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14~15화 : 수귀, 낚다 (3) ~ 귀마혈투 (1)
수귀, 낚다 (3)
한데 술상이라고 하기에는 입이 민 망할 정도로 안주가 부실했다. 물 위에 떠 있으니 회를 구하기도 어렵 지 않았을 터인데 달랑 젓갈 한 종 지만 올라와 있었다.
“한잔 받지.”
용문걸은 먼저 술을 권했다. 설우 진은 마다하지 않고 잔을 내밀었다. 의외로 술은 향이 그윽했다. 고약 한 냄새를 풍기는 젓갈만큼이나 독 한 화주가 담겨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르륵 잔에 담기는 술은 그 빛 깔이 참으로 고왔다.
둘은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술을 나눴다.
“이제 교분은 나눌 만큼 나눈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나눠 보지. 아까 내게 제안하려던 기똥찬 사업이 뭐지?”
술병이 다 비워져 갈 무렵 용문걸 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 다. 이에 설우진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최근 강호의 정세를 언 급했다.
“갑자기 얘기가 왜 그곳으로 빠지 지?”
용문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지만 설우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었다.
“너무 그렇게 정색하지 마, 내가 그쪽에 제안하려는 사업과 최근의 강호 정세와 깊게 맞물려 있으니 까.”
“…….”
“그쪽은 마천과 쌍룡맹, 둘 중 어 느 곳이 강호의 패권을 쥘 거라 생각하지?”
“그야 당연히 마천 쪽이지.”
용문걸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그리 생각하는 근거는?”
“솔직히 드러난 전력 자체는 큰 차 이가 없어. 하지만 두 세력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하나 존재하지. 그건 바로 마천은 하나지 만 쌍룡맹은 다섯이라는 거야.”
용문걸은 쌍룡맹이 지니고 있는 치 명적인 한계를 지적했다.
쌍룡맹은 연맹이다. 여러 개의 세 력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한 울타리 안에 모였다는 뜻이다. 연맹도 균형 을 맞춰 줄 수 있는 강한 버팀목이 있다면 일원화된 세력보다 더 큰 힘 을 낼 수 있다.
한데 작금의 쌍룡맹은 그 버팀목의 힘이 너무 약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스스로 무너져 내릴 정도로.
‘확실히 수적치고는 보는 눈이 남 달라. 하기야 그런 눈이 있었으니 그 험한 전쟁에서도 끝까지 살아남 아 떼돈을 벌었겠지.’
설우진은 감탄의 시선으로 용문걸 을 바라봤다.
그의 기억 속에서 용문걸은 마천 쟁투가 끝난 이후에 급작스럽게 상 단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삼익천이 강호 세력들을 압박하는 것을 보고 재빨리 대응한 것이다.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삼 익천은 장강 일대에 뿌리내리고 있 던 수로채를 모두 쓸어버렸다.
용문걸이 노도채를 노도 상단으로 바꾼 지 불과 일 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 그쪽이 예상한 대로 마천이 이긴다고 가정하면 강북의 무인들은 어찌 될까?”
“투항하거나 도망칠 테지, 운이 나 쁘면 뒈지기도 할 것이고.”
바로 그때 설우진이 핵심을 얘기했다.
“그들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 준다면?”
“미친 듯이 달려들겠지.”
“돈을 내라고 해도?”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그깟 돈이 대수겠어.”
“후훗, 바로 그거야, 돈 되는 기똥 찬 사업.”
‘하아, 이 새끼, 완전 난 놈이잖아.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에게 구명줄을 내려 주고 돈을 받는다. 다시 생 각해도 기가 막히네.’
용문걸은 설우진의 말뜻을 이해하 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틀어쥐었 다. 하지만 그는 알까, 이 놀랄 만 한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을?
이후 두 사람은 구체적인 계획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설우진이 먼저 제시하고 이를 들은 용문걸이 의견 을 보태는 형식이었다.
“흠, 이 사업이 제대로 먹히려면 배들이 많이 필요하겠군?”
“맞아, 그게 핵심이야. 노도채가 아 무리 열나게 장강을 누비고 다녀도 태울 수 있는 숫자는 한계가 있거든.”
설우진은 은연중에 싸움을 부추겼다.
노도채가 배를 구할 수 있는 방법 은 두 가지다. 돈을 주고 사거나, 남의 것을 탈취하거나.
물론 용문걸이 선택할 방법은 정해 져 있었다.
“두걸아, 오랜만에 땀 좀 뺄래?”
용문걸이 고두발을 불렀다. 고두발 은 용문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진심이오?”
“왜? 난 네가 가장 기뻐할 줄 알았는데.”
“니미럴, 내가 그리 말할 땐 콧방귀도 안 뀌던 양반이 저 애송이놈 말에 홀라당 맘을 바꾸다니. 이러는 거 아니오.”
“인마, 그거하고 이건 상황이 다르 지. 넌 아무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쳐들어가자고 했잖아.”
“그, 그야…….”
“됐고, 사흘 안으로 내지에 나가 있는 애들 모두 불러들여라. 입단속 잊지 말고.”
수적이라고 해서 매일 배에서 생활 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땅을 밟고 때때로 계집질도 한다. 해서 현재 노도채의 배에는 전체 인 원의 삼분의 일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알았소. 내가 직접 움직이리다.”
고두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 고 곧장 선미로 향하더니 소선 하나 를 강 위에 띄웠다. 격랑치는 신룡 탄의 물살에 소선이 위태롭게 흔들 렸다. 한데 고두발은 아무렇지도 않 게 그 위로 몸을 날리더니 이내 자 리를 잡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고두발이 자리를 뜬 뒤 두 사람은 다시 사업 얘기를 이어 갔다. 이번 엔 수익 배분에 관한 문제가 대두됐 다.
먼저 의견을 낸 쪽은 용문걸이었 다.
“이 사업은 어차피 우리가 없으면 시도도 못 하는 것이니 수익 배분은 구 대 일로 하지.”
“후훗,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는 게 노도채뿐일까?”
설우진은 우회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용문걸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에 그는 유연 하게 대처했다.
“그럼 일 할을 더 얹어 주지.”
“…… “
“그 이상은 곤란해. 천하의 마천을 상대하는 일이야. 아무리 장강을 터 전으로 살아온 우리라도 위험부담이 꽤 크다고.”
용문걸은 재치 있게 마천을 끌어들 였다.
‘뭐,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이할의 수익이면 충분히 남는 장사지. 하지만 아직 돈보다 중요한 게 남았 어.’
“이 조건만 수락한다면 수익 배분 은 그쪽에 맡기지.”
“그게 뭐지?”
“유사시에 무한에 있는 내 식구들 을 그쪽 배에 태워 줬음 해.”
“유사시라면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거지?”
“무한 설가장에서 화린이 피어오를 때야. 무한에 사람을 두고 지켜보고 있다가 화린이 피어오르면 즉각 배 를 띄워 식구들을 태우도록 해.”
화린은 백장 밖에서도 확인이 가 능할 정도로 강한 세기를 지닌 신호탄이었다.
“원수진 곳이라도 있나 보지?”
“그것까진 알 필요 없잖아.”
“그렇긴 하지. 좋아, 그쪽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겠어. 대신 수익 배 분은 이 할이 아닌 일 할 오 푼이 야. 큰 싸움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서 힘을 분산하는 건 꽤나 부담되는 일이거든.”
‘역시, 돈 귀신답네. 뭐, 계산에 철 저한 쪽이 더 믿음이 가기는 하지.’
설우진은 오 푼의 몫을 더 가져가 려는 용문걸의 태도에 실소를 머금 으며 순순히 수락했다.
어차피 이번 만남은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 가족들만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있으면 나머지 일 할 오푼의 수익도 포기할 수 있었다.
수익 배분에 대한 논의가 끝난 뒤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의 계약서를 작 성했다. 그리고 서로의 신뢰를 확인 하는 차원에서 각자 검지를 깨물어 그 피로 수결했다.
“이제 한 배를 탄 사인데 통성명이 나 좀 하지. 난 용문걸,보다시피 이 노도채의 두령이지.”
계약서를 나눠 가진 뒤 용문걸이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난 설우진, 임시 휴업 중인 황룡 학관의 관도지.”
“크큭, 이거 혹시나 했는데 정말 내 아들뻘이었네. 난 또 자연스럽게 말을 놓기에 인피면구라도 썼는지 알았잖아.”
용문걸이 날선 웃음을 보였다. 하 지만 거기에 위축될 설우진이 아니 었다.
“어차피 이 강호는 힘센 놈이 선배 고, 형님이고, 왕이잖아. 나이가 많 다고 해서 한 번이라도 그쪽이 데리 고 있던 부하에게 존대한 적 있어?”
“……”
“봐, 없잖아. 난 힘으로 당신한테 밀린다고 생각지 않아. 그건 이녀 석에게 물어보면 잘 알 거야.”
설우진이 가만히 서 있던 목가유를 끌어들였다.
목가유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군. 저놈은 분명 혈사보에서 수로채를 장악하기 위해 파견한 고수로 알고 있는데.’
용문걸은 목가유의 정체가 청호채 의 간부가 아닌 혈사보의 일원임을 알고 있었다.
노도채는 신룡탄에 머물러 있지만 그가 사방에 뿌려 둔 눈과 귀는 쉴 새 없이 새로운 정보를 전해 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목가유와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
“미안한데 난 남이 하는 말은 잘 믿지 않거든. 바쁜 일 없으면 한판 붙지.”
용문걸이 비무를 제안했다. 그런데 비무에 임하는 사람치고는 밖으로 흘리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살갗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여기서 해결을 보지 않으면 두고 두고 시빗거리가 될 테지. 그렇다면 확실히 밟아 주겠어.’
설우진이 가볍게 목을 좌우로 젖혔 다. 그리고 팔다리를 가볍게 털며 경직돼 있던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가 기억하는 용문걸의 특기는 각 법이었다. 상대가 대처할 틈도 없이 소나기처럼 퍼부어 대는 마풍각의 귀재.
“먼저 신음을 내는 쪽이 지는 걸로 하지.”
승패의 요건이 정해졌다. 용문걸은 연장자로서 선공을 양보하는 미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기습적으로 앞으로 내달림과 동시 에 왼발을 축으로 삼아 벼락같은 일 격을 날렸다.
날카롭게 터져 나오는 소성, 설우 진은 등을 확 젖히며 발끝을 흘려보 냈다.
그런데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이 격이 날아들었다. 일 격은 눈속임이 었던 것이다. 다시 피하기에는 늦은 상황에서 설우진은 양팔을 교차시켜 충격을 상쇄하는 길을 택했다.
펑.
요란한 굉음과 함께 설우진의 몸이 뒤로 쭉 밀렸다.
‘철각의 소유자라고 하더니, 과장 된 소문이 아니었군. 그럼 나도 제 대로 힘 좀 써 볼까.’
설우진이 양팔을 가볍게 매만지며 양쪽 발에 뇌기를 흘려보냈다. 잠시 후 용천혈에서 모여든 뇌기가 폭발 했다. 설우진의 발에 폭풍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파바바, 팡.
두 사람의 신형이 정신없이 교차했 다.
둘은 쉼 없이 공격을 연계했다. 한 번이라도 흐름이 끊기면 치명타를 입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저놈은 정말 못하는 게 없군. 권 법에 이어서 각법까지 수준급이잖아.’
‘강호엔 정말 기인이사가 많다더 니, 어떻게 저 나이에 두령님과 호 각지시를 이룰 수 있지?’
‘우리가 너무 장강의 저력을 얕보 고 있었어. 한낱 수적이라 쉬이 손 에 넣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자 의 실력은 거의 본 보의 장로급이잖 아.’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사이 두 사람의 싸움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누구 다리가 더 튼튼한지 보자고.”
두 개의 다리가 천둥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기교는 접어둔 채 둘은 순수하게 힘으로 상대로 찍어 누르 고자 했다.
“비, 빌어먹을.”
용문걸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각력에 있어선 중원의 그 누구에게 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는데 바로 지금 자신의 오른발이 아래로 떠밀리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설우진의 발을 밀어내 려 애썼지만 한번 무너진 균형은 쉬 이 회복되질 않았다.
쿵.
힘 싸움에 밀린 용문걸의 발이 갑판 위로 떨어졌다. 설우진의 각력이 얼마나 셌는지 여러 겹으로 덧씌워진 갑판이 안쪽으로 푹 꺼졌다.
“내, 내가 졌다.”
용문걸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돈 앞에선 조금 사내답지 않은 모 습을 보이긴 해도 그의 본질은 타고 난 무인이었다.
“거 깔끔해서 좋네. 우리 한 배를 타기로 한 동지끼리 잘해 보자고. 그쪽이 먼저 등을 돌리지 않는 이상 난 든든한 우군으로 남아 있을 거 야.”
설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용문걸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 니 이내 설우진의 손을 꽉 틀어쥐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막연한 복수심만을 내세 우는 적사호보다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는 위성웅에게 사람들의 마음 이 더 끌렸던 것이다.
결국 고심 끝에 적사호는 황유하에 게 은밀히 인편을 보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던 황유하는 적사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 다.
어두컴컴한 방 안, 호롱불 하나가 외로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리고 그 불빛 아래에 황유하와 적사 호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둘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로 줄곧 말을 아꼈다.
그 답답한 대치를 깬 건 쌍룡맹의 군사인 제갈명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자립니다. 가감 없 이 서로의 의견을 나눠 보시지요.”
제갈명이 대화를 촉구했다. 이에 황유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고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서더니 이내 바닥에 대고 절을 했다.
순간적사호의 눈빛이 격랑 치듯 흔들렸다.
“적 문주, 이번 일을 논의하기에 앞서 지난날 맹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겠소. 이것으로 피 맺힌 원한이 풀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소. 다만, 이 황모의 진심만은 알아줬으면 하오.”
황유하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의 진심을 뒷받침하듯 실 제 수호혈사에 관여했던 제갈명이 뒤따라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두 사람이 얼마나 이번 회합을 중 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었다.
적사호는 한참 동안 두 사람을 내 려다보다 어렵게 입을 뗐다.
“그만들 일어나시오. 정작 사죄해 야 할 놈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당 신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수호혈사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그래서 더 부아가 치밀었다.
“그때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든 막 았어야 했소. 그리했다면 작금의 강 호가 이리 사분오열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않소. 일단 과거의 일은 접어 둡시다, 후회한다 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적사호가 선을 그었다. 이에 황유 하와 제갈명도 더는 과거의 일을 언 급하지 않았다.
이후 세 사람 사이에 많은 얘기들 이 오갔다. 대부분 최근 강호 정세 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적 문주, 앞으로 역천회가 어찌 나올 것 같소?”
“일단은 쌍룡맹의 신뢰를 얻으려 할 것이오, 그들이 목표한 바를 이 루기 위해선 쌍룡맹의 도움이 절대 적이니. 하나 중요한 전력은 철저히 숨길 공산이 크오.”
“중요한 전력이라면……………?”
“수신무위.”
황유하와 제갈명의 눈가에 가는 파 랑이 일었다.
수신무위는 다섯 수호 가문을 지키 는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 무위 가 어느 정도인지 많은 이들이 알고 자 했지만 그들의 행사가 워낙에 은 밀했던지라 그 뜻을 이뤄 낸 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소?”
황유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도 얘기만 들었지 그 실체를 직 접 목도한 적은 없었다.
“수신무위는 암중에서 꾸준히 활동 해 왔소. 단지 그 행사가 은밀해 드 러나지 않았을 뿐.”
“그들의 힘은 어느 정돕니까?”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제갈명이 대화에 끼었다.
전략을 수립하고 입안하는 자리에 있는 만큼 상대의 전력에 대해 소상 히 알 필요가 있었다.
“가문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쌍룡맹의 무력대를 상회하는 수준이오.”
순간 제갈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이제껏 쌍룡맹의 전력이 역천 회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판단하 고 있었다. 삼사보가 이탈하면서 전 체적인 세가 줄기는 했지만 오대 무 력대만큼은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무력대를 상회하는 수신 무위가 한 곳도 아니고 다섯 곳이나 존재한다니, 그 사실에 제갈명은 숨 이 턱턱 막혔다.
바로 그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 정을 읽어 냈는지 적사호가 말을 이 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소, 다섯 곳 중에서 정상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세 곳 뿐이니.”
“……?”
“지난 마천 쟁투에서 본 문과 청룡문의 수신무위는 전멸에 가까운 타 격을 입었소.”
적사호의 얼굴에 씁쓸한 감정이 떠 올랐다.
지난날, 통천문은 마천의 파상공세 를 막기 위해 마지막 보루인 수신무 위까지 동원했다.
다른 가문에도 수신무위를 내줄 것 을 청했지만 네 곳 중 유일하게 청 룡문만이 그 청에 응했다.
두 수신무위는 강했다. 하지만 끊 임없이 밀려드는 마천의 머릿수를 감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거, 제가 괜한 걸 물은 것 같군 요.”
제갈명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 꼬리를 흐렸다.
“아니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 어가야 할 부분이었소.”
적사호는 개의치 않다는 듯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로 수신무위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들이 오갔다. 대부분 두 사람이 질문하고 적사호가 답하는 식이었 다.
“흠, 결국 그들을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군.”
황유하가 짧은 침음과 함께 대화의 결론을 냈다.
이에 적사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 였다.
‘본 맹의 무력대를 상회하는 그들 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창천군을 불러들이기에 는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아직 설 익은 비검대를 쓸 수도 없고……?’
제갈명은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도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실패 가능성이 너무 높 았다.
한데 바로 그때, 적사호가 뜻밖의 해답을 제시했다.
“이쪽에서 휘두를 수 있는 칼이 마 땅치 않다면 다른 곳을 끌어들이면 되지 않겠소?”
“다른 쪽이라면…… 마천?”
“그렇소. 마천에는 수신무위에 준 하는 전위부대들이 있소. 그놈들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굳이 어렵게 칼 을 찾지 않아도 수신무위를 벨 수 있소.”
‘그래. 저자의 말대로라면 마천의 전위부대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 이제이,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어. 한데 황룡 학관에 웅크리고 있는 놈들을 어찌 밖으로 끌어낸단 말인가.’
어렵게 벽을 넘었더니 전보다 더 높고 두꺼운 벽이 나타났다.
마천의 전위부대는 섬서로 들어온 이후로 줄곧 황룡 학관에서 꿈쩍도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 능했다.
이에 제갈명은 그 맹점을 짚어 대 화를 이어 갔다.
“좋은 의견이기는 합니다만 무슨 수로 놈들을 우리 밖으로 끌어낸단 말입니까?”
“마천의 전위부대는 호전적이오. 아마 지금쯤 한껏 몸이 달아있을 거 요, 조금만 자극을 줘도 미쳐 날뛸 정도로.”
“그 말은, 미끼를 던져서 놈들을 자극하자는 것입니까?”
제갈명이 단박에 적사호의 의도를 알아채고 물었다.
“그렇소. 하지만 어지간한 미끼로는 놈들이 움직이지 않을 테니 여기 서 조율이 필요하오.”
“조율이라면…?”
“미끼로 쓸 사람은 내 쪽에서 구하 겠소. 대신 구색을 맞출 나머지 인 원은 맹주께서 힘을 써 줘야겠소.” “점찍어 둔 사람이라도 있는 게 요?”
황유하가 오랜만에 말문을 뗐다. 이에 적사호가 뜻밖의 이름을 거론 했다.
“설우진.”
순간적으로 황유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설우진의 진가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는 “거 아니오?”
황유하가 침중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앞길이 창창 한 젊은이를 사지로 내모는 것이 못 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적사호의 의지는 확고했다.
“녀석은 우리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괴물이오. 마천의 전위부대가 무섭 다 한들 녀석이 작정하고 움직인다 면 결코 그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 오.”
‘문제는 녀석이 우리의 뜻에 따라줄지 알 수 없다는 것인데……….’
적사호는 자신 있게 답하면서도 심 중에는 한 가지 걱정을 안고 있었 다.
그간에 보아 온 설우진은 현실성 없는 정의감보다는 철저히 실리를 좋았다. 한데 이번 일은 설우진에게 돌아갈 이득이 마땅치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을 이 일 에 끌어들여야 해. 그러려면 일단 내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 급선무 야.’
적사호는 이번 일을 계획하면서 가 장 먼저 설우진의 소재부터 파악했 다. 워낙에 그 행사가 신출귀몰해 찾는 데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노력이 통했는지 이곳에 오기 사흘 전 그 소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황유하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문주의 뜻이 그리도 확고하다면 우리도 그 아이를 한번 믿어 보겠 소.”
두 사람이 뜻을 합치자 이후로 회 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제갈명의 주도 아래 거사 일이 정해졌고 역천회의 눈과 귀를 가릴 계획까지 치밀하게 세웠다.
“그럼 그때 봅시다.”
회의가 끝나고 적사호는 은밀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나고 제갈명이 조심스럽게 황유하에게 말을 건넸다.
“맹주님께선 적사호 그자를 믿으십니까?”
“왜, 불안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자는 본 맹에 원한이 깊습니다. 어쩌면 오늘 만남 자체도 철저하게 계산된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갈명은 군사답게 냉정한 시선으 로 상황을 바라봤다.
이번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선 숨 겨 둔 패가 필요했다. 맹에도 마천 에도 노출되어 있지 않는 비검대가. 한데 만에 하나라도 이번 계획이 누군가에 의해 사전에 노출된다면 은밀히 때를 기다리며 날을 세우고 있는 비검대가 되레 위험해질 수 있 었다.
“자네, 그의 눈빛을 보지 못했는가?”
“……”
“그의 눈은 울고 있었네. 어찌 그 렇지 않겠는가, 원수나 다름없는 우 리에게 제 발로 찾아와 손을 내밀어 야 했는데.”
“감정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 다.”
“후훗, 그럼 이곳을 보게.”
황유하가 방금 전까지 적사호가 앉 았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갈명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 다.
‘이, 이건……………’
제갈명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의 눈에 비친 건 안쪽으로 깊숙 이 패여 들어간 탁자의 테두리였다.
“그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탁자를 부여잡고 있었네. 그것까지 속임수라고 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 네만 내 눈에 비친 그는 누구보다 “진실했네.”
황유하는 담백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이번만큼은 제갈명도 반박하지 못했다.
“우리 한번 그를 믿어 보세.”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거사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고맙네.”
“그런 소리 마십시오. 전 누구보다 맹주님의 눈을 믿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한편, 적사호는 황유하와 은밀한 만남을 가진 후 곧장 통천문으로 돌 아가지 않고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 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정과 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
그의 걸음이 멈춰선 곳은 취몽루였 다.
뭔가 있을 법한 이름과 달리 취몽루는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남정네들이 자주 찾는 허름한 기루였다. 취몽루에 속한 기녀들은 모두 서른 줄에 접어든 노기로 철전 스무 냥이 면 하룻밤을 살 수 있었다.
취몽루 안으로 들어서자 기녀들의 진한 분향이 코를 찔렀다.
얼굴의 주름을 가리려는 것인지 그 녀들은 얼굴에 허연 분을 덕지덕지 칠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와요, 잘생긴 공자님! 누구 찾는 아이라도 있으신가요?”
총관으로 짐작되는 중년 여인이 격 렬하게 적사호를 반겼다. 그녀는 자 연스럽게 적사호의 몸을 쓰다듬으며 반쯤 드러난 자신의 가슴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의 귓전으로 은밀한 전음이 전해졌다.
-통천의 정기는 취몽을 깨워………….
“창천을 연다.”
그녀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이곳은 통천문이 운영하는 안가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