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23화 : 정세 변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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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6권 – 23화 : 정세 변화 (1)


정세 변화 (1)

“이게 얼마 만에 밟아 보는 중원 땅이지?”

구릿빛으로 익은 얼굴의 주인공은 누란국의 혼란을 잠재우고 중원으로 돌아온 설우진이었다. 그리고 그 옆 에는 고개를 빳빳이 든 살라만더가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주변을 살 폈다.

살라만더는 이곳까지 오는 내내 수 백 년 동안 품고 있던 씨를 사방에 뿌려 댔다.

물 만난 강아지처럼 그렇게 신나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잠시뿐이었 다. 설우진은 살라만더를 그냥 놀리 지 않았다.

사막에서 먹을 것을 구해 오게 하 는 건 예사고 우연히 만난 마적들까 지 때려잡게 했다. 살라만더는 꼬리 를 치켜세우며 반항했지만 목줄을 매달겠다는 협박에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모래 위에서의 살라만더는 신수라 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수 십 명의 마적들을 그야말로 농락했 다.

짧은 다리로 어찌 그리 빨리 달릴 수 있는지 마적들은 칼 한 번 제대 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살라만더가 휘두르는 꼬리에 피 떡이 되어 날아 갔다.

덕분에 설우진은 공짜로 수십 필의 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 들은 고스란히 돈으로 환산이 되어 그의 전낭을 두둑이 채웠다.

“일단 식당으로 가서 배부터 채우 자.”

설우진이 살라만더를 데리고 근처 객잔으로 향했다.

서역과 중원을 잇는 옥문관 근처에 는 상단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객잔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 다.

그가 찾아간 곳은 그 마을들 중에 서도 가장 규모가 큰 용하촌이었는 데 무슨 연유인지 사람이 보이질 않 았다.

평소 같으면 오가는 상인들로 거리 가 붐볐을 텐데 거리엔 스산한 바람 만이 그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설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에 보이는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다행 히 객잔 안에는 사람이 있었고 백발 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는 설우진과 살라만더를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감님, 여기서 하룻밤 묵어도 됩니까?”

설우진이 물었다.

순간 노인의 두 눈이 희번득거렸다.

“숨길 수 없는 이 진득한 마기! 네 놈도 마천의 졸개렸다!”

노인이 갑자기 빗자루를 들고 설우 진에게 달려들었다.

한데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고 식탁 여러 개를 단숨에 뛰어넘어 설 우진의 면전으로 빗자루를 내뻗었 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설우진은 손에 잡히는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방패 용도로 사용한 것이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뒤이어 우는 듯한 짐승의 신음이 흘러나 왔다.

설우진을 대신해 빗자루를 얻어맞 은 건 살라만더였다.

두껍고 단단한 비늘 덕분에 어지간 한 충격은 가볍게 흡수해 버릴 수 있는데도 저리 발광하는 걸 보면 빗 자루에 실려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 지 능히 짐작이 갔다.

“이봐, 미친 늙은이! 난 마천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몸이야. 그저 인 연이 닿아 마공만 익혔을 뿐이라니 까!”

“어린놈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청산 유수로구나. 내 창천군의 수호사자 로서 네놈을 징치하겠다.”

‘하아, 창천군은 뭐고? 수호사자는 또 뭐야?’

설우진은 눈앞의 노인네를 어찌해 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고 그 사 이 살라만더만 죽어났다. 괜히 따라 왔다는 살라만더의 울부짖음이 전해 지는 듯했다.

한데 바로 그때, 이 층에서 생각지 도 못했던 인물이 걸어 내려왔다. 

“우진아!”

그에게 말을 거는 이는 제갈윤이었다.

“네가 어찌 마천의 졸개를 아는 게냐?”

노인이 잠시 공격을 멈추고 제갈윤과 눈을 맞췄다.

“일전에 한번 말씀드렸던 그 동생 입니다.”

“맹주님을 구했다는 그…………… 동생?” 

“네, 한데 설마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오. 대관절 샌 님 같은 양반이 왜 마천의 영역에 와 있는 거요??

설우진은 제갈윤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다.

옥문관은 마천의 영역에 속해 있 다. 그도 그럴 것이 중원으로 진출 하기 위해선 반드시 옥문관을 거쳐 야 하기 때문이다.

“크흠, 젊은이, 미안하게 됐어. 마 천의 졸개들만 보면 열이 받아서리…….”

“뭐, 괜찮습니다. 나이가 들면 눈이 흐려지는 게 자연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설우진은 사과를 받는 척하면서 가 시 돋친 말투로 되받아쳤다.

“호오, 듣던 대로 입담이 세구나. 하긴, 사내새끼라면 그런 맛이 있어 야지. 너, 맘에 든다.”

‘뭐야, 저 반응은?’

설우진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가 알고 있는 강호 명숙이란 작자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아까와 같은 말을 하면 길길이 날뛰는 게 보통이었다. 한데 저 노인은 그 보통의 범주에서 훌쩍 벗어나 있었다.

-형, 저 영감님은 정체가 뭐예요? 

-후훗, 너도 한 번쯤 이름은 들어 봤을 거야. 괴팍하기로 천하에서 둘 째가라면 서러울 분이거든.

‘괴팍한 성정에, 얼굴은 지저분하 고, 몽둥이를 들고 무공을 펼친다? 아, 파죽신개 노구단!’

그제야 설우진은 노인의 정체를 짐 작할 수 있었다.

파죽신개 노구단.

그는 개방에서 최고 배분을 지닌 태상 장로였다. 마천 쟁투 당시에 죽었다고 알려졌었는데 아마도 일부 러 거짓 정보를 흘려 자신의 존재를 지운 듯했다.

-아까 창천군이 어쩌고 하시던데 그건 뭡니까?

-음,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는데 맹에서 은밀히 조직한 특 수 무력대야. 한데 특이하게도 모두 들 맹 밖에 적을 두고 있지. 

-혹시 구파의?

-녀석, 눈치가 빠른 건 여전하구 나. 그래, 네 짐작대로 창천군의 구 성원들은 모두 구파 소속이야. 물론 대외적으론 다들 마천 쟁투에서 죽 었다고 알려져 있지.

‘음, 역시 연륜은 무시 못 하는 건 가? 설마 이런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설우진은 창천군의 얘길 듣고 푸근 한 인상의 황유하를 떠올렸다. 순진하기만 한 양반인 줄 알았더니 의외 로 무서운 구석도 지니고 있었다.

“윤아, 반가운 손님도 왔는데 한잔 걸치자, 보아하니 오늘은 마천 놈들 도 오지 않을 것 같고.”

“그럼 앉아 계십시오, 간단하게 술과 안주를 내올 터이니.”

제갈윤이 부엌으로 향했다.

그사이 설우진은 노구단과 마주 앉았다.

“술 좋아하냐?”

“네.”

“클클, 주량은?”

“병을 세 본 적은 없습니다.”

“호오, 고놈 참 볼수록 맘에 드는 구나. 너, 창천군에 들어올 생각 없냐?”

노구단이 넌지시 영입을 제안했다. 

“창천군에 들어가면 뭐가 좋습니 까?”

“음, 관상을 보아하니 평생 싸움판 을 누빌 팔자 같은데, 창천군에 들 어오면 실컷 싸우면서 누대에 걸쳐 전해질 명예를 얻을 수 있다.” 

“돈은 안 줍니까?”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보 니 돈 들어갈 곳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그 말은 결국 안 준다는 얘기네요?”

설우진이 아픈 곳을 콕 찔렀다.

창천군은 가난했다. 이름만 거창했지 한 달 운영비도 빠듯할 정도였 다.

황유하가 자신의 몫으로 지급되는 돈을 은밀히 지원해 주고는 있었지 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뚜렷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 는 것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있는 게 좋겠지 요.”

“강호의 평화를 위해 네 한 몸 던 져 볼 생각은 없는 게냐?”

“몇 번을 물어보셔도 제 답은 같습 니다. 그럴 마음! 추호도 없습니다!” 

“에잉,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노구단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술 을 들이켰다.

사실 어느 정도 설우진의 반응을 예상하고는 있었다. 제갈윤이 여러 차례 술자리에서 설우진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양반아, 요즘 시대가 어떤 시 댄데 순수하게 강호 정의를 위해 몸 을 바쳐! 그건 너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설우진은 노구단을 보며 속으로 읊 조렸다.

그는 이미 지난 생에서 강호의 감 춰진 이면을 속속들이 봤다.

그리고 뼈저리게 느꼈다, 강호에는 순수한 정의 따위는 없다는 걸.

“매정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창천군의 규모를 키우고 싶다면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 만한 미끼를 던 지십시오. 막연하게 강호 정의 운운 해서는 단 한 명도 끌어들이기 힘들 “겁니다.”

“네 녀석이 말하는 미끼라는 게, 혹시 돈이냐?”

“그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는 있겠 죠. 하지만 돈보단 무공 쪽이 더 미 끼로써의 가치를 할 거라고 봅니 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본방의 제자 도 아닌 이에게 어찌 무공을 전수한 단 말이냐!”

노구단이 역정을 냈다. 이는 지극 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전통적으로 구파일방은 비인부전의 신념으로 무공을 전수함에 있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해서 직계 제자라도 그 됨됨이가 갖춰지지 않 으면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다.

“사소취대. 무릇 큰 것을 취하기 위해서 작은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창천군에 필요 한 건 무공이 아니라 사람이잖습니 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모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무공을 원해서 들 어온 놈들이 제대로 말을 따를 리 없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요령이 필요한 겁니다.”

“요령?”

“그야, 열을 내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반복된 다면 어떨까요?”

“……”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눈치는 있 기 마련입니다. 주인을 등에 태우면 당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야생마는 그 어떤 말보다 순종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설우진이 예로 든 야생마와 당근은 새로 영입할 창천군과 구파의 무공 을 의미했다. 노구단은 노회한 강호 인답게 그 의미를 단박에 이해했다. 

‘얼굴은 새파랗게 어린놈이 생각하 는 건 여든 넘은 능구렁이 저리 가 라 할 정도군. 군사가 왜 그토록 입이 마르게 칭찬했는지 알겠어.’

노구단은 점점 더 설우진이 욕심났 다. 이에 그는 설우진이 거부하기 힘든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너, 혹시 항룡십팔장을 배워 볼 생각은 없냐?”

“……그 무공은 개방 내에서도 일 부만 배울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는데요?”

“후훗,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원칙적으로 항룡십팔장은 장문인의 인정을 받은 일부 직계 제자만 배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럼 저 때문에 방칙을 깨시겠다 는 겁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너만 내 제자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노구단이 누런 이를 훤히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설우진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안을 거절해 버렸기 때문 이다.

“대, 대체 이유가 뭐냐?”

“제겐 이미 두 분의 스승님이 계십 니다. 실력은 어르신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두 분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 습니다. 솔직히 항룡십팔장이 탐나 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낱 무공에 대 한 욕심 때문에 두 분을 저버릴 순 없습니다.”

설우진은 팽천호와 주천기의 존재 를 언급하며 노구단의 제안을 단호 하게 거절했다. 이에 노구단도 더는 욕심을 낼 수 없었다. 제 스승과의 의리를 지키겠다는데 자신이 무슨 명분으로 이를 말리겠는가.

“흐음, 정말 안타깝구나, 내 꼭 너 를 제자로 삼아 창천군을 이끄는 동 량으로 키우고 싶었건만.”

“강호는 넓습니다. 제가 아니더라 도 어르신의 눈에 차는 이가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어째 그 위로가 달갑지는 않는구 나. 에이,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야 겠다.”

속상한 마음에 노구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줄기 바람처럼 객잔을 빠져나갔다. 정점에 이른 취 팔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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