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489화
489화. 지옥의 약혼녀 쟁탈전 (2)
콰콰콰콰콰콰!
복도 한 부분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무시무시한 마력의 잔향.
듬성듬성 박혀 있는 붉은색 꼬챙이들만이 조금 전 일격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를 말해줄 뿐이었다.
“후후후. 새신랑이 부끄럼쟁이네. 신부를 앞에 두고 도망치고.”
엘리스가 광기에 젖은 얼굴로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철분.
미량의 핏방울이 허공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오싹…….
진혁의 등골을 따라 솜털이 쭈뼛쭈뼛 솟구쳤다.
젠장. 이건 좀 위험한데…….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린 엘리스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했다.
오롯이 하나의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한 뱀파이어 병기가 탄생한 것이다.
“엘리스 씨다!”
“오오오! 여기 계셨군.”
“내가 먼저 구혼……으을? 히이이익!?”
달려오던 남자들이 그대로 왔던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줄기줄기 살기를 뿜어내는 엘리스가 너무나 흉흉했던 탓이다.
심지어 순백의 드레스가 피로 붉게 물들자, 본격적인 지옥이 시작되었다.
탓.
진혁이 자리를 박찼다.
순식간에 조금 전 서 있던 곳이 벌집으로 변했다.
“진짜로 죽일 셈이야, 너?”
신혼 첫날밤에 구멍이 송송 뚫린 신랑이라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보다 비참한 죽음은 없을 거다.
“어차피 다 피하면서 엄살은!”
“아니, 진짜 아슬아슬했어. 마지막 꼬챙이는 정말로 다리를 날려버릴 뻔했다니까?”
“걱정 마. 다리가 없으면 내가 평생 옆에서 부축해줄 테니까. 아니…… 그 편이 오히려 좋으려나? 내가 없으면 어디 가지도 못할 거니까.”
엘리스의 눈동자가 한층 더 이상하게 변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명의 위협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든든한 지원군들을 준비해뒀지.’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달그락!
뼈다귀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해골 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본이었다.
예고 없이 소환한 거지만, 그래도 갑옷과 방패 칼 등의 무장은 전부 갖춰져 있다.
“티본! 급하게 부탁할 일이 좀 있어.”
“마스터. 오랜만이다. 부탁이라면 어떤…… 꾸에에엑!”
말을 하던 티본의 몸이 그대로 분쇄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최상급 데스나이트에 육박하는 티본을 일격에……?
“이깟 걸로 감히 짐을 막으려 했던 것이냐? 최소한 고대종이라도 꺼내거라.”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뼈다귀들 사이로…….
엘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점멸했다.
“그, 그렇지 않아도 더 꺼내려고 했어.”
진혁이 황급히 또 다른 조력자들을 불렀다.
“모오오기이이!”
“미요오오!”
“으음, 이번엔 무슨 일이 터졌길래 고귀한 동방의 주인을 부른 것인가?”
고구마와 후라이드 그리고 말랑흑두루미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을 든든히 지탱하는 두 마리의 고대종과 신수가 당당히 앞을 가로막았다.
좋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조합이다.
아무리 엘리스가 강하더라도 이 녀석들을 한 방에 역소환시킬 순 없겠지.
“다들, 저 철없는 꼬맹이 좀 어떻게 해 봐. 최소한 꼬챙이만 함부로 날리지 못하게 막으면 돼.”
“글쎄, 그게 네 마음대로 되려나?”
엘리스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동시에.
엘리스의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되었다.
“짐도 그대가 그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우우웅!
한 눈에 봐도 진혁의 것보다 족히 10배는 더 크고 화려한 아공간이다.
아타락시아의 모든 재화와 보물을 보관해둔 곳답게, 그 크기 역시 격이 달랐다.
후두둑…….
쏟아진 것은 씨알 굵은 마정석들.
전부다 최상급에 해당하는 상등품이었다.
“모, 모기이이?”
“미요오오!”
“호오, 이건 좀 귀한 것이로군. 고귀한 이 몸이라도 식욕이 동할 수밖에…… 츄릅. 없는…… 것이다. 꼴깍.”
이런 빌어먹을 부르주아 같으니라고.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내가 애지중지 키운 우리 애들과의 유대를 깨뜨릴 수 있을 거라고…….”
“그래그래, 내 편이 되어준다고? 기특하구나.”
“모기모기.”
“미요!”
“명령만 내려다오. 위대한 뱀파이어여.”
너무나 쉽고 허무하게 유대가 깨졌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배신한 애들이 진혁을 못 본 척 마정석을 챙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고구마는 엘리스의 다리에 꼭 붙어서 꼬리까지 살랑거리고 있었다.
야, 니들이 그러면 안 되지.
진혁이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모두의 눈동자엔 큼지막한 마정석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자, 이제 방해꾼은 더 이상 없어?”
엘리스가 거리를 좁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느껴지는 압박감.
그럼에도 진혁은 아직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진혁이 힐끗 창가 쪽을 바라봤다.
이 정도 소란이 일어났으면 분명 반응이 올 거다.
얌전히 있기엔, 폭발하는 두 개의 마력이 너무나 익숙했기에.
물론, 원래의 인격은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 쟁탈전에서만큼은 또 다른 인격이 주를 이룰 것이 틀림없었다.
바로 그때.
콰아앙!
건물 한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후두둑…….
쏟아지는 파편들.
“어머나, 우리 꼬맹이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누구 거에 침을 바르는 걸까?”
순백의 드레스와는 대비되는 검은색 칵테일 드레스,
긴 금발을 한 쪽으로 묶은 게 인상적이었다.
테레사를 본 엘리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너…… 그 옷은……설마?”
“맞아. 이미 결혼식을 끝낸 신혼부부가 피로연에서 입는 옷이지. 멍청하게 생겨선 꽤 자세하게 알고 있구나?”
“누, 누구 마음대로 결혼식까지 다 끝났다는 거야아아!”
엘리스가 고함을 빼액 하고 내질렀다.
고함과 함께 마력이 폭발했다.
우우웅!
오른쪽에 나타난 꼬챙이의 숫자가 무려 100이 넘는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꼬챙이 하나하나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건 제압하는 게 아니라 거의 죽이려는 수준인데?
하지만, 테레사 덕분에 한 숨 돌릴 틈은 생겼다.
[테레사가 ‘타락한 성녀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
하늘에서 검은 별빛이 떨어졌다.
무수히 많은 별들 사이로 엘리스의 붉은 작살들이 점멸했다.
콰아앙!
콰콰콰쾅!
저택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쯤 되면 이게 약혼식인지 전쟁터인지 구별이 되질 않는다.
‘좋아.’
이렇게 팽팽할 때 변수를 한 가지 추가한다면…….
진혁이 아공간에서 황금색 끈을 꺼냈다.
[아이템 ‘신념을 잇는 끈’을 사용합니다!]
우우웅!
차원과 차원이 이어진다.
탑에서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차원이동 아이템이 발동되었다.
⁕ ⁕ ⁕
사뿐.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가벼운 착지.
부름에 응한 건 5층의 주인 중 하나인 ‘안드리아’였다.
“진혁 님! 오랜만이에요.”
안드리아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시련의 탑이 개방된 지 2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5층의 정신병동을 방어하고 있었다.
안드리아가 보스 몬스터로서 얼마나 탄탄하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랜만이야. 좀 급한 일이 한 가지 생겨서 도와달라고 불렀어.”
“어…… 도움이요? 어라?”
안드리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엘리스와 테레사.
그 둘이 죽어라고 싸우고 있는 걸 보니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왔다.
“아하,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그래? 설명할 시간을 아껴서 다행이야. 별 건 아니고 시간만 좀 벌어주면 돼.”
“그쵸. 시간…….”
[안드리아가 구미호 버전 ‘여우 불놀이’를 시작합니다.]
풍성하게 자라난 9개의 꼬리와 눈처럼 새하얀 여우 구슬.
“그런데요.”
안드리아가 생긋 웃었다.
“……제 입장에선 굳이 경쟁자들이 사라진 기회를 놓쳐야 될까요?”
쏴아아아…….
순식간에 바뀌는 분위기.
그러고 보니, 예전에 무림에서 이와 비슷한 걸 했을 때도 안드리아는 지원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쟁의 한복판에 뛰어든 참가자였지.
호랑이들을 막으려고 사냥개를 불러왔는데, 알고 보니 그 사냥개도 주인을 노리는 맹수였다.
[안드리아가 구미호 버전 ‘매혹의 꼬리’를 발동합니다!]
순간,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매혹의 향.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머리가 어지럽다.
“무식한 언니들은 평생 치고받고 싸우라고 하고 저흰 다른 데 가서 재밌게 놀아요. 5층에 오신 지 한참이나 되셨죠? 정신 병동이 좀 그렇긴 하지만, 제가 있는 방은 나름 아늑하게 잘 꾸며놨어요.”
안드리아의 꼬리들이 진혁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나.
툭.
진혁은 간발의 차이로 꼬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큐버스 레미아의 매혹을 경험해둔 덕에, 정신 계열 능력에 대한 저항력이 한층 더 올라갔던 것이다.
‘그래도 이런 식이면 위험해.’
나폴레옹의 대관식까지 얻을 생각을 한다면 마력 분배를 조금 더 잘해야 한다.
준비해야 할 것도 아직 더 있었고.
이렇게 된다면 남은 방법은…….
이제 단 하나뿐.
가능하면 지금 타이밍에 사용하고 싶지 않았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유성!”
진혁이 멀리서 홍차를 마시고 있는 천유성을 향해 소리쳤다.
당연한 말이지만, 천유성은 애탄 부름을 가볍게 무시했다.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며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혼자만의 평화를 만끽했다.
“야! 너 계속 내 말 안 들리는 척할 거야?”
“그럴 생각이다.”
“이리 오세욧!”
진혁이 달려드는 안드리아를 피한 뒤, 다시 한번 외쳤다.
“너…… 나랑 한 약속 벌써 까먹었어? 우리 언령(言令)으로 계약했었잖아?”
“……!?”
천유성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잊을 수가 없겠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고인물 코퍼레이션을 배신하고 마왕에게 붙었던 그 악몽 같은 기억을.
“네 입으로 분명히 약속했잖아. 1주일간 내 노예가 되겠다고. 설마, 천하의 검성이 본인의 입으로 한 말을 어기진 않겠지?”
“빌……어먹을. 그건…….”
천유성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 자존심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놈이 약속을 어길 리가 없겠지.
특히나 자기 잘못으로 팀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폐를 끼친 상황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천유성이 주먹을 부러져라 쥐었다.
녀석 입장에선 한창 즐겁게 이 모든 걸 즐기고 있던 와중에 똥물을 뒤집어쓴 심정일 거다.
“……알겠다. 네 말대로 일주일간 노예가 되도록 하마.”
“언령으로 약속한 거다?”
“……그래.”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언령(言令)으로 인해 앞으로 일주일간 플레이어 천유성은 플레이어 강진혁이 시키는 모든 것을 수행해야 합니다.]
[위반 시, 마계에서의 일이 ‘불명예의 전당’에 일주일간 업로드됩니다.]
말로 하는 계약은 시련의 탑에서도 꽤나 구속력이 약한 종류다.
하지만, 별 거 아닌 패널티라도 당사자 입장에서 뼈아프다면 그것이 강한 구속력을 지닌 것일 터.
“그래, 돌쇠야. 지금부터 이 몸을 잘 보필해서 간악한 무리들이 덤벼드는 걸 막거라.”
이걸로.
최강의 지원군을 손에 넣었다.
⁕ ⁕ ⁕
콰콰콰쾅!
몇 십 분이나 이어진 격투.
기존에 쟁탈전에 참가하던 후보자들은 대부분 탈락했다.
실력이 뛰어난 랭커는 괜히 치근대다가 박살이 났고.
그렇지 않은 자는 무시무시한 신부들의 모습을 보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엘리스가 ‘블러드 레인’을 발동합니다!]
[테레사가 ‘검은 성호’를 발동합니다!]
피와 타락한 신성력이 정면에서 격돌했다.
또 다시 굉음이 저택 전체를 집어삼켰다.
“어라?”
“뭔가 이상한데……?”
위화감을 느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금 둘이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
그 당사자가 보이지 않았다.
“자, 잠깐만. 계약자. 계약자 어디 갔어?”
“……언제 빠져나간 거지?”
진혁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저벅.
발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진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다.
“그 녀석은 결혼식을 거부하고 도망쳤다. 가능하면 찾지 말아 달라더군.”
스릉.
천유성이 검을 뽑은 채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