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13화 : 드러난 배후 (3)
드러난 배후 (3)
설우진은 알 듯 말 듯 한 이야기 로 왕고대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저보단 김 노인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흑선에 노예로 잡혀 있었 으니 놈들이 얼굴을 더 잘 알텐 데?”
“그건 곤란해. 김씨 노인이 빠져나 온 걸 조선 상단 쪽에서 알면 안 되거든.”
‘이게 무슨 엿 같은 경우야! 흑서 문의 위협으로부터 날 지키려고 이 인간한테 달라붙은 거였는데. 이제 와서 나보고 흑서문을 유인하는 미 끼가 되라고? 이건 아니야. 정말 아 니야!”
“아무래도 제가 생각을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제 갈 길 가 겠습니다.”
“그래? 뭐 마음대로 해. 정 안 되 면 내가 직접 미끼가 되면 되니까. 대신 놈들의 칼날에 산중고혼이 되 더라도 날 원망하진 마.”
왕고대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이 둘을 떠난다고 해서 흑서문의 추격에서 자유로우리란 보장은 없었 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들에게 꼬 리를 잡히게 된다면 설우진의 말대로 산중고혼이 되거나 노예로 끌려 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결국, 왕고대는 좀 더 확 률이 높은 쪽에 승부를 걸기로 했 다.
“그 미끼 역할, 제가 하겠습니다. 대신 이번에도 정당한 보수를 챙겨주십시오.”
“그래, 그 배짱 맘에 들어! 놈들을 내 앞으로 데려오기만 해, 네 녀석 은 상상도 못 할 돈을 안겨 줄 테 니까.”
설우진이 왕고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에 의욕이 고취된 왕고대는 맨 얼굴을 드러내고 청도항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놈의 일행 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어디냐?”
“천월관 앞입니다.”
“혼자 있더냐?”
“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다른 놈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그놈을 조용히 우리 쪽으 로 데려와라. 소란이 커져 봐야 우 리에게 좋을 게 없으니 신중하게 접 근해야 한다.”
“네.”
소문혁이 흑무단원 둘을 데리고 조용히 광장 쪽으로 향했다.
천월관은 청도항을 대표하는 명물 이었다. 쉬이 볼 수 없는 기기묘묘 한 물건들을 모아서 판매하기에 청 도항을 찾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곳에 들르곤 했다.
오늘도 천월관 앞은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왕고대는 좌판에 놓인 물건을 구경 하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왕고대와 소문혁 의 시선이 교차했다.
불안하게 요동치는 왕고대의 눈동자.
타다닥.
왕고대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뛰기 시작했다. 소문혁은 그의 돌발 행동 에 살짝 당황하다 이내 흑무단원 둘 과 함께 맹렬하게 그 뒤를 쫓기 시 작했다.
하지만 의외로 거리는 좀체 좁혀지 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문제 였다.
“이대로 가다간 놈을 놓치겠다. 나 먼저 갈 테니 너희들은 표식을 보고 쫓아와라.”
소문혁이 근처 건물로 신형을 튕겼다.
그러고는 벽을 평지처럼 밟으며 지 붕 위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소문혁은 넓어지는 시야를 활용해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넘으며 왕 고대의 뒤를 맹렬하게 쫓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흑 색 깃발이 휘날렸다.
“헉헉헉.”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죽을힘을 다해 뛰었지만 이젠 한계였다.
결국 왕고대는 부들거리는 두 다리 를 주체하지 못하고 흙바닥에 나뒹 굴었다.
“쯧쯧, 무공도 익히지 않은 놈이 내게서 도망쳐 보겠다고 용을 쓰더 니 기어코 탈이 났구나.”
발치에 쓰러진 왕고대를 보며 소문혁이 혀를 찼다.
그런데 왕고대의 반응이 묘했다.
“크큭, 누가 탈이 나는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이놈이 실성을 했나?’
소문혁이 발끈해서 왕고대의 멱살 을 틀어쥐려 했다. 한데 누군가가 한발 빨리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순간 몸이 거꾸로 뒤집히며 눈앞에 청청한 하늘이 보였다.
쿵.
“커억.”
머리가 깨질듯 아파 왔다. 바닥에 머리를 그대로 박았으니 아무리 무 공을 익힌 그라도 그 충격을 상쇄하 기가 쉽지 않았을 터. 그는 오만상을 지으며 원흉을 쫓았다.
원흉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만났네.”
설우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 이놈!”
소문혁이 발악하듯 몸을 일으켜 세 웠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허리에 손 을 가져갔다. 한데 검을 뽑아 보기 도 전에 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 이 패대기쳐졌다.
원인은 설우진의 손에 있었다. 설우진은 소문혁이 일어서려는 찰 나에 그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크게 힘을 준 것도 아니었는데 소문 혁은 도무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괜한 데 힘쓰지 마,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
“그나저나 다른 놈들은 언제 오는 거야? 기다리다 목이 빠질 지경이 야.”
“설마, 저놈이 미끼였던 것이냐?”
소문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왕고 대를 쳐다봤다.
왕고대는 숨을 헉헉대면서도 입가 에 진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맞아, 네놈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역시, 뒷배가 있었던 거로구나. 어 디냐, 네놈의 뒤를 봐주고 있는 세력이?”
소문혁이 사납게 날을 세웠다.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한데 다음에 이어진 설우진의 말에 힘이 절로 풀렸다.
“뒷배는 무슨, 네놈들을 상대하는 건 나 혼자야.”
“네,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 나, 본문의 정예인 흑무단을 혼자 상대하겠다니.”
“흑무단이라고 해 봐야 네놈들 중 에서 그나마 쓸 만한 놈들을 추린 것에 불과하잖아.”
“어디 그 말이 흑무단 앞에서도 나올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소문혁은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잠시 후, 그가 남겨 놓은 표식을 보고 흑무단이 가휼을 필두로 막다 른 골목에 들이닥쳤다.
“호오, 이거 생각지도 못한 대어가 걸려들었네. 저 잔챙이들과는 전혀 다른 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그쪽이 흑서문주?”
설우진이 가휼과 눈을 맞췄고 자연 스럽게 두 눈에 벽뢰진천의 뇌기가 실렸다.
가휼은 눈이 터질 것 같은 극통을 느꼈지만 부하들이 보는 앞이라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맞소, 본인이 흑서문주 가휼이오.”
“서로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 은데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설우진이 대화를 청했다.
가휼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 리다 이내 그 청을 수락했다.
“문주님.”
흑무단이 당황한 얼굴로 가휼을 쳐 다봤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일이다. 대 화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조용히 대기토록 해라.”
가휼이 설우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 겼고 설우진은 그를 데리고 허름한 집 안으로 향했다. 안에는 김 노인이 술상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 었다.
“얘기 나누십시오.”
김 노인이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술상 앞에서 독대하게 된 두 사람. 설우진이 먼저 술잔을 건넸다. 가휼 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려 뵈는 설 우진에게 압도돼 조용히 술을 받았 다.
“그쪽 장사 밑천을 태운 건 미안하 게 됐어. 나도 웬만하면 조용히 볼 일만 보고 내리려고 했는데 당신 부 하가 욕심을 과하게 부리더라고.”
설우진이 흑선을 태우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가휼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요?”
“다른 방식으로 보상해 줄까 해.”
“……?”
“내일 상하평에서 대규모 상거래가 이뤄질 예정이야. 은밀히 진행되는 거라서 상단 관계자들을 제외하곤 이 내용을 아는 자들이 없지.”
“설마, 우리 보고 도적질을 하라는 “거요?”
“뭘 새삼스럽게 정색하고 그래? 네 놈들이 평소에 밥 먹듯이 하는 짓거 리잖아. 시전 상인들에게 보호세 안 받아?”
“그건 정당한….”
“까고 있네. 정 그렇게 양심에 찔리면 지금이라도 애들 데리고 돌아가. 난 아쉬울 거 없으니까.”
설우진이 강하게 나갔고 이에 가휼 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흑선은 우리 문의 상징이야. 그리 고 뭣보다 흑선의 휴업이 길어지면 재정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될 수밖 에 없어.”
흑서문의 전체 수익에서 흑선이 차 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일단 배를 띄우기만 하면 수천 냥 의 수익이 생기니 흑서문으로서는 흑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 흑선이 하루아침에 타버 렸다.
상품으로 내놓을 노예들은 무사히 구했지만 흑선만은 어찌할 수가 없 었다.
“빨리 결정을 내려, 너희가 싫다면 다른 쪽을 섭외해야 하니까.”
설우진이 흔들리는 파도에 바람을 더했다.
‘그래, 일단은 흑선을 다시 띄우는 것만 생각하자.’
“좋소,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후훗, 잘 생각했어. 아마 내일 잘 만 털면 이번에 본 손해를 만회하고 도 남을 거야. 그리고 웬만하면 사 람 장사는 하지 마.”
“그건 그쪽이 왈가불가할 일이 아니오!”
가휼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에 설우진이 그의 귓가로 조용히 입을 가져가 속삭이듯 말했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무 리 세상이 좆같아도 사람이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면 되겠어?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눈에 흑선이 띄면 그때 는 흑선이 아니라 너희 흑서문을 통 째로 태워 버릴 거야. 그러니까 대 가리 잘 굴려서 결정해, 뭐가 더 이 득인지.”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랑 함께하기로 했어.”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흑서 문을 한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게 다 연륜에서 비롯된 지혜라 는 거다.”
들뜬 왕고대의 물음에 설우진이 농 담으로 대꾸했다. 왕고대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강호에선 힘이 센 놈이 왕이라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거사는 언제 치릅니까?”
“내일 묘시. 놈들이 새벽 야음을 틈타 거래하려고 할 때 그 뒤를 친 다.”
“모두 죽이실 겁니까?”
왕고대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어딘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얼굴 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지?”
“저희 아버지는 청도상단의 쟁자수 로 일했었습니다. 어린 절 키우기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을 나가 셨죠. 한데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일을 나갔던 숙부가 팔 하나를 들고 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절 보고 미안하다며 마당이 떠나가라 우시더군요.”
‘이놈한테도 그런 아픈 사정이 있 었군.’
설우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왕고 대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 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라, 내가 원하는 건 놈들의 재물이지 사람이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인마, 어울리지 않는 소리 좀 그만해, 네놈이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 고.”
설우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왕고대를 달리 봤다.
“자, 자, 서둘러서 움직여라. 날이 밝기 전에 거래를 끝마쳐야 한다.”
이른 새벽, 청도항 한 귀퉁이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포착됐다. 박상원이 이끄는 조선 상단의 일꾼 들이 부지런히 수레에 짐을 옮겨 싣 고 있었다.
그가 부지런을 떤 덕분에 열 대의 수레가 조선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가득 찼다.
“모두 상하평으로 향한다.”
말을 탄 박상원이 선두에서 방향을 잡았고 수레가 하나둘씩 그 뒤를 따 랐다.
조선 상단이 자리를 뜬 후 낯익은 얼굴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 로 흑서문의 외당주 소문혁이었다. 그는 조선 상단의 꼬리가 아스라이 멀어져 갈쯤 허공을 향해 화살을 날 렸다.
그 화살은 힘차게 공중으로 치솟은 후 희미한 연기를 뿌리며 어둠 속으 로 사라졌다.
흑도패들이 야밤에 신호용으로 자 주 사용하는 미연시였다. 미연시는 소리가 나지도, 빛을 뿜어 대지도 않기에 은밀한 작전을 수행할 때 요 긴하게 활용됐다.
한편 조선 상단과 때를 같이해 움 직이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도 여러 대의 수레를 끌고 오 고 있었는데 선두에 동영의 태도를 찬 무인들이 앞장서고 있었고 그들 의 가슴에는 눈 설’雪이 수놓여 있 었다.
“부야주님, 저희가 이런 일에까지 나서야 합니까?”
“주님께서 지시하신 일이다.”
“그래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라고요.”
무사들 사이에서 작은 실랑이가 일 었다. 발단은 서른 안팎으로 짐작되 는 젊은 무사가 불만을 표하면서부 터였다.
“운아, 우린 야주님의 칼이다. 네 심정은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야주 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우리 묵설야 의 숙명이다.”
학사 같은 풍모를 자아내는 중년 무사 감천경이 모상운을 달랬다. 하지만 모상운은 그 말에 쉬이 납 득하지 못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지내 야 하는데요? 십 년 넘게 야주님을 위해 충성을 바쳤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