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75화
675화. 어긋나는 균형
카가가가강!
카카가가각!
정신없이 교차하는 검격.
남자와의 찜찜한 대면 이후 테레사 쪽에 합류한 천유성이 홀로 남은 그레고리를 밀어붙였다.
“큭!”
그레고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검격이 매섭기 짝이 없었기 때문.
다른 차원에서 고위 흡혈귀들과 싸워오면서 1:1 승부에 특화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적은 어지간한 로드급보다 더 까다로웠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분명 천유성이라 불리는 남자의 강함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귀환자인 겐스케를 상처없이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보기와는 다르게 장난질을 쳤던 거냐? 아니면 아직 보여주지 않은 비장의 수라도 있는 거냐?”
그레고리가 천유성을 향해 쇠뇌를 쏘면서 물었다.
혹시라도 상대의 감정을 흔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동시에 심장과 목 그리고 양 쪽 허벅지를 노린 사격.
카카카캉!
특수한 은으로 코팅된 쇠뇌들이 천유성의 앞에서 그대로 튕겨나갔다.
그 틈을 이용해 그레고리가 천유성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그레고리가 Lv??? ‘설야의 기습’을 발동합니다!]
눈송이가 흩날리며 사냥꾼이 사냥을 시작했다.
콰아앙!
굵은 나이프가 천유성의 옷깃에 닿기 직전 멈췄다.
냄새와 기척은 물론 마력까지 지운 완벽한 기습이 저지당한 것이다.
천유성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다.
“…….”
본능적으로 쉽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은 그레고리가 나이프를 빠르게 회전했다. 천유성의 검을 튕겨낸 뒤 거리를 벌린 다음 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서걱!
깊게 갈라진 상처에선 금세 굵은 핏방울들이 떨어졌다.
[그레고리가 스킬 ‘어둠의 사냥꾼’을 발동합니다!]
“크르르!”
“커엉! 컹! 컹!”
검은 갈기를 가진 늑대들이 소환되었다.
평범한 늑대들이 아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쭈뼛쭈뼛 일어설 만큼 짙은 피냄새가 베어 있었으니까.
뱀파이어 사냥에 특화된 환수들이었다.
탓! 탓!
5M가 넘는 덩치를 가진 늑대들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잔상을 남기며 움직이는 늑대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천유성을 노렸다.
“어림없습니다!”
[고유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테레사의 방패를 중심으로 황금색 빛이 회오리쳤다.
콰콰콰콰콰콰!
신성한 광채가 늑대들의 잔영을 지웠다.
“케에에엥!”
“크아앙!”
신성력이 눈을 찌르자 늑대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말랑흑두루미가 ‘기상개변’을 발동합니다!]
강한 돌풍이 일어나며 균형을 잡기 힘든 환경이 만들어졌다.
“환수라고 해서 다 같은 환수가 아니지. 고귀한 이 몸이 진짜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청룡의 여의주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흩뿌려졌다.
“조폭 정령특전대도 있다!”
“오늘 밤은 늑대고기다!”
“전투모드 발동!”
“우와와와!”
“다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5대 원소의 정령들도 아껴두었던 마력을 해방하며 그레고리의 사냥을 방해했다.
몰이사냥에 특화된 늑대들의 발이 묶이자 그레고리에게서도 빈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귀환자라고 목에 힘을 뻣뻣하게 주고 다녔나본데, 다구리엔 장사가 없는 거야.”
베헤모스도 하늘 높이 뛰어오른다음 고속으로 낙하했다.
무시무시한 폭풍이 뒤따랐다.
콰콰콰콰아아앙!
구름이 갈라지고 절벽이 절단난다.
아포칼립스를 주관하는 고대종의 힘이 담긴 검이 가로 막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고 그레고리의 몸까지 훑고 지나갔다.
콸콸콸!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
허나, 쩍 벌어진 상처에도 사냥꾼의 얼굴에선 통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반인반조의 특성으로 인해 어지간한 중상은 1초도 안 돼서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맘처럼 되는 일이 없군.”
그레고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묘목의 힘을 개방한 클레망스 쪽에서도 아직까지 승전보가 오지 않고 있다.
아니 그뿐이랴?
오히려 처음보다 그 기운이 확연하게 꺾여 있었다.
승기를 굳히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
거기에 겐스케까지 잃었으니 이미 이 전투는 패색이 짙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현명한 판단이라면 이쯤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도주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섰다간 그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태고의 존재들.
놈들의 의뢰를 한 번 받은 이상 성공하든가 아니면 죽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그 지독한 놈들의 추격을 받지 않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할 때가 아니라는 소리다.
‘어쩔 수 없나.’
그레고리가 품 안에 넣어둔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들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 사냥한 진조의 피가 담겨 있는 성유물. 1회성이라는 커다란 제약이 붙어 있긴 하지만 이걸 사용한다면….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웅!
무언가 이상한 마력이 끼어들었다.
“……!?”
“……뭐지?”
모두의 시선이 한 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이든이 낡은 책 한권을 든 채 서 있었다.
오싹하고.
지켜보던 이들의 피가 얼어붙었다.
정신없이 치고 박고 싸우느라 달아올랐던 열기가 한 번에 식어버릴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리 망하나 저리 망하나 똑같다면…. “
이든이 실성한 듯 키득거렸다.
지독한 공포와 살고 싶다는 욕망이 온 정신을 갉아먹어버린 결과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기존의 모든 판을 뒤엎버릴 만큼 강력했다.
“다 같이 지옥으로 가는 걸 택하겠다. 그 편이 내가 살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
[차원 접합이 이루어집니다!]
쩌저저적…!
공간과 공간이 합쳐진다.
멀리 떨어져 있던 장소가 완전히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었다.
***
쿠쿠쿠쿠쿠쿠!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것만 같은 느낌.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바뀌어버린 시야가 먼저 들어왔다.
“여기는….”
천유성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바로 앞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 네가 왜 여기에….”
정령왕들과 서 있던 진혁 역시 천유성을 발견했다.
“테레사 씨랑 나머지 너희들도? 귀환자 두 명을 추적하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설명하자면 너무 긴데…. 일단, 저 남자. 저 남자부터 막아야 해요!”
테레사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스윙뱃의 리더를 가리켰다.
어느새 잭 이든이 클레망스의 나무 넝쿨 안쪽까지 접근해 있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능적으로 뒤통수를 치려는 끈적끈적한 냄새를 맡았다.
타앙!
탄환이 대기를 꿰뚫었다.
동시에.
[그레고리가 보관하고 있던 ‘진조의 혈액’을 꺼냅니다!]
[진조 ‘힐베르트’의 고유성창이 개방됩니다!]
[‘흑익수(黑翼手)의 혼’을 사용합니다!]
검은 박쥐와 쇠뇌가 합쳐지며 기묘한 형태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스스로 사고하며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꿀 수 있을뿐더러, 위력 역시 기존의 쇠뇌보다 10배는 올라갔다.
퍼퍼퍼퍼퍽!
콰콰콰콰쾅!
허공에서 탄환과 쇠뇌가 격돌했다.
수백 수천의 섬광이 뿜어졌다.
“안 됐지만, 날 먼저 상대해야 할 거다.”
그레고리가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담배까지 꼬나물고 있는 걸 보니 어느 쪽이 여유로운지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쳇!”
“어떻게든…!”
천유성과 테레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또 다시 아까와 같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다리를 재촉했다.
검강과 신성력이 종횡무진 나무넝쿨들을 베어넘겼다.
그럼에도.
‘늦어.’
둘의 속도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신속의 왕관’을 쓴 진혁이 최대 속도를 발휘했다.
[바람의 정령왕 ‘윈 그라시아’가 선풍의 날개를 하사합니다!]
콰콰콰콰콰!
점과 점으로 이어진 공간 도약이 이뤄졌다.
넝쿨들 사이로 거대한 원이 만들어졌다.
“키에에에!”
“끼이이이…!”
괴로워하는 식물들.
치이익!
진혁이 지나간 단면에서 붉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이든이 클레망스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게 보였다.
촤촤촤촤촤!
사복검이 길게 늘어졌다.
한 호흡.
1초의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
물론. 분초를 다투는 전장에서 1초의 시간을 원한다는 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요구였다.
“꺄하하하하!”
날카로운 교성과 함께 클레망스의 입에서 고대 룬어로 된 주문이 흘러나왔다.
[특수 아이템 ‘비극의 용사들이 쓴 일기’가 발동됩니다!]
마도서의 책자들이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현실화되었다.
***
한 세계를 평정한 귀환자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에도 각각 아포칼립스와 같은 의미를 지닌 재앙들이 존재했다.
어떤 세계에서는 불을 뿜어내는 드래곤이.
또 어떤 세계에서는 태산보다 거대한 거인이.
어떤 세계에서는 바다를 가르며 한입에 선박들을 집어삼키는 이들이 말이다.
그리고.
[‘귀환자들의 시대’가 열립니다.]
지금 발동되는 능력에는 시공간은 물론 차원까지 왜곡하고 조작할 수 있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오오오!”
“므롸롸롸롸!”
“크아아아!”
각기 다른 형태를 지닌 종결급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시련의 탑에서도 한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괴물들이었다.
“저딴 사기적인 아이템이 다 있어.”
진혁이 균열 사이에서 나타나는 다수의 고위 몬스터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현존하는 모든 마도서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는 건 진혁조차 처음 보는 종류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지금 넘어오고 있는 게 단순히 몬스터들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우웅!
다수의 빛줄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졌다.
“흐음….”
“묘한 기분이네 이거.”
“내 눈앞에 보이는 상태창. 나만 보이는 거 아니지? 응? 또 내 정신이 해까닥 해서 환영이 보이는 거 아니냐고?”
“그래. 나한테도 똑똑히 보이고 있으니까 제발 입 좀 닥쳐라. 너부터 죽여버리기 전에.”
귀환자들에겐 저마다 깊은 상처와 아픔이 있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살던 곳에서 오랜 시간 떠나가야만 했던 현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임무에서 해방되어 돌아왔을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더 이상 같은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 느낀 괴리감.
그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귀환자들을 만들어냈다.
[아이템의 첫 번째 효과로 인해 반경 1km 이내에 암속성 영향력이 5,000%만큼 상승해 있는 상태입니다.]
[아이템의 두 번째 효과로 인해 ‘고인물 코퍼레이션’을 몰살시킬 경우 각자가 원하는 소망 한 개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현상금 이벤트.
그것도 보상이 말도 안 되는 게 걸렸다.
대체 이든이 들고 있는 아이템이 뭔지. 그리고 어떤 개놈이 저런 위험한 장난감을 저 녀석에게 쥐어줬는지 알아내야 한다.
“소망….”
“재밌군.”
“시스템이 직접 약조한 거면 거짓은 아니겠지.”
“그래. 저 녀석들이 요즘 탑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그 녀석들인가보네. 모처럼 공략하는 맛을 느낄 수 있겠어.”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귀환자 특유의 감정이 옅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파괴와 살육의 욕구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움찔!
“큿….”
테레사가 떨고 있는 왼팔을 오른팔로 진정시켰다.
……이건 여러 의미에서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