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0장 – 출발하는 수탐자들 (6)
“요스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고승들의 질문에 오레놀은 쥬타기 대선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대선사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기다렸다. 오레놀은 대선사에게 감히 비난하는 눈길을 보낸 다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케이건 님의 친구입니다.”
승려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그중 한 명이 그런 황당한 말을 꺼내는 것조차 화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나가입니다.”
승려들은 한참 웅성거리다가 말했다.
“설명해 주십시오.”
“두 분이 어떻게 서로를 알게 된 건지는 저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하지만 대충 15년 전 그 두 분은 서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케이건 님이 한계선 근처에서 예의 활동 중에 만나게 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짐작하기도 힘든 이유를 통해 두 분은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12년 전쯤, 요스비는 케이건 님을 만나기 위해 북부로 올라오셨습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요. 거의 죽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케이건 님을 만나는 데 성공했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 분은 강력한 정신 억압자였습니다. 저는 그 분이 사람을 그러니까 지능이 좀 부족한 사람을 정신 억압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소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오레놀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야 했다.
“그 분은 유쾌한 성격이셨고, 철모르는 어린 행자를 놀리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어린 행자로 하여금 하늘치를 정신 억압해서 타고 왔다는 둥의 황당무계한 모험담을 믿게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린 행자는 고통스러운 밤을 겪어야 했지요. 정신 억압을 당할까 봐 무서워서 밤에 해우소로 갈 수가 없더군요.”
승려들의 공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소들이 떠올랐다. 오레놀은 함께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사람을 정신 억압할 수 있다느니 하는 것은 닳고 닳은 방랑자가 풋내기 행자를 멋지게 속여 넘긴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그 분이 케이건 님을 만나는 데 사용한 것이 자신의 정신 억압 능력인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렇게 두 분이 만나신 다음, 케이건 님은 그 분을 안내하며 북부를 주유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대사원에도 잠시 방문하셨습니다. 그래서 머리 깎은 자리가 아직 파랗던 제가 그 분을 뵐 수 있었지요. 하지만 북부에서의 체류는 점점 더 그 분에게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만 그래도 힘들어하시더군요. 결국 그 분은 남부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떠나기 전, 그 분은 이곳과의 연락을 위해 가져오신 뱀 단지를 남겨 두고 가셨습니다. 케이건 님은 사어를 모르시므로 이곳에 맡겨 두어 케이건 님과의 연락 수단으로 삼으시려 하신 겁니다.”
“그렇군요. 그 뱀 단지가?”
“예. 어느 날 그 뱀 단지가 움직였을 때 저희들은 요스비가 다시 연락해 온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연락을 해 온 자는 자신을 세리스마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지요.”
오레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물론 잠시 후 자신의 승려답지 못한 행동에 부끄러워했지만. 다시 한 승려가 질문했다.
“케이건 님은 왜 그 분을, 어, 평소의 방식대로 대하지 않고 그런 독특한 관계를 맺으신 거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분을 뵌 건 그 분이 이곳에 체류하시던 며칠 동안뿐이었습니다. 저도 그때 그것이 너무 궁금해서 케이건 님에게 졸라 봤습니다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제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그 분은 쾌활하고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분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이곳은 쾌활함은 생각하기도 힘든 끔찍한 환경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없으셨지요.”
“그 나가의 인품 때문이었을 거라는 말이군요?”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설마 케이건 님을 매수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고요?”
오레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가장 이상한 부분입니다. 륜 페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사망하는 요스비를 목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케이건 님은 나가의 강력한 재생력을 거론하며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지만 사모 페이는 요스비의 사체를 소각했다고 말함으로써 그 가설을 부정했습니다. 그 당시 요스비는 불가사의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그렇게 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케이건 님이 소각하는 것을 직접 봤냐고 물으시자 사모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한 승려가 상당히 창의적인 질문을 꺼내었다.
“사어에도 필적과 같은 것이 있습니까?”
오레놀은 놀랐다. 비형 스라블이 바로 그런 질문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그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저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자신이 요스비라고 주장하던 그 자는 사어를 보며 ‘륜 페이는 아니지만, 느낌이 아는 사람 같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정확한 통찰이었습니다. 륜 페이가 아니라 사모 페이니까요. 그리고 그 남매는 모두 요스비의 자녀입니다. 어쩌면 정신 억압에 능숙한 자는 깨달을 수 있는 특징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을 모릅니다.”
“그 말은, 그쪽에서는 이쪽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쪽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정체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사모 페이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계획을 말씀하신 것은 케이건 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성급한 일인 것 같군요. 참, 그러고 보니 그건 어떻게 되었지요? 사모 페이는 왕위에 오르는 것에 찬성했습니까?”
오레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건부로 찬성했습니다.”
“어떤 조건이지요?”
오레놀의 대답을 기대했던 승려들은 갑자기 품속을 뒤적거리는 오레놀의 행동에 당황했다. 품속에서 도깨비지를 꺼낸 오레놀은 그것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길어서 적어 왔습니다.”
그리고 오레놀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우자는 자신과 화해하려 애쓰고 범자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지자는 세계를 양해하려 애쓴다. 지자일 리는 없으며, 이 땅에서는 범자라 하기도 힘든 나로서는 자신과 화해하는 것조차 벅차다. 하물며 세계 속에서의 나의 위치와 내 주위의 존재들과의 관계를 파악하여 가장 올바른 결정을 내릴 자신은 없다. 내 우행의 목록에 새 항목을 추가하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당신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나를 두렵게 한다. 부디 내 제안을 가장 준엄한 시각으로 판단하고 가장 혹독한 비난으로 꾸짖어 주되 칭찬과 동의에는 신중해 주길 바란다. 나는 왕이 필요하지 않기에 왕이 없는 세계에서 왔다. 왕을 원하지만 왕이 없는 당신들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왕을 필요로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왕에 대한 당신들의 그리움과 절실함은 느낄 수 있다. 만약 당신들이 당신들 모두의 의지로써 요구한다면, 나는 조건부로 당신들의 왕이 되는 것에 동의하겠다. 내 조건은 이러하다.
첫째, 나는 나가의 적대자들이 아닌 수호자의 적대자들을 이끄는 왕이 되고 싶다. 한계선이 우리를 갈라놓은 후 지나간 그 긴 세월을 놓고 볼 때 당신들이 아직까지 나가들을 증오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당신들도 용서할 줄 아는 사람들일 테니까. 만약 남쪽으로부터의 공격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신을 모독한 사제들의 참렬한 범죄일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적을 명확히 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했을 때 나는 당신들의 적에 맞서 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
둘째, 나는 그 수치스럽고 사악한 감금이 종식되고 여신이 구출될 때까지만 왕좌에 있겠다. 자결권을 가진 당신들에게는 당신들 안에서 당신들의 지배자를 선출할 확고한 권한이 있다. 비록 시기가 수상하고 화급하여 내가 당신들의 왕위를 잠시 맡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당신들이 선출한 지도자에게 평화롭게 왕위를 이양하는 것, 그것뿐일 것이다. 당신들이 그 긴 세월 동안 기다려온 왕에게 왕위를 줄 수 있는 것에서 나는 당신들의 왕위를 맡은 보람을 느낄 것이다.
셋째, 둘째 조건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키보렌을 넘겨주는 왕은 되지 않겠다. 나는 당신들의 정당한 소유물을 지키는 왕이 되고 싶다. 나는 수호자들의 침략 행위를- 그것이 발생한다면 규탄할 것이며, 같은 이유에서 당신들이 나가의 것을 노린다면 그 역시 규탄할 것이다. 물론 전쟁의 규칙과 상황이 요구한다면 나는 한계선 이남으로의 진격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북부의 명예가 요구한다면 내 동족들에게 두 번 다시 북부에 대한 도발을 삼가도록 교훈을 주는 것에도 찬성하겠다. 그러나 그곳을 당신들에게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은 나무와 나가들의 땅이다.
넷째, 이 모든 조건들과 함께 최후의 아라짓 전사 케이건 드라카가 용의 수호를 하겠다고 맹세한 경우에 한하여 나는 왕위를 맡겠다.”
낭독을 끝낸 오레놀은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이런 조건 하에 그녀는 그녀의 동족을 상대로 우리와 함께 싸우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대사원의 높은 스님들께서는 어제 조건들을 들으셨고, 지금 그 조건들을 검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조건을 내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내세운 조건 또한 합리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습니다.”
군웅들은 깊은 감명 속에서 침묵했다. 그러나 지코마 성주는 회의적인 얼굴이었다.
“사모 페이는 북부의 명예가 요구한다면 그녀의 동족에게 교훈을 주는 것에도 찬성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그 말의 의미를 알고나 있는 겁니까? 그 ‘교훈’을 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녀의 동족들을 학살하고 키보렌을 불태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랑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전쟁의 교훈이라는 것이 그런 비정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가 알기로 그녀의 세계에는 왕과 요리사뿐만 아니라 전쟁도 없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전쟁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환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레놀은 기다렸던 질문이기에 여유를 가지고 대답했다.
“그녀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요?”
“예. 그리고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녀가 전쟁을 그저 큰 싸움 정도로 알고 있었다면 그런 어휘를 사용하지도 않았겠지요.”
“실로 놀라운 일이군요.”
지코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구분하기 힘든 한숨이었다. 그리고 지코마는 실제로 그의 적을 상대로 그런 ‘교훈’을 다섯 번이나 주었던 남자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변경백?”
괄하이드는 침중한 얼굴로 마루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후 변경백은 입을 열었다.
“그녀에겐 유리해 보이는 쪽에 붙는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똑똑한 기회주의자라면 불사의 병사들과 신의 힘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붙지, 그 적에게 붙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오. 더군다나 그들이 자신의 동족이라면 더욱더.”
지배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변경백은 선고하듯 말했다.
“내 잠시 예언자의 흉내를 내어 보겠소. 나가들의 침략이 시작되면, 그들에게 부화뇌동하여 나가의 앞잡이 노릇하려 드는 북부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이 여인은 어떠하오? 그녀가 나가에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녀의 동족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 행위의 부도덕함을 탓하며 우리들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했소. 그저 우리와 함께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동족의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한데, 우리의 왕이 된다면 그녀가 동족에게 받게 될 증오와 저주는 언급하기조차 끔찍할 지경일 것이오. 그녀는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말한 거요.”
말의 끄트머리에서 변경백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괜한 일장 연설을 했다고 후회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의 마무리는 퍽 이상한 것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드오.”
지배자들은 이 끝마무리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괄하이드는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화끈해진 얼굴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 분명했다. 지코마 성주 또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수호자들에 대항하여 싸워 줄 병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원하는 것이니 꼭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어쨌든 저 수호자들이 우리가 얼마 전에 겪었던 것과 같은 재해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다면, “
지배자들은 얼마 전 파름 산을 강타한 폭우를 떠올리고는 전율했다.
“우리는 편안히 잠들기는 글렀습니다. 싸워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녀의 목적과 우리의 목적은 양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에게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주는 대신 그녀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뭐지요?”
판사이에서 온 베미온 마립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코마 성주. 무슨 말입니까? 왕은 사람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무조건적으로 통치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녀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우리는 그녀가 공정하고 현명하게 우리를 지배해 줄 것을 희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게 왕이잖습니까?”
지코마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베미온 마립간.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우리에게 뭔가를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모 페이 이외에 다른 사람도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지배자들의 눈이 번득였다. 오레놀은 겁먹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괄하이드 변경백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지코마 성주?”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 변경백. 사람들을 당황시키지 않을 자가 더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가가 우리의 왕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고 화를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모 페이가 나가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지금 북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왕입니다. 하지만 가장 불필요한 것은 의심받는 왕입니다. 사모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군. 먼저 사과해야겠소. 나는 당신이 왕좌를 탐내는 줄로 알았소.”
지코마 성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오해가 당연하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곳에 왔을 때 제게는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오레놀은 다른 지배자들이 찔끔한 표정을 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을 인정해 줄 왕을 찾길 원하는 괄하이드 변경백 같은 이를 제외한다면, 남부럽지 않은 통찰력과 놀라운 쾌속으로 달려온 그 군웅들에게 야심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지코마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스님들께서 들려준 이야기를 들은 지금, 저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 변경백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이 시점에서 북부의 왕이 된다는 것은…………, 불사의 병사들과 신의 힘을 다루는 자들의 표적이 되는 일입니다. 괄하이드 변경백. 나가들의 흉계를 들은 이후로 저는 어쩌면 칼리도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가에게 제 목을 내어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진저리를 쳤다. 괄하이드는 침울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아마도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오. 우리를 따르는 자들과 우리의 적 사이에 우리 자신을 둘 수밖에 없는 시간이. 그 무서운 시간이 우리를 시험할 때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결정해 두어야 할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제 북부의 왕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졌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도깨비와 레콘 모두를 위해 목을 바칠 각오를 하는 일입니다.”
지코마의 말에 오레놀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제야 륜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륜은 케이건에게 외쳤다. ‘당신은 누님을 왕으로 만든 다음 죽일 작정이잖아!’ 오레놀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미욱했을 수가. 왕이 없는 세계에서 온 륜조차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는데.’
지코마 성주는 계속 말했다.
“비겁하다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제외한 누구라도 왕이 되어 준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무서운 자리에 앉고 싶지 않으며, 사모 페이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수락해 준 것에 감사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녀가 나가만 아니라면 그랬을 거라는 말입니다. 나가인 사모 페이는…………,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대신 그들을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괄하이드는 지코마를 향해 목례했다.
“다시 당신에게 사과하겠소. 성주.”
“두 번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변경백.”
괄하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두 번째 사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오.”
“네? 무슨 이유입니까?”
“당신은 사모 페이 이외에 다른 자가 왕이 되길 바라고 있소.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소. 사모 페이 이외에 다른 자가 왕이 된다면, 규리하는 그 자를 적으로 간주할 거라고.”
괄하이드 규리하는 말을 마친 다음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경악 어린 침묵을 조용히 응시했다.
실로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군웅들은 창백한 얼굴로 괄하이드 규리하를 바라보았고 지코마 성주는 입술을 떨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케이건 드라카가 그녀를 지명했으니까.”
무핀토 추장이 노기 어린 표정으로 외쳤다.
“변경백! 그 자가 최후의 아라짓 전사라는 말을 정말로 믿으시는 거요?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그 부랑자에게 정말로 그런 내력이 있을 리가 없소이다! 나는 그 괴상한 검이 정말로 영웅왕의 검인지도 의심스럽소!”
오레놀은 대사원의 보증이 무시되었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혔다. 분노한 대덕이 그 말에 반박하려 했을 때 괄하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런 내력 같은 것은 상관없소.”
두 번째 충격이 군웅들과 오레놀을 강타했다. 지코마 성주마저도 입을 벌린 채 괄하이드를 쳐다볼 뿐이었다. 대덕이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남자가 누구든 간에 그는 800년 동안 우리가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반쯤은 의식적으로 방기해 왔던 아라짓의 복수를 해온 사람이오. 우리에게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서.”
지코마 성주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음을 깨달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왕의 땅을 지키며 살아온 그 노무사는 케이건에게 동질감을, 심지어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계선에서 턱없이 멀리 떨어진 규리하를 지키고 있었던 변경백은, 자신이 지켜야 하는 그 땅을 노리는 자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 옛날 후사린 규리하가 그랬던 것처럼 그곳을 버리고 한계선으로 진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괄하이드는 한계선을 넘나들며 나가들을 대적해 온 외로운 복수자에게 빚을 진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코마는 고개를 가로젓고 싶었다. 규리하의 사람들은 그들의 지배자가 800년 전의 복수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잠깐. 정말 그럴까? 지코마는 과텔 규리하 이래 규리하 사람들이 강조해 온 상무 정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이 숭상하며 기르는 무용(武勇)은 돌아올 왕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괄하이드는 그런 자들의 지배자다.
괄하이드는 불길 같은 눈으로 지배자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왕의 땅을 지켜왔고, 그것을 긍지로 여겼소. 그러나 케이건 드라카는 외로운 검 한 자루로 왕의 복수를 해왔소. 나는 그가 찾아낸 왕 이외에 다른 왕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소.”
지코마는 유언이라도 남기는 것처럼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자가 지명한 것이 나가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요청입니다.”
“극단적이라 하신다면 나는 도로왕의 말씀을 대답으로 삼겠소.”
지코마는 입을 다물었다. 도로왕은 극연왕의 별명이다. 극연왕은 어떤 극도 서로 이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