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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433화


433화. 크라켄 (4)

아틀란티스의 창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성유물인 것은 맞다.

신격마저 훼손시킬 수 있는 보라색 등급에 해당하는 성유물이었으니까.

그래. 그건 맞는데.

단지…,

그러한 힘을 가진 창으로도 아포칼립스를 행하는 집행자를 죽일 순 없을 뿐.

쿠쿠쿠쿠쿠!

어두운 심해를 뚫고, 일점으로 폭사된 빛이 해저까지 이르렀다.

창이 지나간 자리는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물살이 좌우로 길을 열었다.

“크오오오!”

크라켄이 다리들을 벌려 온몸으로 창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솟구치는 기포.

터무니없는 방어력.

애초에 이건 성사가 안 되는 승부다.

그렇기에.

진혁은 처음부터 아틀란티스의 창으로 크라켄을 찌를 생각 따윈 없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눈부신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29층에 펼쳐져 있는 금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붉은 메시지.

노린 것은 29층을 구속하는 결계 그 자체였다.

콰드득!

당연한 말이지만,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계 전체를 박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일부라면….

전체 중의 극히 일부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 정도쯤은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성유물 ‘아틀란티스의 창’의 내구도가 급속도로 하락합니다!]

[더 이상 사용할 경우 창이 파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웅웅웅웅!

창이 기괴한 공명음을 내뱉었다.

괜찮다.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진혁이 왜곡된 공간을 바라봤다.

“크오오오!”

이변을 느낀 크라켄이 거칠게 수면 위로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진혁의 대응이 한 발 더 빨랐다.

“킥킥, 안 되지 안 돼. 어딜 가려고?”

“문어 아저씨는 우리랑 놀아야 하는 거 벌써 잊었어?”

해구 아래 숨어 있던 케이시와 주드로가 헬버드와 전투 도끼를 내려찍었다.

쾅!

다리가 날붙이에 꿰뚫려 지면에 고정됐다.

인어들 특유의 기포 방울로 전신을 감싼 터라 수압과 호흡에서도 자유로워진 상태.

더군다나 황도십이궁의 ‘쌍둥이자리’는 두 사람을 극한까지 강화시켜주었다.

덕분에 크라켄이 위로 가지 못한 채 저지당했다.

시간으로 치면 0.5초 남짓.

허나,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술식에 의해 ‘고대 결계’가 발동되었다.

우우웅!

차원이 갈라지면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마스터!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좌표는 바꿔두었습니다.”

“응. 맞아. 준비는 완벽하게 해뒀어. 성공확률은 89.35%야.”

티본과 프레이.

신전을 지키던 둘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정확히는, 둘 사이에서 완벽하게 활성화된 게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마계와 이어지는 게이트가 말이다.

파츠츠!

빛과 빛이 부딪치면서 화려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동시에.

[29층 ‘아틀란티스’와 44층 ‘마계’의 영역이 이어집니다.]

두 차원이 연결됐다.

크라켄의 몸이 차원 블랙홀에 이끌려 반대편으로 빨려들어갔다.

콰앙… 턱!

그러나,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다리들이 게이트의 입구를 붙잡았다.

쇠심줄처럼 단단하게 고정된 다리들.

과연, 마지막까지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게는 당해주지 않는다는 거겠지.

꾸구국….

마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고대결계를 강화했으나, 미묘한 균형점은 깨지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없다.

1초라도 빨리 놈을 밀어넣지 않는다면, 그 전에 이쪽의 마력이 고갈돼 게이트가 닫혀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유성아!”

진혁이 옆에 있던 천유성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스릉!

배 위에 서 있던 천유성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요기를 머금은 ‘류화’가 녹색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천유성은 현재 ‘2차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검성(劍聖)’

단순히 검술의 극에 달하고 그 묘리를 깨닫기만 해서는 안 된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불가능이라 여겨지는 상황을 극복하는 자에게만 비로소 주어지는 칭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유성은 지금까지 인내하고 또 기다렸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상황과 조건이 갖춰지길 기다리면서.

“후우….”

자신의 호흡을 잊고 대신 칼날의 호흡을 느낀다.

-베어라.

아름답게 그려진 유선(流線).

쾌(快)의 묘리는 절(節)에 있다.

부드럽던 궤적이 순식간에 가속을 더했다.

‘추혼검무(追魂劍舞)’

폭사되는 검광(劍光).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갈고 닦았다.

목적은 단 하나.

평생을 염원하던 단 한 명의 상대를 뛰어넘기 위해서다.

검의 속도가 한 층 더 빨라졌다.

‘제12식(第十二式)’

열십자로 이루어진 형(形).

동시에 그 형(形)이 산산이 부서졌다.

낮과 밤이 하나를 이루듯, 동시에 그 둘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듯.

검로가 극의에 이르렀다.

이것이….

고인물에 도달하기 위해 내린 답이고.

그 고인물을 넘어서기 위한 종착지다.

‘극야(極夜)’

서걱!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이 심해를 베었다.

“키에에에에…!”

크라켄의 끔찍한 절규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통째로 잘려나간 다리로 인해 미묘하던 균형이 마침내 깨진 것이다.

곧바로 재생은 이어졌지만 이미 크라켄의 몸은 게이트를 넘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렸다.

메마르고 황폐한, 불과 먼지만이 가득한 마계를 향해서.

[차원이 단절되었습니다.]

상태창을 끝으로, 29층을 집어삼키려던 아포칼립스가 완전히 사라졌다.

쏴아아아….

뒤늦게 비가 내리며,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지독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역시, 검성이네.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어. 함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래.

저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지금껏 그토록 발버둥쳐 왔는지도 모르겠다.

천유성의 입가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워낙 희미하긴 했지만, 그건 틀림없이 웃고 있는 것이리라.

“방금 웃었다. 그치?”

“무슨 소리냐? 그런 적 없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런 적 없다니까. 그리고 혹여 그렇다고 해도 그건 마침내 2차 전직을 성공했기 때문이지. 절대 네놈에게 인정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다. 알겠나? 대답해라. 알겠느냔 말이다. 야!”

천유성이 계속 외쳤지만, 진혁은 절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음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지.

어찌 됐든, 그걸로 29층에 닥친 최악의 재앙이 사라졌다.

* * *

“끄아아악! 그만… 그만해!”

고통에 가득 찬 비명.

군타페르의 거처에선 오늘도 어김없이 고문의 일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레미아가 붉은 사슬에 묶인 채 숨을 헐떡였다.

벌써 몇 번이나 됐는지 모를 생사의 고비.

전신이 불덩이에 삼켜지는 건 아무리 경험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흐음. 정말 독하긴 독하구나. 아는 것만 전부 실토하면 고통을 끝내주겠다고 했거늘.”

“다 말했잖아.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다 말했다고!”

“또 거짓말이군.”

콰드득!

쇠사슬이 레미아의 팔을 가차 없이 비틀었다.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아아아악!”

레미아가 다시 한 번 경기를 일으켰다.

“네년이 아무리 버텨봤자, 그 인간은 살아남지 못한다. 이번에야말로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짓이겨버릴 생각이니까. 그러니 헛된 희망은 빠르게 접길 바라마.”

“하아…. 하아…. 그, 그거야… 두고 봐야… 알겠지.”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한 번 버텨 보거라.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으… 음?”

말을 하던 군타페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뿌옇게 낀 먼지 너머로 보이는 태양에서….

……무언가 이상한 마력이 느껴졌다.

이 특유의 마력은… 설마?

고개를 갸우뚱하던 군타페르가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콰드득!

우두둑!

허공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차원이 박살나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인데, 문제는 그 균열 너머에서 나타난 존재였다.

꿈틀하고.

거대한 다리가 보였다.

“크, 크라켄?”

그런 말도 안 되는…!

분명, 29층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어야 할 크라켄이 대체 왜 여기에?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에 대한 사고가 충돌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뱉을 수 있는 건 욕설뿐이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인간 놈이! 감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군타페르의 동공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포칼립스가 44층에 현현합니다!]

에덴과의 전쟁 이후 최악의 참사가 펼쳐졌다.

* * *

아틀란티스에서 벌어진 성대한 연회.

인어족을 구한 영웅을 대접하기 위해, 인어들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총동원되었다.

신선한 해조류와 먹음직스러운 해저 과일들이 가득 상에 올랐다.

“이야. 이건…?”

진혁의 두 눈이 반짝였다.

레인보우 슈림프를 끓는 기포를 이용해 1시간 15분 13초 동안 천천히 구운 다음 아슘트라 소금 13.5g을 7번에 걸쳐 뿌린 요리가 눈에 띄었다.

인어들 중에 미식가가 제법 많다고는 들었지만, 설마하니 이걸 요리할 수 있는 이가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이번 연회는 꽤나 만족스러울 듯싶었다.

바로 그때.

“크흠! 큼!”

엘리스가 헛기침을 하며 소매를 잡아 당겼다.

“응? 왜?”

“그게… 정말로 괜찮은 것이냐?”

“아…. 마계에 크라켄 집어 던진 거?”

“그렇다.”

“괜찮아. 안 그래도 프레이랑 티본이 좌표를 옮겨줘서 베리엘의 영지가 아니라 군타페르 쪽에 떨궈뒀어.”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이면 한창 화끈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거다.

군타페르가 악에 받쳐 고함을 질러대는 게 눈에 선하게 보인다고 해야 하나?

“후우. 온 마계를 적으로 돌리다니… 짐은 참으로 계약자의 미래가 걱정되는구나.”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놈들이었어. 게다가 크라켄이 날뛰어주면 마계의 전력도 대폭 줄어들 거야.”

아무리 상층부의 거대 세력이라 해도 아포칼립스를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수중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라켄의 힘이 반감되는 걸 고려해도 최소한 군단장급 마왕의 영지 몇 개는 쑥대밭으로 변해버릴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다만…. 그보다 계약자.”

“응? 또 할 이야기가 있어?”

“약속… 잊은 건 아니겠지?”

약속? 약속이라면….

“짐과 함께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에 가기로 한 것 말이다! 분명,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단 둘이서 근사한 여행을 떠나기로 하질 않았느냐!”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엘리스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스스로의 입으로 이런 말을 꺼내게 된 게 자존심 상했는지,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기억하고 있지. 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어. 특별 이벤트까지 따로 준비해놨거든.”

아무렴, 그걸 까먹을라고.

죽고 싶지 않고서야 당연히 뼈에 새겨놓고 있었다.

“흐, 흐응. 뭐! 조금은 기대하고 있으마. 짐은 어지간한 거에는 놀라지 않을 거다.”

그제야 엘리스의 표정이 풀렸다.

아니, 풀린 수준이 아니라 잔뜩 신이 난 소녀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하지만….

“용사님. 시간이 됐습니다.”

세상 일은 그리 만만하게 흘러가는 법이 아니다.

어느새 진혁 앞에 여왕인 참치 초밥과 그녀를 따르는 다수의 인어들이 모여 있었다.

후세의 용사를 위해 인어들의 성스러운 의식이 시작되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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