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27화 : 망종 재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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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6권 – 27화 : 망종 재회 (2)


망종 재회 (2)

“그럼, 아이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수문위사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보문장의 차녀와 혼담이 오가는 중이야. 겨우 신뢰를 회복할 수 있 는 길이 열렸는데 그깟 계집 때문에 망칠 수는 없잖아. 내가 독을 내줄 터이니 그 계집과 애를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 버려.”

“공자님의 핏줄입니다.”

“니미럴, 그 애가 내 애라는 증거있어? 오지랖 넓게 설치지 말고 시 키면 시키는 대로 해!”

순간 수문위사의 얼굴이 일그러졌 다. 지금 그에겐 당세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당세 기는 신뢰를 잃긴 했어도 직계이고 자신은 방계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명하신 대로 따르겠 습니다. 대신 이번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신독당의 약재와 의원을 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후훗,그건 걱정 마.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내 신독당주님께 직 접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마 련해 줄 거야. 그러니까 실수 없이 처리해.”

당세기가 수문위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수문위사는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 어 올랐지만 억지로 참아 냈다. 

‘당무성, 령아만 생각하자. 어린 나 이에 몹쓸 병을 얻어 힘들어하는 그 아이만!’

수문위사 당무성은 마음을 다잡았 다.

그는 본래 당문 출신이 아니었다. 그가 당문과 연을 맺은 건 십년 전이었다.

당시에 그는 중경 일대에서 꽤나 실력 좋은 낭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 우연찮게 당가에서 의뢰가 하나 들어왔고 의뢰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당초려라는 여인과 연 을 맺게 됐다. 그리고 그때의 연은 자연스럽게 애정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둘 사이엔 넘기 힘든 신분 의 벽이 있었다.

당초려는 신독당주 당진걸의 딸이었다.

신독당은 독의 제조와 배합을 맡고 있는 곳으로 당가 내에서 엄청난 영 향력을 자랑했다.

한데 그런 신독당의 주인에게 낭인 사위가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결국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 둘은 눈물 을 머금고 헤어져야만 했다.

초무성은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사천에서 먼 광동으로 떠났고 당가에 홀로 남겨진 당초려는 그가 남긴 애정의 씨앗을 남몰래 낳았다.

하지만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그녀 는 산고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 지의 품에 딸을 안겨 주고 숨을 거 뒀다.

뒤늦게 그 소식을 알게 된 초무성 은 한달음에 당가로 달려왔다. 당진 걸은 딸을 앗아간 그가 죽이고 싶도 록 미웠지만 하나뿐인 손녀를 위해 당가의 성을 그에 물려줬다.

이후 당무성으로 살게 된 그는 딸 아이만 바라보며 주변의 냉대와 질 시를 견뎠다.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그녀를 꼭 닮은 딸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그런데 오년 전, 갑작스럽게 불행 이 연달아 찾아왔다.

장인인 당문걸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데에 이어 딸 당초령의 몸에 갑작스럽게 선천 절맥이 나타난 것 이다.

동시에 들이닥친 불행은 그를 절망 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딸아이가 앓고 있는 선천 절맥을 고치기 위해선 값비싼 약재와 뛰어 난 의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뒤를 봐주던 당진걸이 죽으 면서 당가는 철저히 부녀를 외면했 다. 신독당에 몇 번이나 찾아가 사 정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꺼지라는 거친 욕설뿐이었다.

“그럼,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뵙겠습니다.”

당무성이 가볍게 고개를 조아린 뒤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뒤 당세기 의 두 눈에 스산한 살기가 번졌다. 

“큭, 멍청한 낭인 새끼, 넌 이제 아녀자 둘을 처참하게 살해한 악당 이 되는 거야. 그리고 난 그 악당을 응징한 영웅이 되는 거고.”


“아악!”

시간이 갈수록 청월의 비명은 높아 져만 갔다.

“월아, 조금만 더 힘을 내거라. 아 이의 머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으니 이제 다 온 게다.”

청월의 사타구니 아래에서 인상 좋 아 뵈는 노인이 그녀를 격려했다.

노인은 자매가 찾던 산파, 황씨였 다.

불과 이각 여 전까지만 해도 그녀 는 옆 마을에서 아이를 받고 있었는 데 느닷없이 달려온 한 청년에 의해 납치당하듯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청월의 아랫배는 이미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황씨는 청월이 아랫배에 힘을 줄 수 있도록 문고리에 줄을 걸었고, 뜨거운 물로 사타구니 근처를 깨끗 하게 닦았다.

“할머니, 우리 언니 죽는 거 아니 죠?”

“걱정 말거라, 미아야, 이 할미가 받은 애들만 수백이 넘는다. 월이가 몸이 약해 걱정이긴 하다만 출혈이 심하지는 않으니 아이와 산모 모두 무사할 게다.”

황씨는 특유의 푸근한 미소로 청미 를 달래며 사타구니 쪽으로 손을 가 져갔다.

그 사이 청월은 아이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냈다.

“나온다!”

황씨가 다급히 소리쳤다.

정말 청월의 사타구니 사이로 아이의 얼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황씨는 아이의 등을 받친 뒤 조심 스럽게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렇게 몸이 모두 빠져나오자 재빨리 미리 준비해 둔 가위로 탯줄을 잘랐다. 

“응애응애.”

잠시 후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구, 고놈 고추가 아주 실하구 먼. 월아, 아들이다, 아들!”

황씨가 기진맥진해 있는 청월에게 아이를 보였다.

“내, 내 아들…”

청월은 힘든 와중에도 아이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초려도 령아를 낳을 때 저리 기뻐 했을까?”

방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기뻐하고 있을 때 문 밖에선 한 사 내가 석상처럼 검을 쥐고 서 있었 다.

당세기의 밀명으로 그들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당무성이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는 단박에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 들을 도륙하려 했다.

딸 령아를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문고리를 잡아채려는 찰나, 안쪽에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는 검을 아래로 떨어트 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사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아무리 딸을 위해서라 지만 갓 태어난 생명에 검을 들이댈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검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어느 틈에 나타났던 것일 까. 젊은 청년이 그를 바라보며 환 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당무성은 반사적으로 검병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누구냐?”

“그건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야. 아까 검을 뽑아 들고 서 있던데 설마 안에 있던 사람들 죽이려 고 했던 거야?”

“언제부터 그걸……?”

당무성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청년이 자신의 등 뒤에서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 자. 이 것이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였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강자야. 대 체 어디서 이런 자가 나타난 거지?’ 

당무성은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 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오른발을 뒤로 뺐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청년의 시 선을 빼앗은 뒤 도망치겠다는 계산 이었다.

한데 기습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저지를 당했다.

“오른발 가만히 놔두지. 그런 조잡 한 수법으로 공격해 봐야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한텐 통하지 않아.” 

‘설마, 퇴침까지 알고 있는 건가?’

당문성은 무거운 표정으로 잔뜩 힘 을 줬던 오른발을 본래의 자리를 돌 렸다.

퇴침은 신발 안쪽에 숨겨 놓고 비 상시에 사용하는 암기를 뜻했다. 상대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에서 공격이 가능하기에 무력이 떨 어지는 낭인들 사이에서 꽤나 유용 하게 사용됐다.

“눈에 힘 좀 풀지. 죽이려고 맘먹 었으면 아까 등을 보이고 있을 때 목을 그어 버렸을 거야.”

“정체가 뭐요?”

당무성이 어렵게 입을 뗐다. 이에 청년, 아니 설우진이 답했다.

“나? 여기 식객! 이틀 전부터 신세 를 지고 있지.”

“당신 같은 고수가 왜 이런 누추한 곳에 ・・・・・…?”

“그냥 인연이 닿았어. 시전에서 파 는 무협지들 보면 그 비스무레한 내 용들 많이 있잖아. 쓸데없는 궁금증 은 접어 두고 누가 사주했는지 속 시원하게 얘기해 봐. 신세지고 있는 입장에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을 것 같거든.”

설우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당무성은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고수했다.

“지금 그쪽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거야?”

“……”

“잘못하면 당신이 죽을 수도 있어.”

어느 틈에 다가섰는지 설우진이 당 무성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양손에 힘을 줘 조금씩 찍어 눌렀 다.

창백해지는 얼굴. 당무성은 힘겹게 말을 뱉었다.

“다, 당신, 혼,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고. 누군지나 얘기해.”

설우진은 싸늘한 어투를 대화를 이 어 갔다.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면 진짜 목뼈를 부러뜨릴 기세였다. 이에 당무성은 어쩔 수 없이 당가 와 당세기의 이름을 밝혔다. 그제야 목을 옥죄고 있던 힘이 풀렸다.

“크큭, 이거 보기보다 끈질긴 악연 인데, 학관 밖에서는 얼굴을 볼 일 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일로 엮 이게 될 줄이야.”

설우진은 뜻하지 않은 악연의 조우 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 는지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문 밖에서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전갈 문양이 새겨진 검붉은 빛깔의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낯익은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설우진은 입꼬리를 크게 말아 올렸 다.

“네, 네놈은……”

당세기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말 을 더듬었다.

“선배, 오랜만입니다. 졸업 이후에 소식이 뜸해서 어찌 지내는지 궁금 했었는데 여전하시네요.”

설우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 의 등 뒤에 도사리고 있는 무사들을 가리켰다.

‘왜 저놈이 이곳에 있는 거지? 설마, 그 계집들하고 인연이 있는 건 가?’

갑작스러운 설우진과의 재회에 당 세기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런데 그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에 설우진이 먼저 말을 치고 나왔 다.

“무사들까지 끌고 이 허름한 곳에 는 무슨 일로 행차하신 겁니까?” 

“크흠, 이곳에서 본가의 무사 하나 가 아녀자들을 해하려 한다는 소식 을 접하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길이 다.”

“혹시 그 무사가 저잡니까?”

설우진이 손가락으로 당무성을 가리켰다.

당무성은 그제야 당세기의 숨은 속 내를 눈치챘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 노를 억누르며 당세기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당세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음으로 당무성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다.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한 것이 냐! 그깟 계집들 죽이는 게 뭐 대수 라고. 오늘은 일이 틀어졌으니 조용 히 물러서라.

-제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 이었습니까?

-그래, 네놈을 이용해서 아버지의 떨어진 신뢰를 회복코자 했다. 그게 뭐 잘못됐느냐?

-하면 딸아이를 고쳐 준다는 약속도…?

-그래, 애당초 지킬 생각이 없었 다. 네 딸년의 절맥을 고치는 데 들 어가는 영약이 얼만데 내가 그걸 들 어주겠느냐.

순간, 당무성은 이성을 잃었다. 딸 아이를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진심 을 철저히 짓밟아 버린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살의를 느낀 것이다. 

“죽여 버리겠어.”

당무성이 검을 뽑아 당세기에게 달 려들었다. 단전의 내력을 모두 쥐어 짜냈는지 검신에 희미하게나마 검기 가 떠올랐다.

그걸 본 당세기는 입가에 비웃음을 떠올리며 허리를 가볍게 훑었다.

순간 그의 허리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단도들이 연달아 당무성의 면전 으로 들이쳤다.

당무성은 다급히 검을 휘둘러 단도 를 쳐냈다. 그런데 단도를 쳐 내는 순간 그 안에서 날카로운 침이 발사 됐다.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세침이었다.

“크윽.”

당무성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세침에 독이 묻어 있었는지 두 다 리는 휘청거리고 다문 입술 새로는 검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당무성은 걸 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당세기 에 대한 분노가 큰 것이다.

한데 몸이 마음만큼 움직여 주질 않았다. 한 발만 뻗으면 당세기에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는데 그 한 발이 끝내 내디뎌지질 않았다.

당세기는 혀를 차며 당무성의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쯧쯧, 이래서 출신이 천한 것들은 식구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니까. 누 가 낭인 출신 아니랄까 봐 주제도 모르고 주인을 물려 하잖아.”

그런데 그 한마디가 가만히 웅크리 고 있던 맹수를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쯤하지. 당가의 핏줄이 아니더라도 당가의 성을 받았으면 너희 가 문 사람이잖아.”

“네놈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상관해야겠어.”

“이곳이 지금 어딘지 까먹은 거냐? 서안에서처럼 건방 떨다간 쥐도 새 도 모르게 묻히는 수가 있다.”

“후훗, 묻을 수 있으면 그리해 보 시지. 단, 네놈이 묻힐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하진 마.”

설우진의 두 눈에 진한 살의가 떠 올랐다.

당세기는 그의 눈과 마주하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함께 온 갈독단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독의 사용을 허락한다. 놈을 붙잡 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당세기가 갈독단에 명을 내렸다. 갈독단의 무사들은 잠시 눈빛을 교 환하더니 이내 허리에서 독낭을 꺼 내 설우진의 발치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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