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5권 – 23화 : 적랑 출현 (2)
적랑 출현 (2)
“달리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것이 냐?”
“놈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덫을 하 나 만들까 합니다.”
태찬월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 졌다. 삭월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 니 태찬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변독의 효과를 제대로 본 관도들은 양쪽에 날개를 단 듯 가볍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똑같은 내력을 쓰는데도 발끝에 실 리는 힘이 다르니 그 속도가 한결 더 빨라졌다. 덕분에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섬서와 하남을 잇는 화산 에 다다를 수 있었다.
화산은 구파를 대표하는 명문 중 하나인 화산파가 자리 잡은 곳이다. 그곳은 네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간에는 서쪽에 위치한 연 화봉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연화봉은 화산파가 자리한 곳이기 도 하다.
현재 화산파는 봉문한 채 외부 활 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마천 쟁투 당시에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엔 십수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 다.
“화산의 절경에 취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호사가들의 허 풍이 아니었네.”
화산에는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지금은 꽃이 만개할 시기라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매화 꽃잎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화산의 절경에 취한 건 설우진 혼 자만이 아니었다. 뒤따르던 관도들 도 저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 경치 를 한껏 만끽했다.
한데 그 여유로운 분위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한 중년 사내가 관도들을 보고 다 급히 뛰어왔다. 옷은 찢겨 있고 군 데군데 피로 얼룩진 상처들이 보였 다. 그 모양새가 딱 도적에게 털린 상단이었다.
“진정하시고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조인창이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잡 고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이에 사내는 처음 예상대로 상행 중에 도적들을 만나 물건들을 빼앗 기고 함께 상행에 나섰던 딸까지 납 치당했다 털어놨다.
조인창은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후 설우진의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그의 의중을 묻는 것이다.
‘음, 눈빛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 고 있지는 않는 것 같은데, 영 찝찝 하단 말이야. 대체 어떤 간 큰 도적 이 화산에 터를 잡고 작업을 하겠 어? 아무리 봉문을 했다손 치더라도 일개 도적 떼가 감당할 수 있는 세 력이 아닌데……..?’
설우진은 자꾸만 마음이 걸렸고 고 민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입하 지 말라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조인창은 실망한 눈치였지만 설우 진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대협, 상단의 물건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제 딸만 구해 주십시오!”
사내는 조인창의 발목을 붙잡고 애원했다. 한데 그럴수록 설우진의 마 음은 더 찝찝해졌다.
“그러지 말고 도와주는 게 어때? 그깟 도적들 해치우는 데 며칠이 걸 리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북 리강이 전면에 나섰다.
“우리는 지금 굶주린 늑대한테 쫓 기는 중이야. 그런 오지랖을 피울 때가 아니라고.”
“위험에 처한 이를 앞에 두고도 외 면하는 건 정파인의 도리가 아니 지.”
“내 말에 따른다고 분명 약속했을 텐데?”
“이건 사안이 달라. 어디 애들한테 물어봐, 누구의 의견이 옳은지.”
북리강이 여론을 주도했고 약자를 돕는 건 강자의 의무라고 배워 온 그들이기에 당연히 돕자는 의견이 앞섰다.
이에 설우진은 북리강의 뜻을 존중 해 주기로 했다.
“정 그렇게 돕기를 원한다면 저자 를 따라나서.”
“너는 함께하지 않을 셈이냐?”
“난 예정대로 근처 마을을 찾아 움 직일 거야. 표식을 남겨둘 테니 그 것을 보고 찾아오도록 해.”
“나도 싫다는 놈을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으니 알았다. 얘들아, 가자.”
북리강은 평소 어울려 다니던 관도 들에게 눈짓을 보냈고 대부분 그의 말에 수긍하며 따라나섰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황보민만은 설우진 곁에 남았다. 북리강이 황보민을 보며 사 납게 눈을 부라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북리강을 필두로 한 스무 명 의 관도들이 사내를 따라 나섰다. 한데 특이한 건 그 안에 철사자회 소속인 나불진이 들어가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남궁벽이 설우진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쩔 셈이지?”
“뭘?”
“저대로 둘 거냔 말이다.”
“제 발로 떠난 놈들이야. 내 소관 밖이라고.”
“놈들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다면 넌 천하의 몹쓸 놈으로 낙인이 찍히게 될 거다. 그래도 괜찮은 거 냐?”
“그깟 돈도 안 되는 명예 따위 개 나 줘 버리라고 해.”
설우진은 남궁벽의 충고를 무시하 고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향하는 방향이 이상했다. 분명 마을을 찾아 움직인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동선이 앞서 간 북리강과 겹쳤다.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이냐?”
남궁벽이 단숨에 설우진을 따라잡 았다. 이에 설우진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떠올리며 대화를 이었다.
“조호이산의 계야. 몸을 감추고 있 는 놈들을 북리강 그 멍청이로 하여 금 밖으로 끌어내게 만드는 계책이 지.”
설우진은 북리강이 상인을 돕겠다 고 나섰을 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조호이산의 계를 떠올렸다. 놈의 공 명심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한 것이 다.
“아까 그 사내가 마천이 부리는 말 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곳은 화산파의 성산이야. 아무 리 그 세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어느 간 큰 도적이 이곳에서 상단을 털겠 어. 이건 필시 우릴 함정으로 끌어 들이려는 마천 놈들의 수작이 분명해.”
설우진은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그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보단 오히려 피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정황상 학관에 왔던 놈들보다 더 강 한 놈들이 왔을 텐데.”
“놈들이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 잡 고 있었다는 건 우리의 동선이 읽혔 다는 걸 의미해. 그런 상태로는 피 해 봐야 얼마 못 가 꼬리를 잡히고 말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놈들의 정면에서 빈틈을 찌르는 게 나아.”
객관적인 전력에서 황룡 학관의 관 도들은 마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설우진이라는 걸출한 고수가 있기는 했지만 그 혼자서 마천의 무사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설우진은 과감하게 정면 대결 을 선택했다. 물론 일반적인 정면 대결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설우진 의 결정적인 노림수가 숨겨져 있었 다.
설우진의 얘길 다 듣고 난 후 남 궁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 열로 돌아갔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겠다는 의사표시였다.
‘후우, 과연 어떤 놈들이 따라붙었 을까? 임무에 실패한 청랑대를 다시 내보내진 않았을 테고…………. 지금으 로서는 불진이 녀석의 눈썰미를 믿어 보는 수밖에.’
북리강을 따라나선 나불진은 자의로 그 무리에 합류한 것이 아니었 다.
설우진은 매복한 마천의 무리를 확 인하기 위해 그를 일부러 북리강 쪽 에 붙였다. 나불진은 울상을 지으며 왜 하필 자신이냐며 원망을 늘어놨 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 상대는 마천이야. 두렵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두 려움을 떨쳐 내야 해. 두려움에 사 로잡히는 순간 너희들의 손발은 굳 고 그사이에 적도들의 칼날이 사정 없이 몸에 박힐 거야.”
설우진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관도들을 상대로 철저한 정신 무장을 주문했다.
대개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경우 초장부터 위축돼 제 실력을 발 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초장부터 지고 들 어간다고 비유하는데, 설우진은 바 로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다.
“놈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객관적으로 우리보다 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 의 괴물은 아니니까 단 한 방이라도 먹인다는 각오로 싸움에 임해. 그럼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설우진은 강한 어조로 기세를 돋웠 다.
이에 위축된 기색이 역력했던 관도들의 얼굴에서 전에 없던 투지가 일 었다.
“누가 상가의 자식 놈 아니랄까 봐 몰인정하기는. 내 용인문이 도착하 는 즉시 놈의 행실에 대해 정식으로 보고해야겠어.”
“그래, 잘 생각했어. 가뜩이나 나이 도 어린 놈이 대장이라고 설쳐 대는 꼴이 눈에 거슬렸었는데, 이번 기회 에 완전히 찍어 눌러 버려.”
상인을 따라나선 북리강 일당은 위 기에 처한 그를 차갑게 외면한 설우 진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것은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일 뿐 실제 그들이 열을 내는 이 유는 정의를 외면해서가 아니라 설 우진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 섰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명문가의 자제들은 알량한 특권 의 식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 특권 의식을 설우진이 뿌리째 흔들었으니 반발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저것들은 모였다 하면 허구한 날 대장 욕이네. 하여간 못난 것들이 자기 부족한 건 생각 못 하고 남 탓만 한다니까.’
무리의 후미, 나불진이 눈으로 주 변을 훑으며 소매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건 단환 처럼 둥글게 말린 나뭇잎이었다.
그는 길이 갈리는 곳마다 그것을 떨어뜨려 이동 경로를 정확히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상단의 것으로 짐작되는 수레들이 눈에 들 어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주변에는 상단 호위 무사들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한데 이상한 건 수레에 물건들이 그대로 실려 있다는 것이다. 도적이 라면 물건부터 챙겨가는 게 정상인 데 다섯대의 수레 중 단 하나도 물건을 빼 간 흔적이 없었다.
“도적들은 어디 있소?”
북리강이 상인에게 물었다. 이에 상인이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조아리며 수풀 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수풀 속에서 섬뜩한 파공성이 임과 동시에 겁에 질려 있던 상인의 얼굴이 몸에서 떨 어져 나갔다.
‘하, 함정.’
그제야 북리강은 자신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고 반사적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검병을 쥔 손은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렸다. 사실 그는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시 피했다.
가문의 지원을 받아 어릴 때부터 상승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피를 튀기며 실전을 치러 본 경험은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수풀 안쪽에 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찬월을 필두로 한 적랑대였다. 태찬월은 예상보다 적은 숫자에 이 맛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기세에 눌린 북리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에 그 일당은 크게 동요했다.
“왜 숫자가 이것밖에 안 되지? 처 음 보고받기론 백 명에 이른다고 했 었는데.”
태찬월은 북리강의 뺨을 가볍게 두 들기며 물었다. 평소의 북리강이었 다면 악을 내지르며 검부터 휘둘렀 을 텐데 지금은 얼굴만 붉어질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확연한 역 량의 차이였다.
“왜 말이 없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자 태찬월은 북리강의 귓불을 세차게 잡아 뜯었 다. 얼마나 손끝에 강한 힘이 실려 있었던지 귓불이 그대로 떨어져 나 갔다.
“아악!”
북리강은 귀를 부여잡고 고통스러 워했다. 하지만 태찬월은 그의 고통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 번은 안 물어. 왜 이것뿐이야? 나머지는 어디로 갔어!”
“그, 그게 상인의 말을 무시하고 본래의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크큭, 아, 이거 그쪽에도 나만큼이 나 잔머리를 굴리는 놈이 있었네. 뭐, 상관없어. 우리 쪽에서도 너희들 이 그리 나올 것을 대비해 부대주가 화산을 빠져나가는 길목으로 향했거 든.”
태찬월은 비릿한 살소를 머금으며 허리에서 면도를 뽑아 들었다. 그가 사용하는 면도는 연검처럼 낭창낭창 한 도신을 가지고 있어 다채로운 공 격이 가능했다.
“모두 죽여!”
태찬월이 살상 명을 내리자 그의 뒤쪽에 대기하고 적랑대원들이 일제 히 황룡 학관의 관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세에 눌린 관도들은 그들과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등을 보인 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적랑대원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독 안에 든 쥐라고 생 각하는 것인지 단숨에 숨통을 끊을 수 있음에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이는 태찬월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만 먹으면 북리강의 목을 따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살고자 발버둥치는 북리강을 보는 게 즐거운지 면도의 날이 자꾸만 결정적인 순간에 사혈 을 빗겨 갔다. 그 모습은 일전에 황 룡학관에서 잔혹한 살육전을 벌였던 마백풍과 꼭 닮아 있었다.
“차, 차라리 죽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