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30화 : 책략, 그리고 모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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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6권 – 30화 : 책략, 그리고 모함 (2)


책략, 그리고 모함 (2)

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저 흉수들이 검을 아주 잘 쓴다 는 막연한 사실, 그 하나만이 유일 한 소득이었다.

“흠,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설무백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암수가 난무하는 상계에 어울 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상계는 경쟁 상대를 짓밟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치열한 세계다.

한데 설무백은 너무 물렀다. 유리 한 고지에 있으면서도 그 우위를 통 해 상대를 누르려 하지 않고 되레 상생을 꿈꿨다. 이에 경쟁 상단은 그의 우직함을 이용해 이익을 챙겼 다.

일품점이 독보적인 기술력을 지니 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없었다 면 그들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을 것 이다.

“점주님, 공자님께 도움을 청하시지요!”

설무백의 고민이 깊어질 때 고간이 조심스럽게 설우진을 언급했다.

“그 아이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설무백은 영 미심쩍은 반응이었다. 이에 고간은 설우진이 황룡 학관에 서 이름을 떨쳤던 여러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처음 듣는 얘기들에 설무백은 상당 히 놀란 듯 반문했다.

“자네의 말이 모두 사실인가?” 

“네,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 니다. 그리고 일전에 본점에서 일어 난 사고도 공자님 덕분에 큰 피해 없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고간은 설우진의 진정한 힘을 알고 있는 설가장의 몇 안 되는 식구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설우진만 있으면 상행 을 방해한 무리를 찾아내 응징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한데 그의 바람은 뜻하지 않은 벽 에 부딪쳤다.

“넉 달 전에 학관이 문을 닫아 서 쪽으로 견문을 넓히러 간다는 서신 이 마지막이었네.”

“그럼 언제 이곳으로 돌아올지 는……?”

“녀석의 맘에 달려있는 게지. 일단 은 배상금 문제부터 처리하도록 하 세, 이유야 어찌 됐든 우리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이니.”

“한꺼번에 지불하기엔 너무 큰 금 액입니다.”

설가상단은 기한 내에 물건을 전해 주지 못했을 경우 황금 일만 냥을 배상하기로 조선 상단과 계약했었다.

황금 일만 냥은 최근에 투자처가 늘어난 설가상단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거금이었다.

“그래도 돈 때문에 오랫동안 쌓아 온 신뢰를 잃을 순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그럼 근시일 내로 돈 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간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조선 상단이 수상쩍어. 갑자기 거래 기일을 앞당 긴 것이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건 을 내세우며 터무니없는 위약금을 계약서에 넣은 것까지, 이럴 때 공자님이 계시다면 속 시원히 해결을 볼 수 있을 터인데.’

고간은 오늘따라 설우진이 너무 보 고 싶었다.


킁킁.

“왜 인적 드문 숲에서 이리 진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거지? 늑대 무리 가 한 판 붙기라도 한 건가?”

사천 성도를 떠나온 지 나흘, 설우 진은 형문산의 초입에 들어섰다. 형 문산은 굽이치는 장강을 끼고 있는 산으로 풍광이 아름답기로 중원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풍광에 어울리지 않게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역한 피비린내였다.

“주군, 제가 알아볼까요?”

당무성이 자신해서 앞으로 나섰다. 이에 설우진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당무성은 날렵한 발놀림으로 피비린내를 쫓아 신형을 튕겼다. 당무성이 자리를 비우자 살라만더 는 이때다 싶었는지 설우진에게 다 가와 살갑게 머리를 비벼 댔다.

“이 석척 놈아, 뱃속에 거지가 들 어앉았냐!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 고 또 밥 타령이야!”

설우진이 사납게 윽박질렀다. 

책맹 유작 덕분에 입맛을 되찾은 살라만더의 식성은 그야말로 석 달 굶은 거지를 연상케 했다.

살라만더는 눈에 책맹이 보일 때마 다 귀신같이 달려가 잡아 왔다.

책맹을 요리하는 건 설우진의 몫이었다.

처음엔 먼 여정이기에 순순히 따라 줬다. 초장부터 짐꾼이 퍼져 버리면 계획했던 일정이 꼬여 버리기 때문 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살라만더의 식욕은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활화 산처럼 불타올랐다.

“밥이 먹고 싶으면 밥값을 해. 가 령 요런 거.”

설우진이 바지에서 연한 자줏빛을 띤 뿌리를 꺼내 보였다. 당무성이 끓어오르는 충심을 주체 못 하고 밤을 지새우며 캐온 적하수오였다. 살라만더는 적하수오 쪽으로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밥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앞서 산을 올라간 당무성을 쫓아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둘이 떠나고 나자 설우진은 오랜만 에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 다.

그런데 그 자유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역겨운 피비린내 가 등 뒤에서 풍겨 왔기 때문이다. 쉭.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쇄도했다.

설우진은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비 틀며 허리의 천뢰도를 빼 들었다.

카캉.

묵직한 충격이 손목에 전해졌다. 그런데 그 충격보다 설우진을 기겁 하게 만든 건 천뢰도에 부딪쳐 날아 간 흉기의 정체였다. 그것은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사람의 정강이뼈였다.

“클클클, 반응이 제법 빠르구나. 버 러지 같은 화전민들하곤 역시 느낌 이 달라.”

피 묻은 정강이뼈를 주워 들며 정 체불명의 사내가 누런 이를 한껏 드러내며 괴소를 흘렸다.

“이 역한 피비린내, 네놈 작품이 냐?”

설우진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알면서 뭘 묻고 그래! 널 기다리 는데 자꾸만 눈앞에서 날파리들이 어슬렁거리잖아. 그래서 다 때려잡 았어, 깔끔하게.”

“화전민 마을이었다면 아이들도 있 었을 텐데….?”

“있었지.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 던지 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니까.”

“그럼 아이들도…………..?”

“요걸로 머리통을 부숴 줬어. 아직 어려서 그런지 살짝 때렸는데도 머리통이 쫙쫙 갈라지더라고.”

귀마 삭풍혈은 무용담을 자랑하듯 화전민촌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밝혔다.

“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인 것이냐?” 

“날파리를 때려잡는 데 무슨 특별 한 이유가 있겠어? 그냥 눈에 거슬 린 거지.”

삭풍혈의 얼굴에선 한 점의 죄책감 도 엿볼 수 없었다. 이에 설우진은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결 론을 내렸다.

“네놈도 어디 한번 날파리의 심정 을 느껴 봐라.”

팟.

설우진이 거칠게 흙바닥을 찼다.

땅을 내딛는 두 다리엔 벽뢰진천의 뇌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가 사라졌다.

카카캉.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차례의 공방 이 이뤄졌다.

설우진은 처음부터 폭뢰를 전개했 다.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심산이 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삭풍혈은 붉은 기 운에 휩싸인 정강이뼈로 폭뢰의 공 세를 막아 냈다.

“클클, 손맛 한번 죽여주는군. 오랜 만에 혈골파극기를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겠어.”

혈골파극기!’

순간적으로 설우진의 두 눈이 격랑 치듯 흔들렸다.

혈골파극기는 쌍룡맹의 무사들에게 공포로 군림했던 백팔마공의 하나였 다. 닿는 것은 뭐든 부숴 버리기에 그와 조우했던 쌍룡 무사들은 하 나같이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진 채 발견됐다.

‘이거, 마천 놈들이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네, 나 하나를 죽이겠다고 귀 마까지 보내고.’

설우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번 적랑대와의 혈투 이후 처음이었 다. 그만큼 만만치 않은 상대다.

그가 기억하기로 귀마들은 마천 쟁 투가 끝난 뒤에도 전국 각지로 흩어져 분란을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혈귀마라 불리던 삭풍 혈은 관부에서도 거액의 포상금을 내걸 정도로 그 패악이 하늘을 찔렀 다.

“어디 한번 내 칼도 부술 수 있으 면 부숴 봐라.”

설우진이 뇌기를 천뢰도의 도신에 여러 번 응축시켰다.

응축된 뇌기는 찬란한 금빛을 머금었다.

쾅쾅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둘의 신형이 빠르게 교차했다.

천뢰도와 정강이뼈가 맞닥뜨릴 때 마다 화탄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사위를 위진시켰다.

‘네놈은 절대 날 이기지 못한다.

네놈이 오기 전에 이미 넘칠 만큼 피를 흡입했다.’

삭풍혈은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 치 않았다.

혈골파극기는 인간의 피에 내재된 기운을 끌어내는 마공이다. 일종의 흡혈대법과 같은 것인데 많은 피를 흡입할수록 그 위력이 배가됐다.

한데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삭풍혈 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기 시작 했다. 끊임없이 혈골파극기를 끌어 내는데도 좀체 칼이 부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지?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삭풍혈은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 해되질 않았다.

피를 흡입한 뒤의 그는 무적에 가 까웠고 그의 적수는 마천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밀리고 있 다, 신선한 피로 배를 잔뜩 채웠는 데도 불구하고.

더 심각한 건 탐욕스러운 혈골파극 기가 어느 새 그의 피를 탐하기 시 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삭풍혈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눈에 띄게 커졌다. 마공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캉.

붉은 기류에 휩싸여 있던 정강이뼈 가 뒤로 한참이나 밀려갔고 덕분에 삭풍혈의 가슴은 훤히 드러났다. 삭풍혈은 다급히 정강이뼈를 돌려 세우려 했지만 힘에서 밀려 버린 팔 은 좀체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사이 설우진이 삭풍혈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푸욱.

천뢰도가 붉은 피를 뿌렸다.

이번에 흘러내리는 피는 타인들의 것이 아닌 삭풍혈 본인의 것이었다. 설우진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삭풍혈에게 차가운 미소를 건네며 가슴에 박혀 있던 천뢰도를 반절 정도 비틀어 위로 치켜 올렸다.

턱뼈를 가른 천뢰도는 그대로 삭풍혈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갰다.

털썩.

삭풍혈의 신형이 옆으로 무너지는 걸 보고 설우진은 주저앉았다.

이기기는 했지만 그에게도 힘겨운 싸움이었다.

비슷한 성질의 마공이 만나서 그랬 는지 평소보다 뇌기가 소모되는 속 도가 배 이상 빨랐다.

틈틈이 축뢰를 통해 뇌기의 양을 늘려 놓았기에 망정이지 수련을 게 을리 했다면 되레 당할 뻔했다. “날 노리고 귀마가 찾아왔을 정도 면 전처럼 마천과의 다툼을 피해 움직이는 건 의미가 없어. 혼자의 몸 이라면 놈들의 추적 따위 가볍게 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지켜야 할 이 들이 너무 많아.”

설우진은 삭풍혈과의 만남을 통해 문제 인식을 달리하게 됐다.

이제까지 그는 최대한 마천과의 직 접적인 충돌을 피해 왔다. 자신 때 문에 가족 또는 친인들에게 화가 미 칠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런데 이번 일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 걸 알았다. 이제는 보다 적 극적인 대응 방식이 필요했다.

“그래, 네놈들이 싸움을 걸어온다 면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놈들은 곧 내게 칼을 들이댄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설우진은 피 묻은 천뢰도를 털어내며 응전의 결의를 다졌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지난번에 봤 던 손해를 완전히 메울 수 있게 됐습니다.”

제남에서도 기녀가 아름답기로 유 명한 달기루에 이성철과 예명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성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예명한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하하, 내 뭐라 했소, 나만 믿으라 하지 않았소!”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어리석어 예 대인의 혜안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혜안은 무슨, 네놈은 내가 깔아둔 덫에 보기 좋게 걸려든 거다.’ 

예명한은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이성철을 보며 속으로 실소를 머금 었다.

오늘 두 사람이 만난 건 설가상단 의 배상 때문이었다.

이틀 전에 설가상단에서 연락이 왔 다. 제남에서 만나 배상금을 지불하 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성철은 그 서한을 받고 한달음에 제남으로 달려왔다. 인삼을 한 뿌리 도 안 내주고 황금 일만 냥을 챙기 게 됐으니 그 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설가상단의 책임자는 언제 보기로 했소?”

“내일 정오에 상춘각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그럼 돈을 받는 즉시 바로 청도로 돌아갈 것이오?”

“일단은 그리할 생각입니다. 무리 해서 가져왔던 인삼도 예 대인께서 모두 처리해 주셨으니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요.”

“하하,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구려. 부디 조선까지 조심해서 돌아가시 오.”

예명한이 미리 작별 인사를 건넸 다. 이성철은 그와의 이별을 진심으 로 아쉬워하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래, 마음껏 마셔라, 그게 네놈이 이승에서 마실 수 있는 마지막 술일 터이니.’

환하게 미소 짓는 예명한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스산한 살기가 내비쳤다.


“아아악!”

외마디 비명이 길가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앞다퉈 그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한 무더기가 시체가 널브 러져 있었다. 일부러 시체를 훼손할 목적이었는지 얼굴과 몸 곳곳에 끔 직한 자상이 나 있었다.

잠시 후 들이닥친 관군들은 주변을 통제한 뒤 시체들을 수거했다.

그런데 그 시체들 중 하나가 낯이 익었다. 다른 시체와 달리 그만은 얼굴의 손상이 적었는데 이틀 전 예 명한과 술자리를 가졌던 이성철이었 다.

다음 날, 제남 시내에는 이상한 소 문이 돌기 시작했다.

설가상단에서 배상금을 돌려받기 위해 조선에서 온 상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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