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44화
44화 검성의 제안 (2)
흑운(黑雲) 길드.
이미 자리를 굳힌 한국의 1위 ‘단군’과 2위 ‘싸울아비’에 이어 3위 자리를 노리는 대형급 길드 중 하나다.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놈들이지.’
흑운 길드는 매우 호전적인 영업력을 바탕으로 최근 급격히 성장했으며, 특히나 길드장인 홍덕표는 꽤나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질이 나쁜 놈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남자 역시 목에 흑운길드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구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아는 친구냐?”
진혁이 천유성에게 물었다.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 저쪽 길드의 스카우터가 가입 제안을 했었거든.”
아…….
방금 그 말 한 마디로 모든 게 이해됐다.
목에 힘깨나 주고 있는 길드에서 천유성에게 흥미를 보였고.
당연히 독고다이인 이 녀석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겠지.
하여간,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 검성 나으리다.
남자가 재차 물어왔다.
“어이. 묻잖아. 네놈이 천유성인지 뭔지 하는 놈이냐고?”
“그래, 내가 천유성이다.”
“역시. 기생오라비 같은 면상에 검은 머리를 찾으라더니 그 말이 맞았군. 나는 흑운 길드의 정도현이라고 한다.”
정도현이 자신을 소개했다.
“길드의 가입 제안이라면, 이미 그쪽 스카우터한테 말해 뒀다.”
“알아. 대충 전해 들었어.”
“그럼, 더 이상 이야기는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한데, 우리 길드의 제안을 고작 AA등급 받은 신입이 거절하는 게 거슬려서 말이지. 이번에는 강제로라도 예스를 받아낼 생각이다.”
“네가…… 날 말이냐?”
천유성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호오. 생긴 거랑 다르게 깡따구는 좀 있나 보군.”
정도현도 이빨을 드러냈다.
순간, 둘 사이에 옅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파츠츠!
마력과 마력이 부딪치며 지면에 먼지가 흩날렸다.
손이 움직인다.
서로의 허리춤에 있는 무기를 향해서.
바로 그때.
“오버하지 말고 칼 집어넣어. 설마, 협회 앞에서 싸울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지?”
진혁이 끼어들었다.
“먼저 시비 건 건 이놈이다!”
천유성이 항변했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여기서 싸웠다간 뒷감당이 골치 아파지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컹!
“큭!”
결국, 혀를 찬 천유성이 반쯤 뽑은 검을 집어넣었다.
반면, 정도현은 진혁을 위아래로 흘겼다.
마치, 물건에 가치를 따지는 것처럼.
“넌 또 뭐냐?”
뭐긴.
“오늘 무도회인지 뭔지 있다기에 이 녀석 응원하러 온 놈이시다.”
“응원? 무도회에 참가하는 것도 아니고 응원이라고?”
“초대장을 못 받았거든.”
“하……. 초대장도 못 받을 정도라면 등급도 형편없다는 뜻일 텐데?”
“F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알파벳이지.”
진혁이 태연스럽게 말하자, 정도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내뱉었다.
우두둑!
관절을 풀자 터질 듯 팽창한 근육들이 기괴하게 움직였다.
“응원하러 왔으면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져 손뼉이나 칠 것이지. 감히, F등급 따위가 내 앞을 막아?”
만약, 이곳이 협회 앞이 아닌 탑의 내부였다면 그 즉시 척추를 뽑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뒷일을 생각해 가볍게 팔다리 한두 군데 부러뜨리는 걸로 봐주자.
그것이 정도현이 생각한 타협점이었다.
하지만, 마력을 실은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그 녀석은 내 먹잇감이다!”
지켜보던 천유성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스릉!
검이 뽑히며, 눈부신 검광이 쏟아졌다.
[천유성이 Lv6 ‘추혼검기(追魂劍氣)’를 발동합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정도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천유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주먹에서 푸른빛 기운이 일렁였다.
바위조차 일격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강화형 스킬이었다.
“한 방에 그 젓가락 같은 검까지 박살내 주마!”
그리고 그것이.
정도현이 기억하는 마지막 광경이었다.
***
쿠우웅!
2m에 이르는 거대한 몸이 무너져 내렸다.
단검 손잡이 부분이 관자놀이를 파고들었으니 당연히 의식이 날아갈 수밖에.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진혁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단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유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곧,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끌어올렸던 마력을 흩어 버렸다.
검에 맺혀 있던 검기가 사라졌다.
‘방금 그 움직임…….’
아무리 상대가 방심했다곤 하나 그 짧은 시간에 급소를 가격하다니.
워낙 빠른 속도였던 터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그만 기척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당한 정도현은 자신이 뭐에 당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천유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유적에서 헤어진 후. 1분 1초도 쉬지 않고 강해지는 것에만 몰두했다.
하루를 한 달로 늘려 주는 미궁에 들어가 미친 듯이 수련했고.
수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계속해서 한계를 극복해 나갔었다.
그런데도.
대체 어째서.
‘녀석과의 격차는 조금도 좁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복기하고 또 복기해도…….
방금 기습에 대응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뭘 멍하니 있어? 누가 보기 전에 어서 안으로 들어가야지? 가뜩이나 시간도 없다며?”
“……그래.”
천유성은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
각성자 협회 13층 수련장.
층 전체가 마력을 흡수하는 마정석과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어, 플레이어들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장소다.
캉! 카앙!
카카카카캉!
날붙이가 교차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 24명이서 펼치는 배틀 로얄 방식. 때문에 경기장은 온갖 종류의 고유 능력과 스킬들이 난무하는 중이었다.
“하하, 박 형. 어째 각성하기 전보다 몸이 더 둔해진 것 같은데? 능력에 너무 의존하는 거 아니야?”
“아직 몸 푸는 중이다 자식아. 이제부터 제대로 할 거니까 긴장 놓지 마라. 5층에 있는 힐러 아줌마 만나기 싫으면.”
높은 등급을 받은 플레이어들만 모아 둔 탓일까?
대부분 서로 간에 일면식이 있었다.
끼리끼리 몰려다닌다고.
강한 자들끼린 인맥을 갖춰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봐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살초를 배제했을 뿐. 자존심과 명예가 걸려 있기에 모두가 매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같은 시각.
관중석에서도 각 길드의 랭커들과 방송국 관계자들이 흥미롭게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가 꽤나 수준이 높군요.”
“예. 이 정도면 대중들도 만족할 듯싶습니다.”
“하지만, 임시방편이고 어서 3층을 돌파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여러 목소리가 오갔다.
대부분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인류의 미래고 나발이고 간에, 당장 길드의 세력만 부풀리는 게 최우선 과제인 이들도 있었으니까.
관중석 정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매의 눈으로 유망주들을 훑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유일한 S급이자 흑운 길드의 마스터인 홍덕표.
그리고 그를 따르는 흑운 길드의 스카우터들이었다.
“저기 2인조도 꽤나 쓸 만해 보입니다.”
스카우터 한 명이 불꽃을 다루는 노인과 소환수를 부리는 젊은 여자를 가리켰다.
여자가 소환수를 이용해 방어를 담당하고 틈이 보이는 즉시 노인의 불꽃이 상대를 압박하는 모습.
오랫동안 합을 맞춘 듯 완벽한 연계다.
허나, 홍덕표는 스카우터의 말을 귓등으로 흘러 넘겼다.
이미 한 명의 플레이어에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바로 천유성에게.
‘……훌륭해.’
슬림하지만 탄탄한 체격.
차갑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갈무리된 기운은 멀리서 보는 이들에게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각성 테스트에도 허점이 많나 보군.’
저게 고작 AA등급일 리가 없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A’라는 카테고리에 넣으면 안 된다.
종횡무진 시합장을 누비며 휘두르는 검엔 홍덕표 스스로도 벌써 몇 번이나 감탄사를 내뱉었으니까.
“네놈이 포섭에 실패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아, 형님. 거 말씀 한번 심하십니다. 원래 제가 제압할 수 있던 건데, 웬 버러지 한 마리가 뒤통수를 쳤다니까요?”
정도현이 발끈했다.
“또 그놈의 F급인지 뭔지 하는 놈 타령이냐?”
“서, 설마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고작 그런 방해꾼 때문에 실패했다는 걸 어떻게 믿어?”
“하아. 답답합니다, 진짜. 차라리 저기에 절 좀 출전시켜 줬으면, 버러지들 싹 다 정리하고 천유성까지 무릎 꿇려 놨을 텐데……!”
“씁! 니가 지금 시합 타령할 때야? 조금 뒤에 있을 인터뷰나 신경 써.”
정도현을 무도회에 출전시키지 않고 아껴 둔 건 무도회가 끝난 뒤에 있을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각성한 이들 중 50만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AAA등급.
과거, 시련의 탑의 성장 속도를 고려해 본다면 정도현은 앞으로 3년 이내에 충분히 S급의 반열에 오를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유망주를 영입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길드의 위상 또한 자연스럽게 높아질 수밖에.
“이번 일 준비하느라고 돈 많이 썼다. 알고 있지?”
“걱정 마십쇼. 제가 화면발만큼은 죽이게 받습니다.”
정도현이 꿈에 부푼 얼굴로 씨익 웃었다.
***
흑운 길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
경기를 구경하던 진혁이 작게 하품을 했다.
이건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무리 목숨을 걸지 않는 친선 경기라지만 수준이 너무 낮다.
그나마,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만났던 민정우와 이유리를 만난 게 유일하게 신선한 점이랄까?
‘간만에 보니 반갑긴 하네.’
두 사람은 그때 자극을 꽤 받았는지 제법 실력이 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는 시련의 탑이 나타나고 나서 뭘 했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마냥 욕하기엔 주위의 반응이 지나치게 호의적이었다.
겨우 이 정도 수준으로 미래가 밝니 어쩌느니 말하다니.
아주 가관이다.
이 정도 레벨의 개그면 뚱한 표정의 엘리스라도 하루 종일 웃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하려나?
‘젠장, 이렇게 되면 천유성의 우승은 확정이겠어.’
진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날뛰고 있는 천유성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쉽게 초대장을 날름 먹으려 했는데, 분위기를 보니 도저히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시합장 위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한다고 해도. 천유성의 피부에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천유성은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컥!”
“크으으…….”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플레이어들이 기절하거나 항복했다.
압도적인 실력 차다.
대부분 검의 궤적을 읽을 엄두도 못 냈고.
만약, 읽는다 해도 채 3합을 받아내지 못 했다.
결국, 경기가 시작된 지 15분 만에 천유성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들이 쓰러졌다.
“우, 우승자가 나왔습니다.”
협회 직원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짝! 짝! 짝! 짝!
곧바로 천둥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관중석에 있던 길드의 관계자들도 진심으로 이 대결을 감명 깊게 봤다는 방증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천유성 플레이어님. 그럼, 두 가지 보상 중에 하나인 레플리카와…….”
“레플리카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상대를 지목하는 거다.”
천유성이 직원의 말을 끊었다.
다시 한번 관중석이 소란스러워졌다.
‘과연. 아이템보다는 강한 자와의 대결을 원한다라…….’
‘멋지군. 우리 길드에서 꼭 데려왔으면 좋겠는데.’
‘대체 저 검귀가 그토록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지?’
‘길드의 마스터 중 하나겠어.’
모두들 생각했다.
저토록 강한 괴물이 대결하고 싶은 상대라면 한국의 최상위 랭커일 거라고.
이곳엔 오지 않는 단군이나 싸울아비 길드의 마스터인가?
아니면 오래 전부터 한국 무술계의 정점으로 알려져 있는 유 씨 가문의 유천영 어르신?
혹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용병들 쪽에서?
그렇게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을 바로 그때.
“나와라.”
천유성의 검 끝이 관중석에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