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78화
678화. 귀환자들의 전쟁 (3)
카카카카캉!
카아앙!
월영과 테레사가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것과 동시에 다가오는 엘리스.
몇 가지 변수와 각각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가장 재밌고 짭짤한 결괏값이 도출되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좋아.
조건은 전부 갖춰졌고.
남은 건 적절한 연출뿐인데.
진혁이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타이밍을 엿봤다.
바로 그때.
[월영이 ‘음영극살’을 발동합니다!]
고속으로 움직이던 그림자가 테레사의 허를 찔렀다. 인격이 뒤바뀐 타락 버전의 테레사가 미세한 세부 컨트롤을 할 때 반응이 0.1초가량 늦는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날카롭게 파고든 월영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죽이진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주군을 노린 이의 팔다리 하나쯤은 가져갈 생각에서다.
“쳇.”
테레사가 혀를 차며 검은 기운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늦다.
검강이 먼저 갑옷과 갑옷의 연결 부위를 파고들 것이다. 테레사가 반 박자 늦게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먼저 공격을 당하더라도 상대 역시 피를 보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일격이었다.
부우웅!
최단 거리 직선 코스. 가속력에 가속력을 더한 섬광이 가로질렀다.
바로 그때.
푸욱! 퍼억!
진혁이 끼어들었다.
살 속 깊숙이 파고든 칼날.
양쪽에서 검이 진혁의 몸을 뚫고 다른 쪽으로 튀어나왔다.
흐르는 핏방울이 땅에 채 닿기도 전에 엄청난 충격이 모두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주군…?”
“너…?”
월영과 테레사의 눈에 지진이 일어났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실력자들이라면 전투를 하는 동안 여러 가지 변수와 경우의 수 등을 상정하곤 하는데, 여기에 진혁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1초가량 생긴 공백.
무슨 의도에서 이런 건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다.
그런 와중에….
진혁이 한 것은 공격도 방어도 혹은 변명이나 협박이나 회유도 아니었다.
꼬옥.
진혁이 테레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살며시 속사였다.
“괜찮아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그러니 자책하지 말라고.
그저 환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주륵….
테레사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타락한 성녀의 속에 있던 인격이 반응합니다.]
의식의 깊은 곳에 갇혀 있는 기존의 따뜻하고 상냥했던 성녀. 암스테르담을 구원하고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테레사가 깨어났다.
어둡게 물들었던 붉은 눈동자는 더 이상 없다.
맑고 깨끗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진혁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작은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며 속에 담겨 있던 진심이 흘러나왔다.
“…고마워요.”
포기하지 않아줘서. 또 자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해줘서.
마찬가지로 진혁을 꼭 껴안은 테레사가 두 눈을 감고 지금의 이 소중한 시간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옆에 있어줘서 너무나 행복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뭐야, 재미없어.”
인격이 다시 한번 뒤섞이며 타락한 테레사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시간이 다 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쿠쿠쿠쿠쿠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아타락시아의 진조는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흉흉한 마력이 하늘을 넘어 층계 밖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저릿저릿!
날고 기던 귀환자들마저도 뒷걸음질 치게 할 만큼 지독하기 짝이 없는 살기였다.
“지, 지금… 뭐하고 있는 짓거리야아아아!”
콰콰콰콰콰콰콰!
핏방울로 이루어진 거대한 폭발이 이어졌다.
***
테레사의 복귀와 엘리스의 분노 덕에 상황이 약간이나마 달라졌다. 워낙에 엘리스가 크게 날뛴 덕에 여기저기서 공백이 생긴 것이다.
‘무리를 한 보람이 있네. 오글거려 죽을 뻔하긴 했지만… 어으 닭살 좀 봐. 대체 로맨스 같은 거 찍는 연기자들은 무슨 수로 저런 느끼한 대사를 술술 읊어대는 거야?’
진혁이 상처 부위를 치료하며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타락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고. 테레사의 신뢰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과였다.
이후에 엘리스를 달래는 게 큰 과제로 남아있긴 했지만, 얻은 것을 생각하면 사소한 부분이리라.
‘빈고프를 처리한 게 꽤 크긴 했어.’
엘리스를 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인 봉인의 귀환자가 전투 초반에 쓰러진 건 적들로서도 뼈아픈 손실일 것이다.
콰아앙!
카카카캉!
어느새 천유성과 나란히 선 테레사 역시 데고리아 발록을 상대로 강력한 위력을 뽐냈다.
“크오오!”
데고리아 발록이 네 개의 무기를 동시에 휘둘렀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테레사의 신성력을 흡수하지 못했다.
각성.
극한의 상황을 뛰어넘은 테레사는 벽을 뚫었고. 그 결과 최상위 마족의 특수 능력마저도 상쇄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혼자 개고생을 한 게 마냥 헛수고는 아니었군.”
“죄송해요. 유성 씨. 저 때문에….”
“칭찬하는 말이다. 신경 쓰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실수하지 마라.”
“네!”
계속해서 호흡을 맞춰왔던 천유성과 테레사의 시너지는 이제 그 어떤 거주자나 주신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던 최강의 패들이 하나둘씩 제 역할을 다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진혁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했다.
주군을 찔렀다는 사실에 트라우마가 생기긴 했으나, 월영 역시 그림자 속에서 든든하게 한 몫을 다하는 호위로 성장했다.
최강의 고대종 중 하나인 고구마나 그를 따르는 후라이드와 말랑흑두루미 외 나머지 정령수들 역시 든든한 전력이었고.
쪼꼬미 해골병사에서 클레망스를 상대로 시간을 끌게 된 티본과 신들마저 탐낸 완벽한 호문쿨루스인 프레이 또한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감회가 새롭다.
탑의 각계각층에 흩어져 있던 동료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쳐 탑의 최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 남자를 비롯해 예전과는 다른 변수와 강적들이 등장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들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바로 그때.
진혁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쳤다.
미세하긴 하지만 클레망스에게까지 도달하는 루트가 확보됐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타이밍이 찾아온 것이다.
지금이다…!
진혁이 저 멀리 있는 별동대를 향해 신호를 줬다.
우우웅!
밝은 섬광이 하늘을 하얗게 수놓았다.
“마력 간섭이 약해졌군.”
“한 번에 성공해야 해요.”
“간다.”
정령왕들을 필두로 전투 준비를 끝낸 요정과 정령수들이 일제히 마력을 집중시켰다.
[특수 공간이동 ‘흰 토끼굴’이 발동됩니다!]
흙무더기들이 움푹 파이며 다수의 마력이 사라졌다.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던 이들이 일격필살의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혼란을 틈탄 타이밍도.
준비해둔 전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콰쾅!
대규모 공간이동을 시전한 정령왕과 정령들이 마주한 건 끔찍한 함정이었다.
진혁의 계획을 사전에 간파한 앙헬리스가 대량 학살을 하기 위한 완벽한 구덩이를 설계해둔 것이다.
“…무슨…?”
“으아아악!”
“꺄아아악!”
채 현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지면에 설치된 지뢰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동시에 하늘에서는 투명화한 거대 전함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플라즈마 광선포를 발사했다.
“체크메이트.”
앙헬리스가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
한 박자 늦게 정령왕들이 실드와 각종 방어 스킬들을 사용했지만, 이미 말로 표현하기 힘든 피해를 입은 뒤였다.
무엇보다 별동대의 존재가 간파된 시점에서 기습의 이점은 전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앙헬리스가 고유성창 ‘은하 제독’을 발동합니다!]
[불가시 모드가 해제됩니다.]
허공을 따라 엄청난 수의 함선이 나타났다.
아니, 단순히 함선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앙헬리스가 터전으로 삼고 있던 영지의 행성들 역시 함께 소환되어 있었다.
은하계를 호령했던 황제.
대군전에 특화된 귀환자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가세했다.
“무슨…!?”
진혁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회심의 한 방이라고 생각했던 게 간파당했으니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심지어 기습을 저지시킨 것만이 아닌 이후에 이어지는 역습까지 완성시켜둔 상태였다.
완벽하게 포위 진형을 갖춘 앙헬리스의 함대가 숨통을 조여왔다. 이쪽이 결계에 특화되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하듯, 겹겹으로 펼쳐둔 결계의 사정거리를 농락하면서.
“주인!”
“어, 어떻게 해?”
“모기이이!”
함께 말려들어간 고구마와 정령수들이 비명을 질렀다.
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대응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실수한다면 모두를 잃을 수 있었다.
***
“자,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앙헬리스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자아냈다.
그에게 있어 이런 단일 전장은 너무나 손쉬운 일.
가장 까다롭다는 보급이나 후방을 신경 쓸 필요도 없이 눈에 뻔히 보이는 영역만 커버하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단순하기에 한 번의 실책은 전황을 그대로 결정지어 버릴 터.
과연 그 유명한 강진혁은 이 상황을 무슨 수로 벗어날지 그게 미친 듯이 궁금하고 또 기대됐다.
우우우웅!
각 함대에 있는 플라즈마 광선포에 형형색색 빛이 맺혔다.
대상이 존재했다는 것마저 지워버릴 수 있는 앙헬리스의 함대다.
“벌레들 대부분을 정리했으니 뭐 나머지야 쉽겠지. 저 녀석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뭘 어쩌겠어?”
클레망스는 이미 승시를 확신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무차별 포격과 자신들의 군대를 동원해 서서히 상대를 말려 죽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정령왕들 쪽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은 정령과 요정들을 대피시키며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했으나, 모든 도주 경로를 사전에 차단시켜둔 앙헬리스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항성 ‘쥬피터’의 특수 능력이 개방됩니다!]
[쥬피터의 반경 1km 내에 소형 유성우들을 소환할 수 있게 됩니다.]
[항성 ‘우라노스’의 특수 능력이 개방됩니다!]
[우라노스의 빛이 꺼지지 않는 한, 함선들의 동력원이 영원히 지속됩니다.]
각 항성들의 특수 능력들이 가미되자 가뜩이나 어려운 전황이 더더욱 까다로워졌다.
제대로 기세를 탄 언데드 병력 역시 점점 더 엘리스와 프레이를 압박해 들어갔다.
“…….”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진혁이 앙헬리스의 눈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제대로 한 방 먹었다.
테레사와 엘리스를 신경 쓰느라 기습 쪽에 신경을 조금 덜 썼다는 건 둘째치고. 앙헬리스가 승리를 위해 준비한 수들은 매섭고도 완벽했다.
“이건 조금 더 있다가 사용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겠네.”
귀환자들을 위해 준비한 히든 카드.
[귀환자 ‘메드레이’를 소환합니다!]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패가 꺼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