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41화 : 좋아하는 짓.
1. 좋아하는 짓.
“흐으으으음~!”
난 나도 모르게 낮고 긴 한숨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몽몽을 통해서 계속 지켜 본 천음마군 팀의 상황은 꽤 긍정적으로… 그러니까, 거의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일단락 된 셈이었다. 하지만……
“몽몽~!”
[예, 주인님!]
시가전의 악마(惡魔)…………!
윈드는 케빈 장군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현재 저 케빈 장군의 분노는 분명 심상치가 않다.
“시뮬레이션 한 번 돌려봐. 케빈 장군이 본래 스타일대로 하면 상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빡이 돌대로 돌아버린 케빈 장군이 만약 시내의 ‘선량한(?) 좀비’들까지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며 진군할 거라는 분석이 나오면.. 물론 천음마군과 윈드에게 잘 설득하도록 지시를… …음? 가, 가만…? 나 지금 뭔가 좀… 왠지 오버하는 듯한 기분이………
“잠깐, 몽몽. 대기!”
문득 들기 시작한 이 기분은…
이건 아무래도…
“…그래. 취소다, 몽몽.”
맞아. 난 역시 오버해서 참견하려고 들었던 거야.
“카메라도 끄고・・・・・・”
몽몽이 제공하는 화면 속에서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규합하고 있는 케빈 장군의 모습이 팟 꺼졌다. 그와 함께 그 쪽을 향한 내 신경도 꺼두기로 했다.
“아, 천음마군에겐 ‘임무 종료. 케빈 장군과는 별도로 은사마군과 합류하여 대기.’라는 메시지를 보내 줘.”
[예, 주인님!]
군말 없이 명령을 수행하는 몽몽과 달리 요몽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응~? 갑자기 왜 그러세요? 기껏 큰 도움이 될 부대를 포섭해 놓고 왜 따로……….]
“바로 그거야, 요몽.”
[예?]
“지금 네 말과 같은 식의 생각을 나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잘 못된 거였어.”
나는 꽤 오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 섬의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고… 자꾸 감정이입이 되는 바람에 결국 전부 내 위주로 생각을 하게 되었었는데 말야, 사실 이 섬의 문제는 결 국 이 섬의 주인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잖아? 그러니까. 만약의 경우, 케빈 장군이 자신의 동족까지 희생시키는 작전을 펼친다거나 해도… 그건 이 섬, 이 나라의 문제인 거야. 타국에서 멋대로 들어온 내가 대신 처리해 줘야 할 일도, 그래 줘서도 안 될 일인 거라구.”
물론… 이렇게 나름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케빈 장군에게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보였기 때문이지만……………
[호옹~ 이제 보니… ‘난 결코 영웅 같은 게 아니야’라는 발뺌 의식이 발동되신 모양이네요.]
“뭐? 뭔 의식?”
[하여간 주인님도 참. 결국 몰래 몰래 착한 짓을 하고 다닐 거면서 쿨한 척 하시기는…………….]
“몽・・・ 음?”
[에? 읍?]
몽몽의 급속 출동 및 입막음과 포박으로 이어지는 요몽 체포 작전은 그야말로 눈부실 정도였다.
흐음. 이번엔 좀 그러네? 요몽의 말투는 분명 거시기 했지만 그렇다고 뭐라 혼내기는 애매한 발언이었어. 그래서 나도 체포 명령을 내리려다 말 았는데… 으으음. 몽몽 녀석, 이젠 분위기 봐서 웬만하면 지가 더 적극적으로 체포 작전을 실행해 버리는군. 왠지 체포(혹은 포박?)에 재미들린 것 같기도 하고……..
“…뭐, 그거야 어쨌든.”
나는 천천히 목과 상체, 손목 등을 움직여 두둑 두두둑 소리를 내며 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가 다시 출동(?)해서 할 일들은 요몽 말처럼 ‘착한 짓’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짓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약 15분쯤 후, 주석궁 VIP 전용 식당 앞의 계단.
“그러니까…”
나는 계단에 앉아서 약간 느슨해졌던 전투화 끈을 바싹 고쳐 매며 말을 이었다.
“방금 말한 대로, 댁들은 여기서 연구실 시설 복구를 도와줘. 다 끝나도 개인 행동하지 말고 여기서 대기하고 말야.”
내 부탁 겸 명령은 미스 카이와 데릭 허버트, 리철민과 리순희 커플에게 한 것이었고, 내 앞에 옹기종기 서 있던 남녀들은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전부 귀순(?)한지 얼마 안된 이들이기는 해도… 딱히 배신 행위를 할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지…………?
“좋아. 이제 CR들은 나와 함께 ‘MB(Motion Booster)좀비 청소 및 비 감염 환자 확보’ 작전을…….”
“잠깐만요.”
응?
미스 카이였다. 개인행동을 금지하는 건 받아들였어도, 뭔가 다른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쁘신 건 알겠지만… 그래도 저와의 약속은 잊지 않으셨기를 바래요.”
“dir…thr?”
“그래요. 아래층의 마물(魔物)들은 언제 없애 주실 거죠?”
응? 아, 이런 이런・・・ 그 마계의 괴물들을 정말 잊고 있었네. 미스 카이의 수하들이면서 말도 잘 안 듣고, 주인이 어여쁜 처자라고 스토커 짓까지 한 다는 양아치 마물들…………!
살짝 잊고 있던 건 미안했고, 그 양아치 마물들은 분명 인간계에서 사라져야 할 녀석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솔직히 이 미스 카이, 흰 꽃 사슴을 가장한 여우 아가씨 위주로 일정을 짜고 싶지는 않기도 했다.
“음… 물론 내가 그 놈들을 없애 준다고 약속을 하긴 했지만, 뭐 좀 천천히 처리해도 되지 않겠소? 이젠 그 놈들도 함부로 말썽을 부리지는 못할 테니 말요.”
나보다는, 나의 새깽이 늑대 ‘라프’ 때문에라도 말이다.
“아이 참. 그렇지 않아요.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는 꼭 해결해 주셔야 해요.”
훗. 놈들이 지겨운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니거든?
“어… 나도 가급적 빨리 처리해 주고는 싶지만… 솔직히 마계 괴물들 떼거지는 나도 부담이 좀 되고…….”
‘좀’이 아니라 무지하게 부담된다. 괴물이 몇 마리야, 그게?
“근데, 뭐, 꼭, 오늘 안에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요? 걔들을 지난 3년 동안이나 데리고 다녔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내가 계속 피식거리며 확답을 하지 않자 미스 카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빨리 처리해 달라는 건・・・ 저 자신보다 진유준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뭐?
“실은… 오늘밤에 어떤 남자가 저의 생명을 노리고 습격해 올 예정이거든요? 아주~ 굉장히 무서운 남자라서 천하의 진유준씨라도 승부를 장담하 기 어려울 거예요.”
으잉? 뭐시라고라고라?
“그러니까, 그 전에 먼저 마물들을 처리해 놔야 진유준씨의 부담이 줄어 들 거……….”
“자, 잠깐, 잠깐!”
젠장. 이 아가씨 진짜……
“갑자기 뭔 소리요? 대체 어떤 놈이. 아니, 그 전에! 내가 왜 댁을 계속 챙겨 줘야 하는데?”
“그야. 지금 얘길 들으셨잖아요. 제가 위험하다고.”
…빌어먹을…! 어디서 어떤 강적과 원한을 맺었는지 몰라도 타이밍 좋게 오늘 습격해 오도록 유인해 놨었구나. 쌈 좀 하고 오지랍 넓은 남자 진유준을 방패로 확보해 놓고… 말이지? “후후.”
미스 카이는 아름답고 가려린 얼굴에 원판 못지 않은 사악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진유준씬, 연약한 여자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다는데 모른 척 할 남자가 아니잖아요?” “그⋯을세 올시다? 딴 여자라면 몰라도 당신은 좀………….”
내가 당연히 거부감을 드러내자, 미스 카이는 재빨리 장난기를 지우며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면 불쾌해 하실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어차피 당신을 속여서 싸움을 유도할 자신은 없었어요. 그래서 정공 법을 쓰는 거라구요. 음.. 어쨌든 분명한 건 저, 정말 오늘 밤 위험해요!”
미스 카이는 새삼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인다.
“…쳇. 알겠수다. 일단, 거… 뭐, 기억은 해 두지. 하지만 이번엔 약속을 한 건 아니니까. 바쁘면 잊을 수도 있고… 하여간 너무 기대는 마슈!”
애써 퉁명스럽게 말해 보았으나 미스 카이는 마치 철썩 같은 약속을 받아 내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며 ‘땡쓰~’를 연발하고 있었다. 급기야 ‘기쁨 을 함께 하자’는 듯 소냐에게 달려갔고, 소냐는 흠칫 긴장하면서도 미스 카이의 친한 척 끌어안고 부벼대기(?)를 거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기럴~ 역시 저 아가씬 원판처럼 내가 가급적 멀리하고 살아야 할 인종이었어. 나 같은 타입에겐 그야말로 쥐약인 건 인 건데…! 가만있자…? ‘진유준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할… 이라고? 내 투지를 자극하기 위해서 과장을 한 걸까…? 그럼 다행이지만… 굳이 나에게 부탁했다는 건, 자기 수 하 괴물들을 동원해서는 해치울 수 없는 자라는 거잖아? 그럼 그 자도 마계의… 아니, 아니…! 분명 ‘무서운 남자’라고 표현했지? 그럼 나처럼 인 간이면서 마계의 괴물 떼거지들을 능가하는 초특급고수? 뭐냐, 이건 또!
내가 인상을 긁으며 돌아보니 미스 카이도 기다렸다는 듯 날 마주본다. 그러나 나는 얼른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제기…! 무지막지 살벌하게 궁금해서 돌아가실 지경이지마안! 이미 ‘무심한 척’해 놓고 새삼 물어 볼 수는 없잖아?
“음~ 역시 어떤 적인지 궁금하시겠죠?”
쳇. 역시 눈치깠군.
“아, 아니, 뭐, 별로 궁금하지는 않소.”
나는 애써 무심 모드의 표정을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얘들아 가자!”
나는 CR애들과 함께 출발하며 나름 냉정한 톤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꼭 그자와 싸워 줄 의무도 없는 거고………….”
“일단, 현재 이 섬에는 없어요.”
음?
“오늘 밤 이 섬에 도착할 예정이지만… 아마 그 어떤 첨단 장비를 동원한다해도 그의 습격을 미리 감지할 수는 없을 거예요.”
뭐야? 그럼 저 바다를 맨몸으로 헤엄쳐 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사실, 당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긴 해요.”
흐음~ 역시? 그렇다면… 으~ 아냐. 그래도 범위가 너무 넓어. 내가 아는 놈들 중에 그런 놈이 어디 한 둘인가? 사실 미스 카이는 몇 년 전부터 날 알고 있었던 데다, ‘투시능력자’야. 내가 만난 자는 전부 이 여자도 봤을 가능성이 있단 말이지. 아니,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그러니까, 내 행 적을 구경(?)하다가 만난 자와 어찌어찌 원한관계가 되었는지도…………..
“당신의 적・・・ 프리메이슨 쪽 인물이 아닌 건 확실해요.”
오호. 범위가 왕창 좁혀지는군. 으음.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직은 범위가… 으~ 난 그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비상식적 괴인들과 만나온 거야? “또, 제가 아는 한… 그와 당신은 아직 싸운 일이 없어요.”
오호라~ 범위가 좀더 좁혀진다. 맞짱 떴었던 ‘조담놈’은 확실히 아니란 거지? 그리고 수라문(修羅門)의 ‘덕방’ 놈도・・・ 음? 근데… 그 녀석과의 다툼 을 제대로 싸웠다고 할 수 있으려나? 글고… 세계정화재단의 ‘마신일’…! 그 남자와도 제대로 싸웠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모르겠네? 난 그가 소환 한 라후의 혈족 삼형제와 싸운 거지 그와 직접 싸웠던 건 아닌데. 쯧. 아닌 게 아니지. 소환술사는 뭔가 소환하는 거 자체가 싸움 방식일 테니까 말 야. …아. 그러고 보니 미스 카이의 주술은 한국 남자에게 배웠다고 했어. 설마… 그 남자가 바로 마신일..? 아니면 한국에서 덕방을 체포해 주었 던… 주술계의 터미네이터라는 흉터 사나이! 음. 그 남자 이름이 아마 옥, 옥・・・ 아! 그래, 옥환(玉環)! 옥환…! 그 남자와 싸워 보진 못했지만, 마주 보고 있을 때의 느낌만으로도 진짜 장난이 아닌 괴물이란 건 알 수 있었어. …제기. 아직도 용의자(?)가 너무 많아!
“엄청나게 단련된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흉기인 육체.”
응? 그럼 정말 옥환? 아니, 아냐. 그가 유독 육체적인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대부분의 초인들이 육체 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아. 이건 힌트가 될 수 없다구!
“그 육체를 넘어선 영혼의 경이로운 강인함은 이미 인간이 아닌 경지.”
아, 거참. 용의자(?)들 다 그렇다니까? 다들 독해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우니까, 좀 딴 힌트를 달라구!
“물론, 저도 그렇게 무서운 남자의 표적이 되고 싶진 않았어요.”
에이~ 힌트 주다 말고 왜 삼천포로 빠지는 거야?
“만약 시간이 촉박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을 수도………….”
어? 이건 또 새로운 패턴의 힌트인가? 시간이 촉박해서 원한관계가 되었다고? 대체 어떤 상황이었기에… 아, 아니 잠깐! 이건 힌트가 아니라 수수 께끼가 늘어난 거잖아?
“당신이 적에 대해 좀 더 알고 대비하는 편이 좋을지, 아니면 그냥 백지상태인 편이 나을지… 저도 조금 판단이 어렵긴 해요.”
이런 제기! 대체 뭔 소리야? 이 아가씨가 진짜…………
“훗! 어때요?”
응?
“굳이 원하신다면 좀 더 알려 드릴 수도 있는데……….”
미스 카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비스듬히 날 올려다보았다.
…으잉?
내가 화들짝 놀란 건, 이제야 미스 카이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뭐, 뭐요?”
“저를 죽이려는 남자! 오늘 밤 당신이 싸워야 할 강적…! 그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 줄 수 있다고요.”
“어, 그, 그야, 음? 어, 아니.. 왜?”
에구야. 나 왜 이리 버벅대니?
“어… 허, 허헛~!”
겨우 웃긴 했지만… 아이 어색해라.
“크흠. 흠! 거,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소. 난, 그… 당신 일에 별로 관심 없다고 했을 텐데?”
“후후후~ 가던 길을 멈추고 선 것은 물론이고,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 기울이며 일일이 노골적인 표정으로 반응하던 분이… 훗. 별로 설득력 없는 발뺌을 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다니..
“어, 거, 뭔~ 소린지. 난 그냥・・・ 잠시 혼자 딴 생각을 했을 뿐인데… 무슨… 그게, 난, 다른 작전을 좀 더 치밀하게 점검을…………….”
에이쒸!
“큼! 얘들아, 가자!”
나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걸음을 떼었다. 나 때문에 뜬금없이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다시 별다른 기색 없이 담담 하게 따라나서 주고 있는 CR들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젠장!
주석궁을 떠난 후에도 나는 얼마간 씁쓸 떨떠름한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빅 존은 어깨 위에 날 앉힌 상태에서도 여전히 놀라운 도약력으로 건물들 위를 날고 있었다.
으음… 그런데 왜일까…………?
껄쩍지근한 기분이 의외로 빠르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게… 미스 카이는 분명 원판처럼 교묘뻔뻔한 민폐족인 것 같기는 해. 게다가 좀 전엔 관객들(?) 앞에서 체면을 구긴 꼴이기도 했는데 말이지. 그럼에도 결국 원판 녀석을 대할 때의 짜증스러움까지는 아니랄까…? 상대가 여자라고 무조건 관대해지는 건지… 아니면 미스 카이의 첫인상이 워 낙 좋았었기 때문인지.. 혹은… 쯧. 모르겠다. 그녀와 관련된 일들은 하여간 이따가 다시 따지기로 하고…………
“스토옵! 멈춰, 빅존.”
쿠우웅~!
나의 임시 자가용(?) 빅 존이 특유의 묵직한 착지음과 함께 내려선 곳은 6, 7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의 옥상이었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국회’ 건물로 가야 했겠지만, 난 지금 그 곳에 도착하기 전에 멈춘 것이다.
“소냐.”
“예, 천주.”
“내가 좀 아까. 이번 작전에 대해서 뭐라고 했지?”
“음・・・ MB좀비 청소 및 비 감염 환자 확보 작전…이라고 하셨어요.”
한 글자도 안 틀리고 재생(?)하는군. 하여간 왜 이리 이쁜 것들이 영특하기까지 한지 몰라. 요즘은 이런 애들을 엄친딸이라고 한다지?
“뭐, 그래. 본래는 우릴 포함한 전 병력이 공격에 나설 계획이었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어. 반역자 토벌은 이 나라 군대에게 맡기기로 했으니까, 우 린 시민 구출에 치중하자는 거지. 그리고… 이런 일은 각자 흩어져서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겠지?”
나는 아쿠아린 형제와 세이렌 자매를 각각 한 조로 하고, 나와 빅 존, 소냐와 베이비 존으로 두 개 조를 더 구성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며 각 조 의 담당 수색 지역을 지정해 주었다.
흐음~ BB형제 녀석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형제가 멀리 헤어져서 행동한 적이 없다고 하더니만, 각각 다른 조라고 하니까 꽤 당황해 하는군. 그래 도 결국 얌전히 내 명령에 따르는 걸 보면… 이래저래 ‘폐쇄성’이 꽤 고쳐진 것 같지………….?
“좋아. 시작하자.”
“예, 천주.”
“넵, 대장.”
“네에 이따 봐요.”
CR 녀석들은 지하무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편안한(?) 인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몽몽. 현재 케빈 장군 쪽 상황은 어때?”
[・・・ 케빈 장군의 전차부대는 도시 외곽을 따라 북동쪽으로 빠르게 이동 중입니다.]
응?
[시내를 관통하여 국회로 향할 수 있는 코스의 입구는 모두 지나쳤으며, 계속 외곽을 따라 이동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케빈 장군 그 양반, 무대포로 쳐들어가지 않는 건 다행이긴 한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추정 목적지는?”
몽몽은 즉시 도시 외곽의 시설물 중 한 군데를 찍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어? 도시 바깥에 웬 거대한 인공 호수 같은 분위기의 구조물이… 아, ‘운하’…! 섬을 가로지르는 ‘대운하’의 한 쪽 끝이로구나!
[이 섬의 운하는 80% 이상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므로 해당 구역의 물은 모두 컨트롤 가능합니다.]
오호라~ 물을 싹 빼면 전차 부대 진격로로 쓸 수 있겠구만!
“아… 윈드. 윈드 녀석은?”
[코드명 윈드는 천음마군의 허락 하에 케빈 장군과 동행중입니다.]
아깐 윈드에 대한 명령을 깜박했었는데, 천음마군이 알아서 잘 놓아준 모양이네…? 좋아, 좋아. 윈드 녀석의 해킹 실력이라면 몽몽 남매 도움 없이 도 운하의 시스템 장악이 가능할 거야. 그야말로 섬의 주민들만의 힘으로 진행되는 작전인 거지.
“은사마군과 천음마군 쪽은?”
[은사마군팀은 여전히 국회 건물을 암중에 포위 중입니다. 천음마군팀은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케빈 장군의 부대를 떠난 이후 곧바로 은사마군팀 을 향해 이동 중이며, 약 15분 23초 후에 두 팀이 조우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합류하는 대로 팀을 재편성하라고 메시지 보내. 국회 쪽에는 어떤 상황에서건 백신 제조에 필요한 연구원들을 확보할 수 있는 인원을 엄선해서 남기고, 나머지는 우리와 같은 작전을 수행하라고 말야.”
[알겠습니다, 주인님.]
“음… 대략적인 작전 방향 정리는 된 것 같고… 이제 난 조촐하고 겸손하게(?) 자잘한 구출 작전이나 시작해 볼거나?”
뭐, 사실 착한 짓을 하며 영웅놀이 하는 것에 큰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몽몽. 기왕이면 MB좀비들을 먼저 찾아줘.”
[…최적 조합의 상황을 발견했습니다. 방향은………….]
최적 조합? 음. 간단히 말해서 MB좀비도 있고 구출해야 할 시민도 있다는 얘긴가 보군.
“가자, 빅 존!”
빅 존은 즉각 몸을 숙여서 편안한 어깨 탑승 서비스를 제공했다.
으음. 이 녀석이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린 녀석 타고 다니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 내공을 되찾기 전까지, 그 리고 지금처럼 대교와 함께 있지 않을 때 이용할 비상용 탈것을 마련하긴 해야 하는데……
나는 빅 존에 탑승하여 사건 현장으로 점프해 가며 생각했다.
나의 경공 못지않은 이동성을 생각하면 당연히 지난번 괴수 섬에 있는 녀석들이지만… 도시에서 원시 괴수를 타고 다니다간 적보다 경찰과 군대 에 쫓기게 될 가능성이 더 클 테니 으으음. 그래도 세이버(saber-tooth tiger. 왕이빨 대형 고양이 괴수?)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단 말야…?
원판 추적할 때 잠깐 타 본 거였지만 그 고양이과 특유의 야들야들 폭신샤방한 탑승감은 정말 죽였는데… 응? [주인님!]
몽몽이 다급하게 전방의 건물 내부를 투시해서 보여 주었다.
학교? 학원? 하여간 교실 안의 어린아이들이 위험해!
“빅 존! 창문! 그대로 돌진!”
빠창!
창문을 부수며 교실 안으로 뛰어 들었다. 유리 파편에 대비해 눈과 얼굴을 가린 팔을 내리자 실내의 상황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열두어 명의 소녀들과 선생님으로 보이는 여인네 한 명! 저들이 없는 힘을 짜내 교실 입구를 막아놓고 이제껏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군. 의자며 책상 더미로 이루어진 바리게이트를… 방금 저 좀비 한 마리가 헤집고 들어왔던 모양인데…………
“크륵~?”
흉악한 몰골의 좀비가 좀비답지 않게 의아한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상당한 무게의 바리게이트를 혼자 뚫은 것도 그렇고, 갑자기 창문을 깨고 등장한 나와 빅 존에 놀라서 저렇게 행동을 멈추고 있는 것도 녀석의 신분(?)을 확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역시 MB좀비! 어째서 인간성 더러운 것들은 좀비가 되어서도 저렇게 따따블로 추악하고 민폐 끼치기에 매진하는 건지 원.
“크르~ 크아악!”
“뭐?”
“크르……?”
“뭐, 어쩌라고! 엉?”
내가 살기등등 다가서기 시작하자, 잠깐 포악기미를 보이던 MB좀비 놈이 오히려 찔끔 기가 죽어 주춤 물러선다.
‘개겨볼까, 튈까….라고, MB좀비답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조금 기다려 주고도 싶었지만, 그건 한가할 때 얘기. MB좀비가 지금 어디 한두 마린가?
스걱~!
산뜻한(?) 절단음과 함께 MB좀비의 머리와 몸통 전체가 양단되어 좌우로 쓰러졌다. 이쯤에서 교실 안에 울려 퍼졌음직한 소녀들의 비명 소리가 전혀 터져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전혀…는 아닌데, 다들 억눌러 참고 있군. 이거 참… 기특한 걸?
아무래도 소녀들 모두 좀비들이 ‘소리’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지식을 실제의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생님?”
내가 교실 내의 유일한 성숙 여인네를 보며 묻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다들 주저앉아 있는 가운데 그녀만이 가장 먼저 일어서고 있었다.
“마・・・ 말을 하는 노예?”
에…? 아참! 여기선 내가 그런 존재였지?
“아아~ 세상에! 노예가 우릴 구해 주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쯧, 기껏 구출해 주고도 수상한 인물로 경계 받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선생은 물론이고 다른 소녀들까지 하나 둘 우리에게 몰려들더니 몇 명은 날 안고 쓰다듬고 난리가 아니었다. 외견상 살벌 거대한 빅 존보다 나에 게 집중적으로 몰려드는 건 그렇다 치고…………
으으음~ 난 분명 요몽 말처럼 영웅놀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치만 그래도 이건 좀…………
“저기………….”
“아아~ 얘야 고마워! 이렇게 대단한 노예가 다 있다니!”
저기, 누님(?) ・・・ 턱밑을 쓰다듬는 건 특히 기분 나쁜데… 윽!
한 소녀가 유독 적극적으로 목을 감싸 안는다 싶더니 크게 외쳤다.
“선생님! 얜 옛날 우리 집 ‘쫑’을 닮았어욧! 쫑이 얼마나 영리했다고요!”
으으윽!
“아냐! 우리 ‘메리’하고 똑같아! 같은 종인가 봐!”
쯔읍. 이거 괜히 구해준 거 아닌가 싶다!
“음・・・ 누가 널 훈련시켰니? 응? 어디 노예야?”
선생님이 그나마 다소 침착한 어조로 묻고 있었다.
“어, 그게 난…..”
“혹시 군대에서? 군용노예니? 요즘은 군용노예가 없다고 들었지만……….”
“그러니깐, 난 사실 노예가 아니……….”
내가 말을 잇지 못한 건 한 소녀가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노예는 어느 정도까지 말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아놔 진짜! 그걸 알고 싶었으면 끼어들지를 말았어야지~!
“그, 글쎄? 이 아인 그래도 꽤 할 수 있는 것 같긴 한데……………?”
젠장.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이다. 기본적인 상황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애완동물(?)입장에서 과연 어떻게 말을 해야 설득력이 있을까…………? [주인님!]
“에이 쒸바, 몰라!”
나는 결국 신경질 적인 말을 내뱉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던지 말든지! 그냥 막 설명해주 고 갈 생각이었다. 다른 곳에도 구출해야 할 사람들이 많을 테니 말이다.
“…친애하는~”
응?
“화이트 판타지아의 국민~! 여러분~!”
건물 스피커에서 나오기 시작한 소리이며 상당히 낯익은 음성이었다.
“저는 국경 방위 사령부의 케빈! 케빈 중장입니다!”
케빈 장군? 케빈 장군 목소리가 갑자기 여기서 왜…………
[주인님. 이 건물의 스피커는 제가 중계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케빈 장군은 한 대의 전차만을 시내로 진입시켜서 다중 방송 을 시작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 이것 봐라.? 이 할배 장군님도 꽤 꼼꼼・・・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다각도로 상황을 챙기시는 걸?
국민들에게 큰 신뢰를 받고 있다는 케빈 장군의 방송답게, 당장 이 교실 안의 선생님과 소녀들까지 방송을 경청하고 있었다. 내용을 정리하자
1. X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돼서 국민들께 죄송!
2. 이유야 여하간, 내가 해결하겠음! 알지? 난 킹왕짱!
3. 일단 각자 능력껏 계속 짱 박혀 있으삼!
4. 좀비가 돼도 치료 가능! 안심!
5. MB좀비만 조심! 그 쉑들은 가차 없이 박멸!
이쯤 될 것이다. 듣고 있던 이들 모두 납득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난 조용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아~ 과연 판타지아의 수호신! 비밀리에 저런 특수 군용노예들까지 키우셨구나!”
선생님의 외침 때문에 다시 모두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몰려들었고, 나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다들 계속 꿋꿋하게 잘 살아. 이 특공 노예는 이만 가마.”
임무를 마치고 훌쩍- 창문을 통해 사라지는… 최소한의 뽀대나는 영웅 모드로 마무리 하긴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피식피식 싱거운 웃음 만 나올 뿐이었다.
잠시 후.
꽈앙~!
이번엔 아예 벽을 뚫고 등장! 그러나 물론 그 후의 과정은 전과 비슷했다.
써걱! 쓱!
MB좀비 처리하는 소리는 갈수록 짧아진다.
“노예야 고마워! 이거 먹을래? 아껴 둔 쏘시지!”
“됐네, 이 사람아.”
쿠웅!
꾸칵!이번엔 빅 존이 처리하는 소리.)
“세상에! 노예가………….”
“됐거든?”
갈수록 반응하기도 귀찮아져서 네 번째의 ‘위기일발 시민들’을 구한 다음에는 거의 쫓기듯 자리를 피해 버렸다.
[・・・주인님께서 맡은 구역의 기본적인 응급상황은 끝났습니다.]
…에? 벌써? …쳇. 딱히 기분 나쁠 일은 아니겠지만 왠지 좋은 짓은 했어도 좋아하는 짓을 했다는 기분은 별로.
[그러나…….]
음?
[담당 구역 외의 광범위 특이 사항 진행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특별 감시 대상 그룹의 비 일상 반사 행동 및 이동이 확인되었으며 최종 목적지 분석 결과는…….]
바로 여기, 나에게 오고 있군. 특별 감시 대상 그룹… 즉, MB좀비들이 단체 행동을 시작한 것도 모자라, 날 목표로 개떼 러시를 하기 시작한 거야. ・음뿌하핫~! 이제야 진짜 내가 좋아하는 짓을 하게 됐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