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3장 – 파국으로의 수령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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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3장 – 파국으로의 수령 (11)


악타그라쥬 공방전이 또 다른 하루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날 차례를 맞아 전선에 등장한 벚나무 군단의 군단병들은 당황했다. 전투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있는 북부군은 비할 바를 찾기 어려운 정교함으로 여섯 개 군단의 연환 공격을 물리치던 어제까지의 북부군이 아니었다. 불신자들은 허둥거렸고 당황했으며 악에 받쳐 발광했다. 그 모습은 벚나무 군단이 북부에서 싸우곤 했던 보통의 불신자들과 비슷했다. 더군다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의 기온마저 낯설었다. 아니, 낯익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키보렌의 기온은 나가들에게 익숙한 원래의 기온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움직이기 좋은 더운 날씨였다.

도깨비 감투를 쓴 암살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빽빽하게 밀집한 호위병들 사이에 서 있던 수호 장군들은 그 사태에 당황했다. 뇌룡공 륜 페이가 지난밤 기온을 낮추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또한 북부군의 병사들이 중구난방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들이 용인의 통제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전황은 륜 페이가 ‘할 일을 하지 않아서’ 그들에게 낯선 것이 되고 있었다. 수호 장군들은 전쟁터 한가운데서 발악하며 화산 같은 불길을 끌어올리고 있는 시우쇠에게 국소적 폭풍을 쏟아부으며 짬짬이 니름을 교환했다.

<륜 페이가 어떻게 된 걸까요?>

<글쎄요.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물러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전투에 응한 것이지요?>

<꺼림칙하군요. 기온에 신경 쓰도록 합시다. 좀 추워지는 느낌이 없는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양이 떠오름과 함께 기온은 자연스럽게 높아질 뿐이었다. 나가들은 오래간만에 뜨거워진 몸으로 기세가 흐트러진 적을 상대로 싸울 수 있었다. 나가들의 기세는 드높아졌다. 전선 곳곳에서 피에 젖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숲에서 기병은 무의미한 집단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기병들은 보병들과 마찬가지로 작살검을 휘두르며 나가들과 싸워야 했다. 그들의 선두에서, 괄하이드 규리하는 평생의 기술을 다해 대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기량의 출중함은 북부군과 벚나무 군단을 통틀어 단연 발군이다. 회전하고 돌진하고 파헤치며 쑤신다. 찍어내고 잘라내고 끊어내며 부러뜨린다. 이미 오래전에 몸에 꽂은 채 싸울 수 있는 작살검과 괄하이드의 대도를 똑같이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숙지하게 된 나가들이었지만, 그들의 육신을 탐하는 대도에게서 몸을 빼내긴 어려웠다. 분노에 찬 동작으로 사이커를 마주 대어 보건만 그 단단함 때문에 부러지지는 않을지언정 가벼움 때문에 튕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가오는 나가의 머리를 턱 아랫부분까지 쪼개어 놓은 괄하이드는 잠시 호흡을 가누기 위해 대도를 당기며 물러났다. 그의 주위에 나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다가올 수 있는 거리의 나가들은 보다 정상적인 상대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괄하이드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옷에 닦을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갑자기 못 견딜 정도의 더위가 노장군을 짜증스럽게 했다. 괄하이드는 투구를 벗어 팽개쳤다. 투구 아래에 있던 머리카락은 피에 젖은 수염과 달리 아직 흰빛을 간직하고 있다. 노장군은 머리카락을 묶었던 끈마저 풀어버렸다. 하지만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목과 어깨에 달라붙어 괄하이드를 괴롭혔다.

키보렌은 숨이 막히도록 더웠다.

흉악한 전투 때문에 날짐승들이 모두 도망간 밀림에서는 자연적인 소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들려오는 것은 병장기 부딪히는 살벌한 소리와 북부군의 비명뿐이다. 맞부딪치는 병장기들은 섬광과 소음뿐만 아니라 지독한 쇠비린내도 풍겼다. 피 냄새와 땀 냄새에 쇠비린내까지 합쳐진 그 묘한 냄새는 괄하이드에겐 낯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곳 키보렌에는 괄하이드의 신경을 자극하는 냄새가 하나 더 있었다. 짓눌러버릴 것처럼 다가오는 숲의 향기. 그것이 전투의 향취와 뒤섞이자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불길한 냄새로 바뀌었다.

이마에 달라붙는 백발을 떼어내며 괄하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도의 넓은 날 곳곳에는 부서진 비늘들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닦아내려던 괄하이드는 손을 대자마자 다시 떼었다. 무수한 사이커와 충돌했던 대도는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주위가 약간 고요해졌다. 전투의 중심이 그에게서 약간 멀어진 듯했다. 다시 그 싸움터로 복귀해야겠지만 괄하이드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괄하이드는 검게 탄 목과 팔뚝에 흐르는 구슬땀을 계속 훔쳐내었다.

보다 젊고 자신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욕구도 강했던 시절, 괄하이드는 왕의 변경백이라는 지위가 과연 살인 면허장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 지위의 정당성이 언제나 불완전했기에 고민은 더욱 컸다.

그러나 몸의 터럭이 희게 변하고 혹 청춘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그 모든 어리석은 짓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질려 정중히 거부해 버릴 나이가 된 지금, 괄하이드는 더 이상 그런 문제가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살인의 허락을 요구하는 자는 살아가는 것의 허락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죄는 내가 이고 가지.’

맹금의 날개처럼 대도를 뿌린 다음 격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괄하이드는 하늘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다. 키보렌은 이글거리는 폭염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더위였다.

시우쇠가 불길을 거둬들였다. 수호 장군들은 당황했고 그 틈을 타 시우쇠는 뒤로 훌쩍 뛰었다. 몸을 돌린 시우쇠는 마치 도망치는 듯한 모습으로 북부군을 헤치며 달려갔다. 통제되지 못한 모습으로 나가들에게 살육 당하던 북부군은 시우쇠의 열기에 다시 고통받았다. 시우쇠의 도주 때문에 북부군의 전열은 크게 흐트러졌다.

수호 장군들 중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꼭 닐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이 닐렀다.

<시우쇠가 물러갑니다.>

수호 장군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쩌려는 거지요? 륜 페이가 사라지더니 시우쇠까지?>

<어쨌든 잘됐군요. 레콘들을 위해 비를 뿌려볼까요.>

<글쎄요. 모처럼 좋은 기온이라 병사들이 힘을 내고 있는데요. 비를 뿌리면 체온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수호 장군들은 빠르게 숙의한 다음 시우쇠, 혹은 륜 페이가 돌아올 것을 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들이 나서지 않아도 전황은 북부군에게 치명적이었다. 간혹 레콘이 용력을 발휘하여 나가들을 밀어붙이는 장면들이 있었지만, 곳곳에서 전투는 소규모 학살로 바뀌고 있었다. 북부군의 수뇌부가 지휘를 포기해 버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결국 수호 장군들은 세키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패주할 것처럼 보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다섯 개 군단을 투입하여 섬멸전을 펼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세키리 군단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전황은 분명 수호 장군들이 니른 대로였다. 하지만 세키리는 북부군이 궤멸해 버릴 만큼의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세키리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륜 페이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찌는 듯이 더운 날씨는 그대로였고 어디서도 륜 페이가 기온을 하강시키고 있다는 증거는 포착되지 않았다. 설령 륜 페이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기온을 떨어뜨리려 해도 오늘 안에 나가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어려울 정도였다.

<좋습니다. 연락을 취하지요.>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다섯 개 군단은 모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고 따라서 세키리의 명령이 전달되자 곧 전장에 나타났다. 적의 숫자가 여섯 배로 늘어나자 북부군의 전열은 순식간에 함몰되었다. 홍수에 휘말린 것처럼 물러나는 북부군을 보며 수호 장군들은 북부군의 운명이 오늘로 마감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세키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렇게 느린 건가!>

전선에 도착한 다섯 개 군단이 벚나무 군단과 합류하여 사정없이 북부군을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세키리는 북부군의 붕괴가 예상만큼 빠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키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가 병사들을 살펴보았다. 수호 장군 한 명이 닐렀다.

<날씨가 오래간만에 더워지니 당황했나 봅니다.>

다른 수호 장군이 맞장구쳤다.

<그렇군요. 항상 쌀쌀하다가 갑자기 더워지니 견디기 어려울 정도군요. 병사들도 더워하고 있습니다.>

수호 장군들은 모두 그 니름에 동의했다. 거의 스무 날 가까이 쌀쌀한 기온에서 전투했기에 오늘의 날씨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정신을 찌르는 듯한 니름이 들려왔다. 수호 장군들은 놀란 표정으로 세키리를 돌아보았다. 세키리 군단장은 충격과 고통, 그리고 경악의 니름들을 쏟아내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세키리 군단장은 무서운 것을 보는 얼굴로 닐렀다.

<해, 해가!>

<예? 해가 어쨌다는 겁니까?>

<두 개입니다!>

수호 장군들은 기겁하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머리 위를 덮은 나뭇잎과 가지들 사이로 빈틈을 찾아낸 장군들은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세키리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했다.

키보렌의 하늘에 뜬 두 개의 태양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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