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450화
450화. 새로운 고대종 (3)
메마르고 탁한 공기가 기도를 따라 스며들었다.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풍경.
이곳은 마계….
정확히는 베리엘의 영토가 있는 지역이었다.
“크하하! 역시, 나의 사도답구나. 저 흉악한 뱀을 잘도 끌어들였어.”
베리엘이 박수를 치며, 광소를 터뜨렸다.
완벽하게 계획대로 흘러갔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반대편에 서게 된 이의 입장에선 최악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천마들의 세뇌를 풀고… 마계로 데리고 오는 게 목적이었을 줄이야.”
군타페르가 천천히 마른 입술을 적셨다.
상대가 여러 가지로 활로를 모색할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식의 계획을 세울 거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크으으….”
“내가 어째서…?”
“분명,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천마들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짧은 혼란 뒤엔 곧 지금까지의 전후사정이 담긴 기억이 덧씌워졌으니까.
“뭣들 하는 거냐? 네놈들은 우리 군주와 계약을 맺지 않았더냐!”
“당장 저 인간을 죽여라! 쓸어 버리란 말이다!”
“계약은 아직까지 유효해. 놈만 죽여준다면, 새로운 무림은 물론 이후의 모든 부귀영화를 약속하지.”
군타페르의 혈족들이 목청을 돋웠다.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려면 어떻게든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하를 준다고 해도 소용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거든.”
비어마운트가 천마들을 대표해 가장 앞으로 나섰다.
우우웅!
개방된 아공간에서 수많은 검들이 나타났다.
“명예를 원하는 게 아니다. 부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 온 건 그저 새로운 세계에 있는 강자와 싸울 수 있다는 것뿐.
설령 그것으로 인해 모든 걸 잃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시작은 마음대로 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 끝은 원하는 곳에서 맺을 수 있었으니까.
“천마, 임천련. 그게 본좌의 이름이다.”
“천마, 칸달리온… 그래, 그게 나이고 내가 곧 칸달리온이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천마들.
축구, 육아, 제빵, 요리….
천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하여 그동안 쌓아온 업이 더럽혀지는 건 아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각자가 추구하는 것으로 인해.
그저 새로운 길을 걸어왔던 것뿐이었으니.
“그런데, 너희는 알량한 장난질로 우리의 이름을 더렵혔다.”
하늘 아래, 그 누구의 밑에도 있지 않겠다는 긍지.
그것 하나만을 자부하며 살아온 이들에게서 그걸 빼앗은 것이다.
“지금부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똑똑히 알려주겠다.”
그렇게.
모든 천마들이 군타페르의 적으로 돌아섰다.
* * *
“마, 막아라!”
“지원을… 당장 영지의 지원을 요청해라!”
혈족들이 다급히 앞을 막았다.
그러나, 고작 몇 명의 혈족들로는 수십의 천마들을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콰콰쾅!
콰앙!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일격 일격이 마치 태산과 같다.
혈족들은 뒤로 물러서며 버티기 급급한 게 고작이었다.
“…완전히 당했군.”
군타페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레미아의 세뇌를 풀 만한 대결계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간과한 게 가장 큰 실수였다.
“이제 내 쪽이 유리해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진혁이 생긋 웃었다.
“확실히, 내가 기대했던 그림은 아니야. 하지만.”
쿠쿠쿠쿠쿠!
군타페르의 전신을 따라 짙은 흑염이 피어올랐다.
“이제야 조금은 해볼 만한 싸움이 된 거지. 너희들에게 유리해진 건 절대 아니다. 안 그런가, 베헤모스?”
“후후. 맞는 말이야. 너무 시시한 싸움이 될까 봐 오히려 걱정했는데, 차라리 잘 됐어.”
베헤모스 역시 허공을 향해 손을 펼쳤다.
촤촤촤촤!
칼날들이 하나로 모이며 거대한 대검을 만들었다.
완전히 발현된 고대종의 힘.
흉흉한 마력이 수십 줄기의 갈래로 구현되었다.
동시에.
마른 하늘을 따라 기나긴 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군타페르가 ‘현신화’를 시도합니다!]
[마왕의 권능 ‘군단의 부름’이 발동됩니다!]
쿠쿠쿠쿠쿠!
천지가 요동친다.
한둘이 아닌, 수백, 수천의 대군.
“부르셨습니까? 군주시여.”
“마왕의 직속 군단 ‘로어링’.”
“명을 받고 왔나이다.”
엄청난 수의 마족과 마수병들이 게이트 너머로 걸어나왔다.
중형종과 대형종을 포함해, 몬스터들 또한 그 끝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군타페르 역시 일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신을 흑갑으로 감싼 채 완전무장한 군타페르가 양 손에 각각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검과 도끼를 꺼내들었다.
저 무기들은 설마….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틀림없이 마신이 가지고 있던 신물들이다.
이 시점에서 군타페르가 저걸 손에 넣을 방법은 없을 텐데….
여러 가정이 떠올랐지만,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제부터가 라운드 2.
본 게임의 시작이다.
“한 놈도 남겨둘 필요 없다. 전부 죽여라.”
군타페르가 총공격을 명령했다.
* * *
“크아아아!”
“하압!”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전장.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어느새 난전이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 적아를 구분하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헤임달이 진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본연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이 판이 만들어지도록 층계를 이동시켜주는 것.
딱 거기까지가 계약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덕분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많이 됐어.”
“그럼 다음에 또 보지.”
헤임달이 왔던 곳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좋아.
일단 이쪽은 해결됐고.
다음은 포로 생활로 지치고 지친 사원을 달래줄 차례다.
“몸은 좀 괜찮아?”
진혁이 탈진 직전 상태의 레미아를 부축했다.
“목숨만은 보장해… 줄 거라더니. 정말로 죽을 뻔했다고.”
“미안미안, 저 녀석 눈치가 저렇게 빠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냥 내가 죽든 말든 관심이 없던 거였겠지.”
“크흠. 무슨 그리 섭섭한 말을…. 이래 봬도 우리 회사가 사원 복지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신경 써 준다고.”
“됐네요. 하여간 말은….”
레미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툴툴대긴 했지만, 목숨을 구해준 게 내심 고마웠는지 진혁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여기서 쉬고 있어. 이제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응. 너무 졸려서… 조금만 눈 좀 붙이고 있을게.”
레미아가 스르륵 잠들었다.
진혁이 영원의 모닥불을 고대종의 알이 있는 근처에 갖다 댔다.
화르륵!
불꽃이 순식간에 알을 데우기 시작했다.
이미 계곡 안에서 충분한 마력을 머금은 상태.
부화까지는 그리 머지않았다.
“누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군타페르가 직접 움직였다.
검과 도끼.
칠흑처럼 빛나는 두 개의 무기가 진혁의 머리를 향했다.
진혁의 손에도 어느새 두 자루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카카카캉!
종과 횡으로 교차하는 검격.
인사치례에 가까운 한 수가 오가자,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겁다.
최대한 정타를 피하는 데 집중했지만, 그럼에도 마왕의 일격은 격이 달랐다.
왼쪽!
진혁이 지면에 스칠 듯 자세를 낮췄다.
곧바로 도끼가 허리 부근이 있던 곳을 베어버렸다.
콰지지직!
무슨 공격 한 번에 계곡이 만들어질 지경이다.
거기에, 위력 못지않게 속도 또한 말도 안 되게 빨랐다.
‘마왕은 마왕이라 이건가.’
단순히 치고받는 정면 승부에선 승산이 없다.
‘간극’과 ‘행운’ 스탯의 버프를 받더라도 놈과의 격차를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현재 최우선 목표는 상대를 찍어누르는 것이 아닌 버티기.
‘영원의 모닥불이 알을 완전히 데울 때까지만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 돼.’
알의 색을 보건대 길어야 5분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홍련과 바너드에 마기와 신성력이 각각 발현되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트리플 매직’을 통한 각종 마법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시작은 얼음과 불, 번개다.
세 종류의 마법이 군타페르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퍼어엉!
그 위로 각기 다른 기운을 머금은 검격이 이어졌다.
이걸로 조금은 시간을….
“고작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폭발 속에서 군타페르가 상처 하나 없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꿈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살살 좀 하면 안 될까? 명색이 마왕이 고작 인간 하나 상대로 전력을 다 할 필요는 없잖아.”
“인간치곤 지나치게 짜증나는 놈이지.”
군타페르가 검은 마기를 응집시켰다.
조금 전 고구마의 고유 성창과 비슷한 유형.
차이점이라면 위력을 낮춘 대신 속도를 대폭 증가시킨 형태였다.
파츳!
검붉은 불꽃이 점멸했다.
상쇄 시킨다?
그런 선택지 따윈 없다.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물고기자리’가 개방됩니다!]
물고기자리는 12개의 별자리 중 ‘왜곡’에 관한 능력을 관장하는 별자리다.
받아내기 버거운 공격을 그대로 빗겨낼 수 있다는 점에선 꽤나 훌륭하다.
문제는.
빗겨나간 공격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인데….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흘려냈기에, 어떤 결과가 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금에선 이만한 게 없지.’
십중팔구.
확률상 모가 아닌 도를 뽑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약 천마 쪽으로 가면 그건 그냥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해야지 뭐.
콰아아앙!
“크아아아!”
“끄아아!”
마족들이 잔뜩 밀집해 있는 곳에 흑염이 작렬했다.
일격에 세자리수가 넘은 마족이 증발해버렸다.
“이 비겁한 놈이…! 내 부하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네가 죽여 놓곤 왜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야? 어휴. 누가 마왕 아니랄까 봐 인성도 글러먹었네.”
“아주… 아주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 하찮은 벌레 놈아!”
군타페르가 이성을 잃었을 때가 기회다.
“베리엘!”
“알고 있다.”
줄곧 대기하고 있던 베리엘이 흑창 ‘키샨’을 꺼내들었다.
활처럼 팽팽해진 팔.
그 순간. 또 다른 마왕의 고유 성창이 발동되었다.
부우웅….
……콰아앙!
군타페르의 몸 주위에 쳐둔 실드가 송두리째 날아갔다.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 저격할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기에, 투창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크아아악!”
기습은 성공이다.
군타페르가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 만큼 큰 피해를 입었으니까.
너덜너덜해진 몸을 수복하려면 적어도 몇 십초 정도는 걸릴 테지.
천마들과 마족들도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
반대쪽에선 고구마와 베헤모스가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모, 모기이이!”
“더 해봐. 이제 막 달아올랐는데, 뭐, 좀 화끈한 거 없어?”
본신의 힘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는 베헤모스 쪽이 훨씬 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군타페르뿐 아니라 저쪽도 상당히 골치 아픈 변수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해.’
진혁이 모닥불을 더욱더 세심하게 컨트롤했다.
화력과 각도 그리고 알과의 교감까지.
모든 것들에 있어 단 하나의 실수도 섞여 있어선 안 된다.
“베리엘… 강진혁… 두 놈 다… 이 치욕을….”
꾸드득….
군타페르의 몸이 빠르게 수복됐다.
워낙에 마기가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회복속도 역시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빨리.
조금 더 서둘러야….
“크으으…. 방금 전 같은 기습은 두 번 다시 통하지 않을 거다.”
군타페르의 몸이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마침내.
콰드득!
영원의 모닥불로 달궈진 껍질들이 깨지며….
“미요오?”
새로운 고대종이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