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5화 : 쌍룡 분열 (2)
쌍룡 분열 (2)
설우진이 자신의 말을 이리도 쉽게 믿을 줄 몰랐던 공손득은 한참동안 멍하니 그의 얼굴만 쳐다봤다.
“인마, 그렇게 볼 것 없어. 난 내 가 한번 믿기로 한 사람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믿어. 그러니 넌 내가 다녀올 때까지 푹 쉬고 있어.”
설우진은 공손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방을 나섰다.
“내 분명히 정예 무사들을 차출해 달라 청했었는데 대체 이 명단은 뭡니까?”
회의청 안에서 노기를 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흘러나온 곳은 회의청의 상 석, 쌍룡맹주 황유하의 자리였다. 그의 손에는 이틀 전에 합류한 천 중오가의 지원 세력 명단이 들려 있 었다. 한데 그가 기대했던 이름들은 보이지 않았다.
종이에 적힌 명단은 아래와 같다.
-창무대, 와룡대, 권웅대, 철검대, 제검대.
다들 이름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상은 예비대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었다.
천중오가와 같은 큰 세력들은 기존 에 운영 중인 무력대에 결원이 발생 했을 경우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별 도의 예비대를 둔다.
위의 다섯 곳 중 와룡대를 제외한 네 곳이 거기에 해당되는데 아무래 도 예비대인 만큼 그 수준은 기존 무력대에 비해 떨어졌다.
그 사실을 뻔히 아는 황유하는 각 가문을 대표해서 온 자들에게 서슬 퍼런 시선을 보냈다. 연유를 말해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에 눈치를 보고 있던 황보세가의 부가주 황보경이 당당하게 체구를 한껏 드러내 보이며 먼저 입을 뗐 다.
“맹주님, 저희 가주께선 아직 황보 세가의 무사들이 큰 싸움을 치르기 엔 여러모로 부족한 측면이 있다 판 단하여 무력대 전원에게 폐관수련을 지시했습니다. 해서 예비대인 권웅 대밖에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그건 저희 북리가도 마찬가집니 다. 가주님께서 다듬어지지 않은 실 력은 되레 전장에서 독이 될 수 있 다며 무검대와 추검대원들에 무기한 수련을 명하셨습니다.”
황보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리 세가의 부가주 북리우가 말을 이었 다. 표현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속내는 대동소이 했다.
‘이자들이 정말’
퍼석.
황유하가 손에 쥐고 있던 팔걸이가 힘없이 부서졌다.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다 보니 과하 게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솔직히 그 이유만 놓고 보면 문제 될 게 없었다.
무력대가 큰 전쟁을 앞두고 수련에 힘쓰겠다는 걸 탓할 수 없는 노릇이 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갑자기 달라 진 그들의 태도였다.
섬서를 마천에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황보세가와 북리세가는 전면전 을 주장해 왔다. 그들을 말리기 위 해 황유하의 진이 다 빠졌을 정도였 다.
한데 전장의 판세가 바뀌니 이렇게 태도가 뒤바뀌었다. 그러니 황유하 로서는 그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 었다.
“그럼 언제쯤 수련이 끝날 것 같 소?”
잔뜩 굳은 표정으로 황유하는 무력 대가 합류할 시기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답하기 난감하다는 듯 황보 경이 말꼬리를 흐리며 답했다.
“수련이라는 게 딱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지라 확답을 드리기…….”
“당장에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소.”
“설마 마천이 그런 무리수를 두겠 습니까? 하남은 맹의 근거지입니다. 무리해서 들어왔다간 사위에서 포위 를 당할 수도 있는데 그런 위험을 자초할 리가…”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마천이 더 욱 과감하게 공격을 해 올 수도 있 소. 그리고 무엇보다 당대의 마천주 는 무척이나 호전적인 자요. 우리의 방비가 이리 약하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 오.”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시지요.”
황보경에 이어 북리우가 황유하의 의견에 대놓고 반박했다.
‘허어,이런 자들을 데리고 어찌 마천과의 싸움을 치른단 말인가. 이 런 지경이 되고 보니 오히려 마천주 그자가 새삼 부러워지는군.’
황유하는 제 이익만 챙기기 바쁜 그들의 모습에 분노를 넘어 깊은 절 망감에 휩싸였다.
마천과의 전면전을 코앞에 둔 지 금, 쌍룡맹은 극심한 내우외환을 앓 고 있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 만 내부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아 있 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삼사보가 있었다.
삼사보는 천중오가와의 권력 쟁투 에서 밀렸다. 그들이 쥐고 있던 권 력은 하나둘씩 천중오가 쪽으로 넘 어갔고 종국에는 허울뿐인 동맹이란 끈만 남게 됐다.
결국 둘 사이는 마천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삼사보는 더 이상 천중오가와 함께 할 수 없다며 사파 출신의 맹원들을 대거 이끌고 호남으로 향했다. 그 숫자는 무려 오천에 달했다.
‘하아,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창천군이 전하기론 열흘 안으로 마 천의 지원군이 섬서에 당도할 것이 라 했는데 지금의 전력으로 과연 감당이 될는지…………?
굳어진 황유하의 표정은 좀체 풀릴 줄 몰랐다.
그는 난주에 도사리고 있는 창천군 을 통해 마천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보고 받고 있었다.
마지막 보고서가 전해진 게 열흘 전인데 그 당시에 다급히 써 내려간 글에는 수천에 달하는 마천의 지원 군이 섬서로 향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맹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황유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고 있을 때 문밖에서 호위 무사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지?’
황유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따로 방문을 약속한 이가 없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손님을 마냥 밖에 세워 둘 수는 없어 일단 안으로 불 러들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 맹주님!”
사내는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가지런히 정돈된 콧수염이 인상적 인 그는 놀랍게도 현무문의 문주 위 성웅이었다.
‘아니, 저자가 이곳엔 왜……?’
황유하는 위성웅의 얼굴을 확인하 고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 다.
지난 마천 쟁투 이후 수호 가문은 대외적으로 활동에 나선 적이 없었 다. 피해를 수습하기도 바빴거니와 알게 모르게 쌍룡맹 쪽에서 수호 가 문과 엮이는 것을 피했기 때문이다. 이를 방증하듯 회의실에 모여 있던 간부들 대다수가 위성웅의 방문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위성웅은 주변의 시선 따위 는 신경 쓰지 않고 여유롭게 대화를 이어 갔다.
“최근에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 다.”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경직됐다. 성격이 급한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 로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황유하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그시 위성웅의 눈을 응시하며 그 속내를 읽기 위해 노력했다.
“위 문주를 볼 면목이 없네.”
황유하가 에둘러 지난 패배를 언급 했다.
“하하, 이거 제 말뜻을 곡해하신 듯합니다. 전 그저 걱정되는 마음에 여쭤봤을 뿐 쌍룡맹을 책망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위성웅은 과장된 웃음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고 했지만 이곳에 있 는 이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위 문주, 보다시피 아직 회의가 진행 중이네. 편안히 얘기를 나눌 상황이 못 되니 용건이 있으면 가감없이 얘기해 줬으면 하네.”
황유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에 위성웅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천천히 입을 뗐다.
“미력하지만 저희도 이번 마천과의 싸움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이번엔 황유하도 적잖이 놀란 듯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누구보다 수호 가문과 쌍룡맹의 악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다. 한데 쌍룡맹이 도움을 청하기도 전 에 수호 가문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 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 속내가 영 마음에 걸렸다.
“지난 마천 쟁투의 여파가 아직 남 아 있을 터인데 그럴 여력이 있는가?”
“마천에 설욕할 날만을 꿈꾸며 절 치부심 힘을 회복해 왔습니다. 쌍룡 맹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하나의 축 정도는 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성웅이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흐음,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삼사보가 빠진 상황에서 수호 가문 의 합류는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나 그들의 진의를 알 수가 없으니…….’
황유하는 쉽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 지 못했다.
지금의 상황만 놓고 보면 쌍수를 들고 수호 가문의 합류를 반기는 게 맞았다. 한데 역천회가 행했던 짓들 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맹주님, 뭘 망설이십니까? 삼사보 의 이탈로 맹의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긴 상태입니다. 수호 가문이 합류 한다면 그 공백을 쉬이 메울 수 있 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수호 가문은 마 천과의 전투에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합류한 다면 마천 놈들도 쉽사리 하남으로 내려오지 못할 것입니다.”
황유하의 속내도 모른 채 천중오가 의 간부들이 수호 가문의 합류를 적 극 찬성하고 나섰다.
상황이 그리되고 보니 그도 수호가문의 합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 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황유하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그의 간 절한 바람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위성웅은 환 한 미소를 지으며 황유하의 손을 맞 잡았다.
“가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낯익은 얼굴이 방으로 들어서는 위 성웅을 반겼다. 그는 거듭된 임무 실패로 오래 전에 근신 처분을 받은 바 있는 청성 위가렴이었다.
“후훗, 똥줄이 타드는 판에 우리가 내민 손을 마다할 수 있겠느냐. 조 만간 맹에 합류키로 했다.”
위성웅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수호 가문이 쌍룡맹에 합류키로 한 것은 불과 사흘 전에 결정된 사안이 었다.
사실 그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우여 곡절이 많았다. 통천문에서 극렬한 반대 의지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성웅은 그들의 반대에 정 면으로 맞서며 뜻을 관철시켰다. 그 리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적절 한 순간에 마천이 섬서에서 쌍룡맹 을 밀어내는 전과를 올렸다.
덕분에 쌍룡맹과 손을 잡지 않으면 중원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통천문의 분위기는 어떠하냐?”
“아직까지 뚜렷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성이 아무 리 설쳐 대도 대세를 뒤집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놈은 우 리와 맞서기 위해 제 발로 뛰쳐나갔 던 통천문에 다시 복귀했다. 뒤로 무슨 수작질을 벌일지 모르니 지속 적으로 감시토록 해라.”
“그건 염려 마십시오. 통천문 안에 도 저희 쪽 사람들을 심어 뒀습니 다.”
“호오, 그게 정말이냐?”
“네, 통천문 안에서도 수호 가문이 쌍룡맹보다 위에 서야 한다는 이들 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래, 그게 당연한 게지. 그러고 보면 적성 그놈도 참 무정하단 말이 야, 제 복수를 위해 아랫것들의 마 음은 신경도 쓰지 않으니.”
“결국 그 작은 빈틈이 놈의 숨통을 조이게 될 것입니다.”
위가렴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 모습에 위성웅은 대견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보다 군사는 어찌하고 있느냐?”
“저희와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설득은 힘들 듯 합니다.”
“흐음, 곤란하게 됐구나, 그자를 온 전히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무리 없이 거사를 완성할 수 있거늘.”
위성웅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을 내 비쳤다. 이에 위가렴이 위험한 눈빛 을 발하며 입을 뗐다.
“아버지,귀혼마량을 이용해 보심 이 어떻습니까?”
“귀혼마량이라면 섭혼술의 대가가 아니더냐. 설마, 군사를 상대로 섭혼 술이라도 펼치자는 게냐?”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힘으로라 도 눌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혼마 량의 소재는 이미 파악해 두었으니 아버지께서 결정만 내리시면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귀혼마량은 섭혼술의 대가로 강호 를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홀대한 한 마을에 관군들을 끌고 가 피바다 를 만든 일은 아직도 호사가들 사이 에서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었다.
“괜찮은 생각이긴 하다만 아직 그 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엔 시기가 조금 이르다.”
“하면……?”
“일단은 언제든 놈의 재주를 사용 할 수 있도록 우리 문에 데려다 놓 도록 해라.”
위성웅은 귀혼마량을 위험하지만 그만큼 매력 있는 패로 판단했다. 아버지의 긍정적인 반응에 위가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 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방 안, 신 추명이 어렵게 입을 뗐다.
그의 맞은편에는 얼마 전에 새롭게 문주 위에 오른 적사호가 이마를 감 싸고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