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12)
계단에 엎드려 있던 카루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면을 쓴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카 루는 그 가면을 보고 그녀가 대호왕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 다. 하지만 카루는 그 이상의 느낌을 받았다. 카루는 자신이 그 녀를 알고 있다는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불 안 속에서 카루는 조금 전 케이건이 그녀를 나가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그때 보트린의 니름이 들려왔다.
<카루 스바치, 냉동 장치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알려드리겠 습니다.>
카루는 뒤를 돌아보았다. 보트린이 계속 닐렀다.
<그 방법이 카린돌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바치가 다급하게 닐렀다.
<어서 닐러주십시오!>
<금속 상자의 왼쪽에 있는 돌출물을 유의해서 보면 항아리가 세 개 들어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항아리를 파괴하면 됩니다. 그러면 냉동 장치는 쓸모가 없어지게 됩니다.>
스바치는 그 사실을 육성으로 바꿔 속삭였다. 아기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내가 너희들 중 누군가를 이동시켜주겠다. 그 항아리를 파괴해라. 누가 그렇게 하겠느냐?”
”제가 하겠습니다.”
스바치가 대답했다. 그는 보트린을 묶고 있던 줄을 풀기 시작 했다. 아기가 다시 말했다.
”어쩌면 어디에도 없는 신에 의해 죽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라. 지금 사모 페이가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도 위험해질지 모르거니와…….”
아기의 말은 숨죽인 비명에 의해 중단되었다. 티나한과 스바 치, 아기, 보트린은 놀란 표정으로 카루를 바라보았다. 카루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사모 페이입니까?”
”대호왕 말이냐? 그렇다.”
카루는 고개를 홱 돌려 대호왕과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자들 또한 기회를 엿보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케이건을 오로지 아라짓 전사처럼 대하는 사모의 태도는 효과 가 있었다. 케이건은 아라짓 전사로서 말했다.
”폐하, 나가들은 폐하의 전사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그들은 제 희망을 이용하여 저를 철저히 배신했습니다.”
”네 희망이 무엇이냐?”
”제가 원한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냐? 짐에게 말하라.”
케이건은 고개를 들어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희미한 의혹이 피어올랐다. 사모는 자신을 억누른 채 차분하게 그를 마 주보았다.
”네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냐?”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
사모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 다. 케이건의 목소리는 단조로웠고 그 말에는 뚜렷한 인상을 남 기려는 어떤 기교도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모는 그 말 이 귀 속에 쾅쾅 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 사모는 그런 말이 어떻게 나가를 다 죽이려는 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설명하라.”
케이건은 갑자기 과거를 바라보는 눈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시간의 무게가 덧씌워졌고 사모는 태고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세 놈을 잡았지. 마지막 새 끼의 아가리를 찢어놓고 그 입에 오줌을 눠줬지. 말도 못하는 입 에 뭐라도 쓸모가 있어야 할 것 아냐. 제 누이의 전사들. 저는 그것들이 싫었습니다. 제 누이를 살육의 여왕으로 이끄는 광전사 들이 싫었습니다. 그 자들 가운데, 유혈로 자신을 둘러 스스로를 파괴의 여왕으로 선언한 제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 손에 이 혐오 스러운 검을 움켜쥔 채.”
사모는 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정신 없이 생각해 본 후에야 사모는 케이건이 아라짓 전사와 극연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그녀가 이 해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케이건은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는 말했다.
”저는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사랑할 수 없을까?”
사모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왜 이해할 수 없을까? 입장을 바꿀 수는 없을까? 길지 않은 생, 가슴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 의 서로 다른 겉모습은 광적인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다시 없이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사람은 새로움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늘이 덮 인 저 남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의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극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가 장 고마운 선물이 아닐까? 대상이 없는 사랑은 없다. 그리고 새 로운 대상은 새로운 사랑을 약속한다. 남쪽에서 온 비늘 덮인 그들은 나의 또 다른 형제며 혈육이다. 그리고 축복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들은 얼마나 고마운 자들인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 더 얻었다.”
케이건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
사모는 이런 거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이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거대한 축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혹은 그러했던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사모는 니를 수 없는 감 동 속에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얼굴이 갑자기 고통스 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무서운 추억을 바라보는 자의 눈으로 사 모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런 제게 어떤 나가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케이건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사모는 감히 그를 다그 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케이건의 침묵은 건드릴 수 없는, 건드 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받을 것 같은 비탄을 담고 있었다. 갑자기 케이건의 입이 열렸다.
”그 나가의 말은 정말 친절하게 들렸습니다. 제가 들었던 그 어떤 목소리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 나가는 말했습니다. ‘이 해합니다.’ 정말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해합 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 슬픈 사태를 해결할 방도 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그 나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매한 침묵으로 저를 설득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침묵 과 더불어 제시된 손짓의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왕국 아라짓에서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한 그 손짓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 놈들은 인간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습 니다. 의미가 너무 분명합니다! 예. 간단한, 너무도 직설적인 손 짓이었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살육밖에 모르는 누이를 비난하고 그녀의 검을 훔쳐 그녀를 떠났습니다. 제 누이를 떠나는 길에서 제가 생 각했던 것은 누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득의양양하여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가들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 는 저 저주받을 아라짓 전사들은 정체성의 수수께끼를 느껴야 할 것이다.”
사모는 바라기의 실종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 일인지 알게 되었 다. 그리고 그 일에서 나가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 이루 니르기 어려운 혐오감을 느꼈다. 그 나가는 북부에서 나가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기를 원하는 유일한 사람을 가증스럽게 속였다. 죄책감에 고개를 가로젓던 그녀의 눈이 문득 시우쇠에게 머물렀다. 시우쇠 는 저편에 가만히 선 채 그녀와 케이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 건의 말이 계속되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라짓 전사들의 혼란을 틈타 나가들 의 반격이 아라짓을 거세게 강타했습니다. 바라기를 잃은 제 나 라는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케이건은 다시 침묵했다. 그는 이제 아라짓의 무력한 몰락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영웅왕의 검 아래에 이룩되었던 강력한 왕국은 그 검을 잃고 초라하게 시들어갔다.
”믿기 어려웠습니다. 살육귀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운 사랑과 새로운 이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국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증오의 기억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깊은 마음속으로는 제가 나 가에게 속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쓰러져가는 조국의 이름은 제 머릿속을 불태우는 악몽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저는 나가를 사랑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사랑하는 조국이 멸망했습니 다. 아라짓의 가장 가증스러운 배신자. 왕국을 훔친 도둑. 그것 이 저였습니다. 결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조국 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전사의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영웅왕의 나라는 병자처럼 볼품없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케이건의 얼굴에 갑자기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손은 떨림을 멈춘 채 서서히 가슴으로 올라왔다. 사모는 그 움직임을 불안 속 에서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어깨 뒤로 손을 넘겨 바라기의 칼자 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가들을 잡아먹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받 아들인 키탈저 사냥꾼들의 방식이었습니다. 용의 자손인 저는 그 렇게 했습니다.”
바라기를 움켜쥔 케이건의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사모는 불현 듯 케이건이 첫 번째 나가 살육과 그 고기를 먹은 일을 회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몸에서 비늘이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느끼는 공포와 무관하게 그녀의 마음은 한없는 동정심으로 가득 차 흔들렸다.
”예. 저는 한계선 근처에서 힘없이 어슬렁거리는 나가를 잡았 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았습니다. 그것으로써 저는 제 두 번째 장례식을 스스로 주관했습니다. 사랑했던 것을 잃었고, 사랑하고 싶었던 것도 잃었습니다. 나가의 고기가 제 목을 넘어갈 때 저는 속에서 울려퍼지는 단말마를 들었습니다. 처음 몇 번 동안은 그 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속의 무엇이 완전히 죽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모의 눈에 은루가 고였다. 고통스러운 추억에 이르른 케이건 은 빠르게 말했다.
”제 고통을 아는 자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제 아내, 왕국의 도둑을 받아들인 그녀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별비의 가슴을 헤치고 그 간을 꺼내어 씹었던 그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라기의 완전한 회수와 골칫덩이가 된 배신자 를 제거하길 원했던 나가들은 저를 추적하는 대신 제 아내를 추 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아내는 그 비늘 덮인 차가운 동물들 을 사랑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제가 한 때 그것을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갔습니다. 제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 문이지요. 그래서 저를 옛날의 케이건으로 돌려놓으려 했습니다. 나가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자로. 기다리던 나가들은 제 아내를 붙잡아 찢어 죽였습니다.”
사모는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그녀의 목 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모는 니를 수도 없었다. 케이 건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이 나가들이 제게 한 일입니다. 폐하. 저는 그들을 죽일 겁니다.”
사모는 가슴이 올올이 찢겨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도, 어떤 니름도 흘러나오지 않았기에 사모 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한 채 가면을 붙잡았 다. 시우쇠가 흠칫했고 계단에 있던 자들의 상당수가 신음을 흘 렸지만 사모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모는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나가의 얼굴로 케이건을 바라보 았다.
”더 이상 가면은 필요 없어. 이곳에는 왕과 아라짓 전사는 필 요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사과와 내가 할 수 있는 속죄만이 있 을 뿐이야. 케이건 드라카. 고개를 들어 나를 봐.”
케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동요 없는 시선으로 사 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은빛 눈물로 볼을 적신 채 그를 마주보 고 있었다.
”케이건. 나는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
케이건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케이건의 얼굴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 다. 눈물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사모는 그것을 보지 못했 다.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시선을 낮추어 사모의 손에 들린 가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사모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케이건의 얼굴에 또다시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케이건 은 죽어가는 자의 목소리처럼 희미하게 속삭였다.
”나가.”
케이건의 몸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