지고 보완되어 하나를 이루는 형태인 것으로 분석했었고, 결국 몽몽이 완성시켜서 대교에게 전해준 건 분명히 생사금마도결의 업그레이드 판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 내가 생사금마도결을 익히게 되었을 때도 처음에는 그걸로 수련을 했었다. 그러나 수련 도중에 내가 느낀 것은 아무래도 내게는 생사금마도결의 원본이 더 맞는 거 같다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몽몽이 나 나나 대교와 내가 쓰는 무기의 도와 검이라는 차이 때문 일 거라고 판단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백팔나한진 속에서 겨우 깨달았다. 그 동굴의 무공은 생사금마도결을 검결로 변화시킨 게 아니라 ‘생사금마도결과 함께 어떤 검법을 함께 펼치면 백팔나한진을 깰 수 있는가’였던 것이다.
“아미타불~ 패도광협과 청명신니… 두 고인들은 마지막까지 백팔나한진에 그토록 매달렸었구려. 게다가 두 남녀가 함께 펼쳐야만 완성되는 파해식이라니……”
솔로부대 사령관 청아 화상의 탄식처럼… 확실히 최강의 솔로합체절대진법에 대항하는 궁극염장커플파해식인 셈이었다.
“허나, 소승이 보기에 두 시주는 웬일인지 그 파해식에 익숙치는 못한 것 같소. 아미타불~”
이런 제기. 잘도 알아보는 군. 게다가… 당신이 무슨 만화 최종 보스 캐릭터야? 왜 이 시점에서 백팔나한진이… 마치 ‘지금까지는 진짜 힘을 보여주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처럼 몇 배나 더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하며 시작되는 거냐! 응?
[ 주인님! 지금부터 제 지시를 따라 주십시오. 1차 방어 후 진입해야 할 방위는…… ]
어? 이번엔 우리 측 히든카드도 발동하는 건가? 응…? 뭐야, 몽몽… 너 설마 지금 헛소리 한 건 아니겠지……?
[ 대교…! 지금부터 일다경(一茶頃, 약 15분), 아니 그 절반의 시간이면 돼. 전력을 다할 수 있겠어? ]
[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
[ 에이 쒸- 그런 건 걸지 말고! ]
[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대교의 피로한 얼굴에 떠오른 사랑스런 미소가 새삼 내 전투력에 불을 당겼다. 우워어억~ 다 덤벼! 모드가 된 나, 커플부대 사령관은 솔로부대 최후의 공포스런 진격을 향해 마주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두… 미안햇!”
나는 그렇게 외치며 예정된 승리의 길로 뛰어 들었다. 그 옛날의 올드커플이 되살아 난 듯… 내 정글도와 대교의 청명검이 완벽하게 하나 된 호흡으로 어우러져 춤추며 하늘을 가르고 땅을 격동케 했다. 그 앞에서 솔로… 아니 나한승들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무림 최강의 백팔나한진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저, 정말… 우리가 이긴… 거예요?”
“훗-! 그래. 지금 틀림없이 우리 두 사람이… 소림의 백팔나한진을 깬 거야.”
확실히 말해 주었지만 그래도 대교는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주변의 소림승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나 역시 다소 얼떨떨하긴 했지만 대교만큼 대단한 감동 같은 걸 느낄 기분은 아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아미타불 소리조차 잊고 망연자실한 청아 화상과 다른 소림승들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양심에 걸려서 이 사태의 진실을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정신차리거라-! 청아-!”
어디선가 들려온 웅장한 음성이 소림사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아… 스승님? 스승님이 이들에게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까?”
청아 화상이 마주 외치자 다시 예의 음성이 계속되었다.
“방향을 알려 준다고 누구나 갈 수 있겠느냐-? 너는 변명할 생각 말고 네 입으로 약속한 바를 이행하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결국 얌전히 항복한 청아 화상이 천천히 걸음을 떼어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교가 두려운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전 이 음성의 주인이 얼마나 엄청난 내력을 지녔는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나도 뜻밖이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천이단의 정보에 의하면 깊숙한 지하의 폐쇄된 금역에 있을… 그러면서도 여기까지 직접 목소리를 낸 괴물(?) 때문에 다소 기가 죽은 우리에게 청아 화상이 정중하게 합장을 해 왔다.
“아미타불~ 실례가 많았습니다. 약속대로 두 분을 저의 스승님과 화선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어랏? 싸가지 진에게 계속 요녀니 뭐니 하더니 이젠 갑자기 님자를 붙이네? 역시 싸가지 진의 연애 상대는 이 청아 화상의 스승이면서 현재는 금역에 복역 중인 괴물… 달마역근경의 마스터 묘선 대사인가 보다.
내가 대교에게 말한 몇 분 후… 충격과 함께 찾아온 정적이 이 곳 나한당에서 소림사 전체로 번져 가는 것 같았다. 내 옆에 서 있는 대교조차 좀처럼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