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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83화


883화. 오염된 천둥의 군주 (2)

쩌저적!

절대 온도로 떨어지는 극한의 냉기가 몰아쳤다. 

“크오오… 오오!”

토르의 몸 역시 삽시간에 서리로 뒤덮였다.

[엘리스가 ‘혈계검진’ – ‘망국의 검’을 소환합니다!]

피로 물든 거대한 검이 공간을 가르며 나타났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마력이다.

아마 주신들의 숨통을 끊기 위해 엘리스 나름대로 만들어낸 필살기겠지.

그에 걸맞게 그 일격이 자아내는 위력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콰아아앙!!!

망국의 검이 토르를 꿰뚫었다.

화르륵!

피로 이루어진 겁화가 사방으로 뿜어지며, 토르의 몸이 잿가루로 변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공격을 성공시킨 엘리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재로 변한 몸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걸 봤기 때문이다.

[고유무장 ‘차원 브레이커’가 ‘붕괴’를 발동합니다!]

망국의 검이 수백 조각으로 잘게 바스라졌다.

동시에.

파아아앙!

엄청난 반동이 엘리스를 강타했다.

“아아악!”

사정없이 튕겨 나간 엘리스가 성채의 한쪽 벽에 처박혔다.

젠장.

‘붕괴’까지 사용하다니.

이미 차원 브레이커에 있는 상당수 권능을 전부 사용할 수 있다고 봐야 하리라.

“말도 안 되는 능력이군. 무기 하나만으로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는 게 가능한 거냐?” 천유성이 혀를 찼다.

방금 전에 퍼져나간 파장을 막는 것만으로도 호신강기를 발동시켜야만 했다.

“그냥 무기면 어림도 없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게 아자토스의 고유무장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말 그대로 차원을 소멸시킬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게 저 검이었으니까.

‘그나마 열화판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려나.’

만약 원류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오염된 천둥 군주가 ‘우주를 관조하는 빛을 발동합니다!]

쩌억.

토르의 입이 위아래로 길게 찢어졌다.

벌어진 아가리에서 검보랏빛 화염이 맺혔다.

피해야 한다.

정면으로 맞서면 안 되는데.

‘젠장.’

바로 뒤에 엘리스가 있다.

화르륵!

진혁이 전신에 있는 마력을 끌어모았다.

[고유 능력 ‘만상공유’가 발동됩니다!]

인연과 인연이 이어지며.

[‘단죄의 검’이 소환됩니다!]

기나긴 여정을 함께 했던 소환수의 성명절기가 재현되었다.

공간을 너머 소환된 검이 검보랏빛 화염에 맞섰다.

이어진 것은 성채 전체가 뒤흔들리는 폭발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

백야로 구현된 심상 세계가 박살났다.

서로 다른 색의 화염이 뒤섞이며 매캐한 연기가 온 시야를 가렸다.

“크윽.”

진혁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가는 저 화염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고집불통 같은 놈. 왜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거냐!”

천유성이 반대쪽에서 토르에게 접근했다.

‘백야일천검’의 네 번째 초식이 펼쳐지자, 얼어붙은 칼날이 수백 개의 갈래로 흐드러졌다.

눈꽃이 피어오른다.

설중화.

눈속에서 돋아난 꽃잎들이 수백 개로 나뉜 갈래 사이에서 만개했다.

퍼퍼퍼퍽!

“크오오오!”

덕분에 토르의 입에서 뿜어지던 불꽃이 멈췄다.

온몸이 눈꽃에 난도질 당해 피투성이로 변한 모습. ・・・지금이다.

[고유 능력 ‘시스템 조작’이 발동됩니다!]

[대상의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을 바꿉니다!]

가능하면 속성 자체를 바꾸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지 손을 대는 건 무리였다.

[고유 능력 ‘공간발도’가 발동됩니다!]

최단 거리를 살린 최속의 일격.

여명의 검이 금빛 궤적을 남기며 뽑혔다.

서걱!

토르의 이마 한복판에 구멍이 생겼다.

쿠웅!

거대한 몸뚱어리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미치겠군. 저놈은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죽일 수 있는 거냐.”

어느새 다가온 천유성이 쓰러져 있는 토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다.

저런 꼴이 됐어도 여전히 오염된 천둥군주의 마력은 건재했다. 아니 그뿐이랴?

오히려 흉흉한 오오라를 뿜어내며 더욱 거대해지고 있었다.

차원 브레이커와의 동조율이 높아짐에 따른 결과다.

“놈은… 어떻게 된 것이냐?”

천천히 상처를 회복중인 엘리스가 물었다.

충격이 꽤나 컸는지. 진조의 신체로도 회복이 더뎠다.

“한 방 먹이긴 했는데, 숨 고를 시간 번 게 전부야.”

“이 난리를 피웠는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최소한 내가 마력이라도 완전했으면 모르겠는데, 회복도 못 하고 계속 싸우느라 몸이 말이 아니거든.

조건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

니알라토텝이 그걸 노리고 이 타이밍에 토르를 꺼낸 것일 테지만.

“그대가 말한 시간도 이제 5분 남짓 남았을 터. 말해다오. 그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사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열화판 뿐만 아니라 원류에도 먹히는 방법이 있는데.

문제는….

진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큰 대가를 바쳐야 하는 건가 보구나.”

“맞아.”

봉인식은 알고 있다.

다만, 너무나 커다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게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무림에서 흔히 진원 진기라고 일컫는 생명의 정수.

누군가 걸어온 모든 역사와 격을 희생해야지만 차원 브레이커를 봉인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상 없는 수단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선택지를 들은 천유성이 다시 한번 검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거라.”

“뭐?”

“짐의 격을 헌납하겠다. 그러니 저 괴물로부터 이 성채와 짐의 가신들을 구해다오.”

“진심이야, 그 말?”

“그래.”

엘리스가 한점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답했다.

이래서 말을 안 하려고 했던 건데.

진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나왔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쳐 올랐지만, 차마 내뱉진 않았다.

그래. 저게 엘리스다.

언제나 고고하게 자신의 책무를 이행하는

어떠한 난관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저 담담하게 해야 할 것을 하는 게 바로 아타락시아의 가주였다.

거기에 대고 어설픈 동정이나 후회를 논했다간, 그녀의 긍지에 흠집을 낼 뿐이겠지.

“기회는 한 번이야.”

진혁이 마음속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실패하지나 말거라.”

엘리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고유 능력 ‘고대 결계가 발동됩니다!]

수많은 마법진들이 토르와 엘리스의 몸을 휘감았다.

“무슨 짓을 하는….”

난데없는 마력의 소용돌이에 위화감을 느낀 토르가 망치를 움켜잡았다.

[차원 브레이커 ‘붕괴’가 발동됩니다!]

다시 한번 토르가 차원 브레이커의 권능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아까와는 결과가 전혀 달랐다.

엘리스의 심장에서 뽑혀 나온 붉은 핏줄기들이 그 파장을 막았다.

우우웅!

서로가 서로와 공명한다.

수많은 회차를 쌓아오며 만들어낸 술식과. 위대한 진조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수가 하나로 합쳐졌다. 하늘과.

땅.

위와 아래로 이어진 푸른색 선이 아름다운 파장을 자아냈다.

“멈…춰라!”

-멈춰라!

토르의 목소리 사이로 니알라토텝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의식 일부를 토르 안에 넣어뒀었구나.

감히, 이딴 짓을 꾸몄다 이거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반드시 이런 일을 벌인 것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고야 말겠다.

콰앙! 콰앙! 투콰아앙!!

결계 안에서 빠져나가려는 발광이 이어졌지만, 그럴수록 결계는 더욱더 견고해져 갔다.

이제 곧 있으면 봉인식이 완전히 완성될 터였다.

“이름 모를 망자여.”

엘리스의 눈과 입에서 얇은 피가 흘러내렸다.

안색은 창백해졌고, 손과 발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크오오오오!”

-진조 따위가. 아타락시아의 망령 따위가!

토르가 망치를 버린 채 양손으로 결계를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부러지면서도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엘리스를 노려봤다.

엘리스가 그런 토르와 니알라토텝을 향해 고했다.

“두 번 다시・・・ 짐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말거라. 그 대가는 오직 죽음일 뿐이니까.”

폭주하는 핏방울 속.

엘리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봉인 결계가 완성됩니다!]

[‘차원 브레이커’가 봉인됩니다!]

[순혈의 왕관의 오염도가 대폭 낮아집니다!]

촤르르르!

차원 브레이커가 황금 사슬에 휘감겼다.

동시에.

파슥!

토르의 몸이 검은 재가 되어 산산히 부서졌다.

그것으로 첫 번째 침식을 주도했던 흑막이 사라졌다.

***

[남은 시간: 0H: 1M : 59S]

이제 남은 시간은 약 2분.

진혁이 엘리스 앞에 섰다.

텅 비어버린 몸.

더 이상 위대한 가주로 칭총받던 이는 없다.

한 줌의 마력조차 남지 않은 소녀는 그저 영광의 시대가 지나버린 유물에 불과했으니까.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대를 죽이려고 했었는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어.”

진혁이 감정을 일축했다.

그러자 엘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 들었다. 정말이냐, 그대가 살던 세계에서는 그대와 짐이 인연을 맺었다는 게?”

“…..”

백야 밖에 있었을 동안 페투니아와 만났던 건가.

그 사이에 여러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다.

“그대가 다른 차원에서 정말로 짐의 반려자였다면….”

엘리스의 입에서 가느다란 피가 흘러나왔다.

“그 삶도 썩 나쁘지 않았겠구나.”

엘리스의 눈동자에 조금 전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검보랏빛 화염을 뿜어내는 토르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앞에서 불타는 검을 뽑아내는 인간.

피했으면 간단했을 일이었지만, 진혁은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감정과.

그 생각이 조금이나마 전해졌다.

진혁이 여러 가지 말을 고르다가 이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해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막상 하려니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깨에 힘을 좀 빼고 살아봐.”

세상에는 좋은 일들이 넘쳐난다.

너라면 분명 그 길을 찾아낼 거다.

원래 세계의 엘리스가 그랬듯이. “그래. 노력해보마.”

엘리스가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시간이 모두 경과했습니다.]

[원래 세계로 귀환합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

다시 돌아왔을 땐 꽤나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콰콰콰콰콰

콰아앙!

“크아아악!”

“저쪽이다! 다들 측면으로 이동해라!”

폭발과 고함 소리가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순간, 잘못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로 그때.

“사실이느냐! 계약자가 짐과 바람을 피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엘리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날아왔다.

음. 다행히 엄한 차원으로 귀환한 건 아닌 듯싶다.

그나저나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지 이걸?

“그게 있잖아. 엘리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심하게 정서적 교감을 나누더군. 하마터면 두 집 살림을 한다고 착각할 뻔했다.”

진혁이 해명하기 바로 직전에 천유성이 끼어들었다.

저 빌어먹을 놈이 하필 이 타이밍에 망언을 하다니.

“여, 역시・・・ 잘, 잘해주면 남자는 변한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느니라!!!”

진혁은 엘리스를 달래주느라 그로부터 한참이나 진땀을 빼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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