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62화
862화. 과거의 망령 (1)
이제 두 걸음.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검을 논할 단계가 아니다.
이미 수십, 수백 번 상대를 죽이고도 남을 기회가 있었거든.
그런데도 살아서 서로의 앞에 섰다는 건 아마도 그 검에 더 이상 살의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겠지.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본다.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와 한 번도 지지 않았던 상대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검을 시연하기 위해서.
당연한 말이지만.
그 의와 협에
그 혼과 마음에.
더 이상 살의는 남아 있지 않았다.
“…간다.”
“그래. 와라.”
그 말을 끝으로,
극월이 움직였다.
‘추혼검무’
제1식.
추혼수라검.
선택한 건 처음을 함께 했던 최초의 검.
간결하면서 쉽기에 모든 추혼검의 근간이 되는 뿌리다.
‘의외네. 조금 전의 오의를 사용할 거라 생각했는데.’
라고 진혁이 생각한 순간.
우우우웅!
‘검의 노래’와 ‘백야’를 통해 나오는 마력의 흐름이 달라졌다.
순백의 눈발.
새하얗게 물든 검의 정수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한 노랫소리에 휩싸였다.
“하하…하.”
진혁의 입에서 자연스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지금 펼쳐지는 무의 향연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가로와 세로,
끝이 이어진 선이 맞닿는다.
세상을 4분할로 나누는 기준.
끝없이 이어진 지평선과 수평선의 종점에서 몰려오는 바람엔 분명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검은 멈추지 않았다.
1식의 극에 달한 검무는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했다.
콰드득!
우득!
순간적인 깨달음들이 연속으로 찾아오며, 이내 꽃잎은 개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참을 수 없는 향기에 섞여.
제0식.
[‘백매화(梅花)’가 발동됩니다!]
내리던 하얀 눈이 그보다 더한 순백의 매화로 변해 흐드러졌다. 진혁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그 묘리를 이해하기 위해 곤두섰다. 그래. 이게 피와 땀을 흘려서 천유성이란 인간이 도달한 마지막 장소구나.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인정받고 싶었는지.
또 얼마나 넘어서고 싶었는지.
그 모든 과정과 동기가 보이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파츠츠츠.
이쪽도 그에 걸맞은 걸 꺼내야겠지.
진혁의 단검에 극한의 마력이 주입되었다.
고인물류 ‘과거 재현’ – ‘사상구현화’.
천유성은 그저 승리를 바라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인정을 바랐던 것뿐.
단 하나뿐인 라이벌에게.
자신의 검이 이미 충분히 닿을 수 있노라고.
[검들의 승천지가 발동됩니다!]
수십 개의 검이 내리는 눈송이들 사이로 솟구쳤다.
하나하나가 최강의 등반자들과 최강의 거주자들로부터 경험한 절기들이었다.
이미 비승의 영역에 접어든 절대자들이 남긴 검의 정수.
그것이.
콰콰콰콰콰콰
하나의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제히 자신들이 기억하는 검로를 되새겼다.
카가가가가강!
셀 수 없는 검격과.
카아아앙!
세는 것으로 감히 끝을 가늠하기 힘든 검격이 부딪쳤다.
이제 한 걸음.
이는 친우를 넘어 하나의 거울을 마주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이었다.
다음에 어디로 움직일지 알고, 그다음도, 그다음의 다음 역시도.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굳이 합을 주고받지 않아도 결과를 전부 알고 있는・・・ 오롯이 그런 시야를 갖고 있는 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간격이었으니까.
콰아아아앙!
검과 검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피는 뿜어지지 않았다.
옷 역시 평소와 같았다.
눈송이 또한 여전히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며 낙화(落花)했다.
“144전(戰) 143승(勝) 0패(敗).”
진혁이 더 이상 걸을 곳이 없는 이의 앞에 서서 싱긋 웃었다.
서로가 서 있는 거리는 같다.
나란히. 바로 옆에서.
나눴던 검에 대한 결과를 이야기한다.
“1무(無).”
진혁이 천유성의 상처 하나 없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가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이 세계의 마지막을 보자.
애들이 많이 보고 싶다고 하더라.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구구절절 입으로 늘어놓진 않았지만, 어깨에 실린 손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피식.
천유성의 입 꼬리가 아주 미미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래. 마음고생시켜서 미안했다. 가면 모두에게 사과하도록 하지.”
그것으로,
50층에서 벌어진 시련의 탑, 두 고인물의 마지막 검무가 끝을 맺었다.
***
훈훈하게 끝난 한 사원의 탈주 사건.
물론.
콰앙!
그 결과를 모두가 승복한 건 아니었다.
저 위에서 흥미진진하게 자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오랜 시간을 공들인 일이 너무도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끝내버린 것이다. 승자와 패자.
산 자와 죽은 자만이 있어야 할 신성한 결투에서 이긴 자도 진 자도 없다니.
이게 뭐란 말인가?
“지금 장난하는 거야? 어? 너. 이걸로 괜찮은 거냐? 강진혁을 넘어서겠다는 그 집념이 이렇게 가벼운 거였냐고?”
과거의 질문에, 현재가 답했다.
“내가 인정했고 내가 만족했다.”
그거면 된 거다.
“웃기지 마라.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이딴 말도 안 되는 결말 따위는 용납할 수 없어!”
능글맞고 여유 넘쳤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번뜩이는 안광은 이미 광기의 경지에 접어든 상태였으니까.
“죽어도 인정 안 하려는 성격이 진짜 동일인물이긴 동일인물인가 보네.”
“뭐라고 했냐?”
“크흠. 아니, 역시 과거의 산물보단 미래지향적인 현재가 더 멋있다. 뭐. 이런 뜻이었지.”
“조심해라. 무승부를 1패로 바꿔버리기 전에.”
“옙. 위대하신 검성 나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전부 죽여버리겠다. 이제 다 필요 없어.”
과거의 천유성.
아니. 탑의 망령은 그대로 이성을 내던져버렸다.
[시스템이 폭주합니다!]
일그러지는 세계.
시커먼 연기들이 그대로 별의 탄생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탑의 망령의 몸에 검은색 실핏줄이 생겨나며 ‘유성’이라는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저건 더 이상 플레이어도. 탑의 거주도. 시스템의 산물도 아니다.
“괴물….”
뒤에서 호흡을 회복하던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괴물’.
저 이질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데 그보다 적합한 표현은 없으리라.
움찔하고.
테레사 역시 탑의 망령의 현현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직까지 자신이 엘리스를 찔렀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상태였으나, 본능이 저 괴물로부터 멀어지라고 최대한의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아…으….”
“괜찮다. 바보 성녀. 우리 둘 다 적의 술수에 놀아났을 뿐이야. 게다가 날 죽이려고 검을 날린 것도 아니지 않느냐?”
“미안해요…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로….”
“알았으니까 울 시간에 정신부터 차리고 회복에 집중하거라. ‘저건’ 계약자와 바보 검성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언제나 진혁을 믿고 의지하던 엘리스였다.
승리라는 결과를 강제하며 당연하게 가져오는 믿음직한 계약자였으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다.
저릿저릿.
피부로 전해지는 불길한 기운.
형언할 수 없는 마물이 온 세계를 집어삼키기 위해 현현하고 있었다.
***
“젠장. 저 녀석 저런 것도 할 수 있었어?”
“나도・・・ 잘 몰랐다. 가르쳐주기만 했을 뿐, 놈에 대해서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야.”
진혁의 질문에 천유성도 상당히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강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기 바빴던 이 녀석에겐 과거의 자신이 뭘 했는지는 별로 관심사가 아니었나보다.
뭐가 됐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진혁의 시선이 과거의 망령 뒤로 향했다.
우우웅!
신비롭게 흐르고 있는 ‘최초의 혼돈’,
50층을 공략하고 탑의 정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열쇠가 저기에 있다.
봉인의 왕관을 손에 넣는 시점에서 아자토스에게 약간의 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시간도 조금은 벌었을 터.
‘남은 방해꾼은 이제 한 명뿐인 건가.’
척.
‘여명의 검’을 쥐고.
철컥!
‘황혼의 총’을 장전한다.
이제부터는 검만이 아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야 할 시간이다.
“난 오른쪽. 넌 왼쪽. 처음엔 간만 좀 보면서 시작하자.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가늠부터 해봐야 할 것 같으니까.”
“그래. 알겠다.”
탓.
파앙!
각각의 능력과 신법이 펼쳐졌다.
[‘신령질주’가 발동됩니다!]
십이지 묘왕 ‘청하’로부터 가져온 능력.
토끼 특유의 변칙적이고 경쾌한 움직임이 오른쪽 경계의 아슬아슬한 부분을 넘나들었다.
마찬가지로 천유성 역시 ‘검마’가 사용했던 신법으로 순식간에 왼쪽 가장 외곽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신속의 왕관까지 썼으니 그 속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바로 그때.
“하찮구나.”
망령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시에.
푸슉! 푸슈슈슉!
짙게 깔린 검은색 운무 속에서 알 수 없는 가시들이 솟구쳤다.
“…!?”
“…!?”
진혁과 천유성이 가까스로 반응했다.
가시 자체가 튀어나오는 게 워낙 조용한데다, 마력을 포함한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고 나서야 반응할 수 있는 종류.
문제는 시야에 잡혔을 때 쳐내거나 피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무엇보다.
이 안개.
이 넓은 영역 전체에서 언제든지 가시들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파앙!
분석을 끝마칠 새도 없이 이번엔 본체 쪽에서 검은 창이 날아왔다.
조금 전 가시가 전채요리였다면 이번이 메인 요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카가각!
・・・욱씬!
단검으로 궤도를 비틀어내는 데도 상상 그 이상의 무게와 압력이 느껴졌다.
대체 몇 키로짜리 창이냐 이거.
심지어 지가 직접 던진 것도 아니고 어깨 위에 떠 있는 창을 두고 손가락 하나 까딱한 거였다.
“더럽게 성가신 걸 가지고 있네.”
진혁이 혀를 찼다.
천유성 쪽도 어찌어찌 쳐내긴 한 모양인데, 정면 승부만 고집하는 놈이다 보니 빗겨내기가 아니라 상쇄를 선택한 것 같았다. 한쪽 팔이 약간 처져 버렸거든.
극도로 진한 마력이 흐르는 검성의 팔도 놀라버린 게 틀림없었다.
“너희를 죽이는 건 내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단지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에게 강력한 구속을 채운 뒤 이 여흥을 즐길 생각이었지.”
과거의 망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하반신은 어느새 거대한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고.
상반신은 지면으로부터 약 5M가 넘는 높이에 도달해 있었다.
‘인간의 상반신과 연기 덩어리로 이루어진 하반신 그리고 수많은 가시와 창을 보유하고 있는 자체 필드형 보스라…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진혁이 탑의 망령을 보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바로 그때.
더욱더 최악의 악몽이 튀어나왔다.
[‘257개의 고유성창’과 ‘1,665개의 고유능력’과 ‘32,552개의 스킬’이 개방됩니다!]
그것은 ‘세계의 기억’이 담긴 무한의 서고를 훨씬 더 뛰어넘는 잃어버린 언어들로 새겨진 책들이었다.
“이것이 시련의 탑의 진 엔딩과 서브엔딩을 포함해 수많은 이스터에그들을 전부 섭렵한.”
11년 동안 탑을 오른 이를 고인물이라 칭송한다면.
탑에 갇힌 채 5,000년이란 시간 동안을 끝나지 않는 시련에 얽매여 있던 자는 무엇이라 칭해야 하겠는가?
“바로 나다. 하하하하하! 그게 바로 이 몸이란 말이다. 이 벌레 같은 것들아!”
화르륵!
검붉은 화염이 변태가 끝난 거대한 보스 몬스터의 주위로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