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5)

랜덤 이미지

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5)


그리미 마케로우는 아스화리탈과 륜 페이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리고 관찰력이 부족한 자에 게 그것은 크고 작은 두 그루의 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미가 처음 받은 인상도 그런 것이었다. 세상에 짝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나무와, 거목의 발치에서 보호를 받듯 조용히 피어 있는 어린 나무. 하지만 아무리 관찰력이 부족한 자라도 10초 이상 바 라본다면 그 나무들의 모습이 정말로 희한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모는 거대한 나무 쪽을 바라보며 닐렀다.

<그날, 그 회오리 속에서 아스화리탈이 정확하게 무슨 일을 했 는지는 알 수 없어. 라수 규리하도 짐작하지 못해. 하지만 우리 가 돌아왔을 때 아스화리탈은 거의 부서진 조각 같은 모습이 된 채서 있었어. 그리고 그 발 아래에는 륜이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지. 그리고 1년이 지났을 때 데오늬 달 비는 상당히 어려워하는 투로 그들이 나무로 변하고 있다고 보고 해왔지.>

아스화리탈의 모습은 나무로 변한 용 그 자체였다. 번개를 흩뿌리며 하늘을 불사르던 세 장의 날개는 위로 펼쳐져 거대한 나뭇가지가 되었다. 함수초 잎사귀처럼 하늘거리던 날개 가닥들에서는 가지가 돋아나와 잎사귀가 맺혔고, 그래서 그 모습 은 잎에서 가지가 돋아나온 양 신비하게 보였다. 가슴과 머리 부 분은 그 가지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체는 그럭저럭 볼 수 있었지만 그 부분에 집중해서는 그것이 용의 하체임을 짐 작할 방도는 거의 없었다. 무성한 잎과 넝쿨들이 뒤엉켜 하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져서 보았을 때만이 그 전체적 인 형태에서 어떤 상상이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떨어져서 보더라도 거목의 주위에 돋아있는 관목 같은 나무들이 원래 아스화리탈의 다섯 꼬리였음을 짐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스 화리탈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모 페이도 그 나무들이 원래 아스화리탈의 일부분이었음을 깨닫기는 어려웠다.

아스화리탈의 본체였던 거목과 그 꼬리였던 관목들은 초승달 처럼 둥그스름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초승달의 가운데 부분은 잔디 같은 풀이 빈틈없이 돋아 있는 공터였다. 그 공터 한가운데 조그마한 나무가 돋아 있었다.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저원 안쪽에 들 어서면 당장 타죽고 말아.>

<아스화리탈이 뇌룡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군.>

사모는 목이 메이는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륜 페이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공터 가운데 고요히 피어 있는 어린 나무는 자세히 바라보면 도저히 나무라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꼿꼿하고 가 느다란 줄기는 쇠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원래 작살검이었 다. 하지만 그 쇠칼날과 손잡이에서는 분명히 식물의 것인 가지 들이 조심스럽게 돋아 있었다. 가지 끝에 매달린 잎사귀들은 묘 하게 금속의 질감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 부분에는 륜 페이가 누워 있었다.

빈틈없이 돋아난 잔디와 굵은 뿌리들이 뒤덮고 있었기에 륜 페 이의 모습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풀과 뿌리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비늘들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그저 나가 크기의 둔덕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모는 이곳에 올 때마다 느꼈던 충동을 또다시 느꼈다. 그녀는 공터에 뛰어들어 륜을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 스화리탈은 어떤 접근도 허용치 않았다.

그때 해가 졌다. 빠르게 다가오는 저녁 어둠을 바라보던 사모 는 다시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그리미 역시 말로만, 혹은 니 름으로만 듣던 일을 기다리며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거목이 빛나기 시작했다.

햇빛도, 달빛도, 촛불이나 횃불의 빛도 아닌 기이한 빛들이 잎 사귀 사이에서 아롱졌다. 그 빛깔의 다양함은 이루 니를 수 없을 정도였고, 따라서 그 모습을 보며 무수히 많은 보석들이 과일처 럼 매달린 광경을 연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눈이 좋은 레콘이 확인한 사실에 의하면 그곳에는 보석이 아닌 빛만 존재했다. 사모는 그 빛들이 안개 속에서 보는 등롱과 비슷 하며 어두워질수록 점점 더 밝아지지만 결코 눈이 아플 정도로 밝아지는 일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면 그 빛 들이 낙엽처럼 부드럽게 떨어져 공터에 쌓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 다. 새벽이 찾아올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륜을 바라본 어느 날 밤 사모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등에 실었던 모피를 내리고는 닐렀다.

<마루나래. 가서 더 달리고 사냥이라도 하렴. 하늘누리는 며칠 뒤에 이곳에 우리를 데리러 올 거야. 그때까지만 돌아오면 돼.>

마루나래는 지체없이 숲속으로 달려갔다. 사모는 모피를 허리 에 낀 채 그리미에게 다가갔다.

<좋은 장소를 알고 있어. 그리미. 따라오렴.>

그리미는 대호왕을 따라 걸어갔다. 사모는 이곳에서 밤을 보낼 때마다 사용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밤바람을 별로 타지 않으며 이슬도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바닥에 모피를 깐 사모는 그리미 를 그 위에 앉혔다. 그리미는 모피 위에 엎드려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사모는 그리미의 곁에 앉아 쉬크톨을 풀었다. 그리고 그 녀들은 아무런 니름도 나누지 않은 채 아스화리탈과 륜을 바라보 았다.

밤이 깊어갔다.

아스화리탈에서 빛들이 소르륵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사모 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그리미를 바라보 았다. 그리미는 이미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사모는 그 모습 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잠들어 있을 때는 그리미도 여신의 딸이 아닌 나가의 평범한 딸처럼 보인다.

그리미 마케로우는 카린돌 마케로우와 스바치의 딸이다. 하지 만 그리미 마케로우가 알에서 나와서 만난 어머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이었다. 시우쇠는 어르신이 되었고 아기는 평범한 레콘의 어 린 소녀로 자라났다. 하지만 발자국 없는 여신은 화신으로 남아 한 소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미가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여 신은 그리미를 보호하기로 했다. 평범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 여 신은 자신의 힘을 회수하지 않았고 그래서 수호자들은 어리둥절 해하면서도 여전히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무단 도 용은 앞으로 17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여신의 결정에 대해 의아해했지만 왜 그런 결정 을 내렸는지에 대해 여신이 대답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언젠 가 그녀는 지나가는 니름처럼 대호왕에게 닐렀다.

<스물두 살이 되면, 물론 열두 살만 되어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리미에겐 더 이상 어머니가 필요없겠지. 혹은 그때가 되면 카린돌이 제정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모가 들을 수 있던 설명은 그것뿐이었고 그 외에 여신이 다 른 설명을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리미가 그토록 긴 보호를 필요로 하는 소녀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었다. 그 어머니가 화신이었기에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그리미는 어릴 때부터 초능력에 가까운 현명함을 보였다. 다른 모든 천재성과 마찬가지로 그리미의 그것은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느끼게 하는 천재성이었다. 너무나 조숙하고 현명하지만, 경험의 뒷받침을 받지 못했기에 그리미는 언제나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사모가 그리미를 가질 수 없었던 자식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을 깨달은 것은 그리미가 두 살 되던 해였다. 그해에 그리미는 완벽 한 니름과 말을 구사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가장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두 살짜리에게 어떤 경험이 있겠는가? 그리미의 복장 이나 모습은 세심한 관심에 의해 언제나 완벽했지만 그 정신세 계는 나이차가 너무 큰 손윗형제의 옷을 물려받아 소매와 바짓단 을 끌고 다니는 소녀 같았다. 다섯 살이 된 지금 이제는 그런 모 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사모는 여전히 안쓰러움을 느끼지 않고서 는 그리미를 보기 힘들었다. 사모는 자신이 그리미를 의존적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끼며 애써 공터로 시선을 옮겼다. 아스화리탈에서 떨어지는 광점들이 공터를 다채로운 빛깔로 물들였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광점 때문에 공터에서는 끊임없이 무엇인 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 사모는 륜이 일어나려는 것 인 줄 착각하고는 수도 없이 공터에 뛰어들려 했다. 그때마다 열성적인 저지가 있었기에 사모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사모 페이 가 홀로 공터를 방문하는 것을 사람들이 허락하게 된 것은 몇 개 월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많이 냉정해졌다고 믿는 지금도 사모는 당장이 라도 륜이 고개를 들어 미소를 보내어올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내 지 못했다.

새벽이 다가올 때 사모는 마침내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 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모는 발자국 없는 여신께 맹세코 분명히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냉철한 이성에 의해 사모는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그 느낌은 너무도 뚜렷했다. 사모는 억지로 잠든 그리미를 내려다보며 자신 을 억눌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샌가 사모는 공터 쪽 을 멍하니 바라보며 엉거주춤 일어나 있었다. 사모는 비명을 지 르고 싶었다. 륜의 이름을 니르고 싶었다. 그리고 사모는 그런 일을 저지르면 자신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발 앞에 화살이 박혔을 때 사모는 공터를 향해 세 걸음째 걷고 있었다. 사모는 흠칫하며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 무것도 없었고 뒤를 돌아본 사모는 자신이 무의식 중에 모피를 떠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사모는 뒤로 돌아 몸을 날렸다. 쉬크톨 을 움켜쥔 사모는 긴장과 공포 속에서 조금 전 자신이 서 있던 땅을 바라보았다. 그 땅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화살에는 도깨비지가 묶여 있었다.

사모는 혼란 속에서 그 화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그 화 살은 거의 초현실적인 물체처럼 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간신히 그것이 보통의 화살이며, 그 도깨비지 에는 아마도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을 거라는 사실을 사모 가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사모는 그리미를 다시 한 번 돌아 본 다음 조심스럽게 화살을 향해 움직였다.

갑자기 자신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이 그녀를 엄습 했다. 사모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모피가 깔려 있는 자 리보다 더 좋은 피신처는 없었다.

사모는 화살을 움켜쥐자마자 다시 황급히 잠자리로 돌아왔다. 서두르던 사모는 화살촉에 손을 다칠 뻔하면서 겨우 도깨비지 를 풀어내었다. 사모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쳤다. 물론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겐 불이 없었고 아무리 나가의 눈이라 도 밤의 어둠 속에서 도깨비지에 씌어 있는 글을 읽을 능력은 없 었다. 잠깐 고민하던 사모는 그것이 도깨비지라는 사실에서 해결 책을 떠올렸다. 사모는 도깨비지를 펼쳐 눈높이로 들어올린 다음 공터쪽을 향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양피지라면 거의 불가능했겠지만 도깨 비지는 공터의 빛을 투과시켰다. 하지만 글자가 적힌 부분에서는 빛이 투과되지 못했다. 사모는 글자가 뒤집힌 것을 깨닫고는 도 깨비지를 다시 뒤집어 들었다. 그러자 그럭저럭 읽을 수 있는 글 이 떠올랐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