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39화 : 이기적인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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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39화 : 이기적인 이방인들


9 이기적인 이방인들

말하다보니 뭔가 그럴 듯하게 지껄인 듯도 하지만… 으으음. 막상 천음마군이 개판 치면 나까지 망신인데…………

솔직히 그런 불안감이 가슴속에서 살포시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물론, 굳이 참견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 보자~.

천음마군 팀이 현재 위치한 장소는 도심을 서쪽으로 살짝 벗어난 외곽지역이라고 했다. 몽몽이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는 화면을 간단하게 정리 묘 사하자면 도시가 끝나는 지점부터 대략 10여 킬로미터 정도가 거의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이고, 그 이상부터 험한 바위산이 울타리처 럼 좌우로 길게 가로막고 있었다. 또한 바위산 너머로는 울창한 숲과 기타 등등 자연 그대로의 환경이 펼쳐져 있는데 그 속까진 현재의 나로서도 자 세히 볼 수가 없었다.

으음… 소위 ‘미치광이 게릴라 집단’이 숨어살고 있다는 지역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도시를 벗어난 평야지대에 시 내 못지않게 많은 카메라가 설치되어 구석구석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비정상………! 게다가 저 황량한 바위산의 절반 정도 구역에까지(도시 쪽을 향한 방향) 이렇게 적지 않은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 독재정권의 세금 낭비 덕분에 엄한 내가편하게 쌈 구경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랄 까?

내가 조금 편한 관람 자세를 취하기 위해 고쳐 앉았을 때,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윈드!”

천음마군 목소리…………? 감시 카메라에는 마이크까지 장착되어 있는 모양이군.

“기어이 천주께 고자질한 거냐? 뭐라고 하시지?”

“고, 고자질이라니요! 천음마군 형님이 보고를 안 하시니까 저라도 한 겁니다.”

윈드가 불만스럽게 대꾸하자 천음마군이 쿡, 웃었다. 그는 2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모래 둔턱 중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다른CR 들도 그의 양 쪽에 늘어앉아 반대편 적(?)의 시야를 피하고 있었다.

“고자질이든 아니든, 천주께서 니 말을 안 들어주신 모양이지?”

이럴 때는 눈치가 빠르군.

“흐흐~ 당연한 거야. 그분은 가끔 얌전한 척을 하시지만, 결국 이런 걸 좋아하시거든.”

글쎄. 아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천음마군과 동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은 기분이………….

“어쨌든, 윈드. 천주께서 널 이상하게 신경 쓰시는 눈치여서 나도 지금껏 참아주었다만… 이제 더 이상은 안돼.”

호오. 천음마군의 인내에 그런 깊은 뜻이(?)…? 이건 조금 감동스러우려고 하네?

천음마군은 스윽상의 재킷을 벗어서 옆에 내려놓고 뒷춤의 독문병기 견신을 꺼내 들며 입가를 씰룩~ 기괴하게 웃었다.

“이 몸이 모처럼… 좋게 말로 설득하려 했더니… 감히 먼저 총질을 해? 흐~ 전부 죽여주겠어!”

천음마군의 표정은 어느 사이 며칠 굶다가 고깃덩어리를 앞에 문 야수로 변해 있었다.

“자, 잠깐만요! 우리 편을 전멸시키겠다고요? 게다가 그동안 좋게 말로 한건 저였고요. 저쪽에서 총을 쏜 것도 장군님이 아니라 부부대장이 멋대로………….”

쾅!

천음마군은 일단 먼저 주먹으로 윈드의 말을 막고 그 다음에 외쳤다.

“종알종알 정말 말 많네!”

윈드는 머리를 감싸 쥐고 울상을 지었지만 더 이상 따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누가 진짜 다 죽인대?”

댁이야. 댁이 그랬어. 나도 들었어!

“그냥 혼내 준다는 뜻이라구! 아, 물론 몇 놈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겠지만 말야.”

천음마군은 결국 벌떡 일어나더니 둔덕 위로 올라섰고, CR들도 일제히 따라 일어나서 우르르-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금 쳐들어가려는 방 향에는 수십 대의 전차들과 호위 보병부대까지 버티고 있어서 일견 무모한자살 행위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나, 이들에게는 ‘신난다’ 라는 분위기만이 여실했다.

으음. 천음마군의 왼쪽으로 붙어서는 동양계 외모의 소년 두 명…! 쌍둥이는 아니지만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갸름한 얼굴 형태가 상당히 닮은 데 다 긴 생머리의 헤어스타일까지 똑같아서 누가 봐도 형제라는 걸 알 수 있겠군. 저 녀석들 별명이 ‘불꽃슛 형제’였지, 아마?

불꽃슛 형제에게 그런 통키스러운 별명이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생이 불꽃을 일으키는 발화 능력자이긴 한데, 그걸 사용하는 건 잘 못 한 다고 했다. 그 대신, 형은 불꽃 컨트롤 능력이 뛰어나서, 동생이 불꽃공(?)을 만들어 패스하면 그걸 슛- 해서 공격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에레보스의 불꽃 인간 ‘크레이지 파이어(Crazy fire) 자니’에 비해서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쟤들의 불꽃도 꽤 대단하다고.. 응? 천음마군 의 오른쪽으로 붙어서는… 저 백발의 흑인 중늙은이는(?)…………….

“천음 대장님. 아무리 화가 나도 혼자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저희들도 있지 않습니까.”

목소리도 다른 CR들과 달리 점잖고 중후한 느낌까지 들지만, 천음마군은 약간 난처한 쓴웃음을 지었다.

“너・・・너나 무리하지 마.”

“허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대장님. 제가 보기엔 이래도 소냐 누나보다도 어린 청춘입니다.”

“으음. 알고는 있지만…………….”

나도 이거 참.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저렇게 ‘에고 허리야~ 비가 오려나~’ 분위기를 보면 어린 동생으로 대하기가 좀… 으음 하여간, 저 연세 들 어 보이는 흑인 소년께선 그러니까. 아. 생각났다.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냉동 능력’! 그래. 에레보스의 ‘겨울의 여왕’과 같은 계열이라고 했어. 이제 천음마군의 측근(?)들 능력까지는 확실하게 생각났으나, 모든 애들의 이름과 능력까지 쉽게 기억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I

쯧. 일백마군+보천구룡대들도 그렇고… 수하들이 늘어날수록 겪어야 하는 머리 나쁜 보스의 비애(?)라고 할까…………?

“좋아! 거기! 너희들!”

천음마군이 견신을 앞으로 내밀어 전차부대를 가리키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군인이란 놈들이! 총구를 어디로 겨누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병신들아! 나, 천음마군이 네놈들의 얼빠진 머리를 뜯어고쳐주마!”

‘뜯어고쳐준다’는 말을 ‘뜯어먹겠다’ 쯤의 분위기로 선언하자, 전차부대 중의 한 대에서 조종석 출구가 덜컥 열렸다. 지휘전차로 보이는 곳에서 모 습을 드러낸 사람은 회색 수염이 덥수룩하고 주름이 깊은 노병이긴 했으나, 세월도 어쩌지 못한 강인함이 느껴져는 장군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천 음마군처럼 목청이 좋지는 못한지 마이크를 들고 답변을(?) 한다.

“죽고 싶으면 와라! 괴물 노예놈들!”

‘괴물’ 운운하는 걸 보니, 이미 CR들의 능력을 봤다는 건데… 그래도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로군.

“간다! 이 갑갑한 영감아!”

“와라! 이 괘씸한 노예놈!”

어째 비슷한 타입끼리 만난 것 같은 느낌이……………

천음마군이 먼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CR들도 일제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전차부대까지의 거리는 잘해야 100여 미터 정도여서 녀석들이라면 단숨에 주파해서 공격을 가할 수 있을 테지만, 어쩐지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분명 원판이 벌여준 판에 뛰어들 때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아닌데… 어찌 보면 더 부담 없이 희희덕거리며 즐기는 듯한 분위기랄까…………? 그에 비 해 전차부대 쪽은 겉으로 드러난 화력의 절대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침체된 분위기야. 심지어 천음마군에게 지지 않고 맞고함을 쳤던 노장 군도 막상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하려니까 뭔가… 몹시 껄쩍지근하다는 기색을 보이고 있네?

“장군님! ‘케빈’ 장군님! 어서 발포명령을!”

다른 전차에서 모습을 드러낸, 길쭉한 말상 얼굴의 장교가 재촉했으나 노장군 케빈은 왠지 망설이며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으으음. 대체 저런 노예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 우리 판타지아의 시민이라는 소년의 말처럼…정말이 나라에 그런 엄청난 사태 가…? 설마 그럴 리가………….”

뭐야? 윈드에게 듣기 전까지는 좀비 사태를 아예 알지도 못하고 있었던 건가? 몽몽 남매가 일찌감치 통신망을 장악했다고는 해도 그런 연락이 오 가는 걸 막지는 않았을 텐데……

“장군님! 또 왜 이러십니까? 설마저 게릴라가 보낸 애새끼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넘어간 건 아니시겠죠?”

말상 장교가 이죽거리자, 노장군의 눈에 번득 서치라이트가 켜지는 것만 같았다.

“닥쳐! 너 이놈, 브라이트! 또 항명을 하고 싶은 거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의 사격 명령은 그저 부대의 안전을 위해서……….”

“부대의 안전? 비무장의 노예가 말로 욕을 좀 한 것이 부대의 안전을 위협했다는 거냐? 게다가 아직 어린 소년도 있는 곳으로 사격을 가해? 브라 이트 소령!또 네놈 멋대로 그따위 짓을 하면 네가 내 손에 먼저 죽게 될 거다!”

케빈 장군의 호통에 말상 장교 브라이트는 찔끔 기가 죽으면서도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노장군 케빈은 흥분한 상 태에서 천음마군 팀이 오고 있는 방향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쉽게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무거운 목소리를 홀렸다. “으~ 대체 왜 갑자기 모든 통신이 두절되어서… 이렇게 갑갑한 일이………….”

…쯧. 이 섬 군대의 대가리들도 참…………! 좀비 사태와 진유준 사태(?)가 겹쳐서 일어나는 바람에 다급한 처지였었다는 건 알지만 말이지, 아무리 그 래도 아군에게 기본 상황 전달도 안 해줬다는 건… 으음. 역시 고의…………! 즉, 이 전차 부대와 장군도 ‘버려진’거로군.

먼 곳의 엄한 인물이 자신에게 쯧쯧 혀를 차고 있는 것을 알 리가 없는 노장군, 케빈. 그는 결국 마음을 굳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설사 눈앞의 안개가 심해처럼 깊고 알 수 없다하더라도… 나는 군인…! 판타지아의 국민들이 내게 준 임무는… 잠들지 않는 늑대처럼 이 전선을 지키는 것!”

흐음. 확실히 그게 모범 군바리의 자세이기는 한데…………….

“공격 준비!”

장군이 ‘전선을 지키는 것’이란 말을 할 때쯤에 벌써 분위기가 반전된 병사들이 빠르게 명령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전차 내부의 움직임까지 알 수 는 없었으나, 보병들의 결연한 분위기만 봐도 평소부터 상당히 잘 조련된 부대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섬의 역사로 보아실전 경험을 쌓을 일이 거의 없었을 텐데, 그런 자들치곤 기세가 꽤… 으음. 하지만 이쪽은…….

“흐~ 저 영감! 이제 겨우 할 마음이 든 모양이군. 하지만………….”

살기등등한 기세에 비해 의의로 천천히 진격 중이던 천음마군이 불꽃 슛 형제를 돌아보았다.

“‘초이, ‘무이’. 먼저 한방 먹여줘라. 느려터진 영감의 엉덩이에 불을 붙여주는 거야!”

“오~케이!”

동생 무이의 크게 벌린 양 팔 사이로 화륵- 불꽃이 점화된다 싶더니, 순식간에 웬만한 애드벌룬 크기의 불꽃 공이 되고 있었다. 무이가 불꽃 공을 스윽-허공에 띄우자, 그 뒤로 초이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따라붙었다.

파앙-!

전성기의 차범근 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하여간 멋진 중거리 슛(?)이 쏜살같이 전차 부대를 향해 날았다.

퍼억- 쿠아아아아~

정확히 전차 부대 진형의 중앙지점에 꽂힌 불꽃이 진짜 공이 터지듯 사방으로 불길을 쏟아냈다. 불꽃을 흩뿌리는 형태의 광범위 공격이라 전차를 어쩔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보병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인 셈이었다.

“으아아아!”

몸에 불이 붙은 보병들이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팔로 감싸고 정신없이 달아나거나 전차 주변의 모래 위를 굴렀다. 잠시 그럴 듯해 보이던 자들 치 곤 허무하게 무너진 꼴이었다. 게다가 그런 보병들 때문에 전차들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된 셈이었다.

또한 열기와 연기 때문에 시야가 나빠져서 사격도 어려운 상황…………! 초반부터 천음마군 팀의 손쉬운 낙승 분위기…………? 아니, 적어도 한대의 전 차만은 동의할 수 없는 모양이군.

케빈 장군의 전차 포신은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도 정확하게 천음마군을 향해 조준되고 있었다.

“대장! 피하…”

비가 오려나 소년이 입을 열었으나 천음마군은 일찌감치 고개를 저었다.

“인사는 주고받아야 제 맛이지!”

천음마군! 저 인간, 하여간!

꽈앙!

강렬한 포격음이 터져나온 직후, 천음마군의 몸을 무시무시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어 천음마군의 뒤쪽 수십 미터 지점의 땅이 화 산처럼 폭발했다. 포연과 모래가루가 휘날리는 가운데, 천음마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으음~ 나도 요 몇 년간 꽤 거칠게 살아왔다지만, 저렇게 쓸데없이(?) 용감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천음마군은 몸을 스치듯 지나간 포탄의 충격파에 의해 옷과 피부까지 조금 찢겨나간 상태였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스윽- 몸을 앞으로 기울여 달리기 선수의 스타트자세를 취했다.

꽈앙! 꽝! 꽝!

다른 전차들도 정신을 차리고 포격을 시작했을 때, 천음마군도 그들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굉음과 함께 작렬하는 포격들이 아직은 그와 거 리가 있었지만, 다시 장탄을 마친 케빈 장군 전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주인님! 지휘 전차의 정확한 조준으로 보아, 천음마군의 움직임을 간파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몽몽이 걱정할 정도로 정확하게 겨냥된 포신………! 그러나 이번에는 곧바로 발사되지 못했다.

천음마군이 별안간 넘어지듯 급격히 움직임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뭐야, 천음마군! 지금 진짜 본의 아니게 자빠진 거잖아? 쿠콰콰아아-

진동? 지진……? 아, 아니야.

요란한 진동음과 함께 폭발하듯 모래 더미가 솟구쳤다. 그리고 그건 그대로 모래의 파도가 되어 전차 부대 전체의 시야를 막으며 덮쳐버리고 있었 다.

진동파……! 천음마군의 뒤에서 달려가던 저긴 머리 동양계 소녀가 일으킨 건가?

땅에 한손을 대고 뭔가 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건 그녀뿐이었으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들은 강력한 에너지의 방사 때문인지 활짝 핀 꽃처럼 사방 으로 뻗어 있었다.

“으~ 가야! 너어~.”

폼잡고 달려 가다가 졸지에 얼굴을 처박고 뽀대를 구긴 천음마군이 고함을 지르자, ‘가야’라고 불린 소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며 약간 가라앉 기 시작했다.

“아, 미안! 대장은 피하고 싶었는데 그만………….”

소녀는 입술을 조그맣게 모으며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가 일으킨 진동파를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자빠졌던 아군은 천음마군뿐만이 아니었다.

“가야! 너 또 같은 편까지!”

“가야! 대장만 지키면 다냐!”

“가야누나! 나, 멀미나!”

본의 아니게 모래를 퍼먹은(?) 녀석들이 저마다 불평을 쏟아내자 소녀의 머리카락이 포옥-완전히 내려앉고 말았다.

“다들 가야를 원망할 시간이 있으면………….”

혼자 쓰러지지 않은 건 물론이고, 여전히 느긋한 표정의 ‘비가 오려나 소년’ 이 손을 들어 가리킨 방향에는 케빈 장군의 전차가 있었다. 가야의 진 동파로 일어났던 모래 파도의 시야 방해 효과도 어느 사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꽈릉!

천둥 같은 포격이 천음마군과 CR들에게 직격…………! 방심했던 천음마군 팀은 간신히 피하는데 급급했을 뿐이지만, 어쨌든 아직은 다들 무사한 것처 럼 보였다. 그러나……………

꽈릉! 꽈릉! 꽈릉! 꽈릉! 꽈릉!

지휘관의 선재 사격을 기준으로 일제히 포문을 연 전차 부대의 포격이 얼마간 미친 듯이 이어졌다.

.젠장. 진짜 천둥이 한 장소에 몰아서 떨어지는 것 같은………….

얼마가 지났을까. 무시무시한 집중 포격이 멈추자 천음마군과 CR 애들이 있었던 지점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달 표면처럼 모래 분화구만 즐비해 있 었다. 엄청난 폭발과 굉음의 소나기가 갑자기 그쳐서 그런지 그 뒤에 찾아온 적막이 더욱 황량하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전…멸? 당연히 적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 애들이 어디 그렇게 되어 줄 애들일까?

“끄, 끝났나? 그괴물들도 저런 포격에는 별 수 없………….”

보병들의 지휘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어색하게 지어지던 웃음이 멈춘 것은 자신의 바로 뒤에서 낮선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음… 찾은 것 같군.”

비가 오려나 소년, 줄여서 비오소(?)였다. 이 연세 많이 드신 노인 외모의 소년이 어느 틈에 전차 부대 진영의 한복판에 등장한 것이다.

“우, 움직이지 마!”

“손들어!”

당장 몇 명이 소리치며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비오소는 보병들의 경고에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일단은 손을 들어준다.

“가야. 거기, 좀 더 왼쪽으로… 그래. 그쯤에서 해도 될 거야.”

비오소의 말 때문에, 보병들은 그제야 다른 소녀 한 명도 자신들 부근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오케이!”

가야가 땅바닥에 손을 대자 보병들의 총구 몇 개가 그녀에게도 겨와 누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쿠우우웅~!

짧고 국지적인 지진이 발생하며 보병들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에 바빴다.

“또 무슨 짓을……”

보병 지휘관이 주저앉은 자세에서도 애써 가야를 겨냥하자 가야는 재빨리 두 손을 들어 항복 포즈를 취한다.

“아, 저기… 이번엔 별거 아니었는데………….”

실제로 이번에는 아까의 모래 파도가 일어났을 때에 비해 짧고 대단치 않은 진동이었다. 그러나 보병 지휘관의 방아쇠가 당겨지지 못한 건 그런 사 실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막상 눈앞에서 보게 된 가야를 무서운 적이라고 인식하기에는 그녀가 너무나 작고 어리며 가냘픈 소녀인 것이다. “크윽! 대체이 녀석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입술을 깨무는 보병 지휘관에게 가야는 살짝 혀를 내밀어 보였다.

“헤에~ 착한 아저씨네. 역시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그러니까… 도망쳐요, 아저씨.”

보병 지휘관은 자신도 모르게 가야가 턱짓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에 들어서가 시작한 광경은 아직도 자욱한 포연 속 을 뚫고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는 천음마군과 그 일당들(?) 이었다.

포격을 깔끔하게 회피한 건 비오소와 가야. 그리고 또 한 명 정도 뿐인 듯, 다른 녀석들은 천음마군과 함께 겨우겨우 치명상을 피한 몰골이었다. 그 러나 그만큼 더 살기등등한 모습이기도 했다.

“뭐, 뭐하는 거야!”

말상 얼굴 장교 브라이트였다.

“다들 뭐 하는 거난 말야! 발포! 빨리 다시 발포하란 말야!”

그가 무선을 쓰지 않고 전차 밖으로 몸을 드러낼 채 고함을 지른다는 건…음. 혹시 저 녀석이……………

몽몽은 전차 부대의 뒤쪽 사각 지대에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는 비만 체형의 백인 소년을 비춰주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코드 명 ‘디도어’. 자기소개서에는 강력한 전자파를 발산하여 광범위 전자장비 교란이 특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랬었군.

“다시 적이 온다! 발포! 발포하란 말야!”

“하, 하지만 브라이트 소령님! 전자장비들이 갑자기 이상해졌습니다!”

브라이트의 전차 조정사부터 의욕을 잃은 모양이니 다른 전차들은 오죽할까 싶구먼.

“적이 코앞이다! 그냥 쏴!”

“이제 탄도 거의 없… 아니 그보다! 좀 전의 집중 포격에도 적들은 아무도 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이익!”

브라이트는 일그러진 얼굴로 보병 지휘관 쪽을 돌아보았다.

“넌 또 왜 멍청하게 있는 거냐! 너희들이라도 먼저 쏴! 근거리다! 포격보다 너희들의 공격이 더 유효하단 말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보병 지휘관은 맥없이 비오소와 가야를 돌아볼 뿐이었다. 이 기묘한 소년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모아 말 했다.

“그냥 도망쳐요. 우리 대장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도망치면 돼요.”

보병 지휘관이 다시 돌아본 천음마군과 일당들의 선혈이 남자한 모습과 살기는 확실히 지옥의 광분 깡패들로 보일 법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보병 지휘관이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브라이트가 먼저 권총을 뽑아들었다.

“허튼 생각을 하는 놈은 내 손으로 즉결 심판을….”

“에이. 그럼 안 되죠.”

나름 용맹한 브라이트를 기겁하게 만든 건 어느 틈에 유령처럼 그의 뒤로 이동해 있는 비오소였다.

“흑?!”

브라이트의 권총을 든 손, 아니 팔 전체가 절반쯤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브라이트는 불편한 팔을 다른 팔로 누르며 허둥지둥 전차 안으로 숨어 들어갔고, 곧이어 콰릉~ 콰릉~ 전차의 엔진 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약간 재수 없긴 해도 군인으로서는 비교적 바람직한 태도라고 봐야겠군. 하지만……….

브라이트의 전차가 먼저 적을 향해 전진하자 다른 전차 몇 대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또 한 대의 전차는 오히려 뒤로 후진을 하 고 있었다.

케빈 장군의 전차………! 과연… 브라이트가용감하고 케빈 장군은 비겁한 걸까?

브라이트의 전차가 달려가는 천음마군 측의 허공에 무야가 만든 여러 개의 불꽃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그 뒤에는 전문슈터(?) 초이가 있었다.

“초이~ 하이퍼 엘레강스 슈웃!”

초이 녀석이 멋대로 이름을 지어 붙이며 걷어차는 불꽃 공들이 브라이트의 전차를 지나쳐 본대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 속에 있던 비오소가 먼저 달아나며 외쳤다.

“어떻게 된 거야? 녀석들이 선수를 쳤잖아!”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진동은 분명히 네가 말한 지점에 닿았어!”

가야도 따라서 달아나며 항변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CR들끼리 편 갈라 전쟁놀이를 하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펑! 펑! 퍼엉~!

연이어 날아드는 불꽃 공에 의해 전차 부대의 진영은 다시 불바다가 되고 보병들은 저마다 탈출하는데 급급한 처지였다. 그리고 그들 중 부상이 심 한 자들을 부축하여 돕고 있는 건 오히려 적군(?)인 비오소 일행이었다.

우르르르르~

문득 들려오는 진동음에 가야가 기뻐하며 불길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들었지? 난 실수하지 않았어!”

“그래, 가야. 그리고 나 역시 실수하지 않았단 얘기지.”

푸악! 푸악! 푸악!

불바다 곳곳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구치기 시작하네∙∙∙∙∙∙? 저 녀석들, 이제 보니………

“난 아쿠아린 형들처럼 물을 자유롭게 조정하진 못하지만, 쉽게 수맥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친분이 있기는 하지.”

비오소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자, 가야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쳐들었다.

“흥. 그래 봤자, 내가 아니었으면 수맥을 터트리지 못했을 거 아냐.”

“후후~ 맞아. 항상 가야 네가 최고지.”

“으~ 그렇게 폼 잡고 여유부리는 거, 마스터나 ‘레인’ 오빠가 하면 멋진데, 넌 좀 느끼해.”

“그, 그런가?”

직격탄을 맞은 비오소가 민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훗. 다른 애들과 달리 외모와 언행에서도 보스급 분위기를 풍기던 녀석인데… 결국 암팡진 여자 동기(?)에게는 꼼짝 못하는군.

“어쨌든… 이제 우린 전의를 상실한 사람들을 마저 쉬게 해주어야겠지?”

“음~ 시시해. 나도 좀 더 대장과 함께 싸우고 싶었는데………….”

나누는 대화로 보아, 녀석들은 ‘정리 담당’으로 선출된 모양이었다. 전차 부대는 불길에 맛이 갔다가, 이젠 물에 흠뻑 젖은 모래땅에서 버벅대고 있 으니 간단히 저 녀석들에게 정리될 신세인 것 같았다.

비오소가 물에 젖은 전차를 얼려버리고, 보기보다 호전적인 가야의 진동파도 전차 안의 탑승자들을 쉽게 잠재울수 있을 테니… 응? 아차차!

과릉! 꽝! 투타타타~

산발적인 포격음과 기관총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CR들의 생각보다 조직적인 구조 활동(?)이 기특해서 쌈 구경을 깜박하 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녹화로 다시 볼 수도 있겠지만, 쌈 구경은 역시 에구! 그새 벌써……………

본대에서 빠져 나왔던 전차는 총 다섯 대. 그 중 네 대는 완전히 작동 불능 상태인 것 같았다. CR들의 특수능력 퍼레이드에 덩치 값 못하고 아작이 난 전차들이 여기저기 퍼져 있는 가운데, 아직 멀쩡해 보이는 브라이트의 전차만이 천음마군과 ‘일대일'(?)로 대치 중이었다.

아니, 아니 이건 이미 대치중이라기보다… 으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천음마군의 좀 더 피폐해진(?) 몰골로 보아 계속 맨몸으로 전차의 공격을 정면에서 아슬아슬하게 피해왔던 모양이었다. 이제 거의 사라져버린 상 의와 피로 얼룩진 몸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천음마군은 여전히 팔팔해 보였다.

기가 죽은 건 오히려 저 전차………! 집채만한 금속 괴물이…자기 위에 올라타고 앉은 인간 하나가 칼로 캉! 캉! 머리를(?) 두드리고 있는데도 쫄아 서 대꾸도 못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랄까?

“뭐야아~ 쏠거 다 떨어지고 더 할 거 없으면 빨리 기어나와아!”

“우우~ 기어나와라아~ 나와라아~.”

천음마군이 소리치면 주위의 CR들이 입을 모아 동조하면서 죽이 척척 맞고 있었다.

“늦게 나올수록 손해다! 1초에 한 대 추가다!”

“1초에 한 대에~!”

“1초에 한 대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해치가 열리고, 브라이트가 상체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권총을 확인한 천음마군의 입이 좌우로 길어지며 행복한미 소가 떠올랐다.

하긴, 아무리 전차 포격을 맨몸으로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해도 천음마군은 아직 적을 직접 치는 손맛(?)을 보지 못한 상태이니, 그나마 위안거 리가 될… 에?

“나, 난… 화이트 판타지아 제8방위군 소속 와이드 브라이트 소령이다!”

이런, 이런・・・ 자기소개도 좋지만, 기껏 들고 나온 총을 그냥 버리다니……….

“난 최선을 다해 명예로운 전투를 수행했으며, 이제 귀관에게 항복을 선언한다. 귀관과 부대의 괴이한, 아, 아니, 놀라운⋯전투력에 경의를 표하 며・・・ 장교로서 최소한의 예의와 국제 협약에 의한 포로의 인권 보호를 요망…….”

브라이트 소령의 현실을 모르는 대사가 멈춘 것은 그제야 천음마군의 실망+허탈x분노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항보옥? 남자가? 응? 항복? 남자가? 응?”

“이, 이봐. 포로의 인권은…….”

“인권? 어린아이에게 총질을 하던 놈이 인궈언?”

퍼억!

결국 원 편치 쓰리 강냉이.

“으어~ 구, 구제 협야…………….”

“국제 협약? 난 내 협약만 따른다. 1초에 한대!”

천음마군이 열심히 퍽! 퍽! 협약을 지키고 있을때,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예상대로 그사이에 본대의 전차들은 비오소와 가야에 의 해 무력화되어 있었고,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보병들도 더 이상 아무도 저항할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한대의 전차, 아니 한명에게는 전투의지가 살아있어. 천음마군은 비록 치밀한 계산으로 싸우는 인물은 아니지만 감각만큼은 누구 보다 뛰어나지. 당연히..저 언덕 위의 전차가 계속 자신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흠. 일부로 무시하고 있는 건 가?

천음마군 팀이 브라이트가 이끄는 전차들과 싸우고 있을 때, 언제든지 치명적인 지원 사격을 가해 올 수 있었던 전차…………! 그 전차의 해치가 열리 더니 천천히 케빈 장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먼 거리 임에도 해치가 열리자… 문득, 천음마군의 협약 이행(?)이 멈추는군.

천음마군은 한 손으로 멱살을 잡아 들고 있던 브라이트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케빈 장군 쪽을 돌아보았다.

“이봐아~ 영감! 어때? 이제 영감도 항복을 해야지?”

“천만의 말씀! 이 알버트 케빈의 사전에 항복이란 단어는 없다!”

“쳇! 나같이 무식한 놈도 아는 말을 표절하기는………….”

“뭐라고 했나?”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보다 그럼 이제 다시 ‘설득’이란 걸 해보기로 할까? 내가 받은 명령은 본래 그거였거든!”

케빈 장군이 어이없어 하거나 말거나, 천음마군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어이~ 윈드! 용케 잘 따라왔구나!”

천음마군이 돌아본 야트막한 모래 둔턱 위에는 창백한 안색의 윈드가 상체를 숙인 채 하아 하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녀석의 뒤에는 일일보모 (?) 비비안이 서 있었지만, 녀석은 비비안의 품에 안겨서 보호받는 걸 거부했던 모양이다.

“하핫~! 제법인데? 도중에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말야!”

“…이, 이 정도쯤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힘드네요. 겨우겨우… 당신의 싸움을 직접 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렇 게………….”

“녀석. 초보가 그 정도면 충분히 제법인 거야. 향주련(香酒聯)의 내 심복들도 내가 싸울 땐 곧잘 뒤쳐지곤 하지”

“…어쨌든, 이제 다시 제 차례… 인가요?”

“그래. 이 시건방진 꼬마야.”

윈드는 피곤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윈드의 뒤에 있다가 녀석에게 확성기를 건네주려던 비비안이 어색하게 팔을 내렸 고, 나도 갑자기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싶었다. 그런데 곧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건 케빈 장군 쪽이었다.

“케빈 장군님? 아니, 인터넷 아이디… ‘잠들지 않는 늑대’님.”

“맙소사……! 설마 ・・・ 너였던 거냐, 소년.”

“예, 장군님. 예전에 인터넷으로 알게 되어… 두 번 정도 장군님께 전화를 드린 적도 있었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 A’가 바로 저였습니 다.”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몇 년 전, 놀라운 군사지식을 바탕으로 나와 토론을 벌였던 청년이 설마 이제 겨우… 이럴 수 가…………! 그럼 그때의 넌………….”

케빈 장군은 새삼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윈드는 태연하게 웃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장군님. 올해 졸업을 했지요. 그리고………….”

윈드가 문득 말끝을 흐렸다. 케빈 장군이 무서운 초딩과의 재회에 충격을 먹은 것만큼, 비슷한 충격을 먹게 된 건 윈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주 위에서 통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CR들이 이런 소리 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 레인 형과 동갑인가봐.”

“보기보다 굉장히 형이었어.”

“…늙었네.”

“에이~ 실망이야.”

으으음. 윈드도 윈드지만 나도 기분은 좀… 윈드가 늙. 그럼 난 대체·

“어, 어쨌든 장군님!”

윈드는 새삼 짧게 몇 번 호흡을 가다듬는 것 같더니, 다시 차분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제가 아까 알려 드렸던 일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이 섬… 우리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소년, 윈드…라고 했던가? 더 이상 자네의 말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 같군. 무엇보다, 그 괴물 같은 자들…………….”

노장군은 몇 번 되지 않을 패전을 상기하는지 쓴웃음부터 떠올렸다.

“이미 그들이 너무나 확실하게 증명해버렸지 않은가. 자신들은 속임수 같은걸 쓸 필요 없이 강하다’ 라는 것을 말이야.”

“…예. 저로서는 판타지아의 수호신, 케빈 장군님의 부대가 패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슬펐지만…….”

“윈드. 그런 개인의 허명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들이 우리에게, 우리나라에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그걸 정확히 알아야 해. 자네가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말일세.”

흐음. 천음마군 계열치곤(?) 요점을 잘 짚어내시는군.

“윈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 A’로서의 자네는 그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지?”

윈드는 장군의 질문에 잠시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저들… 오늘 장군님의 부대를 패퇴시킨 초인들을 만난 건 이제 겨우 반나절 정도 전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을 포함해서 많은 초인들을 지배 하고 있는 그… 진유준이란 이름의 남자를 만났던 것도 불과 하루 전이었습니다.”

“초인들의 지배자… 진,유,준…………? 아, 그런데 그렇게 짧은 시간이었다고?”

“예. 이렇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죠. 그래서 제 판단을 저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까지나 자신들 위주의 ‘이기적인 이방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에? 저 녀석 보게? 다들 뺑이 치며 도와주고 있는데 뭐가 어째?

“진유준……! 천주, 혹은 마군황이라 불리는 그 남자부터 오늘 장군님을 공격한 초인부대의 지휘관인 저 남자까지 모두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 여 멋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저… 그리고 이 섬의 주인인・・・ 우리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점점~? 그게 물론,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거 꽤 섭하네 그려?

“……”

윈드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소위 ‘애늙은이 표정’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다정합니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다정한 사람들은 정말 곤란합니다. 자기 멋대로 저 에게 어린아이답게 굴라고 하며, 자기들 멋대로 저를 잘못된 아이인 것처럼…………

…흣.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나와 천음마군에게 구박받고 삐친 건가?

“정말 제가 잘못된 건가요, 장군님? 진짜 이기적으로 자기 생각만 하는 바보는 저인 건가요? 저야말로 모든 이들을 걱정하고 또 걱정했는데… 어 째서, 어째서 제가 잘못된 거라고……………”

“……윈드. 난 너와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만…”

케빈 장군의 얼굴에서 어느 사이 쓴웃음이 사라지고 좀 더 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사실⋯네가 그리 귀엽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 핫! 그건, 네. 알아요. 그렇죠.”

“윈드. 본래 어른들 중에는 이기적인 사람이 많다. 흔히들 철없는 어린아이가 그렇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른들이야말로 아주 기술적으로 이기 적인 이들이 대부분이지. 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답기를 바라는… 적어도 그런 이기주의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어린아이 가 애써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는 잘못된 현실을 막고 싶은 너무나 다정한 마음이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이런, 이런・・・ 저 양반, 완전히 천음마군 계열은 아니었던 건가?

“아무래도…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자들인 것 같구나.”

“…예. 저를 바꾸고 싶어 하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적어도 어떤 대가를 노리고 우리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윈드. 그 인상 고약하고 입이 험한 노예놈에게 내가 투항하겠다고 전해다오.”

“예, 장군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흐으으으음. 저 노장군의 명성과 신뢰도는 군인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높다니까, 일단 큰 거 하나는 해결된 거라고 봐야겠군. 헌데 이제 저 윈드 녀석이 문제네. 아무래도 내 뜻을 기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난 녀석의 현재 성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만, 그걸 특정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좀 놀아라’는 건데 말이야.

사실 윈드의 항변도 아주틀린 건 아니어서, 난 지금 ‘아이는 이래야 한다’는 ‘어른의 이기주의’를 발휘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기주의를 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왜 자신을 혼냈고, 또 왜 하필 천음마군에게 맡긴 건지… 영특한 녀석답게 그런 것도 빨리 알아차릴 줄 알았더니… 으음~ 아니, 아니지. 내 뜻 을 이해하는 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어쨌거나 저. 녀석도 나름 살아온 인생이 있는데, 지켜보던 남이 몇 마디 했다고 해서 대뜸 ‘오오~ 감동! 난 이 제부터 형님의 뜻에 따라, 애들답게 놀며 살겠어요!”라고 나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겠지?

문득, 씨익-웃음이 지어졌다.

뭐. 기왕에 노골적으로 이기적이란 소리도 들었겠다, 앞으로는 더 이기적인 편의주의 노선으로 나가볼 거나? 난 아무래도 바쁜 몸인 관계로… 홋. 그래, 윈드. 넌 이제 아예 천음마군과 동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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