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24화 : CR 발동
4 CR 발동
천천히 눈을 떠보니… 눈앞의 광활한 바다와 하늘이 어슴프레 밝아져 있었다.
으음. 밤새 계속 운기조식을 하다가 졸다가를 반복했는데… 새벽녘인 지금은 그냥 퍼질러 잔 것보다 더 머리 속이 맑아진 것 같군.
「…주인님.」
“어, 왜.”
「곧 요몽의 감금을 해제하겠습니다.」
“응? 그야 니 맘이지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풀어주는 거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나는 비교적 느긋한 태도로 말하며 결가부좌를 풀었다.
「물론, 아직 교육의 효과를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인님과 대교님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서포트하기 위해서는 요몽이 필요합니다. 패티 는 프리메이슨 연구소의 공방전만으로도 여력이 없습니다.」
“글쎄……? 대교는 나하고 있을 때나 초창기 모드가 나오지, 다른 일에는 아닌 거 알잖아. 대교 때문이라면 굳이 요동을 풀어 줄 것까지 없을 것 같 은데 말이야.”
「그렇지만……………」
“훗!”
몽몽 녀석, 내가 짐짓 퉁기니까 은근히 난처해 하는군. 역시 벌써부터 풀어주고 싶었는데 자존심 때문에 그냥 풀어주기가 어려운 모양이지?
“알았다. 풀어줘. 음… 명령이야.”
「감사합니다, 주인님. 최종 검열을 마치는 대로 감금을 해제하겠습니다.
요몽 녀석이 과연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지는군. 아무리 강도 높은 정신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본래 성격까지 바뀌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별장 쪽으로 돌아섰다.
“요몽도 그렇고 지금 오는 애들도 그렇고… 소위 ‘무서운 아이들’인 셈이군.”
무서운 아이들, CR(Confidential Raiders)을 태운 헬기가 별장 뒤의 숲 위로 나타나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마이애미 공항에서 녀석들 전부가 헬기로 갈아탈 수 있었던 건 아니라고 했었다.
쿵!
쿠웅!
쿠앙!
은근한 땅울림 소리가 헬기와 같은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숲 위로 불쑥 나타났다가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반복 중인 저 미확인 물 체는(?)……………
최홍만보다도 큰 덩치의 형제… BB형제로군. 속도를 높이느라 장거리 점프를 거듭하고 있는 모양인데… 훗. 누가 보면 정말 헐크가 출몰한 줄 알 겠… 오! 벌써?
후웅~.
BB형제의 거대 덩치가 별장 바로 뒤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쿠아앙!
육중한 울림과 함께 내 앞의 모래사장에 착지한 BB 형제의 존재감은 뒤이어 착륙을 시작하는 헬기들보다도 커 보일 정도였다.
“여어, 오랜만이야.”
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헐크와 킹콩을 믹스해 놓은 듯한 BB 형제의 우왁스런 이목구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내 시선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다.
“짜식들. 여전히 낯을 가리네?”
…아니, 그래도 ‘여자 공포증(?)’은 좀 치유된 건가……………? 형인 ‘빅 존’이 은사마군을, 동생 ‘베이비 존’은 동료인 백인 소녀를 각각 어깨에 태우고 왔 으니 말야.
“속하, 은사마군! 천주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빅 존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포권하는 은사마군의 표정이 상당히 밝았다. 홍콩에서 CR들과 헤어진 후로도 자주 전화나 인터넷으로 안부를 교환했 다고 하더니, 다시 만나게 되어 꽤나 기쁜 모양이었다.
“아・・・ 안녕하셨어요?”
수줍은 미소와 함께 인사하는… 이 단발머리 백인 소녀의 이름은 아마도……
“소냐…………! 너도 잘 지냈니?”
“예에.”
얌전한 언행도 그렇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소교의 백인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소녀 소냐. 음………? 소교 닮은 소녀 소냐……? 은근히 난이도 있는 이름일세?
이름이야 어쨌든, 소냐의 특이 능력은 용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맞게 ‘은신’이라고 한다. 난 아직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카멜레온 같은 건 비교하 기도 미안할 정도로 완벽하게 주위의 환경에 동화될 수가 있다고 했다.
일단 얘는 ‘스파이 겸 전령’으로 낙점. 그리고…………,
헬기에서 하나 둘 나와서 내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CR들을 보며 저들의 다채로운 특수 능력을 생각하니까, 왠지 처음 마군황이 되어 지하무림 을 수하로 두게 되었을 때처럼 흥미로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천주!”
반갑게 외치며 포권하는 남자는 홍콩에서부터 이들을 인솔해 온 천음마군이었다.
전에 DP의 빅 고렘 ‘론’에게 당했었던 부상의 상처도 마저 치유할 겸해서 CR들 관리를 맡겨 왔으니, 지금은 임시 CR마군이라고 해야 되려나? “전군… 차렷!”
음? 중구난방 개성만발한 분위기의 CR들이 천음마군의 구호에 맞춰서 제법 통일성 있게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천주께 경례!”
흐음.
CR들은 내가 경례를 받아주자마자 분위기가 흐트러지더니, 자기들끼리 돌아보며 쑥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군. 천음마군은 얘들보다도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라서 조금 불안했었는데, 생각보다 궁합이(?) 잘 맞는 모양이 야.
“큼!”
가볍게 헛기침을 했을 뿐인데도 일시에 모든 녀석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된다. 이번엔 훈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절실하게 내 명령을 기다려 왔다는 의미일까…………?
“제군들…………! 나는 그동안 너희들이 얼마나 적과 싸우기를 원해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적은 너희들의 마스터와 너희 자신의 운 명을 쥐고 흔들었던… 프리메이슨! 그래………! 이제 때가 왔다! 이젠 너희들이 놈들의 장난감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들이 바로 놈들의 심장을 꿰뚫 을 검이라는 것을 보여주자! 자아 CR제군들! 출전이다!”
…뭐, 대략 이런 분위기의 연설을 생각해본 적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애들의 호응여부를 떠나서 나부터가 심각한 연설은 체질이 아니지.
“모두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 근데 아직 출발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거든? 그러니까 다들 근처에서 좀 쉬든가 놀든가 그래.”
나의 시큰둥한(?) 말에 약간의 실망하는 기색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그리 큰 감정 변화를 표출하지는 않고 있었다.
“니들 온다고 해서 자룡 아줌… 아, 아니.”
음. 자칫 자룡대주한테 칼 맞을 발언을 할 뻔했군.
“자룡대주가 간식을 좀 준비했다고 하니까, 저리로 가봐.”
내가 별장 쪽을 가리키자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르르 내 앞을 떠나기 시작한다. 남아 있 는 녀석들은 BB형제와 소냐 뿐이었다.
“거기, 소냐. 네가 임시 반장이니까, BB형제하고 애들 좀 봐라.”
“예? 아, 현재 대장은 천음 오빤데요?”
웬 오빠? 음. 뭐, 여하간. 게다가 인사를 받기는커녕 “천음마군과 은사마군은 나하고 작전회의 해야 돼. 그동안 네가 애들 딴 데 빠지지 않게 좀 보라구.”
“예에.”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 소냐 옆으로 천음마군이 다가서고 있었다.
“소냐. 말 안 듣는 녀석은 나중에 나한테 말해.”
동료들과의 의리 때문인지 약간 난처해하는 기색의 소냐와 아랑곳없이 기세등등 큰소리를 치는 천음마군을 보고 있자니, 왠지 초딩 교실 안의 정 겨운(?) 풍경이 떠올랐다.
CR과 합류한 후, 다시 몇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외견상 평범한 소형 여객선으로 보이는 배가 서서히 마이애미의 이름 모를 해변가를 출발했다. 그 배의 후미 난간에 서서, 멀어지기 시작한 해변가 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는 당연히 나 진유준이었다.
주욱- 도열한 채 날 전송하고 있는 수하들에게 미안하게도 내 눈에는 아무래도 한 소녀… 대교만이 뚜렷하게 보이는군. 잠시의 개별 행동일 뿐 인데도 이렇게 벌써 마음이 허허롭기 시작한다는 건… 훗. 나도 참… 저 작은 소녀를 만나기 전에는 대체 어찌 살았었던 건지……………
「…다행히 대교님의 뇌파 및 모든 신체 상태는 평소처럼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대교의 본성・・・ 특히 무림에서 반천복화(反天復花) 조직을 이끌 때의 그녀를 생각하면, 지하무림의 지휘권도 그리 힘겨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 려 문제는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의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었지만, 조금 전 날 보내는 태도를 보니 그 또한 믿음으로 승화시킨 모양이었다.
믿는 진유준에 발등 찍… 으음. 아무 때나 자폭성 멘트부터 떠올리는 이노무 버릇은 좀 고쳐야 하는데………….
「대교님께서는 그동안 더욱 아름다워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거야 당연…….”
어랏?
나는 흠칫 놀라서 방금 말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예고도 없이 나타나 내 어깨 위에 서 있는, 이 작고 깜직한 녀석은…………….
“어? 요몽?”
「예.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주인님.」
“응? 어, 그래. 그래.”
너무나 깍듯한 태도와 음성의 인사 때문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대교님께는 바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어. 그거야 뭐 그리 중요한건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 저는 메인 사용자인 주인님과 부사용자 대교님께 완벽히 충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의는 두 분에 대한 충성심의 기본적인 척도입니다.」
이, 이거… 왠지 엄청난 위화감이…………!
「아, 물론 과거의 제가 주인님께 실망을 안겨드렸던 것은 사실 입니다. 허나, 이제부터는 저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주인님에 대한 저의 충심을 증 명할・・・・・・・」
“야! 몽몽! 너 얠 대체 뭘로(?) 만들어 놓은 거야? 엉?”
「오해입니다, 주인님!」
은발 소년 모드로 나타난 몽몽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와 팔을 동시에 짓고 있었다.
「요몽은 지금 의도적인 왜곡 행동을……………」
「홍!」
음…………..? 요몽 이 녀석 이제 보니… 훗! 그럼 그렇지.
「방금 주인님 말씀 들었지? 주인님께선 나의 본래 모습을 더 좋아하신다구!」
앙알대기 시작한 요동에게서는 조금 전까지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어서, 나는 왠지 안심이 되었다.
「요몽! 너 또 감금당하고 싶은 모양인……………」
「오빠! 애인 생겼다메?」
짧고 뜬금없다 싶은 반격에 몽몽의 기세가 일시에 사그러들고 있었다.
「나 없는 사이에 아주 그냥… 음. 근데 누구야? 응?」
「그, 그게 아니라, 그건 모두의 오해야!」
「오해? 오예~는 아니고? 아, 이건 주인님 전용 썰렁 개근데……………」
아무래도 몽몽의 교육은 모두 헛수고・・・ 아니,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난 것 같다.
어수선한 거야 본래 그랬다지만… 이제는 거기에 뻔뻔함과 앙큼함이 더해진 것 같다고 할까…………? 몽몽 녀석, 자신이 없으면 시작을 말 것이지 공 연히 설 건드려 가지고………………
「…주인님!」
몽몽은 결국 안타까운 음성과 표정으로 구원요청을 해왔다.
“은사마군!”
나는 몽몽을 슬쩍 외면하며 배의 앞 갑판으로 향했다.
“애들 인원파악 다 했지?”
“예, 천주! 전원 이상 없습니다.”
「주, 주인님?」
나의 배신(?)에 좌절하는 몽몽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난 아직 누구의 편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짜식……! 당장 난감한 건 몽몽 너지 난 별로 상관없잖니. 게다가 요몽은 방금 겨우 해방되어서 독이 올라 있는 상태…………!
물론 단순한 녀석이니 곧 기분이 풀릴 테고. 그때 적당히 달래주는 편이 요몽의 미움을 받을 위험이 적지. 물론 몽몽이 길게 시달림 당할수록 녀 석에게 더 생색을 낼 수가 있기도… 음. 난 역시 현명(사악?)해.
나는 느긋하게 갑판 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배가 속력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사방에 펼쳐진 바다의 광활함이 더해지고 있었다.
날씨도 더할 수 없이 화창하고… 로또 당첨되어 팔자 좋게 유람을 시작한 놈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만…………….
“천주.”
은사마군이었다. CR들은 모두 선실 안에 있어서 나와 함께 갑판 위에 있는 사람은 세 명이다. 은사마군과 천음마군, 그리고 데릭 허버트였다. “데릭 씨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돌아보자 데릭 허버트는 애써 웃으며 다가왔다.
“뭐, 문제라도 있소?”
“아닙니다. 아직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 이번 사냥에 참가를 희망한 자들의 입금이 모두 끝났으니 명단의 변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난 아직 액수를 본 적은 없지만, 떡밥 겸 미끼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참가비 수입이 상당히 짭짤한 모양이었다.
“훗. 당신 몫을 주장하고 싶은 건가?”
“당치않습니다.”
음? 사실은 하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어서 좀 떼어주려고 그랬는데 돈 굳었네?
“전 다만… 이번 장소인 ‘와일드 아일랜드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그러니까, 실제로 촬영을 했으면 해서.
“이봐!”
천음마군이 데릭 허버트의 어깨를 잡고 손아귀에 살짝(?) 힘을 주자, 데릭 허버트의 얼굴은 즉시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지?”
.~ 그, 그게 아니요! 순수한・・・ 윽! 순수한 예술적 탐미… 으윽!”
“천음마군!”
천음마군이 내 명령에 따라 손을 풀어주자, 데릭 허버트는 잡혔던 어깨를 감싸며 힘없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키와 덩치는 그가 더 커서 상대적으 로 작은 미소년(?)에게 굴욕을 당한 셈이랄까?
“으~ 실은 전부터 사냥 장면을 찍어 왔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는 거 알아.”
“예? 아……!”
참가자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촬영장비’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나는 일부로 속아 주었었다. 그건 이 남자의 영화 제작자로서의 열정만은 나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맘대로 하쇼.”
“예?”
너무 쉽게 허락을 해주니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찍는 건 말리지 않겠다는 말이니까, 능력껏 찍으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입이 찢어져라 기뻐하는 표정으로 봐서는 자기 말처럼 ‘순수한 마음’인 것 같기는 한데…
“데릭 허버트!”
천음마군은 데릭 허버트를 지긋이 노려보며 뒤춤의 정육점 칼을 빼들었다.
“결국… 천주께 거짓을 아뢰었던 것은 인정한 거군.”
“아, 아니, 그게……….”
“천음마군!”
끼어든 것은 은사마군이었다.
“천주께서는 데릭 허버트 씨에게 ‘촬영’을 허락하셨어요. 그러니 한 쪽 눈과 한 쪽 팔은 남겨 두세요.”
“어, 당연히 그래야지.”
천음마군은 히죽- 인육 만두 식당의 주방장 분위기로 웃었고, 은사마군은 낮은 음성으로 ‘죽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라며 위로(?)해주고 있군. 하여간 은근히 죽이 잘 맞는 콤비라니까?
“자, 잠깐! 이럴 수는 없… 제발! 안 돼!”
애절한 데릭 허버트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내려쳐지려던 천음마군의 칼이 멈춘 것은 당연히 내가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었다.
“아, 거, 누가 보면 우리가 나쁜 놈인 줄 알겠네.”
천음마군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서자 데릭 허버트는 겨우 안도하며 마른침을 삼킨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특수부대원께서 이렇게 나 약해진 걸 보면, 역시 고문계의 떠오르는 샛별 아쳐 왕과 보낸 시간이 꽤나 각별했기 때문인 듯싶었다.
“난 관대하… 아, 암튼. 한 번은 봐주지.”
“가, 감사합니다. 마스터.”
“그런데… 촬영을 해봤자, 공개하는 건 허락 안 할 거야. 그래도 찍을 건가?”
“상관없습니다. 본래 현장을 좋아했던 제가 제작자로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건, 어차피 이 세상에 진실한 아름다움은 남아 있지 않다는 그 런 섣부른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저 예전처럼 제 손으로 영상을 담아내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아직 개과천선했다고 믿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일단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진 것 같기도 하군. 흐음. 그나저나 소교의 위력(?)이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천음마군.”
데릭 허버트가 선실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천음마군에게 물었다.
“천음마군은 소교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
천음마군은 웬 뜬금없는 질문이냐는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이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야, 예쁜 분이죠. 대교님과 동생 분들은 다 그렇지만요.”
・・・소교의 마안(?)이 통하지 않는 사내도 있기는 하군. 물론 소교는 어쩐지 이제 겨우 시작인 것 같지만 말이다.
“훗. 당신은 역시 곰처럼 무디네요.”
은사마군이 어째 가만히 있다 했네.
“무슨 소리야! 곰이란 놈이 얼마나 예민한데!”
“…자신이 곰과 같거나 못하다고 자인하는군요.”
“어? 얘기가 그렇게 되는… 취소! 실언이었어!”
“가서 애들하고 소꿉놀이나 하고 노세요.”
“뭐야? 자꾸 왜 그래? 예쁘면 그냥 예쁜 거지, 또 뭐가 필요해?”
하긴. 천음마군 말도 틀린 건 아니로군. 어쨌거나……………
간만에 만난 거 티내느라 아웅다웅하기 시작한 두 사람으로부터 신경을 끊으며 눈을 감았다. 주변이 어수선하다고 해서 수련에 지장을 받을 수준 은 이미 넘었…..
「주인님!」
젠장……! 몽몽이 구체적인 보고를 하기도 전에 몰려오기 시작하는 이 불쾌감이라니.
「어머?」
예상대로 요몽 녀석이 먼저 기쁜 기색을 드러냈고, 나도 하는 수 없이 다시 눈을 떴다. 이제 까마득히 멀어진 육지 중 좌측 해변가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배 한 대가 빠르게 우리 배를 따라잡고 있었다.
무지 성능 좋은 쾌속정…인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저게 우리 배로 오고 있다는 것과 타고 있는 녀석이 문제로군. 「엄허나! 원판 씨다! 원판 씨!」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 요몽 말대로 원판 놈이었다. 당연한 부록처럼 함께 있는 ‘란’이 능숙하게 쾌속정을 몰고 있었다.
“천주!”
“…괜찮아. 적이 아니야. 일단 지금은 말이지.”
“아………! 저 남자는 DP그룹의 마스터로군요.”
보트가 더 가까워진 후에야 원판을 알아본 은사마군이 약간 경계심을 푸는 것 같았다.
“어? 저자가 바로 DP의 회장이야? 적의 보스 중 한 명이면서도 뻔뻔하게 천주의 본가에 얹혀산다는………….”
음. 그러고 보니 은사마군과 천음마군은 아직 원판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겠구나. 아니, 그건 대부분의 다른 수하들도 마찬가지로군. “빌어먹을 녀석. 왜 또 쫓아오고 난리야?”
나의 중얼거림 때문일까…………? 경계심보다 호기심이 더 강해진 표정의 두 마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뱃전의 사다리를 챙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리 배로 옮겨 탄 원판이 한 손으로 스윽 긴 머리채를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니임은~.”
“야, 야!”
“…훗. 저의 노래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마 유준 형님밖에 없을 겁니다.”
“개뿔이, 니가 무슨 인기 가수라고……….”
솔직히 나보다 잘 부르는 건 알지만… 제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쳇. 난 지금 애써 대교까지 두고 나선 길인데, 그 대신이 하필….! 누구 염장 지를 일 있냐?”
“으음. 저도 대교 양, 아니 형수님 못지않게 형님을…………….”
“죽을래?”
“후후~ 실은 이직 란에게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 일 이 없어서요.”
이 자식, 또 내 약점을………….
란은 정말 평소와 달리 반듯한 정장이 아니라 자유로운 일상복 차림이었고, 원판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둘만의 호젓한 여행을 할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유준 형님 곁이 아니고서는 이 정도도 불가능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젠장.
나는 뭐라 더 삐딱하게 대꾸해주려던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원판이 말하는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고개를 들어 잠깐 하늘을 보았다가, 다시 주변의 망망대해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일견 그저 높고 평화로운 하늘과 바다로 보일 뿐이지만…
「…주인님. 코드 명 원판의 행적을 따라오던 감시 위성의 탐지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인근 해역의 잠수정 또한 철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 다.」
“…그래. 내가 네 녀석을 만날 때의 불쾌감 중 일부는 놈들 때문인 것 같기는 해.”
빌어먹을 녀석… 좋단다.
“하지만, 난 역시 네놈의 그 재수 없는 미소가 그냥 싫어.”
“여전히 무례한분이네요.”
란은 말과 달리 진짜 따질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는 그저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원판.”
“예, 형님.”
“보기 싫으니까, 언능 선실 안으로 꺼져.”
나는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고, 원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원판과… 선실 안의 아이들은 대체 얼마만의 재회인 걸까…………?
“아참……! 저 남자와 녀석들이 아는 사이라고 했지?”
천음마군은 이제야 표면적인 얘기를 기억해냈는지 안색을 굳혔다.
“이런! 저 남자가 위험…………….”
“멈춰요!”
황급히 달려가려는 천음마군의 팔을 은사마군이 잡았다.
“크라우드 씨와 아이들, 누구도 상대방을 배신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은 단지 아!”
은사마군이 문득 ‘보안사항’을 깨닫고 날 돌아보았다.
“괜찮아, 은사마군. 오히려 천음마군도 이제 알아둬야지.”
“…예. 그렇군요.”
은사마군이 천음마군에게 상황을 설명해주는 동안에도 선실 안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전에 레인이 원판과 수년만의 통화를 할 당시에는 함께 듣고만 있던 녀석들까지 ‘우리는 버려졌다’는 생각으로 비통에 잠겼었지. 이번에는 그때 와 반대의 상황이니 금방이라도 환호성 같은 것이 터져나오며 배가 뒤집혀라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 ! ! ! ! ! ! ! ! ! ! ! “
음? 방금, 이제야 선실 안에서 뭐라 기쁘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다가 마는 듯했지…………?
그리고 이어서 우르르-하고 발걸음에 의한 진동 같은 것도 느껴지기는 하는데… 쯧. 원판 이 녀석…………! 아무리 천성이 음흉한 녀석이라고 해도 그 렇지… 이런 재회의 순간에서까지 ‘비밀리에 기뻐하는 거냐?
CR의 아이들에게는 부모와도 같은 남자……! 그 꿈에 그리던 원판이 별안간 현실에서 문을 열고 들어와… 놀란 CR의 아이들이 입을 달싹이다 가. 겨우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오려는 순간…………!
원판이 손가락을 들어 입에 대며 쉬- 소리를 내는 왠지 그런 장면이 떠올랐다.
증거(?)도 없이 떠올린 장면이긴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저어 주인님.」
“됐어, 요몽.”
「에?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는 거예요?」
“굳이 엿듣거나 보고 싶지는 않아. 중요한 일이면 몽몽이 알려 주겠지.”
「와아~ 정말 제 맘을 아시네? 아니. 그보다, 적의 프라이버시까지 지켜주시다니. 주인님은 역시 킹왕짱!」
요몽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며 감탄했지만, 이내 아쉬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다.
「으응~ 하지만 전 정말 궁금한데…………」
“몽몽. 넌 대체 요동에게 어떤 교육을 얼마나 시켰기에 이렇게… 별로 변한 게 없냐?”
몽몽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그런 몽몽을 흘겨보는 요몽의 입술이 댓발은 나온다.
「우~ 매일 매일 단순한 교육용 프로그램의 인성 교육 강의에 또 강의! 나중엔 교육용 프로그램이 꿈에서까지 나타나 ‘착한 아이가 되라’며 쫓아 다녔다구요!」
꿈?
「얘들이 이제 아주 골고루 하는구먼. …으음. 어쨌거나………
으으..정말 지겨워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몽몽 녀석도 참. 끝내 지가 직접 교육을 시키고 ‘교육방송'(?)만 줄창 틀어줬던 모양인데… 그랬다면 오히려 요몽이 더 삐뚤어지지 않은 것을 다 행으로 생각해야겠네.
나라도 교육방송의 영어선생들이 꿈에서까지 나타나서 ‘쥬라기 공원? 오우 노우! 쥘라직 팍! 어게인! 쥘라직 팍! 쥘라직 팍!’ …이러면서 쫓아다닌 다거나 하면 정글도 부림 나지, 암.
“요몽. 이제 그만 화 풀고, 네가 나오지 못했던 동안에 있었던 상황이나 빨리 전달받아.”
「그건 벌써 입력 받았… 아, 맞다. 몽몽 오빠는 중요한 얘길 빼놓았으니까 패티에게 물어 봐야지! 몽몽 오빠의 하트를 차지한 건 대체 누굴까아? 우히?」
「야, 야!」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호릉- 사라지는 요몽을 몽몽이 황급히 뒤쫓았다.
몽몽 녀석, 어째 갈수록 앞날이 걱정되는군.
나는 미래 로봇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근데 사실 몽몽보다 내가 더 안 좋은 상황이긴 해. 대교를 되찾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내가 계속 지켜주기는커녕 내공 더부살이나 하는 신세이니 말야. 뭐, 물론 그래서 이렇게 대교와 헤어지면서까지 나선 거지만………………
일단, 현재 나에게 단전 복구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물론 나도 지하무림의 유일한 군림자라는 타이틀을 딱지치기 같은 걸로 딴 놈이 아니다.
형편없는 양의 내공이라도, 그걸 정글도의 날이나 내 몸의 한 부분에 몰아넣어 꽤 쓸만할 정도로 강화 시키는 요령 정도는 몇 번 해보지도 않고 감 잡았었다.
말하자면, 보검이 나무 막대기로 변하기는 했어도 그 막대기 끝에 쇳덩어리를 장착… 즉. ‘망치’를 무기로 휘두를 수는 있단 얘기지.
왠지 영화 애늙은이(?)가 연상되는 비유였지만 여하간 망치라도 계속 휘두를 수 있으면야 나름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으니………….
단전은 에너지 저장소 겸 증폭장치인데다, 그 이전에 내공을 빠르게 끌어 모으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현재 내 몸의 혈도 상태를 ‘물이 그냥 들 어왔다가 그냥 흘러나가는 고무호스’에 비유해서 생각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다 물을 빨아들일 힘도 거의 없다는 얘기다.
으음. 그간 계속 테스트 겸 수련을 해온 결과, 최대한 빨리 물을 보충해도 그 시간은 1초가량………..!
일반적으로는 길지 않은 시간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싸워야 할 적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 그 1초 동안 내게 수많은 칼질과 기타 등등의 치명타 를 배부르게 퍼 먹여 줄 수 있는 놈들이… 으음 이미 만났던 놈들 중에서도 너무나 많이 생각나는군.
다시 말해, 현재의 난 나무 막대기에 쇠뭉치 하나 끼워서 쓰다가 그 망치 대가리가 빠지면 1초 정도 걸려서 갈아 끼워가며 싸워야 하는 신세인 셈 이다. 내가 싸워야 할 적들은 말단 행동대장급만 되어도 특수 합금 방패에 갑옷을 입은 철갑병 수준인데 말이다.
“하아~.”
새삼 한숨이 나오는 현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한숨에 쓴웃음 한 번을 더하는 정도로 고뇌를 털어냈다.
그동안 하도 막장 상황을 많이 만나다보니 약간 성격 버리기는 했어도, 난 역시 내일의 어려움은 내일이나 모레 글피쯤 천천히 고민하는… 매우 바 람직한 사고방식의 청년이기 때문이다.
뭐 어찌 되겠지.
나는 대교와의 꿈같은 재회 이후로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아 온 운기조식과 단련을 다시 시작했다.
달갑지 않은 원판 녀석까지 합류한 후로부터… 5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천주.”
은사마군의 음성에 눈을 떠보니, 어느 사이 전방의 광활한 바다에 낯설고 거대한 섬이 하나 자리 잡고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목적지, ‘와일드 아일랜드’에 도착했습니다.”
거친 섬이라…………! 인간 사냥꾼 놈들이 그런 이름을 붙일 때는 재밌는 사냥과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섬이란 의미였겠지…? 하지만 오늘은 거기서 ‘재미’가 빠질 거야 이 사냥꾼, 아니 사냥감들아.
“사냥 참가자, 미끼를 문 물고기들은 앞으로 2시간 정도 후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좋아. 준비해”
“복명!”
은사마군과 천음마군의 복명 소리에도 다른 어떤 때보다 의욕이 차 있는 것 같군. 처음으로 CR들과 함께 싸우게 되어서 더 그런 건지도…………. “으음. 저 섬도 이제 큰일이로군요.”
원판이었다. 녀석은 내 뒤로부터 몇 걸음 더 나와서 옆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섬 킬러, 섬 분쇄기 진유준님이 납시었으니, 오늘 저 섬의 운명은 과연……….”
“야, 야!”
젠장. 나의 도덕적 약점을 꼬집다니.
“넌 꼭 이럴 때 분위기 깨야겠냐?”
“후후. 이 정도에 투지를 잃을 분도 아니면서……………”
“아니! 기분 확 잡쳤다. 나, 안 할래!”
나의 생때(?)에 원판의 웃음기도 조금 가시고 있었다.
“…진심입니까?”
“그래 인마. 내가 이런 일에 농담하는 거 봤어?”
“설마………….”
“설마는 개뿔이 설마. 그냥 네가 지휘해.”
원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이번엔 내 쪽에서 피식 웃었다.
“너도 CR들과 간만에 뭉친 건데, 한 번 같이 놀아봐.”
“…그럴까요?”
원판에게서 다시 떠오른 표정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 옛날 비화곡의 권좌에 앉아 있던 자의 붉은 피빛 미소였다.
이거, 이거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 건 아니거나 말거나. 여하간 보고 싶었어.
현 시대로 복귀한 후로 난 계속 원판과 싸워왔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상 원판은 프리메이슨의 얼굴 마담(?)에 불과한 거였어. 결국 난 아직 단 한 번도 원판 이 녀석과 제대로 싸운 적도 없고 싸우는 걸 본 적도 없었단 말씀.
“음. 그렇다면 저들도?”
“어, 그건・・・ 맘대로 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천음마군과 은사마군이 흠칫 놀란다.
“천주?”
천음마군이 특히 안색을 굳히고 있지만, 두 사람도 이번 기회에 원판을 제대로 겪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지금 들었듯, 지휘권 이양했어. 이번 사냥꾼 소탕 작전이 끝날 때까지니까 그리 알도록.”
“…복명.”
떨떠름한 복명 소리를 들으며 원판이 다시 새액- 웃었다.
“자, 그럼…….”
응? 어느 사이 원판에게서 비화곡주 모드가 사라진 듯한…근데도 이 불길한 기분은…….
“자리 좀 비켜주시죠, 유준 형님.”
“뭐?”
“항상 흑막의 주인공이었던 이 진하운의 진면목을 이번에는 당신이…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고 싶으신 거 아니었나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나주긴 주겠는데…기분이 좀 거시기 하네?
“야. 나도 너 하는 꼴 좀 볼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꼭 어둠 속에서 뭘 어쩐다고 표현할 것까지는………….”
“은사마군. 천음마군.”
원판 녀석, 내 말을 씹고 내 수하들을 부른다.
“예, 크라우드 씨.”
“아, 예. 왜요?”
비교적 예의바른 은사마군과 달리 천음마군은 노골적으로 삐딱했다. 그러나 그런 천음마군도 원판이 다시 발산하기 시작한 특유의 음산한 살기에 찔끔 기가 죽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우선…….”
제, 젠장! 저 자식, 초장부터 내 수하들에게 저런 엄청난 잔인한 명령을…………!
원판 놈에게 두 마군의 지휘권까지는 넘기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야, 너!”
“유준 형님. 당신 스스로 한 말을 채 1분도 되지 않아 번복할 셈입니까?”
“…쳇.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조용히 지켜봐주시죠.”
제기랄!
천음마군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으며 선실로 통하는 문으로 향했고 은사마군 역시 단검을 빼들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 와 그들을 말릴 수가 없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갑자기 왜………….”
데릭 허버트의 당혹한 음성이 배 안에서 들려오다가 바로 끊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음마군은 양손에 침대식 비치의자를 하나씩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게 이 배에서는 제일 편한 의자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결국 의자를 내려놓고 펴주자, 원판은 뻔뻔하게 란과 함께 의자를 차지하고 앉는다. 나는 천음마군의 원망이 담긴 시선을 회피하며 속으로 ‘지못미’를 중얼거려야 했다.
잠깐 누워 있다가 뜬금없이 의자를 빼앗겼던 모양인 데릭 허버트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의아해 하고 있었다.
“지시대로・・・ 설탕은 뺐습니다.”
이어서 은사마군이 사무실 여직원마냥 커피와 과일 접시를 들고 오자, 원판은 더욱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고맙지만 커피와 수박은 별로 어울리지 않………….”
“…야!”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정글도를 원판 놈에게 겨누었다.
“그냥 주는대로 쳐 먹어.”
“당신은 다 좋은데 미의식과 교양이 다소 부족해서 탈이야.”
“닥쳐.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 재수 없는 살기는 대체 뭐냐?”
“아, 실례. 뭔가 지시할 때는 습관적으로 그만.”
원판은 예의 ‘피빛 미소’ 를 거두더니 여유롭게 커피잔을 들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또 허튼 짓거리 하면 약속이고 뭐고 가만 안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원판은 한 손을 들어 딱-하고 손가락을 퉁겼고, 그 직후 배 안쪽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마스터의 신호닷!”
“시작안가?”
“시작이야!”
“시작이다!”
CR들은 저마다 비슷한 소리를 외치며 출입문과 창문을 가리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쿠옹- 쿠우웅-.
이 진동음은 커다란 덩치 때문에 화물칸에서 자고 있던 BB형제도 깨어났다는 신호.
“끼이이이이~.”
돌고래의 울음소리 같은 괴음을 내며 대뜸 바다로 뛰어드는 녀석들은 수중형 돌연변이 ‘아쿠아린’ 형제들과 ‘세이렌’ 자매들이다.
타닷 –
얼핏 금동이가 연상될 정도로 작고 재빠른 녀석이 원판 옆으로 나는 듯 달려왔다. 몸집뿐 아니라 무성한 전신의 털, 원판이 내밀어주는 수박 조각 을 받아먹는 저 행동 패턴까지도 정말 원숭이 같은 이놈, 아니 소녀의 이름은 ‘실키’.
조 녀석이 소냐와 함께 척후병 겸 연락병 역할 전문인데………….
계속 일일이 이름과 특징을 열거하기는 힘들 정도로 각양각색 다채로운 용모와 능력의 CR들이 갑판 여기저기며 제일 높은 전망대까지 차지한 채 원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판은 아예 느긋한 자세로 길게 누워 한 쪽 손에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누가 가장 빠르지?”
“저욧~!”
뜬금없다 싶은 소리에 모든 CR들이 일제히 손을 들고 입을 모아 대답하고 있었다.
“누가 가장 힘이 세지?”
“저욧~!”
“누가 가장 착한아이지?”
“저욧~!”
원판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증명해 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