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33화 : 흑성 조우 (2)
흑성 조우 (2)
“아…….”
“아니라고 부인하지 마. 그 도법을 익히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니 까. 한데 왜 낭인 놈들이 되도 않는 흑도패 흉내를 내고 있는 거지?”
“……”
“뭐, 의뢰인과의 의리를 지키겠다 면 억지로 캐묻지는 않을 거야. 대 신이 모가지가 으스러지겠지.” 설우진이 오른손에 힘을 가했다.
애꾸 사내가 컥컥대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설우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 다는 듯이.
바로 그때, 설우진의 등 뒤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놈, 백주에 무슨 행패냐!”
‘자로 잰 듯이 정확한 등장이네. 그 말은 곧, 저놈이 배후라는 뜻이 지.’
설우진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천소강이 막 홍아검을 뽑 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따로 신 법을 사사한 적이 있었는지 그 움직 임은 제비처럼 날래고 경쾌했다.
-넌, 이제 죽었다.
애꾸 사내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소강이 앙갚음해 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웃어!’
설우진의 얼굴에 살기를 넘어선 광 기가 떠올랐다. 애꾸 사내의 도발에 제대로 열이 받은 것이다.
설우진은 애꾸 사내의 목울대를 움 켜쥔 채로 맨바닥에 내리꽂았다. 뚜둑.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애꾸 사내의 목이 완전히 꺾였다.
그 거침없는 손 속에 낭인들은 물 론이고 기세 좋게 달려들던 천소강 까지 흠칫했다.
‘황룡 학관에 다닌다고 하더니 그 곳에서 제법 쓸 만한 무공을 배운 모양이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피 튀기는 전장에서 진짜 싸움을 치러 온 나를 이길 수 없다.’
천소강은 마음을 다잡았다.
북원의 군사들 사이에서 그는 전장 의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용 맹을 뽐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관 무렵까 지 무림의 태두로 손꼽히는 소림사 에서 무공을 사사했다.
정식 제자는 아니었기에 칠십이종 절예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소림에 는 그에 준하는 무공들이 즐비했다. 그가 소림에서 수학할 때 사사한 무공은 총 세 가지로 철포삼과 달마패검 그리고 승천보였다.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는 무공이지만 그 렇다고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달마패검의 경우 소림의 성 향에 맞지 않아 사내에선 거의 사장 되다시피 했지만, 그 검리나 위력은 결코 칠십이종절예에 뒤지지 않았 다.
“백주에 사람을 해하다니. 네놈에 게 국법의 준엄함을 뼈저리게 일깨 워 주마.”
천소강이 승천보를 밟으며 달마패 검의 초식을 연달아 전개했다.
달마패검은 일 격에 땅을 가르고, 이 격에 산을 부수고, 삼 격에 하늘을 갈랐다. 그만큼 한 방 한 방이 위력적이었다.
부웅.
설우진의 가슴 어름으로 홍아검은 붉은 빛무리를 뿌리며 쇄도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협적인 공격이 었다.
설우진은 차분히 야수안을 전개하 며 달마패검의 궤적을 좇았다. 야수 안도 만능은 아니었기에 처음 보는 무공을 파악해 내기 위해선 최소한 의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확실히 소림의 무공이라 그런지 궤적이 복잡 다변하군. 겉보기엔 무 식할 정도로 단조로워 뵈지만 그 안 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감춰져 있어, 저놈이 그걸 알고 구사하는지는 모 르겠지만.’
설우진은 짧은 시간에 달마패검의 무리를 꿰뚫어 봤다. 야수안과 전생 의 경험이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이제 저놈을 어떻게 한다? 맘 같 아선 그냥 모가지를 꺾어서 야산에 묻어 버리고 싶지만, 그리하면 뒤탈 이 나도 크게 날 테지.’
설우진은 천소강의 정체를 어느 정 도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을 대하는 말투나 버릇처럼 엿 보이는 몸동작에서 군부 출신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군부의 인물 중 그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인물은 천소강이 유 일했다.
“여자 때문에 이러는 거 치졸하다 고 생각하지 않냐?”
설우진이 거칠게 힘으로 몰아붙이 는 천소강의 검을 옆으로 흘려보내 며 비웃듯 얘기했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난 그저 네놈이 백주에 싸움을 벌인 것을 보 고 국법의 준엄함을 보여 주고 …….”
“크큭, 그렇게 자기 위안을 삼으면 기분이 좀 나아져? 이런다고 떠난 여자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보아하니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 는데 이제라도 다른 여자 찾아. 세 상의 절반이 여잔데 그쪽 짝이 없겠 어?”
“여자는 많지만 내게 어울리는 여 자는 그녀뿐이다.”
“그럼 나한테 와서 이럴 게 아니라 그녀를 쫓아갔었어야지. 그리고 한 번이라도 그녀한테 제대로 마음을 고백한 적 있나?”
“아, 아니.”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정략혼을 좋 아하지 않아. 부부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애정이란 감정이 결여되어 있거든. 아마 그녀가 떠나간 것도 그 이유가 상당히 클걸.”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잡아먹 을 듯 살기를 뿌려 대던 이들이 어 느 순간부터 손에서 힘을 빼고 대화 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그녀의 마음을 잡으려면 어 떻게 해야 하는 거요?”
천소강이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구문제독부의 아들이 아닌 천소강 으로 다가가도록 해. 진심은 결국 통하는 법이거든.”
“그게 말이 쉽지……”
“노력하면 다 돼.
그러니까 이제라 도 이 우스운 짓거리 집어치우고 당 장 그녀의 뒤를 쫓아가. 너희 가문 의 힘이면 그녀가 어디로 향했는지 쉽게 알 수 있잖아.”
설우진은 천소강을 주소령에게 보 내고자 했다. 죽일 수도 때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게 최선이었기 때 문이다.
결국 설득이 먹혔는지 천소강이 검 을 거둬들였다.
“오늘 일은 미안했소. 그녀가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줬다는 말에 그만 이성을 잃었소.”
천소강이 사내답게 자신의 잘못을 깔끔히 사과했다.
설우진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건 내 사죄의 뜻이오. 군부의 힘이 필요할 일이 있으면 그 패를 내보이도록 하시오.”
천소강이 푸른빛이 감도는 옥패를 건넸다. 옥패 한복판에는 구문九門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옥패를 건넨 뒤 천소강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설우진의 조언을 받아 들여 주소령을 쫓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가 조언해 주긴 했지만 잘 먹힐 지는 모르겠군, 나도 책으로 배운 것이니.’
설우진이 천소강에게 해 준 조언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연애백서라는 책에서 기인한 것이었 다.
연애백서는 사랑꾼이라 불렸던 기 남아 담청운이 말년에 집필한 책으로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만의 비법들이 수록돼 있었다.
당시 연애백서는 사랑에 목말라 있 던 사내들에 의해 불티나게 팔려 나 갔다.
그런데 그 인기가 저자였던 담청운 의 명을 재촉했다. 강호인들 중 일 부가 책에 적힌 대로 따라 했다가 되레 망신만 당하고 그 화풀이를 그 에게 한 것이다.
“뭐 이어질 운명이면 어떤 식으로 든 이어지겠지.”
설우진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막 걸음을 막 옮기려던 설 우진이 갑자기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천소강이 나타났을 때와는 확연 히 다른 반응이었다.
“하아, 생각했던 것보다 기감이 더 예리하군. 설마, 작정하고 숨은 나를 찾아낼 줄이야.”
담벼락 안쪽에서 거짓말처럼 하나 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장사에서부터 설우진 하나만을 바 라보고 달려온 진추성이었다.
“날 찾아온 건가?”
설우진은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적잖게 긴장하 고 있었다.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없 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색할 것 없어. 오늘은 너와 싸우려고 찾아온 게 아니니까.”
진추성은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듯 두 손을 번쩍 들어 올 려 보였다.
하지만 설우진은 쉬이 경계심을 거 두지 않았다.
‘이 정도의 강자가 날 찾아왔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야, 수호 가문이거 나 마천이거나.’
설우진은 진추성이 둘 중 한 곳에 서 찾아왔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 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단도직입적 으로 물었다.
“마천과 수호 가문. 둘 중 어느 쪽 이지?”
“우리가 찾아올 걸 어느 정도 예상했나 보군. 난 진성이라 한다. 수호 가문 출신이지.”
‘역시’
설우진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날 제거하러 온 것이냐?”
“아까도 얘기했지만 오늘은 그냥 사실 확인을 위해 찾아왔을 뿐이 다.”
“그 말을 어찌 믿지?”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난 내 입으로 뱉은 말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 왔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군. 그럼 일단 대화를 나눠 볼까?’
“내게 확인코자 하는 게 뭐지?”
“음, 일단 세 가지 정도다. 우리 수호 가문은 과거 천하를 어지럽혔 던 마인들을 비동에 가둔 바 있다. 그 마인들은 죽기 전에 자신의 유진 을 남겼고, 그 유진은 최근에 수호 가문에서 선택된 이들에게 전해졌 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벽뢰진천을 얘기하는 거라면 내가 얻은 것이 맞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다섯 비동 에는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삼 엄한 기관이 펼쳐져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기관지학에 관심이 많았다. 조금 운이 따르기도 했고. 한데 그게 죄가 되나? 엄밀히 따져 서 그 비동의 주인은 그곳에 갇힌 벽력신마인데.”
설우진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 당당한 태도에 진추성도 뭐라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문젠 접어 두고. 다음 질문으 로 넘어가지. 일전에 황하가 범람했 을 때 신하촌에 간 적이 있다고 들 었다. 혹, 그곳에서 피처럼 붉은 빛 을 띤 불상을 본 적이 있나?”
진추성이 혈옥불에 대해 직접적으 로 언급했다.
그런데 신하촌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설우진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신하촌에서의 일, 네놈도 관련이 있는 거냐?”
설우진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돋았다. 애써 잊고 지냈던 신하촌에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음, 나도 일단은 회에 속해 있으 니 관련이 있다고 봐야겠지. 한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진추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 문했다.
신하촌에서 일이 벌어졌을 당시 그 는 가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버지 의 병세가 좋지 않아 옆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하촌에서 벌어진 일 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한데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설우 진은 진추성에게 거친 분노를 토해냈다.
“그걸 지금 몰라서 내게 묻는 것이 냐! 네놈들은 혈옥불을 섬서 무인들 을 끌어 모으는 미끼로 쓰기 위해 애꿎은 신하촌 사람들을 희생시켰 다. 대체 네놈들의 그 알량한 명분 에 왜 그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을 당해야 하느냐? 왜!”
‘설마, 신하촌 사람들이 희생당한 게 우연이 아니라 철저히 의도된 것 이었단 말인가?’
진추성은 일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수호 가문이 마천과 손을 잡고 쌍 룡맹과 맞서는 것까지는 그도 이해 했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위한 일 이기도 했고 쌍룡맹이 강호를 어지 럽히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 였다.
한데 쌍룡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죄 없는 양민들을 끌어들여 희생양으로 삼았다니, 강호 정의를 목숨처럼 여 기는 그에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설우진의 독설은 계속 이어졌다.
“네놈들은 수호 가문이라 불릴 자 격도 없다. 말로는 강호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엔 쌍룡맹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
“…..”
“자, 검을 뽑아라. 오늘 이 자리에서 수호 가문이란 그 위선에 가득 찬 이름을 단칼에 베어 주마.”
설우진이 허리에서 천뢰도를 뽑아 들었다.
끝장을 볼 요량인지 도병에서 뇌기 가 거침없이 흘러들어 도신에 강기 를 형성했다.
한데 진추성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검에 손을 가져가지 못했다.
한없이 부끄럽고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다.
‘추성아, 추성아! 이리될 줄 모르고 있었던 말이냐! 이 모든 게 다 내 불찰이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끝까 지 마천과 손을 잡는 걸 반대했어야 했거늘.’
철그렁.
진추성이 갑자기 검을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무슨 뜻이지?”
설우진이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진추성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 을 열었다.
“수호 가문을 대신해 죗값을 치르 겠다.”
순간, 설우진의 눈빛이 크게 흔들 렸다. 진추성이 이리 나올 줄은 그 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천뢰도가 멈칫했다. 망설임의 표현 이었다.
바로 그때. 골목 어귀에서 검은색 매듭을 걸친 거지 하나가 튀어나왔 다. 진추성이 설우진의 행적을 조사 해 달라 청했던 바로 그 거지였다.
“흑성님, 큰일 났습니다!”
흑개방도가 황급히 진성에게 달 려왔다.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닌 듯싶었다.
이에 진추성은 설우진을 바라봤다. 어찌할 것인지 묻는 것이다.
이에 설우진은 천뢰도를 거둬들이
는 것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무슨 일이냐?”
진추성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에 흑개방도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 마천이 발호했습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