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4부 – 64화 : 무서운 소녀.


4. 무서운 소녀.

너무나 황당해서 어처구니없을 정도였음에도 교묘하게 현실에 녹아들어서 처음 얼마간은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웠던 환각과 환청…………!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보니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야하는가, 그런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더 주요한 점을 깨달았다.

우쒸~ 나 지금 운전 중이잖아…………! 아무리 나와 대교가 무적의 먼치킨 커플이어도 그렇지. 이러다 교통사고라도 내면 우리는 그렇다 쳐도 내 차 키트 1.5호가 위험… 으음. 근데 나, 이런 위기감을 애써 일으키려고 해도 왜… 이렇게 마음에 여유가 있는 거야, 이거.

의무적인(?) 위기감 의식과 알 수 없는 태평함 사이를 오가는 와중에도 나는 거의 반자동으로(?) 상황을 파악해 나가고 있었다.

우선… 조금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환각과 환청은 멈추었군. 전방의 시야와 운전을 하고 있는 내 손과 발의 감각… 아무래도 이상이 없는 거 같아. 슬쩍 옆으로 돌아보니… 음, ‘옆을 돌아보았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을 때’와 달리 실제로 돌아봐지면서 실제의 대교가 이상 없는 모습으로 보이고 인식되는군.

“대교!”

과연, 실제의 목소리를 내는 건 환각과 달라.

“대교, 넌 어때? 이 안개 속으로 들어 온 이후 뭔가 이상해지지 않았어?”

“아! 이 안개가 문제였었던 건가요? 왜 이상한 잡념들이 떠오르나 했더니………….”

훗~! 역시나 무서운 우리 대교. 잠시지만 날 혼란스럽게 했던 환각과 환청 현상을 단지 ‘잡념’ 정도로 인식했다 이거지? 그래서 지금까지 별다른 반 응 없이 조용했던 거고 말이지.

“대교. 네가 괜찮으면 된 거야. 나도 이정도야 뭐… 음. 그러고 보니 이건 이거대로. 재밌, 겠, 는, 걸・・・・・・? 핫! 그러네?”

전반적인 자체 점검 결과와 대교의 반응을 종합하여 내릴 수 있는 최종 결론은 ‘환각이고 환청이고 나발이고, 현재의 상황 정도로는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 수 없음.’ 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깨달은 대로, 좀 아까의 이상한 꿈같은 상황을 오히려 즐길 수도 있겠어. 어디… 혹시 모르니까 안전 운전을 하려는 의식은 기본으 로 깔아두면서 이 괴이한 안개와 내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뭔가를… 으음~ 그러니까 그에 대한 거부감을 잠재우는 그런 마인드 컨트롤을…………. “저어, 오라버니.””

호오~ 이거, 되는 거 같네?

“조금 전에는 장난을 쳐서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정말이에요.””

기다렸다는 듯 다시 시작되는 환청이 반갑기까지 한건, 일단 현실과 구분이 된다는 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슬쩍 눈동자만을 움직여 옆자 리의 진짜 현실의 대교를 살폈더니 그녀는 무심 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조용히 있을 뿐이었고, 가짜 대교의 환청만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유준 오라버니. 사실 아까의 무공비급은 가짜였지만, 저는 그 도깨비시장에서 진짜 귀한 물건들을 몇 개 발견했었어요. 그중에서 오라버니께서 가장 좋아하실만한 건・・・ 동천만년영삼으로 담근 술이었어요. 어떤 할머니께서 시장입구 바닥에 앉아서 몇 병 팔고 있었는데, 친척주려고 가져왔다 가 못 만나서 차비나 마련하려고 파시는 거라는 딱한 사정을 말씀하셔서 한 병 사놨어요.””

어째 ‘시골에서 가져온 진짜 자연산 귀한 꿀이라고 팔던 분들 스토리가 섞인 듯한…….

“그 ‘동천만년영삼주’는 오라버니 방의 장롱위에 잘 두었고요, 그러니까 나중에 경동시장에서 판다는 이무기 육포, 혹은 천년 묵은 상어요괴 지느 러미 말린 거를 구워서 안주로 드시면 될 거 같아요. 아, 하지만 그때 금동이를 불러서 술을 주실 생각은 마세요. 금동이가 더 이상 동천만년영삼을 먹으면 바로 손오공 될 거라고 몽몽이 그랬어요.”

흐으음~ 이거 나름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신선함이 떨어지는 거 같기도………….

“몽몽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사실 그동안 몽몽은 한국의 여러 재래시장들을 뒤져서 많은 유용 아이템들을 찾아냈다고 하네요.””

호오. 드디어 몽몽 캐릭터까지 등장인가?

「그렇습니다, 주인님. 제가 그동안 찾아낸 아이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몽몽의 환청과 함께 허공에 환각 문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석빙고 깊숙한 곳에서 빙룡의 내단이 생성 중이며 99프로 완성된 상태임.

-청주 육거리 시장의 버스 정류장 부근, 복대 시장 입구에 가끔 출몰하는 리어카 좌판 위에서 각국 중요 정보기관의 연락망을 도청할 수 있는 라 디오 발견, 가격은 1만원대 전후반.

-한때 인터넷에서 ‘무안단물’이라고 불리던 약수의 정체는 ‘공청 석유’로 확인됨.

-성남 모란시장에서 유통되는 토종닭 중에 봉황의 유전자가 검출되었으니 선별 구입하여 복날 백숙으로 섭취 추천.

-전국 각지의 장터, 특히 상설보다는 정기적 패턴의 오일장 등의 장날에 부정기적으로 출몰하는 소위 ‘약장수’들을 주목하시기 바람. 이들이 판매 하는 만병통치약 중에는 소림사의 대환단과 소환단이 60퍼센트 확률로 섞여있는 것으로 추정.

‘「1차 보고는 이정도입니다. 차후 더 확인되는 정보의 제공은……………」

‘왜? 더해보지? 벌써 소재가 떨어졌냐?’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할 수 없・, 죄송합니다, 주인님. 저는 더 이상・・・・・・・」

음? 뭐지? 환각과 환청이 급격히 약해지는 느낌이 아하~ 그렇군. 문제의 안개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

나는 어쩐지 살짝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차의 속력을 줄였다. 안개가 걷혀가며 시야가 좋아지니까, 100여 미터 정도 거리의 지점에 통행금지를 알 리는 구조물이 설치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가 완성된 도로의 끝이라면 출구는… 흠. 바로 옆에 있군. 그렇다면 일단…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기로 할거나?

난 출구 부근의 적당한 갓길에 차를 세웠고, 공연히 피실피실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따라서 내린 대교가 내 옆에 서서 함께 우리가 통과해 온 안개 쪽을 보고 있으려니까 사르릉~ 요몽이 나타났다.

「역시나 두 번째 결계 ‘몽환무’도 날로 먹・・・ 아니, 뭔가 겪으신 거 같긴 한데. 하여간 무난하게 클리어 하신 거 축하! 추카!」

“뭐랬냐. 요몽. 저 안개가 뭐 몽환무?”

「예. 그런 이름이래요. 마신일씨 말로는 재단 사원들 사이에서도 ‘출퇴근길의 구운몽’이라고 악명이 높다네요.」

구운몽・・ .? 단 하룻밤의 꿈으로 일생을 보내는 경험을 하게 되어 나름 득도, 혹은 득불심(?)하는 스토리의 설화·· .? 그럼 저 몽환무인지하는 안 개결계에는 그 정도로 시간의 흐름까지 혼란스럽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건가? 물론 각자의 멘탈이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다른 거 같고, 그래서 나와 대교는 별문제 없이 통과한 거겠지만 그래도 이거, 은근히 난이도 높은 위험결계였었네?

「후후 솔직히 말해서 저도 조금은 걱정했었어요. 대교님이야 천년면벽수련으로 ‘멘탈짱 인증녀’ 이시지만, 주인님께선 그… 뭐랄까, 분명 장난 아닌 멘탈 소유자이시긴 한데 종종 불안정하셔서…

“뭐야? 요 녀석이~?”

「헤헤, 죄송. 하지만 그건 또 옛말이 된 거 같아요. 저 안개, 몽환무에 흐르는 에너지 패턴은 에레보스의 멤버들 중 코드명 ‘환영의 천사’ 못지않은 것으로 추정되거든요? 근데도 주인님은 룰루랄라 즐기면서 통과해 버리셨잖아요. 전 이번에 정말 감탄했어요. 이제는 주인님께서도 완전 멘탈 갑 인증 완료!

요몽이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하는 모습은 다소 오버다 싶긴 하지만… 뭐, 나도 나름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아! 아참! 몽환무 속에서 주인님과 대교님은 대체 어떤 환영을 보신 거예요? 대교님은 시큰둥하셔서 특별한 건 없으셨던 거 같지만…

요몽이 말하며 대교를 돌아보자 대교는 피식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요몽. 난 환영이라고 할 정도도 아닌, 그저 가벼운 걱정거리가 잠시 떠올랐을 뿐이었어. 으음. 그렇지만…오라버니.”

응? 대교가 왜 날 돌아보며 묘한 쓴웃음을 짓는 거지?

“아무리 저라도, 내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실 어머님께 집 안팎의 청소 상태라던가, 냉장고 관리 그런 거 점검받는 상황은 조금 무서웠어요.”

쿳~! 그렇군. 아무리 천하무적 대교라도 두려워할만한 존재는 울 엄니… 즉, 시. 어. 머. 니!

난 그냥 웃었고, 요몽도 꺄하하- 소리를 냈다. 하지만 대교는 자못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요몽. 그러지 말고 어머님과 아버님의 여행일정을 다시 확인해 주지 않겠어?”

「호홋! 알겠사와요. 지금 당장은 물론이고, 앞으로는 대교님의 유일무이 천적, 코드명 ‘시어머니’의 동향은 상시 체크해서 보고 합지요!」

“얘도 차암.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훗. 그럴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않는군.

“… 음. 저는 이 정도였는데, 오라버니께선 어떠셨나요?”

“응? 나, 나?”

에고. 대교가 갑자기 내게 화살을 돌려서 조금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나야말로 누구에게도 말하기 뭐한 유치뽕짝 황당무함의 환영을 겪었는데… 이거,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지?

“어~ 그게, 나도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어. 원판과 닥터 제이가 전화를 걸어와서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알려준다고 하면서 엉터리 얘기를 해주 는 그런 환영이었지.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 현실에 교묘하게 섞여 들어오는 식이어서 처음엔 많이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그래. 대충 이정도로 요약본만 알려주면서 얼버무리자. 세세한 내용은 역시 말하기 X팔려.

“결국에는 환영속의 존재들이 말하는 내용에서 모순점을 찾아낼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지. 그다음에는 뭐 뻔히 다 아는 수 작을 하고 있는 사기꾼들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뭐, 나름 재미있었어.”

내가 엄청 축소 왜곡 편집된 체험기를 늘어놓는 동안 대교가 살며시 내손을 잡아왔다.

“저도 심마(魔)를 다스리는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지만, 유준 오라버니처럼 심마를 오히려 즐기는 그런 경지는 이르지 못했어요. 정말이 지, 대단하세요.”

예상 밖의 칭찬과 ‘역시 내 애인은 짱! 감동이야!’ 라는 의미를 담은 시선을 받자니까 심하게 민망한 기분이………….

「오호홋~ 감동 먹으시기에는 아직 일러요, 대교님!」

으윽. 이 녀석, 요몽. 대체 무슨 찬물 세례를 하려고 이러는 거지?

「환영의 앞부분은 맞을지 몰라도 후반부는 조금 수상해요. 주인님께서 후반부에 보이신 므흣한 표정, 그리고 평소 대교님과 함께 계실 때의 주인 님 사고 패턴..! 우후후~ 주인님께선 몽환무의 실감나는 환영을 대교님과 얼레리꼴레리를 하는 상황으로 유도해서 현실처럼 느끼시며……………」 “야, 야!”

반사적으로 요몽의 말을 끊었지만 대교는 이미 내 손을 놓고 슬며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아, 아냐, 대교. 내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 옆에 진짜 대교 네가 있는데 뭐 하러 환영을 이용해서 그런 걸………

에고. 핀트가 어긋난 변명이 나왔다.

「어멋? 전 그냥 농담을 했을 뿐인데, 주인님께선 정말로 그런 생각하셨나 봐요? 더구나 환영이 아니라 실제로 차안에서 대체 어떤·

“야! 너, 우이 쒸! 비출! 몽몽!”

「앗! 죄송! 죄송해요, 주인님! 제가 장난이 좀 지나쳤어요!」

요몽은 몽몽의 은빛 오랏줄이 등장하여 포박 및 봉인될 것이 두려운지 울상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런 상황을 예상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몽 몽은 은빛 오랏줄을 발동하지 않고 있었다.

뭐야, 이거. 몽몽 녀석, 그렇게 바쁜… 아, 이제 등장하는군.

「죄송합니다, 주인님. 마침 ‘서포트 관리 모듈’을 업데이트 중이어서 호출 응답이 늦어졌습니다.

“… 요몽 관리 방법에 뭔가 추가한다고?”

나는 물론이고 요몽과 대교까지 주목하는 가운데, 몽몽은 뒤춤에서(?) 뭔가를 스윽 꺼내들었다.

「엑! 생사령?」

요몽이 놀라 외친 것처럼 몽몽의 왼손에 들려있는 것은 분명 나의 생사령과 똑같은 가상현실 속 생사령이었다.

「몽몽 오빠. 그걸로 날 어쩌게? 설마……………」

요몽이 질린 표정으로 한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치는 시늉을 해보이자 몽몽이 풀썩 웃었다.

「역시 생과 사의 의미는 너무 무거운 거 같군.」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몽몽은 오른 손을 들어서 왼손의 생사령을 살짝 쓰다듬는 듯한 동작을 했다. 그러자 사르릉~ 은빛 가루가 흩날리는 비주 얼과 함께 글자들이 바뀌는 것 같았다. 몽몽은 간단하게 글자가 수정된 자신의 생사령을 둘로 나누어 한손에 하나씩 들었다.

흑령과 백령………? 흠. 여기까진 내 생사령의 디자인과 별칭만 벤치마킹한 수준인데… 과연 사용법은 어떠려나?

「이 흑백령 시스템은 아직 베타 버전이야. 이 백령에 링크 연동되는 프로그램도 이미 네가 알고 있는 ‘A등급의 미각인식 패치’정도지.」

몽몽이 설명하며 백령을 들어보이자, 백령 자체가 밝은 은빛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요몽의 이마에 백자가 문신처럼 새겨지고 있었 다.

“어멋? 어머? 이거 뭐야? 이런 식의 보조 프로그램 패치는 처음인데. 근데 이거 아하? 일체화가 디따 빠르네? 갑자기 전에 먹었던 식신 요리들 의 맛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우와~ 대단해, 몽몽 오빠! 그땐 몰랐던 숨은 맛까지 이제는 느낄 수 있을 거 같아!」

몽몽 녀석, 맛배기 베타버전인 것처럼 말했지만 결국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시스템인 모양이네. 요몽이 저렇게 정신줄 놓고 군침을 꼴깍이는걸 보 니 말야.

「…자, 이번엔 흑령을 체험할 차례야, 요몽.」

「자, 잠깐 오빠!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 윽?」

어느 틈에 몽몽의 손에 들린 흑령 쪽이 어두운 은빛을 발하면서 요몽 이마의 글자도 흑자로 바뀌어있었다.

「뭐, 뭐야. 이, 이 기분 나쁜 감각은・・・ 으흑~!」

몽몽보다 조금 위의 허공에 있던 요몽이 힘을 잃고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은빛 오랏줄에 포박당할 때와 비슷해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행능력 을 봉인당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이거언~ 서얼마아~」

요몽의 말이 늘어지는 것과 함께 몸도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쯤에서 어찌 버텨보는 기색이긴 했으나, 결국에는 견디지 못하고 추욱- 늘어져 눕다 시피한 자세가 되고 있었다.

「으… 패티의…무기력… 바이러스… 하필 이걸.

「맞아, 요몽. 너와 패티가 바이러스 배틀 게임 할 때 만들어진 바이러스지. 내가 코드를 조금 변경해 놓았으니 네가 가진 백신은 무용지물이야.」 「치이… 몽모… 오바… 미오… 으, 으익.」

요몽은 나름의 기합성 같은 것을 내며 포륵(?) 기운 없기는 했으나 확실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아. 이건 저의 예상에서 벗어난 패턴의 결과입니다.」

몽몽은 왠지 기쁜 듯 웃으며 나와 대교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안면 근육의 통제 불능으로 타액의 외부유실과 같은 현상을 그런 모습을 두 분께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사력을 다해 자신의 방으로 대피한듯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요몽은 방금 우리 앞에서 침까지 겔겔 흘릴 상태 일보직전까지 갔었다는 거군. 몽몽이 설마 지 동생을 그 정도까지 만들어 버릴 만 큼 모진 녀석은 아니겠지만… 흠. 어쨌든, 그 무기력 바이러스인지 뭔지, 까불이 요몽에게는 최악의 벌칙 아이템이겠군. …근데, 나 아까 왜 몽몽을 호출했던 거지? 몽몽이 새로운 아이템 사용 하는 거 구경하다가 정작 녀석을 왜 불렀는지는 잊고 있었네, 그려.

난 뒤늦게 몽몽을 비상호출하게 되었던 상황을 상기해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기분이 복잡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저기, 몽몽. 생각해보니까, 내가 좀 오버했던 거 같다. 물론 요몽이 먼저 오버하고 실수한 점이 있기는 해도, 그런 정도는 네가 나중에 따로 천천 히 교육해주거나 요몽 스스로 반성해도 될 사안이었을 텐데 말야. 일단… 몽몽 너한테는 미안! 앞으로는 정말 꼭 필요한 경우에만 부르…려고 노력 하마.”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치고는 다소(?) 뻔뻔하다싶긴 했지만, 몽몽은 별 불만 없는 듯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근데, 몽몽. 기왕 온 거 마무리는 하고 가라. 가급적 심플한 패턴으로 부탁해.”

「이십여분 전에 종료된 코드명 마신일과 요몽의 대화내용, 그 외 수집된 다각도 정보 분석에 의하면 더 이상은 방해요소가 없는 것으로 판단됩 니다. 즉, 그냥 다시 차를 타고 출발하시면 됩니다.」

“… 그러냐?”

「예. 그렇습니다.

이런, 이런…………! 난 분명 더 이상 번거로워지는 게 싫어서 심플한 진행을 원했는데, 근데 막상 몽몽이 그걸 장담해주니까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드 는 건 또 왜일까?

“그럼 뭐… 가야지. 그러자, 대교.”

내가 다소 싱거운 태도와 함께 차 쪽으로 몸을 돌리자 몽몽이 슬며시 한손을 들었다.

「잠깐. 다른 패턴의 상황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응? 다른 가능성?”

나도 모르게 떼려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몽몽은 약간 망설이는 기색과 함께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선 현재, 빠르게 재단 방문을 진행하시어 그동안의 여러 의문점들을 풀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해당 재단의 특이사항, 특히 구성원들을 직접 접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강하십니다. 즉, 귀차니즘과 호기심의 충돌을 겪고 계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 훗. 내 마음을 너무 꼭 집어 분석하니까 기분이 좀 거시기하네. 흠. 그래. 그럼 이 시점에서 나의 두 가지 마음을 다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추 천 패턴이 있는 거냐?”

「주인님의 뜻에 얼마나 부합될지는 저도 계산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현 위치를 유지한 채 잠시 더 대기하신다면, 곧 흥미로운 인물들 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내가 흥미로워할 인물…………? 근데 재단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대기해야 한다는 건……….

「현재 일반내비게이션이 안내하지 않는 톨게이트, 미로 트랩이 설치된 산길 등의 코스를 주인님과 같은 최적 패턴으로 통과중인 차량이 있습니 다. 약 4분 20초 후면 몽환무라 불리는 안개결계에 진입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흠. 그래? 나 같은 사기 캐릭이 아니라면, 원래 이 길에 익숙한 재단 사원이라는 얘기겠군.”

나는 어느 사이에 다시 몽환무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참고로, 현재 접근중인 차량에 탑승 구성원은 2인, 1요로 추정됩니다.」

“뭐? 2인은 그렇다 치고, 1요? 요괴가 타고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해당 비공인존재의 현실공간 실체화 패턴은 특정 병기와의 일체화를 이룬 즉, 주인님의 병기인 코드명 ‘정글’과 유사한 존재로 추 정됩니다.」

뭐, 시라, 고라? 내 정글도처럼 자아를 가진 병기를 다루는 인물이 오고 있는 거라고?

“몽몽. 아공간 창고 개방.”

난 나도 모르게 그랬게 말했고, 열려진 몽몽의 아공간에서 정글도를 빼든 것도 거의 무의식중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오라버니?”

대교는 살짝 의문을 표하면서도 자신역시 청명검을 챙겨 들고 있었다.

“아니. 오해 하지 마, 대교. 난 그냥 비슷한 녀석이 온다니까 인사나 시키려고 그래.”

피식 웃은 대교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청명검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뭐라 낮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청명검에도 빨리 ‘념’에 의한 자아가 생기기 바라는 대교 나름의 주문인 셈이군. 뭐라는지 내용이 궁금하긴 하지만 프라이버시 침해는 삼가기로하고…….

대교의 청명검은 항상 검집에 넣어져 있지만, 난 습관적으로 정글도와 도집을 따로 두는 편이었다. 그 도집을 새깽이 늑대 ‘라프’가 베개 삼아 베 고 잠들어 있었다.

“꺄웅?”

내가 도집을 슬며시 빼내자 라프도 잠에서 깨어 잠시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곧 폴짝 뛰어나와서 내 왼쪽 어깨에 앉았다.

아직 라프까지 나오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얜 뭐 그렇다 치고………….

“정글아. 너, 뭔가 느껴지는 거 없냐?”

난 정글도에게 말을 걸면서 녀석을 도집에 넣었다.

“정글이 너와 비슷한 존재이면서 적은 아닌. 말하자면 너의 친구 후보가 오는 모양이다. 그러니 날은 감추고 만나는 것이 기본 예의겠지?”

…흠. …정글이, 요녀석. 주인 말을 생까고 나오지 않는군. 동족인지 뭔지가 오든 말든 싸움이 아니면 흥미가 없다는 건가?

「주인님. 해당 차량이 몽환무에 진입했습니다.」

“응? 이제야? 좀 전에 네가 말했던 시간은 벌써 지나지 않았냐?”

「그렇습니다. 이는 차량이 산길 미로코스를 통과하던 도중 일시적으로 정차했기 때문에 생긴 오차입니다. 정차이유는 탑승자 중 여성의 요청에 의한 ‘경치 감상’으로 추정됩니다.」

“훗. 우리 비슷한 커플인 모양이네. 귀신 잡으러 다니느라 바빠서 출근길 경치조차 제대로 감상할 여유가 없었던 건가?”

「상세 사유는 저도 알 수 없으나, 일단 두 사람은 커플이 아닌 ‘남매’입니다.」

“에? 그래? 어.. 근데 넌 그동안 재단 사원들 정보도 꽤 많이 확보해 놓은 모양이네? 하여간 재주도 좋아, 우리 몽몽선생.”

「…재단 본부의 시스템 해킹은 아직 미비하며 재단과의 친분을 고려하여 더 이상의 해킹도 유보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재단 구성원들의 활 동은 소위 ‘탐문’ 활동만으로도 많은 데이터 수집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군. 내가 모르고 살아서 그렇지, 이쪽 계통에서는 역사 깊고 유명한 곳이라니까, 잘만 물어보고 다녀도(?) 많은 걸 알 수 있게 되는 거였어. 참고로, 주인님께서는 인식하지 못하셨을지 모르나, 저 몽환무에는 결계 내부와 외부의 에너지 흐름을 차단 및 왜곡하는 패턴도 존재합니다.」 어?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내가 저길 통과해 올 때도 끝날 때쯤에 갑자기 빠르게 안개가 사라지며 주변 경관이 보이기 시작했었던 거 같네. 「…따라서, 몽환무를 통과하는 차량의 탑승자들은 통과직후 마음의 대비없이 주인님과 대교님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파생 될 수 있는 문제를 숙고하시어 대비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뭐야, 이거. 몽몽 이 녀석, 뭐가 문제인지 딱 알려주질 않고, ‘댁이 알아서 하셈’ 모드로 나오네? 이 녀석 설마 또 초기 사용자모드를 지멋대로 적 용… 아, 아니! 그게 아니구나!

나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 아차 싶었다.

에고야. 좀 전에 내가 충동적으로 정글도를 꺼내든 게 실수, 에러였었구나. 저 몽환무라는 안개결계를 통과해서 오는 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두터운 커튼처럼 드리워져있던 안개가 걷히자마자 눈앞에 ‘칼을 든 수상 만땅의 남자’가 떠억 버티고 있는 그런 상황이 되는 거야. 두 명중에서 최 소한 한명은 요괴병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자일 테니, 한눈에 나에 대해서 좀 더 세세하게 파악해 버릴 수도 있겠어. 예를 들어….

“어멋?! 손에 요괴칼을 들고 어깨에는 마계 늑대를 장착(?)! 그리고 엄청나게 예쁘면서도 무시무시한 여자고수 애인까지 거느린, 무지막지 살벌한 괴물남자가 결계 출구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어요! X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빵 날려욧!”

젠장. 이노무 분위기다운 상상 버릇은 고쳐지지도 않네. 아, 암튼! 상상 속 여자의 대사톤은 그렇다 치고, 내용은 실제로 비슷하게 흘러갈 가능 성이 있기는 해. 그러니 몽몽 말대로 뭔가 대비를… 우쒸!

뭔가 하기도 전에 짜증이 앞서는 건, 결국 정글도와 청명검, 라프까지 전부 다시 몽몽의 아공간 창고에 넣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쫀심 때문에라도 했던 행동 무르기는 싫………….

「주인님!」

윽. 오는 건가? 어쩐다? 일단 정글도를 손에 쥐고 있기 보다는 등뒤로 돌려 메고, 최대한 사람좋게 쪼개기라도.. 으~ 왠지 비굴한 기분이 들어서 못하겠다!

부와아앙-!

예상했음에도 흠칫 놀랄 정도로 큰 엔진음과 함께 안개를 헤치고 등장하는 승용차 한 대……………! 에이 쒸! 모르겠다!

난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차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뒤에 있던 대교를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어멋? 왜? 흡?!”

기습 포옹과 입술 덮침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대교가 본능적으로 저항의 몸짓을 했지만, 나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뒤쪽 도로를 지나가는 차가 일으킨 바람에 흩날리는 대교의 머릿결이 허공에 꿈처럼 아름다운 수를 놓고 있었다.

끼이이이이익~!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추는 소음 때문에 퍼뜩 정신이든 내가 팔에 힘을 풀자, 대교의 젖은 입술이 하아~ 가쁜 숨을 토해냈다.

“뭐, 뭐예요.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말은 그래도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며 상기된 표정 어디에도 원망의 기색은 없는 거…같지? 다른 때와 달리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던 점이 대교에게 무지 미안하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대교와의 므흣한 시간은 참으로………….

「주인님!」

아차차. 나 또 현실을 잠깐 망각했었네?

「두 분의… 적절한 퍼포먼스로 인해 목표 차량 탑승자들의 불필요한 경계심을 배제한 정황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크흠. 흠. 그러, 냐?

어색하게 대꾸하며 몽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로부터 삼십여 미터 떨어진 곳의 갓길에 은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뒤쪽으로 길게 나있는 스키드 마크를 보니까 새삼 민망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름 보람이(?) 느껴지기도 했다.

‘우린 뽀뽀하기 바빠서 누굴 노리고 공격하고 어쩔 시간도 없는 커플임’, 대충 그런 의미가 잘 전달되었다면 이젠 혹시라도 발생할지도 몰랐던 다 툼의 여지도 없어진 셈…………..!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가 좋으면 된 거지, 뭐.

난 그런 마음으로 당당(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기다릴 수가 있었지만, 대교는 부끄러워하는 기색과 함께 몸을 숨기듯 내 뒤에 서고 있었다.

어디보자, 드디어 차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두 명의 남녀가 내리는데… 몽몽이 남자 쪽의 허공에 먼저 기본적인 프로필을 띄워주는군.

-이름, ‘유인호’ 현재 서울 소재 000대학 4학년. 특기는 불가의 무예로 ‘불무도’로 추정.

흠. 예상보다 젊은, 풋풋한 청년이었군. 불가의 무예로 귀신이나 요괴를 제압하는 청년 고수라 이거지? 용모는 우리 요몽이 열광할 정도는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꽤 어? 가만? ‘남매’라고 했지? 오빠가 대학생이면 여동생 쪽은 그럼…

-이름, ‘유소희’. 서울 소재 ‘미진 여고 3학년. 나이에 비해 다양한 주술 능력을 갖추고 오빠이자 파트너인 유인호의 전투 서포터로서 알려져 있었 음. 최근 코드명 ‘묵정(墨精)’이라는 ‘대요마용병기’의 사용자가 됨으로서 독자적인 전투력까지 확보한 것으로 추정.

잰 또 여고생 퇴마사? 게다가 정글이 친구 후보인 요괴병기도 쟤 꺼고? 그리고… 요즘은 소위 ‘엄친딸’이 희귀종이 아니게 된 건가? 능력 좋은 애 가 예쁘긴 또 왜 저렇게 예쁜 거야?

난 어쩌다보니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이를 무색케 하는 소위 ‘무서운 아해들을 너무 많이 접한 터였다. 그래서 이 범상치 않은 남매의 신상내력도 그리 신기하지는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쟨 왜 저래?’식으로 생각할 것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공연히 틱틱거리는 마음이 되는 건.. 제기럴! 내가 어린 아그들(?) 앞에서 얼레리꼴레리 생쇼를 했다는 사실은 너무… 으~ X팔려. 난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대학생 청년과 여고생 소녀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딴청을 피우고 싶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이것 봐라? 지금 X팔리고 뭐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닌 거 같네 그려. 아무리 적을 만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이거, 이 친구, 정 말장난이 아닌 거 같은데?

어느덧 몇 미터 앞까지 다가와서 걸음을 멈추고 있는 청년, 유인호. 겉으로는 이렇게 가까이 왔는데도 느끼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수준의 기운을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얼핏 떠오르는 이미지는 크고 단단한 바위가 아침 이슬에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의 본능인지 직관력인지는 이 청 년 바위를 적시고 있는 것은 깊고 깊은 땅속 어딘가의 심층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 지금, 맞는 비유를 떠올린 건지 모르겠네. 여하간, 불무도(佛武道)라는 무예를 익혔다고 했지? 불가의 무예가 본래 이런 은근한 특성이 있는 건 지, 그냥 본인이 나이에 비해 엄청난 경지를 이룬 건지… 그리고 또, 뭔가 의문점이 이건 아무래도 한판 붙어봐야 알 수 있을… 에고, 나 왜 이러 니?

난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 미안!, 미안…해요.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다른 누가 보면 뜬금없게 보일 사과였지만, 유인호 역시 약간의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그쪽의 강맹한 기운에 당황하여 내심 임전태세를… 음.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유인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왔고, 나도 나름 정중한 마음으로 마주 고개를 숙여보였다.

난 사실 나이를 좀 따지는 편이라, 나보다 어린 친구에게 이런 마음 잘 안 생기는데… 이 친구는 좀 예외로군. 이건 아무래도 내가 울 엄니 영향을 받아서 불교계 인물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서…려나? … 흠. 근데 그사이에 여자들 쪽은 또 왜 이렇게 심각해진 걸까?

내게서 서너 걸음 거리를 둔 대교가 살짝 마중제일녀 모드 스위치를 올린 상태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대편 소녀를 보니 그녀도… 아 니, 저 유소희라는 소녀는 적극적으로 싸우려는 기색이 아니야. 은근하지만 확실하게 살기를 발산하고 있는 건, 소녀가 어깨에 메고 있는 검은색 가 방 안에 있는 무언가로군. 근데 저 가방의 형태가 이제 보니 왠지 낯이 익네? 내가 언제 저런 가방을 본 일이……………

「’집’입니다, 주인님.」

아, 그렇구나. 흑주의 활집과 비슷한 느낌이라서 낯익은 거였어. 근데 그러면………..

-저 소녀의 요괴병기는 칼이 아니라 활이었던 거냐?

「그렇습니다. 해당 병기의 정식 명칭은 ‘묵정사사궁입니다.」


아하~ 그래서 정글이가 계속 시큰둥하고 반응이 별로 없는 거구나. 정글이는 같은 칼끼리 정면으로 맞장 뜨는 걸 선호하는 녀석이고, 다른 무기들 중에서 활은 주인인 내가 정글도 다음으로 선호하는 무기다보니 정글이에게도 친숙한 느낌을 줄 테고, 그러니까 저 묵정인지 묵정사사궁인지와 정 글이가 친구 먹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 거는 좋은데, 뭐냐, 이 상황?

두 남자, 나와 유인호가 비록 잠깐이라도 한판 뜰 기미를 보였으니, 양측 진영의 여자 파트너들도 임전태세가 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남자들끼 리는 어찌어찌 어영부영 화해무드가 조성되었는데도 이 무서운 여자분들은 여전히 살벌대치 상태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소희야. 묵정을 좀 진정시킬 수 없겠니?”

유인호가 먼저 동생 유소희에게 말을 건네자, 유소희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저 언니하고 칼이…………….”

대교의 살기가 먼저 거둬져야 자기도 자신의 요괴활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얘기로군. 대교도 동생뻘 소녀와 더 뭘 어쩔 생각은 없을 테니 쉽게 먼 저 진정을 할 생각이 없는게벼?

대교는 마중제일녀 모드를 접기는커녕, 약간씩이기는 해도 점점 더 매서운 기운을 높이고 있는 것 같았다.

“대교. 대체 왜……….”

내 목소리를 들은 대교의 기세가 살짝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더 말을 붙이기 무서울 만큼 냉랭한 분위기였다.

뭐지? 대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내 쪽 상황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어째서………….

-몽몽. 넌 뭐 아는 거 없냐? 대교가 왜 이러는지 말야.

「… 대교님보다 대교님의 검, 코드명 청명의 상태에 주목해야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뭐? 청명검? 청명검 상태가 뭐 어떻다고 대교까지… 어, 가만? 좀 전에 저 유소희라는 소녀도 분명 청명검을 언급했었지? ‘저 언니하고 칼이…’라 고 말야. 정글이도 아니고 청명검을 따로 인식한다는 건………….

-뭐야, 몽몽. 대교의 청명검도 정글이처럼 ‘자아’가 생겼다는 말이야.

「‘념 에너지’의 분석에는 현재의 저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에너지의 단순 총량만을 비교하자면, 주인님의 정글도와 비교해 청명검은 이미 주 인님의 정글도를 능가합니다. 이러한 사항은 이전에 설명을 드린바있습니다.

-그야 정글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바로 확인해 본거, 기억하지. 청명검에는 대교의 천년에 걸친 념 에너지가 더해졌으니까 에너지 빵빵한 것 도 당연한 거고 말야. 하지만 에너지 많다고 자아가 형성되는 건 아니라며.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인님. 지금은 코드명 청명의 각성 여부 및 패턴 분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

“저어, 진유준씨?”

몽몽의 말을 끊은 것은 또 하나의 자아를 가진 병기 소유자’, 유소희였다.

“진유준씨, 맞죠? 마비서 아저씨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소희, 유소희라고해요. 재단의 인턴사원이죠.”

“아… 안녕? 내가 진유준 맞아. 그리고… 음. 하여간, 반가워요, 소희양.”

“후후. 저도 하여간 반가워요.”

유소희와 내가 뒤늦고 이상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내 뒤의 대교는 조금 더 냉기를 키우고 있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예상보다 차분한 음성이 들려와서 돌아보니, 대교는 고개를 숙여 내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 청명의 변화를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좀 더 성장한 다음에 선보이고 싶었는데… 저를 닮아서 성격 급한 소녀가 되었나 봐요.” 

대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왠지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일지 알 것 같았다.

천년 면벽 수련의 대교를 닮았는데 성격이 급해졌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훗. 하는 수 없군. 그 정도로 급한 일이라면 나도 협조해 줄 수밖에 없지.”

대교는 고개를 들고 놀람과 기쁨을 동시에 드러냈고, 나는 그녀에게 피식 싱겁게 한번 웃어준 후, 유소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희양. 초면에 이런 얘기하기는 참 거시기 하지만… 음. 좋아하는 간식이 뭐지?”

“예?”

“떡볶이나 피자, 치킨, 뭐 이런 것들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뭔가 묻는 거야.”

“… 말씀하신 거 다 좋아하고, 다이어트 같은 거 안 키우지만……….”

“좋아. 그럼 그 걸로 계약하자. 소희양이 우리 쪽 아가씨, 대교와 ‘스파링’ 한번 해주면, 파이트머니 대신 그 메뉴들로 한턱 쏘지. 어때? 오케이?” 나의 즉흥적이고 황당한 제안에 유소희가 어이없어하는 건 당연했다. 나도 내가 좀 너무했다싶어서 뭔가 더 설명을 덧붙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그러려니까, 뭔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자니까, 유소희 쪽이 먼저 키득 웃었다.

“듣던 대로 재미있는 분이네요.”

유소희는 진심으로 나와 내 썰렁 행동패턴을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좋아하는 매장의 메뉴판을 손에 들고 있는 표정으로 유인 호에게 물었다.

“오빠. 어떡하지? 나, 페퍼민트 치즈크러스트, 라지… 먹고 싶어졌어.”

… 으음. 저 암호문은(?) 조카아이들이 피자집 광고지를 들고 뭔가 외치던 때 들었던 거 같기도 하군. 어쨌든 유소희는 우리 쪽의 ‘뜬금없는 스파 링’ 제안을 오케이 한 셈인데, 저쪽 매니저(?) 유인호의 반응은………….

“조심해라.”

짧은 한마디로 자신의 뜻을 밝힌 유인호가 스윽- 뒤로 물러났고, 나는 그만 감동 먹고 말았다.

와아우! 이 두 사람. 정말 맘에 드는데? 당장 이 남매를 지하무림에 스카웃하고 싶・・・ 웃! 이건?!

유소희는 어깨에 메고 있던 활집을 앞으로 들고 상단의 지퍼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활집 안으로부터 엄청난 살기와 무언가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소위 ‘요기(妖氣)’… 요괴의 힘…? 낯설면서도 왠지 익숙한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 강하고… 어둡다. “대교.”

너도 조심하라는 말을 하려던 생각을 접고 그냥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제멋대로 행동하는 걸 이해해줘서…”라는 말이 이어진 것도 같았으나, 대교의 나지막한 음성은 그녀 자신이 뿜어내는 강대한 기운에 덮여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저 묵정이라는 요괴 활의 기운은 검고 어두우면서도 활활 타오르는 느낌…………? 그에 비해 대교의, 아니 대교와 청명검의 기운은 눈부신 광채를 머 금은 냉기의 정화가 사방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한 아이고야! 시작도 안했는데 뭐가 이리 무서워!

“자, 잠깐!”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양측의 무서운 소녀들 누구도 내말을 듣지 못한 거 같았다. 유소희는 묵정의 힘을 봉인하고 있었던 모양인 활집을 완전히 벗겨서 뒤쪽으로 던졌고, 대교도 스렁- 청명검을 뽑았다.

‘정글아! 비상! 정신 챙겨!’

난 등에서 멍 때리고 있던(?) 정글도를 움켜쥐고 양측의 기운이 충돌하며 얽히기 시작하는 지점으로 몸을 날렸다.

“잠까안-!!”

크게 외치며 정글도를 치켜드는 순간, 불끈 정글도의 기운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쩌어어억!

장작을 쪼개듯 양측의 기운을 가른 정글도가 바닥에 박히며 쩡! 짧고 굵은 폭음이 터져 나왔다. 나를 기준으로 왼쪽의 검은 기운과 검은 열기, 오른 쪽의 하얀 냉기가 동시에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나 이거야 원!”

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봐! 이봐, 숙녀분들!”

나는 어찌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양쪽 소녀들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난 친선 스파링 경기를 주선한 거야. 주변 다 날려버릴 정도로 생사결을 벌이라고 한 게 아니란 말이지.”

말하면서도 어느 쪽에서든 반발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양쪽 다 찔끔 기가 죽는 기색이 느껴지고 있었다.

일단 잘 말리기는 한 거 같은데.. 근데 이제 어쩐다? 이제 자기들끼리 알아서 적당한 수준과 분위기로 다시 시작해주면 고맙겠…는 게, 아. 니. 라! ・쯧. 그래. 이건 아무래도 좀 너무 아닌 상황이야. 내가 아무리 울 대교 위주의 사고방식 소유자라지만, 이번만은, 이런 상황에서는, 그래. 눈물을 머금고(?) 대교를 혼. 내. 야. 해.

애써 대교를 야단치기로 한건, 나의 무리한 스파링 제안을 웃으며 수락해준 남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대교!”

나는 무겁게 대교를 부르며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나는 잠시 그냥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교가 내 예상과 달리 지극히 안정적이고 시크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교?”

다시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슴께까지 들어 올린 청명검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청명. 내가 너를 너무 몰랐었구나.”

뭐야? 설마 벌써 자아 형성은 물론이고 대화까지 가능해진 걸까?

“성급한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였어. 미안하구나, 청명.”

으으음. 대화 같기도 하고 혼잣말인 거 같기도 하고. 어? 가만? 저거, 혹시?

청명검 위로 뭔가 희미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흐릿하고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어서 구체적인 인식이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뭔가 를 나는 보았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더니, 꿈자락 같던 형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교! 방금 그거……………”

“아, 오라버니?”

대교는 이제야 날 돌아보며 태연하게 청명검을 검집에 넣고 있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요.”

“어, 그건.. 음. 아니, 뭐, 부끄러운 모습이었다기보다… 어, 암튼, 사과를 하려면 나보다 저기 저, 유인호씨와 유소희양에게 해야 할 거 같은데?”

중간에 서있던 나는 뒤로 조금 물러났고, 고개를 끄덕인 대교가 주저 없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요괴활 묵정을 엉거주춤 들고 시위까 지 놓을까말까 망설이던 유소희가 어색했던 자세를 풀고 묵정을 든 팔도 내려뜨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와 묵정 주위에 아직까지 맴돌고 있던 검 은 요기가 슈우욱- 묵정의 몸체로 빨려 들어갔다.

다행히 유소희와 묵정 콤비도 비교적 쉽게 진정을 해주는군. 만약 누군가가 이 싸움을 기대하고 관전 중이었다면 ‘꿀잼 보장의 스페셜 이벤트가 이 렇게 허무하게 무산되다니! 진유준, 저 쓰파시키!’라며 날 씹어댔겠지? 사실 나 역시 내가 기껏 성사시킨 대결을 무산시키기는 정말 싫었어. 하지만 결국 멈추게 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무엇보다 대교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

그 정상적이지 못했던 대교가 이제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유인호와 유소희 남매 바로 앞에 서고 있었다.

“유인호님, 유소희님. 초면에 너무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대교는 정중한 사과 멘트와 함께 포권하며 깊숙이, 아주 깊숙이 고개와 상체를 숙였다.

“아, 아니예요.”

오히려 당황한 표정의 유소희가 양손을 크게 저었다.

“이러실 필요 없어요. 저도 잘 한 거 없는걸요.”

유소희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병기 묵정을 조금 들어 올려보였다.

“사실, 제가 이 묵정의 힘을 그만큼 끌어내본 건 처음이라 조금 무서울 정도였어요. 그쪽에서 먼저 멈춰주셔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훗. 아침 이슬 머금은 풀잎처럼 겸손한 아가씨로군요.”

“예? 아… 호홋. 제가 좀 그런 얘긴 듣는 편이죠.”

“저와 청명이 더 부끄러워지네요.”

“…청명. 그 검에 머물고 있는 영혼의 이름인가요?”

유소희가 새삼 청명을 주목하자, 대교는 청명을 조금 소희 쪽으로 들어 보이며 약간 난처한 표정을 떠올렸다.

“실은 이 아이가 이제 막 깨어난 참이라 다른 이름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음~ 저로서는 청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거군요. 저의 묵정처럼… 아, 아니다. 취소! 죄송해요. 그러면 안돼요!”

대교는 물론이고 나까지 갸웃하는 기색을 보이자, 유소희는 자신의 활 묵정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묵정이 이렇게 된 건 아, 알아, 묵정. 그런 얘기까진 안 해. 아, 죄송. 해요.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하여간 묵정의 사연은 좀 슬퍼서… 그 러니까 그런 사연이 또 있으면 안돼죠.”

중간에 묵정과 ‘념에 의한 소통’이 있었던 거 같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어린 아가씨가 무시무시한 요괴활 사용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저렇게 깊이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 이, 이소녀, 유소희・・・ 탐난다. 심하게 탐나는 인재로다. 쿨한 불무 청년 유인호도 마찬가지. -몽몽. 만약 이 남매를 스카웃할 수 있다면 말야. 그렇게 된다면 어떤 자리가 이 친구들에게 어울릴까? 오빠 쪽은…….

[죄송합니다, 주인님! 지금은 대교님 말씀을 들으셔야할 타이밍으로 판단됩니다.]

뭐? 아, 이런!

늘 그렇듯(?) 의식이 샛길로 빠져들어 접근도 몰랐던 대교가 살짝 내 팔을 잡아오고 있었다.

“유준 오라버니. 여기서 조금 더 시간을 가져도 될까요?”

“응 어, 그야 대교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감사해요. 아, 그런데 준비를 조금 도와주셔야 할 거 같은데…………

“그것두, 당근 얼마든지!”

원래 내가 먼저 이들과의 만남을 원했던 거라 선선히 수락…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그런 거지. 내 팔을 잡은 대교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어떤 의지, 눈빛의 애절함(!). 이런 건 별개의 문제, 암.

잠시 후,

나는 대교의 지시대로 우리 차의 트렁크에서 뭔가 잔뜩 꺼내 옮겨야 했다. 우리 차와 남매들의 차 사이의 적당한 위치에 대나무 돗자리가 먼저 촤 륵- 깔렸다. 그리고 대교는 그 위에 척척 익숙하게 뭔가를 거창하게(?) 세팅하고 있었다.

• 다과상에 거의 풀 버전 다기 세트, 십 여 가지의 찻잎 봉투… 이러 거 대교가 항상 구비해 놓은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손님(?) 접대까지 하게 될 줄은…….

“… 오라버니.”

“응? 이 정도면 된 거야? 불(?) 끌까?”

“예. 감사해요.”

난 왼손의 손바닥에 집중하던 태양마공의 기운을 거두고 그 손위에서 조용히 끓고 있는 도기 주전자를 대교에게 건네주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대교의 ‘야외 찻집 차리기 신공’에서부터 놀라거나 어이없어 했을 것이고, 나의 태양마공 버너 초식(?)에는 더더욱 이상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 지만 예상대로 유인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조용히 우릴 지켜보고 있었고, 유소희만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와아~ 멋져요. 우리 오빠도 좀 배웠으면 좋겠어요.”

“응? 왜? 유인호씨도 이정도 내공은 있지 않나?”

“후후. 그게요. 내공의 유무를 떠나서 우리 인호 오빠는 융통성이 너무 없어서 그런 무공 활용법은 아예 생각도 안하는 게 문제죠.”

“…그게 문제인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생활 무공’이 모토인지라, 여기 이 정글도로 고기도 곧잘 구워먹지.”

“어멋? 진짜요? 그거 진짜 맛있겠다!”

갈수록 더 맘에 드는 호감소녀 유소희는 슬쩍 지 오빠 유인호의 팔을 툭 쳤다.

“들었지, 오빠. 다음엔 오빠도 동생에게 생라면 씹게 하기 없기!”

“… 그때는 미안했다. 하지만 난 역시 무공을 그런 식으로는…………….”

처음으로 살짝 당황하여 보일 듯 말 듯 홍조까지 피어 올리는 청년 유인호.

“저어.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는 건 아닌지……………

대교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한과 몇 개가 놓인 접시를 내놓자, 유소희가 주저 없이 손을 내밀어 집어 들었다.

“전 좋아요. 이런 분위기, 이런 간식, 무엇보다 이 찻잎 내음. 너무 오랜만이에요.”

유소희는 상체를 기울여 대교가 찻잎을 우려내고 있는 도기 위에 코를 가까이하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유인호 역시 대교가 차를 준비하는 과 정과 시간에 익숙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의 스승님께서는 차도에도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어머. 그럼 두 분도?”

“따로 사사받지는 못했습니다. 어렸을 적 잠시 접했던 스승님의 향과 맛을 조금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인호의 대답을 들은 대교는 더욱 차를 준비하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차 맛 좀 아는 남매’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이제야 대접할 의욕이 솟는 상 대를 만났다’는 기쁨이 더 큰 거 같았다.

・쯧. 이렇게 되면 이제 내가 가장, 아니 나 혼자 벌쭘 따 분위기가 되어버리는군. 난 따로 커피믹스 하나 타먹으려고 했더니 왠지 눈치 보여서 안 되겠네.

다시 한 시간 정도가 흐른 후,

미완성 자동차 도로 갓길에 뜬금없이 오픈한 대교의 야외 테마 찻집’은 꽤 성공적이었다.

뒤죽박죽 이상하게 진행되었던 우리의 첫 대면 과정은 찻잔을 홀짝이며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로 차츰 정상적이 되어갔던 것이다.

가만있자~ 늦게라도 가진 자기소개 시간덕분에 서로 많은 것을 알게 된 건 좋은데 갑자기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몰리니까, 내 머리 속 맷돌에 과 부하가 걸리는 느낌…? 젠장. 내가 지금 체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그러니까, 그게… 아! 그래. 그거였지?

-대교.

내가 대교에게 전음을 보낸 건, 그녀가 세 번째의 새로운 차를 분배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체의 대화가 멈추었을 때였다.

-대교. 방금 들은 소희양 얘기대로라면, 저 묵정이라는 활은 우리의 정글도와 청명검과는 태생이 틀린 거잖아. 본래 인간이었던 소년의 육체와 영 혼이 어떤 대장장이에 의해서 저런 활에 일체화된 거라니까 말이야.

그랬다. 사연의 당사자(!) 묵정이 반발하여 소희양도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는 못해서 문제의 대장장이가 누구이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지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분명히 묵정은 오백년쯤 전에 저런 모습이 된 ‘인간 출신’ 요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그래서 정글이가 묵정에게 별로 반응하지 않는 거 같아. 정글이 입장에서는 묵정도 그냥 ‘인간’으로 인식되어서 말이지. 물론 형태 가 칼이 아닌 것도 이유가 되긴 하겠지만 말야. 그런데………………

나는 대교의 등 뒤로 언제부터인가 희미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어떤 형체에 시선을 주면서 전음을 이었다.

-너의 청명. 그 아이는 왜 이렇게 묵정의 기운에 반응하는 거지?

새 찻잔을 챙기던 대교의 손길이 멈추었고, 그녀 등 뒤의 형체가 조금 더 강하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설마. 보이세요? 청명의 모습이?

그게, 보인다고 하긴 좀 그렇고, 뭔가 보인다는 기분이드는 그런 수준? 하지만 느껴져. 저게 너의 청명, 작고 하얀 소녀라는 것이 말이야. 나의 애매한 표현에도 대교는 적잖이 놀라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이 청명에게도 투영되는 건지, 아니면 청명 자체가 벌써 감정이란 걸 가지고 있어 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청명의 알 수 없는 형체도 동요하듯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과연, 유준 오라버니. 저도 청명의 존재를 느끼고 어느 정도 보게 된 것은 불과 하루도 채 되지 않았거늘………….

대교는 몸을 조금 돌려서 뒤쪽의 바닥에 놓여있던 청명검을 잡아서 내 쪽으로 다시 몸을 바로 했다. 그녀가 양손으로 받쳐 든 청명검 위로 일렁이 는 형체가 점점 더 빠르게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이거. 어째 우리 정글이보다도 구체적이고 선명한 모습이 되어가는 거 같잖아…………? 아까부터 설마, 설마 했는데… 각성이 미비해서 희미 하게 보였던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거란 말야?

이제 완전히 자태를 드러낸 소녀, 청명을 보면서 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하얗고 투명한 얼음꽃 같은 왠지 무서운.. 무섭도록 아름다운… 이것이 청명…………..?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