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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81화


881화.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3)

예전 BJ를 했을 때.

망할 방구석 트수의 미션으로 강남역에서 길거리 헌팅을 한 적이 있었다.

후드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화려하게 꾸민 여성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었지.

지금 엘리스 표정이 그때 만났던 사람들과 아주 흡사했다.

[‘블러드 리뎀션’이 발동됩니다!]

위아래로 몰아치는 피의 파도.

브레이크 없는 플러팅에 대한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음욕의 대죄가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야, 네가 유감만 표하면 어쩌라는 건데?

게다가 명색이 마신의 권능이 고작 이것도 해결 못 하면서 무슨 놈의 고유 성창이란 거냐.

욕설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지금 당장은 항의를 할 여유도 없었다.

변변찮은 전투 스킬 하나 없는 천유성이 두 명의 가주에 의해 인수분해 되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수치심과 모멸감을 새로운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수밖에.

[분노의 대죄가 대상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쿠쿠쿠쿠쿠!

진혁의 몸에서 뿜어진 검은색 운무가 악마의 형상으로 변했다.

아직.

이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훨씬 더 많은 자극이 있어야만 엘리스의 저 한방을 넘어설 수 있었다.

[분노의 대죄가 기억을 회고합니다.]

[잠재의식 속 매장된 2,353개의 흑역사를 꺼냅니다.]

트라우마를 자극해 분노의 힘으로 바꿔주는 권능.

진혁의 눈앞에 영사기가 재생되었다.

-수리부엉이 그 망할 놈이 월세 미션을 거는 바람에 괴식 먹방을 하다가 응급실에 실려 가서 전문의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았던 기억.

-먹고살기 위해서 미소녀 버튜버 행세를 하다가 10,875명 시청자 앞에서 실수로 캠을 켜버린 악몽.

-안드리아와 만났던 정신병동, 거기서는 중2병 흉내를 내며 복사조건을 달성했었다. 왼손에 흑염룡이 날뛴다는 말에 받았던 경멸 어린 시선들. 심지어 광신도 교주 놈도 불결한 것과 마주했다는 듯 시선을 피했었지.

-천수천안관음과 Let it go에 맞춰 탱고댄스를 추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망각이란 일종의 축복이다.

안 좋은 기억을 전부 잊지 않고 산다면, 인간의 정신은 결코 버틸 수 없었으니까. “크아아아!”

진혁의 눈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BJ 시절부터 시련의 탑을 정복한 그 후까지.

수많은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

[마신의 권능 ‘마천세계’가 발동됩니다!]

진혁의 머리 위로 한 쌍의 뿔이 나타났다.

파츠츠!

뿔 위로 검은 구체가 만들어졌다.

콰콰콰콰콰콰콰!!!

몰려오는 붉은 파도를 향해 구체가 발사됐다.

이어진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과 마력의 격돌이었다.

쩌저적!

폭풍으로 인해 블랙 캐슬의 천장이 그대로 날아갔다.

환하게 떠 있는 보름달에 닿을 정도로. 검고 붉은 광휘가 솟구쳐 올랐다.

*

“무슨 힘이….”

엘리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려 ‘개벽의 계시록’을 사용한 상태에서 발동한 블러드 리뎀션이다.

설령 주신급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팽팽하게 맞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파츠츠! 파치칙!

상대는 견디고 있다.

아니, 단순히 견딘다는 걸 넘어서 대등하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쪽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인다면 즉시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감히’

아타락시아를 포함해 수많은 가문들을 이끄는 자신에게 이런 수치를 안겨주다니.

수천년을 지탱해온 긍지와 신념에 이빨을 드러내는 꼴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칭찬해주마. 짐에게 이걸 꺼내게 만든 자는 그대가 두 번째이니라.”

[‘순혈의 왕관’이 소환됩니다!]

탑을 지탱하는 일곱 개의 보구.

최강을 일컫는 일곱 명의 절대자에게만 허락된 성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웅!

피에 실린 마력의 밀도가 급변했다.

검은 구체가 조금씩 뒤로 밀렸다.

하지만.

“드디어….”

진혁의 표정은 궁지에 몰린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마침내 참고 참았던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희열하는 자에 가까웠지.

그리고 그 씰룩이는 입꼬리가 엘리스의 이성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실실 쪼개다니.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고도 웃을 수 있는지 보겠다.”

엘리스가 모든 마력을 집중했다.

몇 배로 거대해지는 붉은 파도.

그래.

바로…….

지금이다!

“유성아!”

“알고 있다!”

진혁의 고함에 요리조리 도망만 치던 천유성이 모아왔던 무희의 마력을 해방했다. 동시에.

타닷!

방향을 바꿔 지붕이 사라진 블랙 캐슬의 창공 위로 몸을 날렸다.

“우오오!”

처음부터 1:1로 엘리스를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최대한 자존심을 긁고 버티면서. 모든 신경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것.

그게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선녀의 나비옷이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봄비가 내리던 날.

어느 골짜기에 내려온 선녀.

나뭇꾼의 마음을 훔쳐 하늘 높이 훨훨 날아가버린 그날의 도약이 다시 한번 행해졌다.

“안 돼!”

“멈춰라!”

아뮬람과 줄리아드가 ‘혈’과 ‘혈사’를 사용하며 천유성을 저지하려 했다.

엘리스 역시 남은 마력을 재배열해 붉은 꼬챙이를 소환했다.

“그렇게 둘 것 같으냐!”

진혁이 구체에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마신의 권능 ‘마천세계’ – ‘절연’이 발동됩니다!]

빠드득.

타락한 성기사의 갑주에 균열이 일어나며 최후의 몸부림이 펼쳐졌다.

조각조각 나뉜 쇳조각들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콰콰콰콰콰!

아뮬람과 줄리아드가 꺼낸 핏방울들이 그대로 흩어져버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낸 공백의 1초.

폭풍전야와 같은 적막 속에서 천유성이 손을 뻗었다.

“닿아라!”

목표는 단 하나.

‘순혈의 왕관’.

침식을 막기 위한 두 개의 조건 중 하나를 달성하는 것이다.

탓.

천유성의 손끝이 살포시. 그러나 확실하게 왕관에 닿았다.

띠링! 띠링!

상태창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첫 번째 침식이 종료됩니다.]

[이 세계선에 속한 존재들은 더 이상 당신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15분 뒤에 원래 세계로 귀환합니다.]

성공이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이제 이 무시무시한 세계도 안녕이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

“아타락시아의 전성기도 별 거 없었군.”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투콰아앙!

번개를 머금은 망치가 갈비뼈에 작렬했다.

“크악!”

천유성의 몸이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

북유럽의 주신 중 하나이자 천둥의 군주인 ‘토르’.

묠니르를 휘두르는 거구의 남자가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빌어먹을 놈이…”

천유성이 살기 어린 눈을 뜬 채 욕설을 내뱉었다.

우우웅!

내공으로 인해 빠르게 회복되는 상처.

침식이 끝난 이상 더 이상 날개옷 따위는 필요 없다.

이미 완전히 검성으로 되돌아갔으니까.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그리웠어.”

진혁 역시 여명의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세삼 느낀다.

원래 직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수많은 고유 성창과 고유 능력들이 해방됨에 따라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위기의 순간에 끼어든 건 잘했다. 허나, 조금 전에 아타락시아가 별 거 없다고 한 것 같은데・・・ 짐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

“그래. 제대로 들었다. 진조.”

토르가 당연하다는 듯이 하대를 했다.

엘리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죽고 싶은 것이냐. 고작 북유럽 신화에 속한 네놈이 그런 건방진 말을 내뱉다니.”

“고작 북유럽이라… 그래. 뭐. 부정하진 못하겠군. 이 세계에서나 내가 속한 세계에서나. 우리는 언제나 패배를 맛봐야만 했으니까.”

토르가 빼앗은 왕관을 보며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순혈의 왕관’이 오염됩니다!]

[‘태고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파츠츠,

토르 역시 생김새가 서서히 변했다.

토르의 어깨에 해골로 된 새로운 머리가 자라났다.

망치에 흉측한 칼날이 튀어나왔고.

몸 주위에는 온통 검은색 번개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크크…크하하하! 그래. 이게 바로 태고의 힘이로구나. 지금까지 내가 다루던 한줌의 마력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어!”

두 개의 머리가 광소를 내질렀다.

공기가 저릿저릿 울린다.

무식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파장이었다.

“제기랄. 십이지의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게 저놈이었나? 완전히 괴물이 되었잖아?”

“엄….”

천유성과 진혁이 요동치는 마력을 맞으며 쓴소리를 내뱉었다.

익숙하지 않은 직업을 선택해 용을 쓰느라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아무리 원래의 직업을 되찾았다고 한들 전력을 다하려면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걸 주지 않는다는 거겠지.

“뒈져라.”

토르가 망치를 휘둘렀다.

[‘태고의 번개’가 발동됩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검보랏빛 줄기.

화르륵!

콰콰콰쾅!

시야가 온통 화염으로 뒤덮었다.

“크아아아!”

“아아악!”

지켜보던 혈족들의 몸이 삽시간에 잿가루로 변했다.

“무슨….”

“엘리스 님을 지켜라!”

가주급들도 간신히 견디는 게 고작이었다.

그 정도로 오염된 순혈의 왕관과 태고의 권능을 주입받은 토르의 힘은 차원이 달랐다.

‘절대 평범한 방법이 아니야.’

진혁이 번개를 베어내며 마력의 성질과 패턴을 분석했다.

니알라토텝이 무슨 수를 썼는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런 터무니 없는 힘을 그냥 끄집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목숨을 대가로 하는 건가.

아니. 아무리 토르가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파급력을 만들어낼 순 없었다.

그렇다면…

‘왕관 쪽인가.’

순혈의 왕관 자체를 희생하여 얻어내는 등가교환.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최강의 성유물이라면 어느 정도 말이 됐다.

파츠츠! 

또 다시 번개가 응집되었다.

가솔들을 보호하느라 무리를 했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는 줄리아드와 아뮬람이 그 대상이었다.

쯧.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피하기나 하지. 하여간 느려 터져가지곤.

‘천마군림보’를 사용한 진혁이 번개가 도달하기 전 두 진조 앞에 끼어들었다.

츠걱!

그리고 대신 공격을 받아쳤다.

“어, 어째서?”

“왜 우리를 구해준 거지?”

두 가주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죽이려고 한 적

당연히 자비를 베풀 이유 따윈 없었다.

“지금부터는 험악해질 거니까. 엘리스 데리고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

진혁이 그 말만 남긴 채 자리에서 이탈했다.

툭.

다시 전장에 합류하자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천유성이 반겨주었다.

“다른 세계선이라 하더라도 뱀파이어들이 당하는 건 못 봐주겠다는 거냐.”

“뭐. 꿈자리가 사나워질 것 같다고 해둘게. 그보다 유성아. 백야 사용 가능해?”

“가능하긴 하다만, 원래의 30% 정도밖에 안 될 거다.”

“그 정도면 충분해.”

[천유성이 고유 성창 ‘백야’를 발동합니다!]

텅 빈 하늘 위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졌다.

곧바로 눈보라와 함께 시야가 바뀌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다.

군데군데 드러난 틈과 균열.

미완성의 심상 세계는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싸움은 천유성 혼자 하는 게 아니거든.

[고유 성창 ‘파이널 제네시스’가 발동됩니다!]

진혁이 부족한 심상 세계의 틈을 메웠다.

쏴아아아….

눈보라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괴물,

남은 시간은 단 11분.

지금부터가 라운드 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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