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5화 : 변란의 조짐 (2)
변란의 조짐 (2)
“창고에 불이 난 게 그렇게 큰일입니까?”
“그게, 최근에 단주님께서 마천과 쌍룡맹의 전쟁에 대비해 군량미를 많이 확보해 놓으셨습니다.”
“설마, 그 군량미가 다…………….?”
“네, 중경의 창고에 보관 중이었습 니다. 아무래도 이곳보다는 중경이 두 세력 간의 싸움터가 될 섬서와
가까운지라………….”
“불은 어쩌다 난 것이랍니까?”
예명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이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모르나 창고 안에서 갑자기 불길이 일었다고 합 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게, 저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화재에 대비해서 밤에는 안쪽의 횃 불을 모두 끄도록 했습니다.”
“하면 누군가 일부러 불을 냈을 수 도 있겠군요?”
예명후의 눈빛에 날이 섰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집을 떠나 있기는 했지만 예명후는 주변의 지인들을 통해서 상단의 소식을 자주 전해 듣고 있었다.
“그들은 아닐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죠?”
“설무백은 일반적인 상인과는 거리 가 먼 잡니다. 지난번 일로 우리 상 단에 실망을 했을지언정 그리 과격 한 방법으로 보복을 획책하지는 않 았을 겁니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일단 그쪽에 은밀히 사람 을 보내 알아보세요.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개입한 증거가 발견된다 면…… 그때는 제가 직접 그들을 징 치할 것입니다.”
지난밤 화끈한 불놀이를 즐기고 돌아온 설우진은 한껏 밝아진 얼굴로 식당에 내려왔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자리는 거의 다 채워져 있었다.
설우진은 비어 있는 구석으로 가서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음식을 주문 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설우진은 주변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지난밤에 일어난 화재 사고에 대해 하늘이 대신 벌을 내린 것이라 며 통쾌해했다.
‘이래서 사람은 죄 짓고 살면 안 된다니까. 다들 동정하기는커녕 제 일처럼 기뻐하잖아.’
설우진은 사람들의 반응에 절로 입 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한 데 그가 기분 좋게 젓가락을 들려고 할 때 큼지막한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낭왕 궁악비였다.
“약속한 시간보다 빨리 오셨네요?”
설우진은 그와 가볍게 시선을 주고 받은 뒤 국수 위로 젓가락을 가져갔 다.
후루룩.
달밤의 불놀이에 허기가 졌는지 면 발은 쉼 없이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 다. 궁악비는 큼지막한 눈을 씰룩이 며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지난밤에 아주 큰 사고를 쳤던 데.”
“꿈이라도 꾸신 건가요? 전 이곳에 서 나간 적이 없는데요.”
“시치미 뗀다고 내가 믿을 것 같은 가. 지난밤 예도상단의 물류 창고에 서 큰 불이 났네. 안에는 곡물 포대 가 가득 쌓여 있었는데 간밤의 화재 로 홀라당 타 버렸다고 하더군.”
“그것 참 안됐네요.”
설우진은 자신과는 하등 관계가 없 는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반응했다.
‘하아, 이 새끼, 낯짝 두꺼운 것 좀 보소. 지난밤에 그쪽으로 향하는 걸 아소가 분명히 봤다고 했거늘….? 궁악비는 은밀히 설우진에게 사람을 붙였다. 설우진의 행적이 수상쩍 었기 때문이다.
“근자에 예도상단과 설가상단 사이 에 큰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네만.”
“마찰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저 희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니.”
“그래서 내 묻는 것일세. 정말 그 화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겐가?”
궁악비가 대놓고 물었다.
‘이 인간이 내 약점을 틀어쥐려고 작정을 했군. 하지만 그런 뻔히 보 이는 수에 놀아날 수는 없지.’
“대체 무슨 의도로 그걸 묻는 겁니 까?”
-크흠, 난 계약자와의 신뢰를 무엇 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네. 그런데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되겠는 가?
궁악비는 서로 간의 신뢰를 강조했 지만 그 정도 사탕발림에 넘어갈 정 도로 설우진은 순진하지 않았다.
“어르신, 지난밤에 큰일 하느라 애 쓰셨습니다. 한데 재주도 용하십니 다. 어찌 무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곳에 쥐도 새도 모르게 불을 지를 수가 있습니까?”
“자네 지금 그게 무슨……?”
“저한테까지 숨기실 필요 없습니 다. 어르신은 옳은 일을 한 겁니다. 민초들을 등쳐 먹는 그런 악독한 상 단은 없어져야 마땅하지요.”
설우진이 갑자기 궁악비를 화재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갔다. 드리고 자연스레 주변의 시선이 두 사람에 쏠렸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게냐!
당황한 궁악비가 다급히 전음을 보 냈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전 그저 좋 은 일을 하셨기에 칭찬했을 뿐입니 다.
“네놈이 지금 날 놀리는 게냐!”
궁악비가 거칠게 투기를 발산하며 설우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 손 놓으시죠, 사람들이 봅니 다.”
설우진이 주변의 시선을 상기시켰 다. 그제야 뒤통수에 쏠려 있는 시선을 느낀 궁악비가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그건 오히려 제가 묻는 싶은 말 입니다. 낭인의 제일 수칙을 벌써 잊어버리신 겁니까?
설우진이 말하는 낭인의 제일 수칙 은 간단했다. 바로 의뢰인에게 관심 을 두지 않을 것.
사람들은 낭인을 쓸 때 자신의 존 재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다. 특 히 뒤가 구린 일일수록 더 그렇다. 해서 최근에는 계약을 맺을 때 별도 로 비밀 엄수 조항을 넣기도 했다.
-영감님, 선은 넘지 마십시오. 한 번은 봐드릴 수 있지만 두 번은 못봐드립니다.
설우진이 두 눈에 벽뢰진천의 뇌기 를 실었다. 동공이 타는 듯한 통증 에 궁악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 었다.
‘이 괴물 같은 놈, 대체 정체가 뭐 야? 날 능가하는 힘으로도 모자라 안공까지 구사하다니…………….”
궁악비는 순간적으로 식겁했다. 안 공은 고수들의 상징과도 같은 무공 이다. 내기의 수발이 자유로워야지 만 구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안공을 펼쳤다, 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능숙 하게.
-크흠, 알았다. 다시는 내 개인적인 호기심을 내세워 네 뒤를 캐지 않으마.
눈에서 통증이 조금 잦아들자 궁악 비는 설우진의 강수에 한발 뒤로 물 러서는 선택을 했다.
설우진은 그제야 웃으며 궁악비에 게 쏠린 의혹의 시선을 해소시켰다.
“하하하! 어르신, 농 한번 지껄여 본 것 가지고 뭘 그리 흥분하십니 까?”
“자네, 농을 지껄일 게 따로 있지. 어찌 멀쩡한 사람을 방화범으로 몰 수 있나!”
궁악비가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언 성을 높였다.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 하기야, 어떤 미친놈이 그 사달을 내고서 팔 자 좋게 이곳에서 밥을 먹고 있겠어.”
이내 사람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하 나둘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궁악비 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 탁에 놓여 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켰 다. 하지만 타는 속내는 좀체 식을 줄 몰랐다.
‘저놈과의 동행은 영 순탄치가 않 을 것 같군.’
심중에 생겨난 불안감, 낭왕에 오 른 이후 이런 감정을 느껴 보는 건 처음이다.
한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설우진 은 태연하게 마지막 남은 국물을 그룻째 들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군사, 이대로 괜찮겠는가?”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로 황유하 가 정면에 마주 앉은 제갈명에게 조 언을 구했다.
그는 요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역천회가 맹에 합류하겠다 는 의사를 전해 온 그 직후부터였 다.
맹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역천회의 합류는 큰 호재였다. 삼사보의 이탈 로 생긴 전력의 공백을 그들로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그들의 실체를 알고 있는 그 로선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한 때 쌍룡맹에 대한 복수심으로 마천 과 손을 잡았던 역천회다. 지금은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언제 태도를 달리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맹주님, 일단은 조용히 추이를 지 켜보시지요.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 면 반대 노선에 서 있는 자들에게 역공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습니 다.”
제갈명이 신중하게 움직일 것을 조 언했다.
최근 들어 맹 내의 분위기가 심상 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강경 노 선에 서 있던 자들이 황유하의 지도력에 비판의 날을 세우기 시작한 것 이다.
특히 섬서를 마천에 내준 것에 맹주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유하의 입장에선 어이없는 일이 었지만 다수가 주도하는 여론은 이 미 그를 무능력한 맹주로 전락시켰 다.
“하아,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도 없지 않은가. 자칫 맹 전체가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 있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창천군으로 하여금 역천회의 동태를 면밀히 살 피라 명해 뒀습니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보고해 올 터이니 힘들 어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제갈명은 마천에 집중되어 있던 창천군의 전력을 일부 떼어 각 수호 가문에 은밀히 침투시켰다.
그들은 수시로 수호 가문의 동태를 파악해 비선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흠, 알았네. 늦은 시간까지 붙잡아 서 미안하네. 그만 방으로 돌아가 쉬게나.”
“조금이라도 눈 좀 부치십시오. 안 팎의 적들과 상대하기 위해선 맹주 님의 몸부터 보증하셔야 합니다.”
제갈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를 바라봤다.
“내 안 그래도 오늘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할 참이었네. 하니 걱정 말고 어서 가게나.”
황유하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제갈 명을 안심시켰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제갈명이 정중히 인사를 건네며 방 을 나섰다.
홀로 방 안에 남은 황유하는 오랜 만에 서랍 안에서 술병을 꺼냈다. 입구를 여니 독한 주향이 방 안 가득 진하게 풍겼다.
“이걸 마시면 속이 좀 편해지려나…….”
그는 병째 입으로 가져갔다. 평소 의 그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 다.
벌컥벌컥.
술은 쉼 없이 들어갔다. 한 모금만 마셔도 목이 타 들어갈 터인데 속이 많이 갑갑했는지 그는 멈추지 않았 다.
“크윽.”
잠시 후 황유하의 입에서 거친 신 음이 터져 나왔다. 술병을 다 비우 고 나자 속에서 취기가 한 번에 치 밀어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취 기를 인위적으로 해소하지 않았다.
“그 친구 말대로군. 마음이 심란할 땐 화주를 마셔 보라고 하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야.”
한껏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후우,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살 아야지.”
배에서 내린 궁악비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힘차게 나루터 위를 거닐었 다.
그는 중경에서 수로를 이용해 이곳 의창까지 왔다. 배라면 질색하는 그 였지만 설우진의 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배에 몸을 실었다.
예상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뭔 놈의 강물이 그리도 사나운지 의창 까지 오는 내내 속은 멀쩡할 날이 없었다.
이틀 밤새 얼굴이 확 늙어 보일 정도였다.
그에 반해 함께 배를 탄 설우진은 멀쩡하다 못해 얼굴에 윤이 자르르 흘렀다. 배를 타고 오는 내내 숙면 을 취한 덕분이다.
설우진이 육로가 아닌 수로를 고집 한 것은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중경에서 의창으로 이어지는 수로 는 비교적 곧게 뻗어 있다. 그 말은 곧 뱃머리를 돌리지 않고 일정한 속 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 밥부터 먹세.”
궁악비가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매만지며 바라봤다.
간절한 표정으로 설우진을 설우진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이 내 근처 객잔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 모습에 신이 난 궁악비는 어린애처럼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런데 강어귀에서 둘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얼굴 은 지극히 평범해 뵈는데 두 눈에는 은은한 혈광이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