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3장 – 파국으로의 수령 (7)
보트린의 정신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비아스가 이야기하는 15년 전이 아니었다. 보트린은 10년 전의 기억에 도달했다.
그날, 샤나가가 달 뒤로 숨는 날, 두려움과 기대, 흥분 등 스물두 살이 된 나가에게 볼 수 있는 보편적인―그리고 도깨비 같은 감정을 주위에 잔뜩 퍼뜨리며 심장탑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젊은 나가들 가운데서, 카린돌의 모습은 까불거리는 대나무 숲 가운데 한 그루 물푸레나무 같았다.
물푸레나무는 그 가지를 물에 담그면 물이 푸르게 변하기에 물푸레나무라 한다. 불신자들에게 푸르게 보이는 그 물빛은 나가에게 물보다 짙은 물빛이라는 묘한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빛깔이다. 그 고요함, 침착함, 무관심함으로 오인될 법한 차가움. 보트린은 그 첫인상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트린은 이제 그날의 카린돌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심장 파괴에 대해 알면서도 찾아왔다고?’
죽으러 온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녀가 어떻게 주위의 얼간이들처럼 불사의 생명을 얻는다는 착각에 흥분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보트린은 젊은이들의 순서를 정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운을 십분 즐길 수 있었다. 카린돌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보트린이 그녀를 얼마나 훔쳐 보았는지는 그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두려움 속에서 보트린은 그것을 정념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보트린은 자신의 불운을 슬퍼했다. 보트린은 여신의 신랑이었다. 살아 있는 여인의 침대에 그의 자리는 없는 것이다. 보트린의 곁에는 심장 적출을 기다리고 있는 무수한 청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가 들 수 없는 침대에 들어갈 청년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청년을 보며, 보트린은 폭력적인 충동을 느꼈다. 그들을 노려보는 보트린의 시선은 신부 강탈자를 노려보는 신랑의 눈빛이었다.
카린돌은 그의 레졸디였다. 분명히.
그가 혼란에서 헤어나온 것은 카린돌이 적출을 받을 차례가 다가왔을 때였다. 카린돌이 그의 곁을 떠날 시점이 다가옴에 따라 보트린은 초조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보트린은 이제 그의 여신인 처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면 보트린은 카린돌에게 다가가 니름을 걸고 말았을 것이다. 문득 보트린은 그렇게 해서 안 될 게 뭐냐는 광포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적출을 기다리는 처녀에게 수호자가 건넬 만한 니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의 머리가 차가워지고, 그 때문에 놀랄 만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보트린은 충격 속에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그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카린돌은 ‘정말로’ 그의 신부 레졸디였다.
카린돌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은 세페린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과 똑같았다. 그리고 보트린은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신체를 감지하는 그의 감각이 자극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보트린은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 없었다. 카린돌은 신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체는 륜 페이여야 했다. 보트린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느낌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 카린돌은 사라진 후였다. 적출을 받기 위해 떠난 것이다. 보트린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아 있는 젊은이들을 통제했다. 어떤 결론도 조심스러웠기에 보트린은 카린돌이 적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한번 더 확인하리라 결심했다. 그런 확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보트린은 가지고 있지 않은 재능까지 끌어모았다. 그는 계략을 꾸몄다. 사실 계략이라 말하기도 뭣한 유치한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보트린은 특수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을 꺼내 왔다. 책을 꼭 쥔 보트린은 통로에 숨어 있다가 적출을 마치고 약간 피로한 표정을 한 채 걸어 나오는 카린돌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혹 마케로우 님 아니십니까?>
카린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트린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아마도 정념이 부린 조화겠지만 보트린에게 그 니름은 정신을 후벼 파는 회오리처럼 느껴졌다. 제발, 졸도하지 않게 해주세요! 보트린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성급하게 쥐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카린돌은 물끄러미 책을 바라보다가 다시 보트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닐렀다.
<책>
<네?>
<그건 책이라고요. 다음에는 뭘 꺼내실 거죠? 이름을 기억하는지는 물어보셨으니, 오늘이 몇 일인지 물으실 건가요? 저는 심장을 뽑았지 두뇌를 뽑지는 않았습니다만.>
카린돌의 니름에 섞여 있던 약간의 짜증스러움이 보트린에겐 격노에 찬 질책처럼 들렸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보트린은 가까스로 준비했던 니름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저, 수련자 화리트에게 이것을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수련자에게 큰 도움이 될 책입니다. 저는 그가 이것을 읽고 내용 요약을 해오길 바랍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동생에게 베풀어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성함이?>
<수호자 보트린입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카린돌은 떠났다. 그리고 보트린은 확신했다. 그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그 사실은 그에게 복잡한 감정을 선사했다.
결국 보트린은 그 일을 세리스마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조용히, 끈질기게 조사했고 결국 5년 전의 요스비 살해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획의 변경은 불가피했다.
보트린의 정신은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는 4년 전의 과거였다. 그는 마케로우 저택에 있었고 카린돌을 납치하기 위한 준비를 갖춘 채 그 사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정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화리트 마케로우가 죽었을 때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뻔했지만, 엉뚱하게도 륜 페이가 화리트 마케로우의 임무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고무시키는 행운이었고 보트린 또한 다른 수호자들과 마찬가지로 즐거워했다. 노기 하수언이 설계하고 페니나 시에도가 제작한 냉동 장치 또한 완벽하게 작동했다. 이제 냉동 장치에 집어넣을 여자만 납치하면 되는 상태였고, 그래서 보트린은 다른 세 명의 수호자들과 함께 비아스의 방으로 간 그로스가 보내올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의 가장 중요한 일원이었지만 음모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보트린이 카린돌 납치에 나선 것은 그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보트린은 동료들이 그의 신부 레졸디를 거칠게 다루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보트린은 떼를 쓰다시피 하여 다른 세 명의 수호자들과 함께 그로스를 따라왔다.
약속된 신호가 왔다. 고요한 마케로우 저택 어디선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트린은 그 목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잠자리를 뛰쳐나왔다. 그의 신부 레졸디를 정중하게 모실 수 있도록, 보트린은 다른 수호자들보다 먼저 레졸디에게 도달하고 싶었다. 바람대로 보트린은 가장 먼저 비아스의 방 앞에 도달했다. 하지만 비아스의 방 앞에 도달했을 때 보트린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내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알고 싶어?”
뒤늦게 도착한 다른 수호자들도 뜻하지 않은 목소리에 놀라 보트린을 바라보았다. 보트린은 조심스럽게 방 안을 훔쳐보았다. 하마터면 보트린은 들고 있던 철퇴를 놓칠 뻔했다. 카린돌이 등을 보인 모습으로 방 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그로스가 난처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기름과 불과 칼을 들고 오신 지금의 모습만 보아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로스의 말은 신호였다. 수호자 하나가 사이커를 움켜쥐며 앞으로 나섰다. 보트린은 무의식 중에 그를 밀쳐냈다. 수호자는 어리둥절하여 보트린을 바라보았다. 보트린은 황급히 자신의 철퇴를 가리켰다. 동료들은 보트린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카린돌이 말했다.
“그게 뭔데?”
사이커보다는 철퇴가 기절시키기 좋은 무기라고 생각한 동료들은 보트린에게 길을 내주었다. 물론 보트린의 의도는 동료들의 추측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다른 자들이 내 신부를 공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보트린은 철퇴를 움켜쥐었다. 그로스 또한 보트린이 나서는 것을 보며 말했다.
“예를 들자면, 지금 당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철퇴 같은 것.”
보트린은 기겁했다. 그는 그로스가 좀 더 시간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카린돌이 뒤를 돌아볼 거라 생각한 보트린은 뭔가 다른 생각을 해 볼 겨를도 없이 철퇴를 휘둘렀다. 동작을 완료한 후에야 보트린은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기겁했다. ‘안 돼! 내가 무슨 짓을’ 하지만 철구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카린돌의 머리에 충돌했고 카린돌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보트린은 넋이 나간 채 카린돌을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좀 더 빨리 올 수 없었나? 시간 끄느라고 미치는 줄 알았어.”
그로스의 투덜거림이 있었지만 보트린은 듣지 못했다. 보트린은 철퇴를 통해 전달된 느낌의 여운에 비늘을 부딪쳤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경악했다. 다른 수호자들 또한 눈앞에서 여자가 그렇게 쓰러지는 모습에 당황했기에 보트린의 경악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그로스가 다가와 보트린의 어깨를 툭 쳤다. 보트린은 움찔하며 그로스를 쳐다보았다. 경악에 사로잡힌 신랑은 사라졌고 그 자리엔 비겁한 보트린이 남았다.
나는 네 편이야. 그로스, 나는 몇 번이라도 더 이렇게 할 수 있어. 나를 의심하지 마………………
“잘했어. 고마워, 보트린.”
보트린은 격한 자기 혐오에 빠졌다. 하지만 그의 입매는 미소를 지었고 보트린은 자신의 귀에도 기이하게 들리는 말을 꺼냈다.
“이 여자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따라오긴 했지만, 공격해야 된다고 결정한 이후로 이 여자가 하는 말은 거의 듣지 않았어.”
신부를 공격한 신랑은 슬퍼할 수 없었다. 패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보트린은 현재로 돌아왔다.
수호자 보트린은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조금 전까지의 살기등등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보트린은 자신의 두 볼이 축축하다는 것을 느꼈다.
“울기는 왜 우는 거냐?”
“접니다.”
“뭐야?”
“접니다. 당신이 말한 그 예민한 나가는 접니다.”
비아스는 환호를 지르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보트린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세페린, 요스비, 카린돌. 그들을 알아본 것은 접니다.”
비아스는 세페린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질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요스비를 죽여서라도 륜 페이를 신체로 만들려고 한 거지? 그냥 요스비를 곧장 냉동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 왜 15년 전에 요스비를 냉동시키는 대신 죽인 거지?”
“세페린 때문입니다. 갈로텍이 그것을 원했습니다.”
다시 세페린인가. 결국 비아스는 그게 누구냐고 질문했다. 보트린은 흐느끼며 말했다.
“갈로텍의 누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