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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60화


860화. 최강의 등반자를 가리는 장소. ‘별의 탄생지’ (2)

엘리스와 테레사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하는 시도는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순혈의 진조와 모두의 사랑을 받는 성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술수들은 전부 미수에서 끝났다.

아무리 공을 들이고 교묘한 함정을 준비해뒀어도 고인물의 시야를 넘어설 순 없었기 때문. 게다가 엘리스와 테레사 역시 흔한 세뇌나 굴복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

분명 그럴 진데.

“으으으윽….”

“피해요!”

엘리스와 테레사가 급속도로 무너졌다.

“저항하려고 하지 마. 내가 심어둔 건 알량한 정신력 따위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거니까.”

천천히 시간과 공을 들여서 침투시켰다.

괜찮다고. 극복해냈다고 믿게끔 상황을 연출시키면서 더욱더 깊은 이면 속으로 끼어들었지.

그 결과가 이거다.

“나랑 승부를 보려던 것 아니었어? 왜 이딴 짓을 하는 거야?”

진혁이 고함을 질렀다.

괴로워하는 엘리스와 테레사의 곁에 다가가 어떻게든 폭주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동공이 뱀처럼 가늘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자니 좀 오글거리긴 한데, 나와 한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희생’이라는 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거든.” 

탑에 버려진 망령.

무수히 많은 회차를 반복하면서 썩어 문드러진 검귀의 삶이 어땠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피와 죽음만이 가득한 탑은 글쎄. 그다지 유쾌한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잃은 만큼. 너도 잃어보도록 해. 그런 아픔을 간직한 자들끼리 최후의 칼부림을 벌여보자고.”

“궤변도 정도껏이지. 그 정도면 정신 이상이 아니라 사이코패스다.”

“너무 비극적으로만 받아들이진 마. 어차피 아자토스의 본신체를 막으려면 봉인의 왕관이 필요하잖아?” 

그리고 봉인의 왕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

다시말해.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따라야만 한다는 소리다.

“아아….”

“으윽. 훗,”

엘리스와 테레사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3:2인 상황에서 갑자기 4:1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위대한 영웅들의 실력 좀 봐 볼까? 어때 유성아, 흥미롭겠지?”

“악취미에 어울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 끝나면 불러라. 어차피 나에게 오는 건 한 명뿐일 테니.”

“이야. 역시 진혁이가 이긴다에 몰표란 말이지? 흐응 하지만 글쎄다. 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진조와 타락 성녀한테 합공당하면 쉽진 않을 텐데

말이지.”

과거의 천유성이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팝콘과 콜라까지 꺼낸 건 덤이었다.

“아 그전에 관전할 자격도 없는 것들은 좀 재우도록 하지.”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케이시와 주드로 그리고 아델이 픽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그 순간.

[‘블러드 스피어즈’가 발동됩니다!]

언제나 든든하게 후방을 지원해주던 붉은 작살들.

그 흉기가 향한 곳은 이번엔 적들이 아니었다.

콰콰콰콰콰콰

몰아치는 피의 향연.

아타락시아의 압도적인 화력이 진혁이 서 있던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젠장. 엘리스 나야! 나라고!”

애타게 말해봤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엘리스는 묵묵히 다음 공격을 준비할 뿐이었다.

평소에는 그리 조잘조잘 말이 많더니.

차가운 얼굴로 흉기를 무지막지하게 날려대니 몇 배로 공포스럽다.

바로 그때.

“…!!??”

콰아앙!

단검이 측면에서 쇄도한 대검의 궤도를 비틀었다.

완벽한 타이밍으로 흘렸음에도 손목에 전해지는 충격이 만만치 않다.

마검 데르카시아.

대상의 어두운 마음을 포식할수록 강해지는 특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왜… 저는 선택해주지 않는 거예요? 언제까지고 뒤에 서서 당신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거죠? 그건 싫어요. 정말 더는 싫어.”

성녀도 타락 버전도 아닌 제3의 인격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이건 또 뭐냐.

진혁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우우웅!

다시 한 번 응집하는 혈액이 거칠게 요동쳤다.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타락 성녀와 원거리에서 스킬을 날려대는 진조.

이 조합은 상상 이상으로 위협적이다.

진혁이 여명의 검을 역수로 쥐었다.

대충 상대해서는 제압하는 게 불가능할 터.

약간은 상처를 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손을 써야만 한다.

콰앙!

진혁이 엘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둘 중에 우선적으로 제압한다면 전장 전체를 아우르는 원거리 딜러부터였다.

거기에 문제는 없었다.

실수라고 한다면,

“또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네요. 이번에도 역시나 엘리스에게만 향하고 있어요.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할 수 없어.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왜 나는 안 되는 거냐고!”

그런 정석적인 것이 아닌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해야만 했다는 것.

비명을 내지른 테레사가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마기를 뿌려댔다. 

-지이이잉!

마검이 기괴한 공명음을 내질렀다.

[‘뒤틀린 신성’이 발동됩니다!]

[‘바스라진 마기가 발동됩니다!]

반쯤 빛을 잃어버린 신성력과 절정을 넘어 풍화가 시작된 마기가 서서히 뒤섞였다.

“내 것이 되어야만 해요. 오직 내 것이어야만 해.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빠져나간다면, 그래. 차라리 팔다리를 전부 잘라서 언제나 내 옆에만 있게 하겠어요.”

간단한 이야기다.

자유를 찾아 날아가는 나비를 붙잡으려면 그저 그 날개를 떼어버리면 되는 것을.

“너무 걱정 마요. 먹는 것도 입히는 것도 씻는 것도 산책하고 그 외 모든 활동을 하는 것까지 전부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정말이지 꿈만 같지 않나요? 우리 둘이서 영원히 함께 머물면서 모든 추억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는 거잖아요.”

천진난만하게 웃는 미소는 마치 어린아이의 잔혹하고 순수한 욕망과 같았다.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되는.

그렇기에.

오싹.

진혁은 아자토스의 분신체를 만났을 때와 유사한 감각을 느꼈다.

콰콰콰콰콰콰

이어진 것은 패도적인 검격이었다.

정형화된 초식이나 화려하고 복잡한 기예는 없었지만, 오롯이 본능만을 추구하는 검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콰아앙!

투콰앙!

어느새 진혁의 주무장은 긍휼의 검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무식한 공방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단검으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으니까.

“흐음. 무지막지해 보이기는 한데, 어째 실속은 없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건가?”

과거의 천유성이 조금 따분하다는 듯 길게 하품을 했다.

이래서야 몇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예선전이 너무 늘어져서야 흥이 식는 법.

조금 더 빠르고 화려하게 클라이맥스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사용한 건 두 가지.

첫 번째는 테레사의 마검을 강화시키는 것.

[특수 성유물 ‘역전의 명수’를 사용했습니다!]

[50층에 존재하는 아이템의 능력을 그대로 구현해 지정한 무기에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아이템의 제약은 없습니다.)]

[1분간 불러올 대상은 ‘차원 브레이커’입니다!]

[마검 ‘데르카시아’에 ‘차원브레이커’의 권능이 깃듭니다!]

순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폭풍이 일어났다.

‘차원브레이커’

무려 아자토스의 고유무장이 그 격을 발현한 것이다.

“……!”

진혁 역시 이번 것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테레사의 공격 하나하나도 만만치 않은 와중에… ‘부유하는 흑안’과 함께 가장 까다로운 고유무장이 가세한다?

그것도 완전히 허를 찌르는 타이밍에?

‘못 막아….’

차원브레이커는 인과마저 베어버릴 수 있는 사상병기.

막으려 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전의 명수’를 통해 차원 브레이커가 막 발동되려는 찰나.

과거의 천유성이 사용한 두 번째 카드가 발동되었다.

[특수 아이템 ‘주마등 필름’이 발동됩니다!]

파각!

가벼운 충격과 함께 엘리스의 품속 한켠에 잘 간직되어 있던 향수병이 깨졌다.

‘일곱 여신의 향수’.

바로 릭 헤네시에게 받은 아이템이다.

호감도를 올려줄뿐더러 대상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발동되자. 애처로우면서 달콤한 향이 퍼졌다. 엘리스의 동공에 미미한 변화가 생겼다.

잃어버렸던 이성이 되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암전되었던 시야가 밝아지며, 곧바로 눈에 들어온 건 거칠게 몰아치는 검격이었다.

정확히 진혁의 어깨죽지를 노린 마검엔 브레이크가 걸려있지 않았다.

단순히 팔만 자르는데 그치지 않고 목숨까지 앗아버릴 수도 있겠지.

놀라우리만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수많은 상념을 되새김질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엘리스는 과거의 천유성의 입모양을 통해 상대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켜.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그리고 그 숭고한 희생을 통해 네 연인에게 왕관을 쥐어주렴.

‘봉인의 왕관’.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선 반드시 봉인의 왕관이 필요했다.

‘나 하나로 계약자의 목숨뿐 아니라 바보 동료들까지 살릴 수 있다는 거잖아.’

게다가 언제 또 이성을 잃고 진혁의 피를 탐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아닌가?

그러니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손끝이 떨렸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엘리스가 진혁과 테레사 사이로 끼어들었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이 모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또옥. 또옥, 또옥.

피가 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검이 엘리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엘리…스?”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너무나 당황한 터라 이성적인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치료부터 해야 한다.

상처, 상처가 어느 정도인 거지?

더듬거리며 검이 파고든 지점을 살피자, 심장이 있던 부위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있잖아.”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구쳐 나왔다.

“잠깐. 말하지 마. 그럼 위험하니까.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약자의 피가 좋았어. 너무 달콤하고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었거든.”

“가만히 좀 있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별의 가호’ ‘만다라’. 젠장 치유력에 관한 능력을 훨씬 더 많이 모아둘걸.

대체 왜 이쪽은 이렇게 등한시 했던 걸까.

후회가 미친 듯이 몰려온다.

그토록 많은 시간 그토록 많은 능력을 복사해 왔건만.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무력감과 절망감이.

모든 감각을 무너뜨린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계약자가 좋았던 거더라. 항상 우울하고 힘들었는데, 계약자를 만난 순간부터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했어.”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고! 회복에만 집중하라고. 너 진조잖아! 진조는 불사의 존재잖아!”

진혁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고마워. 나한테 이런 추억을 쌓게 해줘서. 나 같은 애랑 함께해줘서.”

엘리스의 가녀린 손이 진혁의 뺨에 닿았다.

강진혁.

이 남자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또 소중한, 단 하나뿐인 존재다.

대신 목숨을 잃어도 조금의 후회가 없을 만큼.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줘.

자신의 몫까지.

엘리스는 그리 말했다.

툭.

힘없이 떨어지는 고개.

동시에.

탑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들의 대표문자들이 새겨진 왕관이 나타났다.

[‘봉인의 왕관’을 획득하셨습니다.]

“비극은 좋은데 신파는 별로야.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았어. 희생의 값진 경험도 하고. 봉인의 왕관을 얻어서 아자토스도 막고. 응? 완전히 일석이조잖아.”

지독하게 깔린 침묵 속에 과거의 천유성만이 낄낄거리며 축포를 쏘아올렸다.

***

같은 시각.

모멸의 사원에 있던 또 다른 엘리스와 테레사의 인격이 이변을 감지했다.

“느꼈어?”

“그래. 제대로 당했나 보네.”

이 정도 충격이 발생했다는 건 생명이 소멸되기 직전이라는 거겠지.

기어코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다고 상정해야 하리라.

두 명이 서로를 잠시 동안 마주봤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경우에 어떻게 할지는 이미 이야기해 두었다.

“후회는?”

“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계약자랑 같이 있는 건 나보단 그 바보 꼬맹이가 더 어울리거든.”

그러니 후회는 하지만 이생에 미련은 없을 것 같다.

“너는 어떤데?” 그 둔감하고 멍청하고 자기 주장도 제대로 못하는. 자존심만 센 여왕폐하가 다시 웃는 걸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나도 뭐. 어쩔 수 없겠네. 이대로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 성녀는 내가 용납하기 힘들 것 같거든.”

또 다른 인격의 테레사 역시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저 멀리 있는 본체의 감정과 기억이 흘러들어오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럼 해보자고.”

“그래.”

[엘리스와 테레사가 ‘영혼의 정수’를 발동합니다!]

몸에서 나온 순수한 빛이 아자토스의 궁전을 향해 날아갔다.

***

쿠쿠쿠쿵!

난데없이 몰아치는 두 줄기 빛이 엘리스와 테레사에게 각각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두근….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한 엘리스의 몸에 작은 고동소리가 울려퍼졌다.

“…?”

엘리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무언가 따스한 기운이 몸속에 파고드는 것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으아아앙! 저, 저는 이럴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이건 제 본심이 흐끅. 절대. 끅 아, 아니에요. 저는 이런 사람이 아, 아, 아니라 고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성을 되찾은 테레사가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진혁을 해치려 하고. 엘리스를 찔렀다는 죄책감에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테레사 씨 잘못이 아니에요.”

진혁이 그런 테레사를 다독였다.

그리고 곧바로 엘리스에게 다가가 말없이 꼭 끌어안아줬다.

“수, 숨 막힌다 계약자. 짐은 지금 중상을 입은 환자이니라.”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엘리스가 바둥거렸지만, 진혁은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

모두가 살았으니 이걸로 된 거다.

다만.

“…넌 나 좀 보자.”

진혁이 장난질을 친 대상을 정면에서 노려봤다.

장담하건데 여기서 둘 중에 하나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토록 화가 난 건 처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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