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77화
877화. 블랙 캐슬 (1)
레비시타 가문의 가주.
‘아비가일.’
진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선에서는 가주들이 엘리스를 배신하지 않고 죄다 같은 편이었지.’
원래의 능력이라면 가주들이 한 트럭으로 와도 상관없었지만.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저주받은 성기사가 본 직업일 때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나 가주들 사이에서도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아비가일이 추격자라면 최악이지.
“달려!”
“싸우지 않을 거냐? 내 춤사위가 펼쳐진다면 저런 놈 하나쯤은…”
“개소리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라고!”
고인의 마지막 춤사위가 되고 싶지 않다면 아직은 싸울 때가 아니다.
“크르르!”
“커엉! 커엉!”
측면에서 거대한 덩치를 지닌 다이어 울프들이 튀어나왔다.
진혁이 즉시 방패를 꺼내 공격을 막았다.
콰아앙!
묵직하다.
그나마 성기사라고 힘 스탯을 높게 받았기에 망정이지.
천유성이었다면 부상까지 입었을 수도 있었다.
‘너프도 이 정도면 선을 넘는 건데.’
하다못해 신성력이라도 제대로 다룰 수 있었다면 해볼 만했을 텐데.
욕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어쩔 수 없다.
불평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진혁이 다이어 울프의 목덜미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푸욱!
“깨갱!”
정확한 급소를 노린 일격.
상처 부위에 신성력으로 인해 황금빛 불길이 타올랐다.
[신이 허락받지 않은 능력을 계속 사용함에 따라 천벌을 내립니다!]
[대상의 몸도 같이 불탑니다!]
화르륵!
진혁의 등에 황금 불꽃이 일어났다.
끄아아아 이게 뭔 난리래?
“유성아 버프! 버프!”
“빌어먹을 문워크라도 하란 말이냐? 아는 춤이 없단 말이다!”
“강강수월래든 봉산탈춤이든 아무거나 좋으니까 추라고 빨리! 늑대 밥 되기 전에!”
“그러게 평소에 헌금도 좀 하고 에덴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딜러인 네놈이 반푼이니 더 힘든 것 아니냐!”
춤을 추면서 달리는 (전)검성 (현)무희와 신에게 버림받은 성기사.
총체적 난국이 계속되었다.
“후후. 팔팔한 사냥감들이네요.”
탓! 타앗!
어둠을 타고 다가온 아비가일이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거점 ‘블랙캐슬’의 가호로 인해 관통력과 공격력이 각각 15%씩 상승합니다!]
우우웅!
날에 스며든 검붉은 기운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
저거에 그냥 맞았다간 몸에 예쁜 구멍이 생길 거다.
[스킬 ‘성호’가 발동됩니다!]
[성공 확률은 2%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에서 2%의 확률이 성공하는 일은 없었다.
콰아앙!
방패를 희생해 간신히 버틴 진혁이 통로의 끝자락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여기까지 오긴 했다.
“이쪽이야.”
아마 여기 틈 사이에 있을 텐데……
겉으로는 평범한 벽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진혁은 능숙하게 손가락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달칵!
역시. 여기도 똑같구나.
진혁이 손가락에 걸리는 격철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검은 박쥐의 수호벽’이 발동됩니다!]
콰콰콰콰콰콰
박쥐의 날개를 본뜬 검은색 칼날이 벽과 벽 사이를 가로질렀다.
모든 걸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함정.
“어떻게….”
아비가일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성채에 존재하는 기믹들은 가주급을 제외하고는 절대 알 수 없는 비밀.
외부인이 보고 알아챌 정도로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운 좋게 격철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양의 마력을 공급해야만 발동되는 구조였기에, 당혹감은 더욱더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배신자가 있다는 건가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 좀 쫓아와라. 다음에 만나면 아주 그냥 어휴.”
진혁이 꿀밤을 때릴 것 같은 자세를 취하자, 아비가일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응, 왜?”
“당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뭔가요?”
“뱀파이어 호텔 숙박권 당첨돼서 놀러왔다. 됐냐? 나쁜 짓 안 하고 조용히 있다가 갈 거니까 너무 그리 까칠하게 굴지 말라고.”
“능글거리며 이죽이는 게 어째서인지 낯설지가 않은데… 뭐 좋습니다. 이유야 잡아서 심문하면 될 테니까요.”
아비가일의 눈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토르가 말했던 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런 아비가일을 보며, 진혁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쓰읍.
어쩐지 더럽게 불길해지면서 과거의 악몽이 떠오려고 한다.
뱀파이어들이랑 지지고 볶고 하느라 PTSD가 세게 왔었는데, 이건 어떻게 50층을 정복하고 나서도 달라지지가 않냐.
***
아비가일의 추격에서 잠시 벗어난 진혁과 천유성이 즉시 혈옥으로 향했다.
지독한 사냥개가 붙은 이상 지금부터는 1초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두 사람은 마침내 검은 문으로 가로막힌 방 앞에 도달했다.
쏴아아아….
유독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여기가 네가 말한 그곳이냐?”
“응. 엘리스가 하도 질색을 해서 실제로 와본 건 몇 번 안 되지만.”
릭과 함께 왔을 때는 릭이 사전에 위험한 물건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였다.
그래서 비교적 안전하게 고를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안전장치 없이 100% 날 것 그대로가 진열되어 있는 상태일 거다.
진혁이 문의 양쪽에 있는 뱀 모양의 장식품에 손을 갖다 댔다.
뱀의 머리를 움직이며 각도를 바꾸자 뱀의 눈에서 붉은 광선이 쏘아졌다.
파츠츠!
여기서 중요한 건 광선이 문에 박혀 있는 각종 보석과 수정구에 닿지 않고 6시에서 12시까지 움직이는 게 포인트다.
“더럽게 어렵네.”
진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식은땀을 훔쳤다.
워낙 간격이 좁고 촘촘한데다 각도까지 괴랄한 탓이다.
“서둘러라. 누가 온다.”
천유성이 조금씩 커지는 발자국 소리에 청각을 곤두세웠다.
“나도 아는데, 그게 맘처럼 되는 게 아니란다.”
“비켜라. 차라리 내가 하겠다.”
“어허. 애들이 이런 거 함부로 만지면 ・・・ 어라? 되네?”
아 얘 의대생이었지.
그것도 미끈거리는 동맥을 척척 봉합하는 실력자라는 걸 깜빡했다.
“이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니.
“닥쳐라.”
덜컹!
문이 열리는 즉시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쿵!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발자국 소리가 다시 멀어지는 걸 보니 다행히 걸리진 않은 듯싶었다.
“함부로 아무거나 건드리면 안 돼. 진짜 별의별 이상한 것들이 있으니까.”
게 중에는 태고의 존재들이 사용하던 성유물이나 고유무장까지 잠들어 있었다.
조금 다치는 수준이 아니라. 공허의 틈으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 네놈인 줄 아느냐.”
천유성이 콧방귀를 뀌며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진혁 역시 열심히 진열된 아이템들을 뒤적였다.
솔직히 말해 보기만 해도 눈이 돌아가는 성유물들이 즐비하긴 했지만, 느긋하게 쇼핑이나 즐길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가야 한다.
그러다 안쪽에 비치된 천으로 만든 옷을 발견했다.
[선녀의 나비옷- 무희 전용 아이템]
입수 난이도 : S
내용: 버프와 디버프 계열 능력을 +10%만큼 상승시켜주며, 춤을 출 때 소비되는 칼로리를 50%만큼 낮춰줍니다. 사용하는 자의 매력도에 따라 능력치가 달라지며, 못생이 사용할 경우엔 상공 50km까지 떠오르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을 성층권으로 보내버린 악마적인 아이템.
눈이 더럽게 높아서 아무나 착용할 수 없다.
하지만, 천유성이라면 괜찮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외모 하나만큼은 세계관에서 손꼽히는 잘생이었으니까.
“좋아. 무기는 이걸로 쓰면 될 것 같군.”
반대쪽에서 천유성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니, 무기 쪽도 어느 정도 해결된 모양이다.
‘다음은 내 차롄데…
진혁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사실 이곳에 보관된 것들 중에 딱 어울릴 만한 아이템들을 알고 있긴 했다.
저벅.
걸음이 멈춘 곳에 칠흑처럼 어두운 갑주가 비치되어 있었다.
[타락한 성기사의 갑주]
입수 난이도 : 측정 불가
내용: 일체형 갑주로 마기로 이루어진 특수한 권능을 발현시킬 수 있습니다. 마신의 총애를 받는 정도에 따라 역대 마신들의 고유 성창과 고유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심연] 스탯이 추가로 부여됩니다.
원래 테레사에게 줄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테레사는 갑주 대신 마검 ‘데르카시아’를 선택했다.
절대 마검의 성능이 훨씬 더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이 갑주에 걸려 있는 착용 조건이 너무도 까다롭고 위험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것을 고른 것이었지.
[제한: 마신들의 저주와 원념이 배어 있는 갑주는 역대 착용자 중 가장 악랄하고 잔혹한 성품을 지닌 자를 능가해야만 착용이 가능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시 몸이 서서히 썩어문드러집니다.]
상위 마족들은 물론, 마왕들조차도 이 터무니없는 조건 때문에 소멸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나처럼 티끌 하나 없이 선량한 사람이 시도하기엔 ・・・ 너무 도박이야’
이제라도 다른 걸 찾아봐야 하나?
하지만, 이것만 한 게 없는 것도 사실인데….
“됐다. 썩어문드러지면 아무리 좋은 성유물도 다 무슨 소용이겠어?”
테레사가 사용했던 마검도 여기 어딘가에 있긴 할 거다.
그렇게 진혁이 마음 정리를 끝내려던 바로 그때,
“딱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갑준데, 어째서 선택하지 않는 거냐?”
천유성이 다가왔다.
“나도 마음에는 드는데, 조건이 말이 안 돼서 입으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흐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대체 뭐길래?”
천유성이 아이템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진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 마라. 너라면 아무 문제 없을 거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눈빛.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는 100%를 자신하고 있었다.
“대신 다음 사람은 절대 이 갑주를 못 입는 게 유일한 단점이라면 단점이 될 수 있겠군.”
“잠깐. 그게 무슨 뜻이야?”
“별 뜻 아니다. 그저 경험에 근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너.”
진혁이 구시렁거리면서도 갑주를 선택했다.
이상하게도 갑주를 착용한 직후 아무런 부작용도 없었다.
아마, 이 세계에서 이 갑주를 입은 자가 아직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처음은 그 누가 입더라도 부작용이 없을 수밖에.
암. 그것 외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안이다!”
“마력의 흔적이 이쪽으로 이어져 있어!”
“찢어 죽일 놈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빨리 열어라. 놈들이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어서 붙잡아야 한다!”
혈옥의 바깥에서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결국에 들킨 것이다.
“입구가 막혔어.”
“다른 출구는 없는 거냐?”
“……..”
“빌어먹을. 뚫는 수밖에 없는 건가.”
천유성이 주섬주섬 옷을 바꿔입기 시작했다.
나폴거리는 선녀 옷에 토끼 귀를 착용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다 웅장해지려고 한다.
“잠깐. 싸우지 않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있어.”
“진즉에 말하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왜 가만히 있던・・・ 설마, 네놈!!!”
천유성이 날개로 진혁의 목을 칭칭 감았다.
숨이 막힌다.
뇌로 가는 산소가 급속도로 떨어진다.
“죽어라. 그냥 제발 좀 죽어!”
“켁! 케엑. 나,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사진 한 장에 얼마인데, 개고생을 한 보상은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진혁이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며 옆에 있는 물건에 손을 뻗었다.
‘신념을 잇는 끈’과 비슷하게 공간과 공간을 잇는 종류의 아이템이다.
인연이 조금이라도 닿아 있다면 그곳으로 인도할 터.
‘브라함의 반지’와 ‘결혼반지’를 갖다 댔다.
우우웅! 황금빛이 번져나갔다.
그러더니 이내 시야가 완전히 바뀌었다.
화려한 방.
푹신해 보이는 침구류와 베개들.
이곳은 누군가의 침실이었다.
그리고.
“어머나….”
안락의자에는 너무나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