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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59화 : 180CM 높은 풍경


9. 극악서생 4부 – 59화 : 180CM 높은 풍경

CR5……!

CR아이들의 완전체 각성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에 붙여진 이름은 그러했다. 난 그곳에 가기위해서 나선 것이고,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엘리베 이터 앞에 섰다.

「대교님께 가시게요?」

-어, 우선 그래야겠지?

「후후 지금은 곤란해요. 대교님께서는 아직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명령에 따라, 아주 많이 반성하신다’고 누구도 처소에 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 리셨거든요.」

-에? 야아. 대교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언제 그런 걸 명령으로…………….

「헤헤~ 그야 물론 제가 약간 편집했지만, 그래두 아무도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하신 건 맞아요.」

으음. 반성 시간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서 틈틈이 ‘식신의 낙원’을 즐기는 걸 수도 있겠군.

난 아까 식신마군에게 대교는 우리 처소에서 ‘따로 한상 차려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대교와의 동행은 일단 접기로 했다.

흠. 그럼 어쩐다…? 물론 꼭 대교와 함께 가야하는 건 아니지만, 대교 없이 혼자 어디를 가려니까 웬지 허전⋯ 훗. 나도 참, 어느 사이에 그녀와 함 께 다니는 것에 이렇게 익숙해졌었나?

난 싱겁게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몇 가지를 망설였다.

「주인님. 파티장소 말고 어디 딴 데 가시게요?」

-어, 아직 얘기 안했나? 파티 준비하는데 대빵이 어슬렁거려봐야 방해만 될 거 아냐. 난 그래서 CR애들이나 좀 보러…………

「아, 그럼 일단 지하 3층에서 내리세요. 거기가려면 이 엘리베이터로는 안 되거든요.」

흠. 그러고 보니까 지금 탄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에서 7층까지의 버튼밖에 없네? 모든 층을 가는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나보군.

「아참. 근데요, 한 시간쯤 전에 CR팀 입실이 끝나서 지금 가셔도 얼굴 보긴 힘들걸요?」

윽. 이런, 이런… 내가 너무 즉흥적으로 일정을 결정했나?

엘리베이터는 이미 지하 3층에 도착해 있어서 나는 일단 내리면서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이대로 적당히 구중천 관광(?)을 해도 나쁠 건 없겠지만, 그래도 목적지조차 없이 혼자 걷는 건 아니지 싶었다.

・요몽. 혹시 내가 전에 만들라고 했던 영상, 다 완성했냐?

「아, CR들 다큐영상이요? 그거… 몽몽 오빠하고 패티가 바빠서 거의 저 혼자 하느라 마무리가 조금 안됐는데. 뭐. 지금이라도 맘먹고 하면 한 시간 정도면 끝낼 수 있어요.」

…네가 거의 혼자 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한다만, 어쨌든 그럼 넌 그거나 마저 완성해.

「에엑? 제가 만들었다는 게 왜 맘에 걸리는 거죠? 네?」

-아니, 그냥 별다른 의미는 없었어. 하여간 넌 마저 만들고… 난 그동안 천천히 구경 좀하면서 CR5 찾아갈게. 기왕 보는 거 애들과 가까운 곳에서 보는 게 더………….

「으이~ 주인님께서 이 요몽의 예술적, 지적 영상물 편집 능력을 불신하시다니~ 알겠어욧! 반드시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 보입죠!」

발끈한 요몽이 삐릉- 다소 요상한 효과음과 함께 사라졌다. 난 천천히 아까 대교와 이곳에 도착해서 통과해 들어왔던 보안검색대 (그렇게 부르는 거 맞나?)쪽을 돌아 본 다음, 반대편인 내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뭐…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CR5는 구중천에 오기 전부터 위치 약도를 본적이 있고, 지금걷기 시작한 복도부터 얼마간은 승룡대주의 안내를 받아 서 한번 와본 코스니까… 음. 그러고 보니, 미래여자 싸가지를 만난 이후로는 몽몽 남매의 서포트없이 다니는 건 처음인건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왠지 허전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은신술 혹은 인법을 구사하면서 걸으니까, 누구와 마주쳐도 번거로울 일도 없 어서, 나는 점차 더 기분 좋게 걸음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음. 근데 이거 초장부터 좀… 여기가 아닌가벼?

계속 될 것만 같았던 복도가 뜬금없이 끊기며 막다른 장소가 나와서 나는 잠시 망설여야했다.

에고.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뭐… 다시 낯익은 길을 찾기 만하면, 나도 한 길눈하니까 어떻게든………….

나는 공연히 막다른 골목 안쪽을 구경하듯 돌아본 다음에 슬며시 뒤돌아 나와야했다. 선택 미스가 있었던 갈림길로 돌아와서 침으로 침점을 보거 나 전투화를 벗어던져 신발 점을 보는 건, 명색이 마군황 체면에 할 짓이 아니다싶어 참았다. 이번엔 어느 정도 신중하게 방향을 잡고 얼마간을 걷다 보니 드디어 뭔가 낯익은 곳이 나타났다.

…흐음. 흠. 여긴 분위기가 아무래도 세탁실 정도 되는 건가? 확실히 저 큰 문 위에 쓰여 있는 크리닝 어쩌고 하는 글자는 낯익긴 해.

난 본의 아닌 세탁실 시찰을 하고난 후 다시 정처있다고 우기고 싶은 발음을 옮겨 얼마간을 더 걸었다.

오호~ 여긴 탈의실 그것도 여자 수하분들이 꽤 많은 흠. 내가 지금 은신술 모드여서 망정이지 칼침 좀 맞을 뻔했구먼.

다시 얼마 후, 정처있는지 어쩐지 하여간 도착한 곳은 끽끽- 꽥꽥- 꼬끼오~ 소리가 가득한 동물원, 아니 실험용 동물을 키우는 장소인 것 같았 다.

…흠. 혹시라도 금동이가 놀러와서 보면 기분이 나쁘려나? 주의 장소 체크로 가산점 획득!

난 멋대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얼마가 지난 후에 도착한 곳은 도착 전부터 어디인가를 알 수가 있었다. 아까의 식신 요리와 비슷할 정도로 맛난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각층마다 있는 모양인 식당 중 하나인건 좋은데, 방금 지나간 주방장 두 명이 ‘6층 주방에 우리 5층 주방이 밀리면 안 되지!’라며 파이팅을 다짐 한건 뭐지? 난 지하 3층에서 출발해서 계단을 밟은 기억이 없는데 어째서 5층 주방인지 식당인지가 나온 걸까…………?

나는 일단 식당에서 뭔가 약간 챙긴 다음, 다시 기약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응? 편의점? 사람 사는, 그것도 많이 사는 곳에 편의점 있는 건 당연한 거지만… 에이 모르겠다.

난 어느 사이 공공보법을 펼쳐 반쯤 날기 시작했고, 그만큼 빠르게 많은 곳을 너무나 많은 곳을 시찰(어디까지나!)할 수가 있었다.

…다, 당구장? ・・・ 영화..관? 그런 정도야 우리나라 육군본부 내에도 얼마든지… 헉! 박물관? …으으. 나 왠지 디즈니랜드 앞을 지나온 거 같은 기 분이… 에이 쒸~ 여기 군사기지 맞는겨?

딱히 회피할 이유도 없는데 왠지 현실도피성 달음질을 계속하던 결국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번엔 진짜 가장 낯익은 장소에 도착했기 때문 이었다.

여, 여긴・・・ 처음에 출발했던 3층 보안대 앞…? 젠장. 요몽이 작업 끝낼 때가 얼마안남은 거 같은데 원점이라니………!

난 하는 수 없이 은신술을 풀고 내 쪽에서는 낯이 익어버린 경비요원 한 명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경비요원은 문득 날 돌아보다가 내 손에 들 린 술병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벌써 시작된 모양이군요. 우리도 빨리 교대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저기, 내가 지금 당장 급하게 거길 가야하는 건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확인 좀 해보고 싶어서……”

“창피해 하실 것 없습니다. 이 구중천은 워낙 방대하여 거주기간이 1년 넘은 분들도 종종 길을 잃곤 합니다.”

“하핫~ 그럴 거 같긴 하네.”

젠장. 무모한 도전이었구나.

“헌데 찾으시는 곳이 …………….”

“CR5.”

“음? 거긴 1급 보안시설인데? 왜 해당 구역 보안증을 패용하지 않으셨죠?” “아니, 난 그런 거 안주던데?”

“그럴 리가요. 설사 구중천의 중천 어르신들이라도 해당 보안증없이는… 어, 헉? 처, 천주? 어, 어째서, 어째서 혼자 이런 곳에……….”

음. 은신술 혹은 인술이 약간 덜 풀렸었나? 말하다말고 갑자기 화들짝 놀라서 나까지 조금 놀랬네.

“모, 몰라뵙, 주, 죽을죄를!”

“아니, 아니! 그러지 좀 마. 그럴까봐 여태 인술쓰고 있었는데……….”

다른 경비요원들까지 모여들면서 작은(?) 소동이 일어서 난 잠시 쓴웃음과 함께 벌쭘 모드가 되어야했다.

또 잠시 후.정확히는 5분이 채 되기도 전에 난 목적지에 도착해있었다. 3층 입구에서 연락을 취해주어 몇 군데의 경비 시설을 논스톱으로 지나왔다 고는 해도, 참 허무한 자유시찰(어디까지나 방황이 아니!)이었던 셈이다.

「주인니임!」

오. 나이스 타이밍이다, 요몽.

「멋지게 완성했으니까 기대하셔도 조아요. 어, 근데 여긴 진짜 엄청 넓고 복잡한 곳도 많은데 용케 혼자 찾아오셨네요?」

“짜, 자식이 주인님을 뭘로 보고.. 흠. 큼. 어쨌든 나도 준비 끝났다.”

난 아까 맞닥뜨・・・ 아니, 어디까지나 내 발로 찾아갔… 크흠. 암튼, 식당에서 술병 하나를 슬쩍 챙겼었지. 술잔과 간단한 안주 조금도 군바리들의 만 능 수납공간인 건빵주머니에 챙겼으니까, 확실히 준비 끝~인 셈이군.

「오홍~ 그런 준비까지? 오늘은 아주 제대로시네요? 후후~ 그럼 개봉박두…가 아니라, 바로 개봉되겠습니다아~!」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아 결가부좌를 틀었다. 오는 과정이 다소 썰렁한 감이 있긴 했지만, 꽤 오래 개봉을 기다려온 영상을 본다는 기대감 이 먼저 앞서 달리고 있었다.

어둠.

상영직전의 영화관처럼 내 눈앞에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호르릉~

피리와 오르골 소리를 합친 듯한 특유의 비행음(?)과 함께 요몽이 날았다. 그리고 녀석이 지나간 허공의 괘적을 따라 타라락- 자막이 찍히기 시작 했다.

  • 본 작품은 주인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제작된 다큐 영상물임.

흐음. 그러고 보니 몽몽(+요몽)의 가상현실 영화(?) 시청하는 건 꽤 오랜만인 듯하군.

제작: 요몽몽 프로덕션

장소: 홍콩 시내 인근 모 처의 모 지점 모 공원.

다소(?) 성의 없다 싶은 장소설명 자막과 함께 어둠 너머로 뭔가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동산 형태의 지형에 나름 우거진 수풀과 그 사이로 몇 갈래의 산책로가 정갈하게 깔려있는… 그야말로 공원이로군. 아래 쪽 입구 옆의 100여 평 넓이 주차장도 그렇고 규모가 제법 큰 공원이긴 한데. 특이한 점이라면 장소보다 상황이랄까?

이미 해가 진 시간대인 건 분명했으나 공원 여기저기에 환하게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으며 꽤 여러 군데 추가로 설치된 보조 조명까지 모두 밝혀져 있었다. 거기에 산책로 양옆의 난간을 따라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용 전구들이 촘촘하게 걸려 형형색색 다양한 빛깔로 반짝이며 화려함을 더하고 있 었다.

주차장 한 쪽의 간이매점 앞에 아이들이 좋아 할 법한 바람개비며 풍선 같은 것들이 잔뜩 매달려있고. 전반적으로 야간 행사가 진행되고 있음직 한 분위기인데도 정작 사람들은 그림자조차 비치고 있지 않은 상황인 건데………

“이쯤에서~ 저, 요몽! 홍콩 공원관리국과 평소 이곳을 애용하신다는 홍콩 시민들, 특히 이렇게 분위기 좋은 장소를 선호하는 눈꼴신 아니 그냥 다 정한 연인들…! 그 분들의 타발적 협조에 캄솨~ 드리며!”

역시나 그랬었군.

“이상으로 기본 상황 소개를 마치겠씀돠! 주인님, 즐감~!”

행사전문 MC스런 멘트를 날린 요몽이 뒤로 빠져 주더니 구우우웅~ 묵직한 기계음이 화면바깥(?)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공원 입구 쪽 도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들은……………

커다란 스쿨버스…? 그리고 그 이상의 크기와 육중함을 자랑하는 탑차…! 음… 하긴 저쯤은 되어야 하지. 고 ‘귀염둥이 녀석들’을 단체로 실어 나 르려면 말이야.

공원 입구의 주차장에 멈춘 두 대의 커다란 차량 중에서 스쿨버스 쪽의 출입문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건 인솔교사, 아 니 세련된 캐리어 우먼의 자태를 뽐내는 여인네, 자룡대주(紫龍隊主)였다.

“비에이! 비에이라고 했죠?”

자룡대주가 돌아보며 묻자, 뒤따라 내리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탑승자들 체크해서 보고해요.”

“어, 예에에”

어느 정도 엄격한 어조의 명령에 비해 대답소리와 태도는 심드렁했다. 자룡대주는 보일 듯 말 듯 눈살을 찌푸렸으나 더 뭐라지는 않고 탑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룡대주로부터 버스 탑승자들 대표쯤으로 지목 받은 저 녀석, 비에이(B.A). 인종은 흑인이며 겉보기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백발에 얼굴 가득 주름 이 진 그야말로 노인네…! 거기에 체구까지 왜소한 편이어서 ‘에구구 허리야 비가 오려나?”라는 대사를 읊으면 얼른 가서 부축해 드려야 할 것 같지 만… 사실은 이제 겨우 10살의 어린 소년! 그래서 내가 ‘비가 오려나 소년’, 줄여서 ‘비오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녀석이지. 그리고 저 비오소 비 에이에 이어 줄줄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는 녀석들 수십 명 모두 당연히도 비에이와 같은 CR들이다.

비에이만틈 심하진 않더라도 10세 정도라는 실제 평균 연령에 맞는 외모를 가진 녀석들은 드물어서 스쿨버스임에도 학생들이 아닌 부모 포함 가 족들이 내리는 듯 한 분위기로군.

뭐, 그래도 또 다른 녀석들… 중장비 수송용 탑차로 나를(?) 수밖에 없는 멤버들 보다야 눈에 덜 띄이긴 하지.

자룡대주가 지켜 선 가운데 서서히 좌우로 열리는 거대 탑차 화물칸 속으로 그런 공간조차 비좁아 보일 정도로 우람한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CR들의 F4 아니, B4.! 즉, Big 4 남매들이었다.

누가 봐도 딱 헐크다 싶은 BB형제, 그 못지않은 등빨과 강인한 인상의 여성판 헐크 ‘비비안’, 그리고 빅4 중에서 그나마 작은 덩치와 유순한 인상 을 보이는 ‘로즈’. 음… 저 로즈가 사실 엄청난 괴력하나는 B4중 최고라고 하던가?

그런 B4들을 확인한 자룡대주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있는 건 그들 중 누구도 움직여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서인 듯했다.

“저어……”

조심스럽게 허공이(?) 목소리를 냈다. 흠칫하는 자룡대주와 탑차 사이의 공간에 사르륵 맑은 유리 동상 같은 형체가 떠오르더니 곧 확실한 단발머 리 백인 소녀의 모습이 되었다. 투명화 능력의 백인판 소교, ‘소냐’였다.

“죄송해요. 이 아이들은 아직 내리고 싶지 않데요. 새로운 대장님 만나기 전에 좀 더 마음의 준비가…………”

음. 그렇지. 저 B4들은 덩치와 함께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엄청나게 내성적이고 수줍움이 많다는 점이었어. 그래서 저 투명 소녀 소 냐가 항상 보호자 겸 대변인 노릇까지 하는 거고 말야.

“아차차~! 빼먹은 게 있었네? 죄송 주인님!”

뜬금없이 다시 나타난 요몽이 허공에 자막을 던져(?) 넣었다.

-시기: 주인님께서 CR들을 천음마군(天飮魔君)에게 맡긴다 결정하신 직후의 어느 날 밤.

-제목: CR, 천음마군과 만나 DR(Dragon Rib) 되다!

“야, 야! 됐으니까, 이제 그냥 보자 좀.”

“헤헤~ 넵!”

오늘에야 보게 된 이날의 상황은 요몽이 뒤늦게 뿌린 자막처럼 천음마군의 CR부대 임시 대장 취임식(?)이다. 솔직히 당시 난 그리 깊게 생각해서 결정한 건 아니어서 천음마군과 CR들이 어떻게 어울리게 되었는지 항상 궁금하긴 했었다.

“이쪽 인원… 뭐, 대충 이상 없는 듯합니다.”

비에이 녀석의 매우 불성실한 보고에 자룡대주는 자신의 PDA부터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PDA는 지직거리며 제대로 화면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건 ‘디도어’ 때문입니다. 녀석도 잠시나마 우리 대장 노릇 할 분을 기다리며 살짝 흥분했나봅니다.”

강력한 전자파를 발산하여 광범위 전자장치 교란이 특기라는… 둔해 보이는 비만 체형의 백인 소년 디도어. 그러나 녀석은 비에이의 말과 달리 흥 분은 고사하고 버스 지붕에 느긋하게 누워서 만사가 귀찮다는 듯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룡대주. 사실 자룡대주에게 PDA는 단지 보조 기록 수단일 뿐이다. CR들의 인원이 제법 많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점 이라고 해도, 자룡대주는 이 때 버스에서 내렸어야 할 인원이 몇 명 빈다는 사실과 녀석들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도 쉽게 눈치 깠을 여인네 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 준 것이다.

“그럼 이제 당신들, CR부대를 이끌 신임 부대장, 천음마군만 도착하면 되겠군요.”

“신임이자 ‘임시’죠.”

굳이 ‘임시’를 강조하는 비에이. 그리고 그 뒤로 버스주변 주차장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CR들로부터 낮게 구시렁거리는 소리들이 들려 오고 있었다.

“뭐야. 누가 온다는 거야? 레인 오빠가 울 대장 아녔어?”

“그러게? 레인 형이 곧 돌아올 텐데?”

“레인 형 아니래도 소냐 누나나 비에이가 있잖아.”

“레인 오빠, 오랜만에 보니까 더 멋있어진 거 같더라.”

“레인 형이야 항상 짱이지!”

대화 내용의 차이는 약간씩 있어도 대부분 자신들의 대장은 ‘레인’이어야 하는데 왜 자신들 형제도 아닌 자가 대장이 된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는 녀석들 사이에서는 ‘천음 뭐라는 그 사람 첫인상부터 맘에 안 들어 같은 말까지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CR5…!

CR아이들의 완전체 각성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에 붙여진 이름은 그러했다. 난 그곳에 가기위해서 나선 것이고,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엘리베 이터 앞에 섰다.

「대교님께 가시게요?」

-어, 우선 그래야겠지?

「후후 지금은 곤란해요. 대교님께서는 아직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명령에 따라, 아주 많이 반성하신다’고 누구도 처소에 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셨거든요.」

-에? 야아. 대교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언제 그런 걸 명령으로…

「헤헤~ 그야 물론 제가 약간 편집했지만, 그래두 아무도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하신 건 맞아요.」

으음. 반성 시간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서 틈틈이 ‘식신의 낙원’을 즐기는 걸 수도 있겠군.

난 아까 식신마군에게 대교는 우리 처소에서 ‘따로 한상’ 차려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대교와의 동행은 일단 접기로 했다.

흠. 그럼 어쩐다..? 물론 꼭 대교와 함께 가야하는 건 아니지만, 대교 없이 혼자 어디를 가려니까 웬지 허전⋯ 훗. 나도 참, 어느 사이에 그녀와 함 께 다니는 것에 이렇게 익숙해졌었나?

난 싱겁게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몇 가지를 망설였다.

「주인님. 파티장소 말고 어디 딴 데 가시게요?」

-어, 아직 얘기 안했나? 파티 준비하는데 대빵이 어슬렁거려봐야 방해만 될 거 아냐. 난 그래서 CR애들이나 좀 보러…………

「아, 그럼 일단 지하 3층에서 내리세요. 거기가려면 이 엘리베이터로는 안 되거든요.」

흠. 그러고 보니까 지금 탄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에서 7층까지의 버튼밖에 없네? 모든 층을 가는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나보군.

「아참. 근데요, 한 시간쯤 전에 CR팀 입실이 끝나서 지금 가셔도 얼굴 보긴 힘들걸요?」

윽. 이런, 이런… 내가 너무 즉흥적으로 일정을 결정했나?

엘리베이터는 이미 지하 3층에 도착해 있어서 나는 일단 내리면서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이대로 적당히 구중천 관광(?)을 해도 나쁠 건 없겠지만, 그래도 목적지조차 없이 혼자 걷는 건 아니지 싶었다.

・・・요몽. 혹시 내가 전에 만들라고 했던 영상, 다 완성했냐?

「아, CR들 다큐영상이요? 그거 몽몽 오빠하고 패티가 바빠서 거의 저 혼자 하느라 마무리가 조금 안됐는데… 뭐. 지금이라도 맘먹고 하면 한 시간 정도면 끝낼 수 있어요.」

…네가 거의 혼자 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한다만, 어쨌든 그럼 넌 그거나 마저 완성해.

「에엑? 제가 만들었다는 게 왜 맘에 걸리는 거죠? 네?」

-아니, 그냥 별다른 의미는 없었어. 하여간 넌 마저 만들고… 난 그동안 천천히 구경 좀하면서 CR5 찾아갈게. 기왕 보는 거 애들과 가까운 곳에서 보는 게 더………….

「으이~ 주인님께서 이 요몽의 예술적, 지적 영상물 편집 능력을 불신하시다니~ 알겠어욧! 반드시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 보입죠!」

발끈한 요몽이 삐릉- 다소 요상한 효과음과 함께 사라졌다. 난 천천히 아까 대교와 이곳에 도착해서 통과해 들어왔던 보안검색대(그렇게 부르는 거 맞나?)쪽을 돌아 본 다음, 반대편인 내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뭐…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CR5는 구중천에 오기 전부터 위치 약도를 본적이 있고, 지금걷기 시작한 복도부터 얼마간은 승룡대주의 안내를 받아 서 한번 와본 코스니까… 음. 그러고 보니, 미래여자 싸가지를 만난 이후로는 몽몽 남매의 서포트없이 다니는 건 처음인건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왠지 허전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은신술 혹은 인법을 구사하면서 걸으니까, 누구와 마주쳐도 번거로울 일도 없 어서, 나는 점차 더 기분 좋게 걸음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음. 근데 이거 초장부터 좀… 여기가 아닌가벼

계속 될 것만 같았던 복도가 뜬금없이 끊기며 막다른 장소가 나와서 나는 잠시 망설여야했다.

에고.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뭐… 다시 낯익은 길을 찾기 만하면, 나도 한 길눈하니까 어떻게든………….

나는 공연히 막다른 골목 안쪽을 구경하듯 돌아본 다음에 슬며시 뒤돌아 나와야했다. 선택 미스가 있었던 갈림길로 돌아와서 침으로 침점을 보거 나 전투화를 벗어던져 신발 점을 보는 건, 명색이 마군황 체면에 할 짓이 아니다싶어 참았다. 이번엔 어느 정도 신중하게 방향을 잡고 얼마간을 걷다 보니 드디어 뭔가 낯익은 곳이 나타났다.

…흐음. 흠. 여긴 분위기가 아무래도 세탁실 정도 되는 건가? 확실히 저 큰 문 위에 쓰여 있는 크리닝 어쩌고 하는 글자는 낯익긴 해.

난 본의 아닌 세탁실 시찰을 하고난 후 다시 정처있다…고 우기고 싶은 발음을 옮겨 얼마간을 더 걸었다.

오호~ 여긴 탈의실 그것도 여자 수하분들이 꽤 많은 흠. 내가 지금 은신술 모드여서 망정이지 칼침 좀 맞을 뻔했구먼.

다시 얼마 후, 정처있는지 어쩐지 하여간 도착한 곳은 끽끽- 꽥꽥- 꼬끼오~ 소리가 가득한 동물원, 아니 실험용 동물을 키우는 장소인 것 같았 다.

…흠. 혹시라도 금동이가 놀러와서 보면 기분이 나쁘려나? 주의 장소 체크로 가산점 획득!

난 멋대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얼마가 지난 후에 도착한 곳은 도착 전부터 어디인가를 알 수가 있었다. 아까의 식신 요리와 비슷할 정도로 맛난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각층마다 있는 모양인 식당 중 하나인건 좋은데, 방금 지나간 주방장 두 명이 ‘6층 주방에 우리 5층 주방이 밀리면 안 되지!’라며 파이팅을 다짐 한건 뭐지? 난 지하 3층에서 출발해서 계단을 밟은 기억이 없는데 어째서 5층 주방인지 식당인지가 나온 걸까…………?

나는 일단 식당에서 뭔가 약간 챙긴 다음, 다시 기약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응? 편의점? 사람 사는, 그것도 많이 사는 곳에 편의점 있는 건 당연한 거지만… 에이 모르겠다.

난 어느 사이 공공보법을 펼쳐 반쯤 날기 시작했고, 그만큼 빠르게 많은 곳을 너무나 많은 곳을 시찰(어디까지나!)할 수가 있었다.

…다, 당구장? ・・・ 영화..관? 그런 정도야 우리나라 육군본부 내에도 얼마든지… 헉! 박물관? …으으. 나 왠지 디즈니랜드 앞을 지나온 거 같은 기 분이… 에이 쒸~ 여기 군사기지 맞는겨?

딱히 회피할 이유도 없는데 왠지 현실도피성 달음질을 계속하던 결국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번엔 진짜 가장 낯익은 장소에 도착했기 때문 이었다.

여, 여긴… 처음에 출발했던 3층 보안대 앞…? 젠장. 요몽이 작업 끝낼 때가 얼마안남은 거 같은데 원점이라니……!

난 하는 수 없이 은신술을 풀고 내 쪽에서는 낯이 익어버린 경비요원 한 명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경비요원은 문득 날 돌아보다가 내 손에 들 린 술병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벌써 시작된 모양이군요. 우리도 빨리 교대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저기, 내가 지금 당장 급하게 거길 가야하는 건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확인 좀 해보고 싶어서……”

“창피해 하실 것 없습니다. 이 구중천은 워낙 방대하여 거주기간이 1년 넘은 분들도 종종 길을 잃곤 합니다.”

“하핫~ 그럴 거 같긴 하네.”

젠장. 무모한 도전이었구나.

“헌데 찾으시는 곳이………….”

“CR5.”

“음? 거긴 1급 보안시설인데? 왜 해당 구역 보안증을 패용하지 않으셨죠?” “아니, 난 그런 거 안주던데?”

“그럴 리가요. 설사 구중천의 중천 어르신들이라도 해당 보안증없이는… 어, 헉? 처, 천주? 어, 어째서, 어째서 혼자 이런 곳에……….”

음. 은신술 혹은 인술이 약간 덜 풀렸었나? 말하다말고 갑자기 화들짝 놀라서 나까지 조금 놀랬네.

“모, 몰라뵙, 주, 죽을죄를!”

“아니, 아니! 그러지 좀 마. 그럴까봐 여태 인술쓰고 있었는데……….”

다른 경비요원들까지 모여들면서 작은(?) 소동이 일어서 난 잠시 쓴웃음과 함께 벌쭘 모드가 되어야했다.

또 잠시 후.정확히는 5분이 채 되기도 전에 난 목적지에 도착해있었다. 3층 입구에서 연락을 취해주어 몇 군데의 경비 시설을 논스톱으로 지나왔다 고는 해도, 참 허무한 자유시찰(어디까지나 방황이 아니!)이었던 셈이다.

「주인니임!」

오. 나이스 타이밍이다, 요몽.

「멋지게 완성했으니까 기대하셔도 조아요. 어, 근데 여긴 진짜 엄청 넓고 복잡한 곳도 많은데 용케 혼자 찾아오셨네요?」

“짜, 자식이 주인님을 뭘로 보고… 흠. 큼. 어쨌든 나도 준비 끝났다.”

난 아까 맞닥뜨. 아니, 어디까지나 내 발로 찾아갔… 크흠. 암튼, 식당에서 술병 하나를 슬쩍 챙겼었지. 술잔과 간단한 안주 조금도 군바리들의 만 능 수납공간인 건빵주머니에 챙겼으니까, 확실히 준비 끝~인 셈이군.

「오홍~ 그런 준비까지? 오늘은 아주 제대로시네요? 후후~ 그럼 개봉박두…가 아니라, 바로 개봉되겠습니다아~!」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아 결가부좌를 틀었다. 오는 과정이 다소 썰렁한 감이 있긴 했지만, 꽤 오래 개봉을 기다려온 영상을 본다는 기대감 이 먼저 앞서 달리고 있었다.

어둠.

상영직전의 영화관처럼 내 눈앞에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호르릉~

피리와 오르골 소리를 합친 듯한 특유의 비행음(?)과 함께 요몽이 날았다. 그리고 녀석이 지나간 허공의 괘적을 따라 타라락- 자막이 찍히기 시작 했다.

– 본 작품은 주인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제작된 다큐 영상물임.

흐음. 그러고 보니 몽몽(+요몽)의 가상현실 영화(?) 시청하는 건 꽤 오랜만인 듯하군.

제작: 요몽몽 프로덕션

장소: 홍콩 시내 인근 모 처의 모 지점 모 공원.

다소(?) 성의 없다 싶은 장소설명 자막과 함께 어둠 너머로 뭔가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동산 형태의 지형에 나름 우거진 수풀과 그 사이로 몇 갈래의 산책로가 정갈하게 깔려있는… 그야말로 공원이로군. 아래 쪽 입구 옆의 100여 평 넓이 주차장도 그렇고 규모가 제법 큰 공원이긴 한데. 특이한 점이라면 장소보다 상황이랄까?

이미 해가 진 시간대인 건 분명했으나 공원 여기저기에 환하게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으며 꽤 여러 군데 추가로 설치된 보조 조명까지 모두 밝혀져 있었다. 거기에 산책로 양옆의 난간을 따라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용 전구들이 촘촘하게 걸려 형형색색 다양한 빛깔로 반짝이며 화려함을 더하고 있 었다.

주차장 한 쪽의 간이매점 앞에 아이들이 좋아 할 법한 바람개비며 풍선 같은 것들이 잔뜩 매달려있고. 전반적으로 야간 행사가 진행되고 있음직 한 분위기인데도 정작 사람들은 그림자조차 비치고 있지 않은 상황인 건데………

“이쯤에서~ 저, 요몽! 홍콩 공원관리국과 평소 이곳을 애용하신다는 홍콩 시민들, 특히 이렇게 분위기 좋은 장소를 선호하는 눈꼴신 아니 그냥 다 정한 연인들…! 그 분들의 타발적 협조에 캄솨~ 드리며!”

역시나 그랬었군.

“이상으로 기본 상황 소개를 마치겠씀돠! 주인님, 즐감~!”

행사전문 MC스런 멘트를 날린 요몽이 뒤로 빠져 주더니 구우우웅~ 묵직한 기계음이 화면바깥(?)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공원 입구 쪽 도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들은……………

커다란 스쿨버스…? 그리고 그 이상의 크기와 육중함을 자랑하는 탑차…! 음… 하긴 저쯤은 되어야 하지. 고 ‘귀염둥이 녀석들’을 단체로 실어 나 르려면 말이야.

공원 입구의 주차장에 멈춘 두 대의 커다란 차량 중에서 스쿨버스 쪽의 출입문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건 인솔교사, 아 니 세련된 캐리어 우먼의 자태를 뽐내는 여인네, 자룡대주(紫龍隊主)였다.

“비에이! 비에이라고 했죠?”

자룡대주가 돌아보며 묻자, 뒤따라 내리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탑승자들 체크해서 보고해요.”

“어, 예에에”

어느 정도 엄격한 어조의 명령에 비해 대답소리와 태도는 심드렁했다. 자룡대주는 보일 듯 말 듯 눈살을 찌푸렸으나 더 뭐라지는 않고 탑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룡대주로부터 버스 탑승자들 대표쯤으로 지목 받은 저 녀석, 비에이(B.A). 인종은 흑인이며 겉보기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백발에 얼굴 가득 주름 이 진 그야말로 노인네…! 거기에 체구까지 왜소한 편이어서 ‘에구구 허리야 비가 오려나?”라는 대사를 읊으면 얼른 가서 부축해 드려야 할 것 같지 만… 사실은 이제 겨우 10살의 어린 소년! 그래서 내가 ‘비가 오려나 소년’, 줄여서 ‘비오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녀석이지. 그리고 저 비오소 비 에이에 이어 줄줄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는 녀석들 수십 명 모두 당연히도 비에이와 같은 CR들이다.

비에이만틈 심하진 않더라도 10세 정도라는 실제 평균 연령에 맞는 외모를 가진 녀석들은 드물어서 스쿨버스임에도 학생들이 아닌 부모 포함 가 족들이 내리는 듯 한 분위기로군.

뭐, 그래도 또 다른 녀석들… 중장비 수송용 탑차로 나를(?) 수밖에 없는 멤버들 보다야 눈에 덜 띄이긴 하지.

자룡대주가 지켜 선 가운데 서서히 좌우로 열리는 거대 탑차 화물칸 속으로 그런 공간조차 비좁아 보일 정도로 우람한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CR들의 F4 아니, B4.! 즉, Big 4 남매들이었다.

누가 봐도 딱 헐크다 싶은 BB형제, 그 못지않은 등빨과 강인한 인상의 여성판 헐크 ‘비비안,’, 그리고 빅4 중에서 그나마 작은 덩치와 유순한 인상 을 보이는 ‘로즈’. 음… 저 로즈가 사실 엄청난 괴력하나는 B4중 최고라고 하던가?

그런 B4들을 확인한 자룡대주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있는 건 그들 중 누구도 움직여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서인 듯했다.

“저어……”

조심스럽게 허공이(?) 목소리를 냈다. 흠칫하는 자룡대주와 탑차 사이의 공간에 사르륵 맑은 유리 동상 같은 형체가 떠오르더니 곧 확실한 단발머 리 백인 소녀의 모습이 되었다. 투명화 능력의 백인판 소교, ‘소냐’였다.

“죄송해요. 이 아이들은 아직 내리고 싶지 않데요. 새로운 대장님 만나기 전에 좀 더 마음의 준비가……”

음. 그렇지. 저 B4들은 덩치와 함께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엄청나게 내성적이고 수줍움이 많다는 점이었어. 그래서 저 투명 소녀 소 냐가 항상 보호자 겸 대변인 노릇까지 하는 거고 말야.

“아차차~! 빼먹은 게 있었네? 죄송 주인님!”

뜬금없이 다시 나타난 요몽이 허공에 자막을 던져(?) 넣었다.

-시기: 주인님께서 CR들을 천음마군(天飮魔君)에게 맡긴다 결정하신 직후의 어느 날 밤.

제목: CR, 천음마군과 만나 DR(Dragon Rib)되다!

“야, 야! 됐으니까, 이제 그냥 보자 좀.”

“헤헤~ 넵!”

오늘에야 보게 된 이날의 상황은 요몽이 뒤늦게 뿌린 자막처럼 천음마군의 CR부대 임시 대장 취임식(?)이다. 솔직히 당시 난 그리 깊게 생각해서 결정한 건 아니어서 천음마군과 CR들이 어떻게 어울리게 되었는지 항상 궁금하긴 했었다.

“이쪽 인원… 뭐, 대충 이상 없는 듯합니다.”

비에이 녀석의 매우 불성실한 보고에 자룡대주는 자신의 PDA부터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PDA는 지직거리며 제대로 화면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건 ‘디도어’ 때문입니다. 녀석도 잠시나마 우리 대장 노릇 할 분을 기다리며 살짝 흥분했나봅니다.”

강력한 전자파를 발산하여 광범위 전자장치 교란이 특기라는… 둔해 보이는 비만 체형의 백인 소년 디도어. 그러나 녀석은 비에이의 말과 달리 흥 분은 고사하고 버스 지붕에 느긋하게 누워서 만사가 귀찮다는 듯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룡대주. 사실 자룡대주에게 PDA는 단지 보조 기록 수단일 뿐이다. CR들의 인원이 제법 많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점 이라고 해도, 자룡대주는 이 때 버스에서 내렸어야 할 인원이 몇 명 빈다는 사실과 녀석들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도 쉽게 눈치 깠을 여인네 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 준 것이다.

“그럼 이제 당신들, CR부대를 이끌 신임 부대장, 천음마군만 도착하면 되겠군요.”

“신임이자 ‘임시’죠.”

굳이 ‘임시’를 강조하는 비에이. 그리고 그 뒤로 버스주변 주차장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CR들로부터 낮게 구시렁거리는 소리들이 들려 오고 있었다.

“뭐야. 누가 온다는 거야? 레인 오빠가 울 대장 아녔어?”

“그러게? 레인 형이 곧 돌아올 텐데?”

“레인 형 아니래도 소냐 누나나 비에이가 있잖아.”

“레인 오빠, 오랜만에 보니까 더 멋있어진 거 같더라.”

“레인 형이야 항상 짱이지!”

대화 내용의 차이는 약간씩 있어도 대부분 자신들의 대장은 ‘레인’이어야 하는데 왜 자신들 형제도 아닌 자가 대장이 된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는 녀석들 사이에서는 ‘천음 뭐라는 그 사람 첫인상부터 맘에 안 들어 같은 말까지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뜬금없이 웬 목마?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한 CR들에게 의아함이 더해지고 있었다. 천음마군이 자신의 목뒤에 뭔가 태우는 몸짓을 해 보이자 비로소 몇 몇 아 이들이 ‘아~ 그 목마?’ 하고 알아채는 듯했다. 그러나 목마의 의미를 알든 모르든 결국 지배적인 분위기는 ‘당혹과 난감’으로 흐를 뿐이었다.

“목마・・・ 좋아하는 사람이 없나보구나.”

잠깐 화색이 돌았던 천음마군은 회심의(?) 아이디어에 호응이 없는 것 같자 풀이 죽은 목소리를 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여기서 어떤 남자가 목마 태워주었을 때 가장 재밌고 기분이 좋았었어. 그래서・・・ 응?”

천음마군의 어깨에 뭔가 작은 사탕 같은 걸 던진 건 가야였다. 녀석은 천음마군이 자신을 돌아보자 검지손가락을 세워 어딘가를 가리켰다. 녀석의 손가락 끝에는 거대한 탑차가 있었고 그 안의 B4, 천음마군의 두 배가 넘는 덩치들이 하나 둘 내리고 있었다.

“어, 어랏?”

당황한 천음마군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목마를 태워 주신다고요오?”

“어… 그게…………”

가야가 먼저 쿡쿡대는 소리를 냈고 다른 CR들도 하나 둘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하핫! 바보! BB형제를 들어 올리려다간 피자처럼 납작해지고 말 걸?”

“바보 맞네! 비비안의 목이 더 굵어!”

“로즈 누나가 오히려 바보 대장을 태워줘야 할 같아. 와하하~”

…쿠훗! 나도 상상해 버렸다. BB형제를 목마 태우려다 납작해지는.. 응? 저 인간 설마 진짜?!

천음마군은 에라 모르겠다하며 달려가더니 BB형제 중에서 형인 빅존의 한 쪽 다리를 붙들고 낑낑대기 시작했다. 우르르~ 본격적으로 몰려든 CR 들이 저마다 ‘바보 대장’을 응원하거나 장난 섞인 야유를 던지면서 공원은 왁자지껄 놀이판이 되고 있었다.

“으라차~”

기합성과 함께 천음마군이 들어 올린 건 빅존의 한 쪽 다리에 불과했고 사실 그마저도 빅존이 스스로 들어 올린 모양이었다.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슬며시 천음마군을 들어 올린 로즈가 그를 자기 어깨에 올리자 분위기는 그야말로 절정에 달해서 배를 잡고 구르며 웃는 녀석들까지 속출한다.

내성적인 로즈까지 웬일로 흠. 게다가 중요한 건・・・ CR들이 어느 사이 천음마군을 자연스럽게 ‘대장’이라 칭하고 있다는 점이야. 뭐, 비록 ‘바 보’라는 수식어가 붙긴 해도 말이지. 이 정도면 소위 게임 끝…? 천음마군이 초능력 악동들의 신고식으로 고생을 조금(?)하긴 했어도 결국 이렇게 해피엔딩을… 음?

“잠깐!”

비에이였다. 일종의 배신을 때린 동기동창(?) 가야의 뒤에서 묵묵히 서있던 녀석이 묘한 미소와 함께 한 손을 들었다.

“목마・・・ 지원자입니다.”

천음마군은 반색을 하고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했던 가야는 재빨리 몸을 돌려 비에이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야, 너! 더 이상 허튼 짓 하지 마. 괜찮은 사람 같아.”

“그럴지도 모르지.”

“어차피 레인 오빠 돌아오기 전까지일 뿐이잖아.”

“글쎄…? 레인 형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몰라. 게다가 난 너처럼 금방 마음이 바뀌는 어린애가 아니지.”

“뭐? 비에이. 너…………”

가야와 비에이의 대화는 거의 속삭이듯 자신들끼리만 들릴 정도였고, 비에이는 이미 가까이 온 천음마군에게 한껏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 다.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이 아이도 함께, 괜찮죠?”

안고 있던 실키를 자기 목뒤로 돌려 올리며 묻자 천음마군은 더욱 즐거워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 아이는 실키! 난 비에이!”

“핫핫! 너희들 고기를 많이 먹고 살 좀 쪄야겠다! 너무 가볍잖아!”

천음마군이 빅존에게 낑낑대던 때와 달리 큰소리를 치며 걸음을 옮기자 주위의 CR들이 가볍게 놀려대며 따라 붙는다.

“여긴. 그 때도 이렇게 온갖 불이 가득 켜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새삼 천천히 공원의 전경과 아이들을 돌아보는 천음마군의 두 눈은 먼 과거의 시간대를 그리는 듯 아련한 기운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이들 중 누군 가가 물었다.

“바보 대장이 몇 살 때 였나요?”

“어… 그러고 보니 몇 살이었더라? 7살? 8살…? 어니, 더 어렸었나? 하핫! 난 정말 바보인가 봐.”

아이들과 함께 웃던 천음마군은 문득 고개와 손을 들어 공원 위쪽을 가리켰다.

“그 때 그 사람은 저기, 저 위까지 데려가 주었었어. 어때. 너희들도 한 번 가볼래?”

천음마군이 그렇게 물었을 때, 비에이는 이미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어있었다.

“마음대로 하시죠. 그게 당신 힘으로 가능하다면…말이죠.”

“…어?”

천음마군의 몸이 휘청~ 옆으로 기울어지다가 한 발을 더 벌리며 겨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당혹해하는 천음마군의 귓가로 고개 숙인 비에이가 낮게 속삭였다.

“실키와 나의 능력은 중력 조절…! 당신은 과연 몇 배의 중력까지 견딜 수 있을까?”

천음마군이 걸음을 멈추자 주위의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멈춰 서고 있었다. 아직은 상황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 챈 아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차츰 빠르게 천음마군의 안색이 변하며 두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조금 전 빅존을 상대로 보인 모습은 엄살 장난에 불과했군요. 아쿠아린 형제가 일으킨 파도를 피하고 가야의 진동파와 초이, 무이의 화 염까지 뚫고 온 분답게・・・ 잠깐은 200KG가 넘는 무게까지 견딜 수 있는 모양이네요.”

비에이는 천음마군의 머리에 두 팔을 팔짱끼어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괸 자세로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 무게는 계속 증가 할 겁니다. 후후. 땀을 꽤 흘리셔야 할 거 같은데 저의 원래 특기로 좀 식혀드리기로 하죠.”

비에이 자신의 고유 능력은 겨울의 여왕과 같은 냉동(冷凍)…! 녀석이 그것까지 발동했는지 녀석과 천음마군의 몸 주위로 희미한 수증기 같은 기운 이 감아 돌며 하얗게 서리가 덮이기 시작했다.

“현재 중력이 대략 3배정도? 우리 모두의 몸무게는 이미 300KG이 훨씬 넘었겠군요. 이 정도를 버티는 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비에이가 더욱 중력을 올리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천음마군이 딛고 있는 주차장의 아스팔트 바닥이 찌직, 찌직 금이 가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제 좀 더 실감이 납니까? 우리가 당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종족이라는 사실이.”

이제 다른 CR들도 눈치를 채고 웃음기를 지우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나름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자룡대주의 표정 역시 굳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끼어들어야 할지 어떨지 망설이는 기색으로 머뭇대는 사이, 비에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가, 내가 계속 능력을 보여주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린 서로 달라요. 우린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당신의 잘못도 아닌데 당신이 신 경 쓸 필요없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이 녀석…! 가야와 형제들에게 큰 소리쳤던 것이 틀어지자 공연히 심술부리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천음마군이 괜찮은 사람인 건 알겠 지만 그래서 더 이상 가까워지기가 싫은 거구나. 너무나 어린 나이임에도 항상 만남과 동시에 이별을 생각해야하는 처지로 태어났으니…………

“비에이. 이제 그만해.”

가야가 다시 나서자 비에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비에이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 ‘어?’ 소리를 냈다. 자신이 능력을 풀기도 전에 천음 마군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치솟으며 자신의 냉기를 날려 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엄청난 무게의 압박으로 꼼작도 못하는 건 물론이고, 차가 운 냉기에 입까지 얼어붙어 버린 것 같았던 천음마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뭐라고 했었지? 하여간 너! 장난은 이게 다냐?”

“장난?”

“물장난, 흙장난, 불장난・・・ 그리고 이제 뭐? 중력과 찬바람?”

천음마군은 강적을 앞에 두었을 때 못지않게 기색으로 씨이익 굵게 웃었다.

“또 어떤 장난이든 얼마든지 쳐봐라.”

훗. 천음마군, 이 인간. 마음껏 장난치라는 말을 ‘걸리면 죽어라는 포스를 뿜어내며 하는군. 애들… 심지어 비에이 녀석까지 겁먹고 굳어 버리는 거 봐라.

사실 조금 전까지는 사람 좋은 남자’였을 뿐이어서 낯설기까지 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야 소위 패닉 상태에서 깨어나 우리가 아는 천음마군으로 돌아 온 듯했다.

“그럼 꽉 잡아라.”

“에? 설마……”

우지지직~!

땅바닥에 얼어 붙어버린 천음마군의 신발이 찢기고 깨지며나는 소리였다. 걸음을 떼는 순간 맨발이 되어버렸지만 천음마군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한 발 한 발 자신이 말했던 공원 위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아스팔트가 패이며 깊은 발자국이 찍히고 있었으며 그의 뼈마디마다 우득, 뿌득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난・・・ 천음마군. 하늘과 함께 술잔을 기울일 자이며 너희들 같은 어린애들의 장난쯤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는… ‘어른’이다.”

천음마군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 이긴 한데… 그의 발자국 위로 점점이 떨어지고 있는 저 선혈들은……………

“비에이! 이 멍청아! 그 사람 죽일 셈이야?”

비에이는 가야가 버럭 고함을 질렀을 때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응? 어? 와아앗!”

갑자기 중력 제어가 풀리자 천음마군의 몸은 오히려 무중력 상태를 만난 것처럼 허우적대야 했고, 얼마간을 더 버둥대다가 겨우 균형감각을 되찾 고 있었다. 우스꽝스런 몸짓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아무도 웃지 못하고 있었다.

“어, 미안. 괜찮냐, 너희들?”

천음마군이 오히려 사과하며 자기 머리 위의 녀석들에게 물었다. 실키가 비에이로부터 떨어져 나오더니 쪼르르 가야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앙?! 아웅~!”

실키의 아기 옹알이 같은 소리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CR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라고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천음마군에게 뭐라 대답한 것 같았다.

“괜찮데요. 그리고… 고맙다고 하네요, 목마. 그리고 저도……………”

비에이는 좀 더 구체적인 통역을 한 후 자신도 내려오려는 몸짓을 했다. 그러나 천음마군은 비에이의 양발을 잡고 있는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더 이상 무리하지 마세요. 전 접촉한 사람의 에너지 흐름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실은 처음부터 당신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 습니다. 그럼에도 장난을 친건 죄송……”

천음마군은 한 팔을 들어 까닥까닥 손짓했고 그에 따라 비에이는 얌전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딱~!

소위 꿀밤이 작렬하자 비에이는 이마를 잡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이 녀석, 인기 없지? 그럴~거야.”

CR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천음마군은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사내 녀석이 사사건건 뭐 이리 말이 많아?”

천음마군은 짐짓 인상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건 우리 천주의 고향에서 ‘꿀밤’이라고 부르는 벌칙(?)이다. 앞으로 또 이 녀석처럼 복잡하고 골치 아픈 얘기 주절대는 놈은 내가 강력한 꿀 밤을 선사할 것이다. 알겠나?”

처음 공원에 도착했을 때 이상으로 피와 땀에 엉망인 천음마군의 상태 때문인지 아직은 뭔가 애매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비에이가 나선 이후의 심 각했던 분위기는 이미 사라져서 다들 한숨을 돌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아~ 그럼 또 가볼까?”

천음마군은 여전히 비에이를 목마 태운 채 다시 공원 위쪽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고 CR들도 일제히 뒤를 따른다.

“그런데… 대장님.”

투명소녀 소냐였다. 언제부터 그녀가 언제부터 바로 옆에서 걷고 있었는지 몰라 갸웃했던 천음마군은 이내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오빠라고 불러.”

“예?”

“우리 향주련 동생들도 우리끼리는 오빠, 형. 그렇게 부르지.”

“아… 예. 알겠어요, 천음 오빠.”

막상 불리우자 살짝 쑥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천음마군.

“비에이가 말했던 몸의 이상… 당장 치료받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어요? 저희들 중에는 치유 능력자도 있어요.”

소냐가 천음마군의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는 피식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별거 아냐. 너희들 때문에 다친 것도 아니고. 얼마 전에 론이라는 놈과 싸웠었는데… 아, 너희들도 알고 있나? DP의 론 중령!”

“그, 론 중령과 싸웠었다고요?”

소냐가 놀라는 건 물론이고 CR들 모두가 술렁였다.

“우리 같은 실험체를 쓰레기 취급하는 엘리트 생체강화 전사..! 우리들을 통해서 얻은 데이터로 부작용 없는 힘을 얻었으면서도 뻔뻔하게… 비에이의 침울한 중얼거림에 손을 들어 올렸던 천음마군이 그 손으로 비에이의 꿀밤을 때리는 대신 소냐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그런 놈이었단 말이지? 뭐, 지난번엔 무승부였지만, 다음에 만나면 이 오빠가 박살내 줄게. 반드시.”

소냐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이내 곱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탁해요, 천음 오빠.”

소냐와 비에이, 특히 소냐는 론 중령에게 뭔가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군. 다른 CR들은 론 중령의 ‘강함’ 자체에 더 중정을 두고 그런 자와 싸워 무승부였다는 천음마군에 대한 새삼스런 감탄이 대화의 주가 되는 듯… 음? 훗!

“론 중령에게 지지 않았다니, 바보 대장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는 걸?”

“왜? 싸움 잘하는 바보도 있잖아.”

“하긴. 바보라서 더 잘 싸우기도 하지.”

이런 대화가 천음마군의 귀로 쏘옥 들어가는 것 같군.

“이 녀석들이… 뭐가 어째?”

싸움 잘하는 바보 대장이 으르렁(?) 대자 잽싸게 튀기 시작하는 녀석들. 그 뒤를 쫒는 천음마군. 그렇게 그 들은 공원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다. 공원의 가장 높은 전망대 역할을 하는 장소인 모양이었다.

“와아~

쫓기던(?) 아이 하나가 문득 탄성을 울렸다. 공원 아래 쪽, 아니 그들이 막 도착한 장소가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짐작하기 어려웠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은하수 같아. 하늘의 큰 강.”

누군가의 표현처럼 정말 그랬다. 홍콩 시내의 어디쯤이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도시의 야경이었다. 그럼에도 딱 맞는 각도와 거리로 인 해서 마치 하늘의 별무리처럼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빛무리를 선사하고 있었다.

“어떠냐, 여기. 홍콩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비에이.”

천음마군은 다시 추억에 젖는 표정으로 난간에 살짝 기대서며 말을 이었다.

“넌 지금 이 멋진 모습을 남들보다 180CM 더 높은 곳에서 보고 있다. 기분이 어때?”

…어른의 목마를 타고 있는 아이에게만 주어지는… 야경. 오래 전 그런 선물을 받았던 아이가 이제 같은 자리에서 다른 아이에게 같은 선물을 한

것이다.

“사실 이건 표절이야. 그 때 그 사람이 내게 해 줬던 말이었지. 그리고……”

“아마도, 그러니까. 그 때의 아이는 이렇게 말했겠죠.”

비에이는 살며시 천음마군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멋져요. 너무나 멋진 풍경… 고마워요.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빠.”

비에이의 눈에 살며시 맺혀있던 물방울 하나가 살며시 볼을 타고 흘렀다.

“어.. 실은 그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어. 난 고아였고… 그 사람은 날 거둬 키워 준 사부(師父)… 전대 천음마군이었지. 훗. 하긴, 나에겐 결국 아 빠였나?”

천음마군의 머리를 감싸 안은 아이의 팔에 조금 더 힘이 주어졌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 었다.

– THE END.

정말 영화가 끝나듯 눈앞이 어두워지며 엔딩 자막까지 떴지만 나는 잠시 눈을 뜰 수 없었다. 아무래도 감정의 여운이 남아서였다.

-…뭐, 요몽이 연출한 것 치곤 괜찮았네.

「우에~ 칭찬치곤 쫌 그래요, 주인님.」

요몽이 입술을 삐죽인 건 아주 잠깐이었고 곧바로 녀석의 입에서 수다가 시작되었다.

「근데 사실 제가 이번엔 신경 좀 쓰고 만들었지요. 주인님께선 다큐영상을 원하신 거라서 드라마틱한 편집이 얼마나 힘들었다구요. 게다가 극적 긴장과 감동을 놓치지 않으려고 생략한 장면들이 어찌나 아쉬운지… 아, 근데 사실요, 저 감동만땅의 엔딩 뒤의 얘기도 솔찮이 재밌어요. 천음마군 은 결국 긴장이 풀리자 출혈과다로 쓰러졌다가 나이팅게일 자매의 찐한 치유 뽀뽀로 깨어나면서 어찌나 기겁을 하던지…………」

-요몽. 그래. 수고한 건 알겠다.

「그쵸? 저 수고했죠? 근데 있잖아요, 저날 공원은 완전 한국의 노숙 공원이었어요. 천음마군이 CR들 특수 능력으로 라면 조달해서 끓여 먹으면 서 자긴 빼갈 나발 불고………」

훗~!우려 이하(?), 아니 이번엔 정말 기대 이상이어서 좀 더 칭찬해 주고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칭찬해줄 틈도 찾기 어려운 수다가 계속될 것 같군.

난 그냥 눈을 떴고,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영화상영(?) 전에 보이던 정경이 그대로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운기조식하는 자세로 앉아서 눈 을 감고 있는 동안에 달라진 건 저 앞의 ‘C-R5’라고 쓰인 문 앞에 천음마군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CR-5… 저 문 너머에는 몽몽의 진두지휘로 편성된 우리 연구진들이 열심히 CR들을 위한 녀석들의 짧은 수명과 여러 문제들을 고쳐 줄 장비며 시설들을 최종점검 중이지. 이미 CR들도 모두 저 안에 있기에, 우리의 천음마군이 저렇게 술자리까지 미루고 어슬렁거리며 기웃대는 거고 말야. “천음마군.”

“아, 천주 오셨습니까?”

“난 원래 여겼었어. 온 건 그쪽이고.”

“어・・・ 그랬군요.”

“훗. 한잔 하자, 우리.”

내 앞의 술병과 술잔을 들어 보이자 반색을 하는 천음마군. 하늘과 함께 술잔 기울이는 걸 가장 좋아는 자. CR들의 형님이며 오빠, 그리고… 아빠 대장. 그를 위해서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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