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1-1화 : 적대관계 조인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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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1-1화 : 적대관계 조인식(1)


2-2. 적대관계 조인식(1)

“동족…혐오?”

내 반문에 녀석은 여전히 소녀 같은 표정에 약간의 홍조까지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넌 날 너하고 닮은… 것두 아주 심하게 닮은… 동족이라고까지 생각한다고?”

다시 크게 끄덕.

“동족혐오… 그 뭐냐,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그렇기 때문에 거부하고 싫어하는 거… 맞지?”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망설이듯 끄덕인다.

“너, 진심이냐? 내가 너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

“물론! 그리고… 그래서 난 당신을 아주 좋아해.”

“…그 것도 진심?”

“물론…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미~친 새끼!”

놈이 하필, 언젠가 내가 대교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는 바람에 욕설부터 나오고 말았지만, 나는 비로소 뭔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되어 결국 마주 씨익 웃어주며 말했다.

“그럼 결국, 맞짱 한번 뜨자는 거네?”

“그… 비슷한 거.”

“비슷은 무슨… 암튼 까짓 거, 좋다! 근데 넌 어째 병을 치료한 지금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데… 설마 뭐든 절세신공을 연성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건 아니겠지?”

“역시 성급한 남자로군. 보라구. 세상은 이렇게 넓고… 빛나며… 그리고 아름답지 않은가.”

원판은 말과 함께 창으로부터 몸을 바로 세우며 자신이 공연할 무대를 소개하듯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녀석의 등 뒤 창 밖으로 눈부시도록 투명한 하늘과 그 하늘 아래 아무 것도 모르고 평화로운 서울의 전경이 펼쳐져 있다.

“천천히… 느긋하게 가자구. 우리는 명색이 타임씨에게 선택된 사람들 아닌가.”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느긋한 성격이 못된다는 걸 알텐데?”

“알지. 그래서 아직 만날 때가 아니라고 했던 거고… 훗-!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도 참을 수밖에 없을 거야.”

“뭣… 때문에?”

“내게는 인질이 있으니까. 그녀… 대교! 당신이 자신의 영혼을 걸고……”

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마음, 혹은 그보다 빠르게 정글도를 쥔 내 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번쩍!

한 줄기 빛이 원판의 어깨 바로 위를 가로질렀다.

쩡-!

원판의 목 뒤 유리벽이 가로로 갈라지며 낮은 비명을 토해냈다. 그 실처럼 가는 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잘려진 원판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허공에서 춤추게 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들어올리는 원판의 손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원판의 커질 대로 커진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날… 잘 안다면서? 그럼 그녀를 위협하는 게 나란 놈을 어떻게 만드는 지도 알 텐데?”

“아아-“

원판은 낮은 탄성소리와 함께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매만져 보며 그 목이 아직 제대로 붙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네 수준, 혹은 그 이상 막 나가는 걸 보고 싶다면……”

쳇…! 사람이 모처럼 진지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저 자식,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잖아?

원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의 갈라진 유리를 확인하고는 이어 어깨 위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들여다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력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아니, 그전에… 칼을 쥔 지 불과 2년 밖에 안 된 이가… 의형수검(意形受劍)이라니……!”

…응? 의형수검? 그거 엄청 졸라 울트라캡빵 높은 경지를 말하는 거 아냐? 지금의 내 칼질이 그 정도였다고…? 난 그냥 욱하는 마음에……

“훗! 후, 후후후……”

빌어먹을 놈. 이번엔 또 왜 그렇게 기분 나쁜 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거냐? 게다가 얼굴은 꼭… 일 년쯤은 빡세게 아르바이트해서 드디어 오빠들의(?) 앨범을 산 빠씨 가문 모양들 같이 하고는……

“역시… 역시 멋져. 당신이란 남자!”

에이 씨~ 이거 그냥 진짜로 확 베어 버릴까?

[주의하십시오, 주인님!]

몽몽의 경고 때문에 돌아보니, 어느 틈에 소리도 없이 열린 문을 통해 도홍과 란이 들어와 있었다. 란은 손에 쥐고 있던 권총으로 날 겨냥했고, 그녀의 그런 동작보다도 빠르게 도홍은 이미 나와 원판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흐음… 도홍은 역시 더럽게 빠르다. 천우신이 독문경공을 펼칠 때의 스피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음, 그리고 이어서 속속 들어와 내 주위를 포위해 버린 네 명의 남자들… 이 녀석들의 움직임도 장난이 아니다. 원판 직속 보디가드들이라면 당연히 생체강화인간들 중에서도 엄선된 자들이겠지? 문제는… 내가 이런 수준의 적들을 제대로 상대하려면 조금 전의 의형수검 경지를 펼쳐 줘야 한다는 건데, 아무래도 쉽게 그 정도 수준의 칼질을 다시 재현할 자신은 없다. 에… 조금 전엔 내가 어떻게 했더라? 무심결이었지만 아마 정글도를 이런 식으로……

“프리즛!”

꼼짝 말라는 Freeze의 강한 발음…?

몽몽 녀석에게 간단한 단어는 해석하지 말라고 했더니만… 암튼 저 여자 란은 아까와는 달리 엄청 살벌한 표정으로 총을 겨누고 있군. 강화인간들도 문제지만 저 총… 게다가 하은이와 달리 상당히 안정되고 익숙한 느낌의 자세인 거로 봐서 분명히 훈련을 제대로 받은 여자인 것 같은데……

“진유준님…! 마스터께서 그 동안 당신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당신은……”

“이봐, 란!”

란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원판이었다. 녀석은 행복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자신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블러디 울프(bloody wolf) 제군들……”

쯧, 그럴 줄 알았다. 니 측근은 역시 현대의 혈랑대라 이거지?

“더 이상 허락도 없이 이 시간을 방해하면… 그래, 약속하지.”

녀석은 여전히 꿈꾸듯 달콤한 상황을(대체 어디가!) 만끽하는 소녀의 표정으로,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예의 불길한 C-PK를 발산하며 선언했다.

“제군들의 동료인 ‘론’의 처지를 부러워하게 만들어주지.”

응? 론? 그 괴물 같은 백인 남자… 그를 벌써 어떻게 한 건가? 단지 나한테 개겼다는 이유만으로? 아니 하은이에게도…였던가? 하여간 뭐… 야 이거? 다른 자들은 물론이고 저 도홍까지 두려움에 떠는 기색이라는 건……

“아아- 이런, 이런… 분위기가 갑자기 칙칙해지고 말았군.”

인간아! 그게 다 너 때문이잖아!

“자아- 다들 다시 나가 주시고… 아, 란! 당신은 본래의 일을 계속해야지?”

“예, 옛! 마스터!”

도홍과 보디가드… 신생 혹은 21세기 버전 혈랑대가 신속히 거실을 빠져나가자 혼자 남은 란은 아까처럼 응접실 테이블 옆으로 가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애써 처음과 같은 표정과 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게 더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공포라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원판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태연히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앉더니만 내게 손짓했다.

“흐음~ 좋아. 이제 우린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볼까?”

“그러지, 뭐.”

간단하게 대답한 나 역시 처음처럼 녀석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원판 녀석은 가볍게 손가락 퉁겨 경쾌하게 딱-! 소리를 내며 말했다.

“검남춘(劍南春)!”

언젠가… 내가 삐진 야후 장로를 꼬드길 때 썼던 술이며, 그 전에도 가끔 원판과 야후 장로가 함께 마셨었다는 사천 특산 술이다. 어쨌든… 나도 녀석처럼 손가락을 퉁겨 둔탁한 퍽-!(?) 소리를 내며 말했다.

“쐬주!”

음, 그냥 해 본 소리였는데… 란은 즉시 슈퍼에서 사온 듯한 소주를 고급스러워 보이는 천으로 감싸들고 내 잔에 따르고 있다. 내가 호강하는(?) 소주를 받아들자 원판이 자신의 잔을 내밀며 말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 보도록 하지.”

“그러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는 각자 원샷~! 크으~! 좋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노무 쐬주 한 잔의 맛은 변함이 없군.

조금 전에는 녀석이 대교를 인질 운운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욱하고 말았었지만, 사실 난 녀석이 ‘동족혐오’라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급속도로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었다. 내가 녀석을 경계하고 어느 정도 두려워하기까지 했었던 건… 무엇보다도 녀석의 너무나 애매하고 알 수 없는 부분들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게 태반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진 것이다. 그건 녀석이 나와 대교의 ‘적’이라는 것!

그게 확실해진 이상 망설이고 가늠하고 할 일도 없다. 마인 중의 마인이고 나발이고… 이 세계에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해 놓았건 어쨌건…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보이는 것부터 하나씩 부셔 준다. 돌진할 방향이 정해진 진유준이란 인간이 어떤 놈인지… 저 고대의 변태 살인마에게 실감시켜 주고 말겠다.

“벌써부터 나를… 내가 일으켜 놓은 21세기의 비화곡을 어떻게 박살낼지를 생각해 보고 있는 건가?”

윽! 이 자식, 또 남의 생각을… 쳇! 역시 이 녀석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해야겠다.

“21세기 비화곡이라…! 하은이가 말했던 SF… 그 마지막 자는 V… 맞지?”

원판 녀석, 이제야 알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Secret Flower Valley…! 훗~! 내가 딴 생각하다가 대충 만들어 봤던 명칭이잖아. 화이트 크라우드라는 이름도 그렇고… 너도 나처럼 작명 센스는 별로인가 보군.”

“현재의 내 이름, 화이트 크라우드… 그리고 그 밖의 모든 힌트는 당신 수준으로 만들어 봤어. 어렵게 구성하면 날 찾는데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말야. 뭐, 결국 그 과정은 이렇게… 날로 먹었지만 말야.”

이쒸- 내 전용 표현을 표절하네? 아니 그보다……

“언제는 내가 니 수준이라며?”

“후후~ 그 것은 ‘재능’ 차원일 뿐, 당신은 아직 개발 단계야. 곧… 밝혀지겠지. 나와 동류일 뿐인가, 동급까지 가능한 남자인가……”

“그렇게 평가를 해보고… 그리고 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평가 기준과 그에 대한 대접… 혹은 처분은 나중에 말해 주지.”

이 자식…! 이게 날 아주 지 장난감으로… 으~ 제기, 지금은 참아야 한다. 이 놈은 감정대로 나가도 될 상대가 아니다. 침착하자, 침착하고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진유준!

“이봐…! 이거 너무 불공평 한 거 아냐? 아무래도 마치 네가 신이라도 되는 양… 날 어떤 식으로든 시험에들게 할 생각인 모양인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난 둘 다 싫거든? 내가 네 놈에게 인정받아서 ‘포상’개념으로 ‘대접’이란 걸 받고 싶어한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군. 그럼 그 쪽의 조건을 얘기해 봐.”

“…우선 대교는 우리 일에서 빼.”

“흐음~ 그건 좀 곤란한데……”

“너…! 내 정글도가 언제나 의형수검으로 네 목을 비껴갈 거라고 생각해?”

원판은 내가 다시 정글도를 잡고 있을 것을 힐끗 보더니, 곧 고개를 돌려 란을 노려보았다. 란은 내 행동에 반응하여 다시 총을 빼들었다가 원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힘없이 팔을 내려트렸다. 원판은 천천히 살기를 거두며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게임이던지, 라스트에는 아름다운 공주… 혹은 여신을 구해내는 이벤트가 있지. 그게 없으면 아무래도 맥이 빠지지 않겠나?”

“게임? 나와 대교… 특히 대교는 게임의 캐릭터 따위가 아니야.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게임이고 나발이고 없어.”

“그건… 음, 좋아. 그럼 대교는 인질에서 제외시키기로 하지.”

“당연한 거겠지만… 너의 그 평가라는 거… 그 과정에서 내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거 맞지?”

“그야, 아무래도… 게임은 서로 진지해야 더 재미있지 않겠나.”

“그럼 그 빌어먹을 게임이 끝난 후… 아니 오늘 이자리가 아닌 시간과 장소에서는 나 역시 널… 죽여도 되겠지?”

“후후- 그 정도는 인정되어야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지. 앞으로… 당신이 이 자리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적용하도록 하지. 당신이 그 정글도로 날 베어 버린다 해도 그녀는 안전할 거야. 그럼 되겠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문득 웃음기를 조금 거두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야. 그녀가 이제부터 나의 인질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결국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될 테니, 같은 결과가 아닐까?”

젠장…! 그게 또 그런가? 아니… 아니지.

“…그녀의 안전은 내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야. 만약의 경우 내가 그녀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해도, 그녀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상관없어.”

에구…! 내가 왜 이 녀석 앞에서 이런 닭살 대사를…

아, 아니 그보다! 실수닷! 분위기에 말려서 무심코 내 입으로 적에게 인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만 꼴이……

“과연… 부럽군.”

“뭐?”

“내가 20년 동안 비화곡에 있으면서도 찾지 못했던 보물을… 당신은 그보다 20배는 짧은 기간에 얻었으니 말이야.”

‘다른 사람 부러워하기 전에 니 지랄 같은 성격을 탓해라, 이놈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참았다. 소호루의 이화를 생각해 보면 저 놈이 변태 살인마고 뭐고 무조건 좋다는 절세 미녀들도 한 둘이 아니었을 텐데…..

“어쨌든, 룰이 정해졌다면 곧 바로 적용해야겠지? 란! 조금 전의 내 말을 모두에게 전달해.”

“…만약 진유준님이 마스터께 위해를 가한다 하더라도… 대교 아가씨를 해치지 말라는… 명령입니까?”

란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지만, 원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어딘가로 연락을 취해 명령을 전달하는 사이 원판은 뭐가 그리 즐거운 지 약간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검남춘을 홀짝이고 있었다. 나 역시 천천히 내 소주 잔을 기울이며 몇 가지 생각을 더 해 본 후 입을 열었다.

“…좋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더 있어.”

원판은 기가 막히다는 듯 풀썩 웃더니, 란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란! 이 사람을 좀 봐. 어느 날 갑자기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를 만나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불합리한 게임을 강요받고 있는 처지에… 당연하다는듯 자기 쪽에서 계속 조건을 추가하고 있군. 란, 이런 남자 봤어?”

“글쎄요. 마스터 외에는 아직……”

“훗~ 그래. 그래서 기다린 보람이 있군.”

저 자식… 대체 어디서부터 날 동류로 보기 시작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집에 쌓여서 내가 뭘 하든 자기 생각에 갖다 붙이는 것 같다. 쯧…! 어찌 되었든 이번 조건도 양보할 수 없는 거니 일단 밀어붙여 보자.

“이봐, 원판! 너… 다른 곳에서는 모르겠지만, 이 한국 땅에 오기 시작했을 초기에는 이런 생활이 아닌… 나와 비슷한 소위 ‘서민’들의 생활을 경험해 보려고 했겠지? 그러다가 이런 곳, 그들의 머리 위로 옮겨 온 걸 보면… 넌 거기에 적응하지 못했어.”

내 말에 원판의 표정이 처음으로 흠칫, 아주 조금이나마 굳어지는 군. 훗! 동류니 어쩌니,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아 온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자기 속내 같은 걸 들키면 저런 반응을 보이고 마는 군.

“호위병 없이… 혼자 거리를 걷다 보면 어깨 정도 부딪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쇼핑할 때 새치기하는 사람들, 불친절한 버스기사, 지하철에서 발을 밟고도 사과도 없는 사람, 가까운 거리도 돌아서가며 요금을 올려 받는 택시기사, 물건 시세 모른다고 바가지를 씌우는 가게 주인……”

“아- 그만하지. 당신… 역시 날 너무 편견을 가지고 보는 거 아닌가? 내가 설마 그 정도 사소한 일로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라는 거야?”

…빌어먹을 놈! 쉽게 대답을 못한다. 역시……

“뭐… 이런 경우는 있었지. 당신이 열 일곱 살 무렵에 자주 가던 보라매공원 기억하나?”

에이 쒸… 이 자식, 무림에서의 일 말고도 우리 시대에서의 내 인생까지 뒷조사를 해 둔 건가?

“난 몇 년 전 그 곳 부근의 포장마차에서 혼자… 당신이 좋아하는 그 소주를 한잔 해보고 있었지. 그런데… 어떤 남자 한 명이 내게 말을 걸며 접근해 오더군. 후후- 날 여자로 착각하고 말이지.”

“무림에 이어 여기서도… 그런 불쌍한 남자들이 있었군.”

“그래. 그런 자들은 항상 날 귀찮게 하고 불쾌하게 만들지.”

“그래서… 그를 해쳤다는 거야? 술기운에 단지 널 귀찮게 했다는 이유로?”

“아니. 난 그를 해치지 않았어. 당신 말대로 마침 호위병도 없이 갔었기 때문에 말로 다독거리긴 했지만 말이야.”

“뭐?”

“오히려… 그가 다른 사람들을 해쳤지. 그 것도 꽤 많은 숫자를.”

뭐, 뭐야? 이거 설마……

“그래. 그가 바로 요즘 한국의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그… 연쇄 살인마야.”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정글도를 잡고 말았다.

“부추…겼구나, 네가! 그 놈이 살인을 하도록!”

“아아- 너무 흥분하지 말게. 나도 그런 결과를 바란 건 아니었어.”

“그럼 뭐야?”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몇 명의 여자를 해친 상황이었어.”

맙소사! 뭔 말을 어떻게 했기에 처음 만난 사이에 그런 고백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거지? 대체 이놈은……

“난 다만…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가 품고 있는 분노가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일깨워 줬을 뿐이지.”

“이 썅~! 결국 그게 그 말이잖아?”

나는 결국 벌떡 일어나 정글도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으으~ 대교… 대교만 아니었어도 이 자리에서 이 악마 같은 놈을……

“하아- 실패였어!”

“뭐?”

“어이없는 실패작이었지. 나도 말이야. 그렇게 치졸한 쓰레기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거야. 그래서인지… 난 내가 조금 일깨워주면, 그 자도 자신의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자신의 말처럼 소위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에게 발산할 거라는… 그런 착각을 하고 말았어.”

원판은 원샷으로 술잔을 비우더니 다시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나도 며칠 전에야 알았어. 그 자는 감당할 수도 없는 상대에게 덤벼들다가 자멸하는 대신… 약삭빠르게도 계속 자기보다 현격히 약한… 약하고 불쌍한 여자와 노인들만을 해치고 다녔다는 것을 말이야. 난 정말 실망하고… 그리고 부끄러웠지.”

“……”

“그 쓰레기는 요즘 경찰에 잡히고서도 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군. 자신의 유명세를 적절하게 이용해 가면서 말이야.”

뭐…야. 얘기가 어째 좀……

“당신은 조금 전 내게…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그런 요구를 하려고 했지?”

“…그래.”

“수락하지. 적어도 당신과의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소위 ‘보통 사람들’에게 손대지 않겠어. 설사 그들이 날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야.”

이렇게 간단히 수락한다고……?

“대신, 내가 그 부끄러운 실패작을 처분하는 것만은 허락해 주겠나?”

이런… 빌·어·먹·을! 이 자식 이제 보니 나에게 그 쓰레기 살인마의 생사를 결정하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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