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12)
륜 페이는 눈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보며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심장을 뽑아낸 나가는 사고로는 죽지 않는다. 질병에도 걸리지 않으며 몸의 일부가 잘려도 빠르게 재생한다. 하지만 완전히 불사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지금 륜의 앞에 놓여 있는 시체처럼 그 몸이 두 자릿수 이상의 조각들로 나눠진다면 제아무리 나가라도 죽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 시체에는 여전히 나가의 특징이 남아 있었다. 륜은 덜덜 떨리는 무릎을 힘겹게 구부려 시체 조각들 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체 조각들 사이에서 이름이 들려왔다.
<돌려 ・・・다오.>
륜은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를 툭 건드렸다. 머리는 한번 기우뚱했지만, 똑바로 뒤집어지지 않았다. 륜은 이를 악물며 그 머리를 들어 올린 다음 똑바로 돌려놓았다. 한쪽 눈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다른 쪽 눈 또한 심하게 부어 있었지만, 어쨌든 잘려진 머리는 륜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륜이 혼절하기 직전 그 머리가 미약한 이름을 보내어왔다.
<라르간드・・・・・・?>
륜은 흠칫하며 다시 머리를 직시했다.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륜은 가까스로 그 얼굴에서 자신이 알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벡스? 유벡스 사서님이십니까?>
특수 도서실의 사서인 유벡스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물론 무의미한 행동이다. 목이 잘리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법이다. 유벡스는 그 사실에 당혹해하다가 겨우 일렀다.
<그런데・・・・・・ 너, 어떻게 여기로 들어온 거냐?>
<저, 저는 적출식 때문에…….>
<어떻게 특수 도서실에……… 들어온 거냐? 사서인 내가 허락해 준 적이 없는데……>
머리가 잘린 것 때문인지 유벡스는 정신이 혼미스러운 듯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의 이름은 계속 희미해지고 있었다. 죽었다고도, 살았다고도 이를 수 없는 상태에서 그 이름이 더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륜은 엉겁결에 그 머리를 붙잡고 흔들 뻔했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 직전 기겁하며 손을 도로 끌어당겼다.
<사서님께 누가 이런 짓을 했습니까?>
유벡스는 멍한 눈으로 륜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나, 공격당했어……………? 라르간드. 내가 죽…… 었나?>
<누가 그랬습니까? 누가 사서님을 이렇게 해 놓았습니까?>
유벡스의 머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름으로도, 표정으로도. 륜은 사서가 마침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륜이 일어나려 할 때 유벡스의 머리에서 가느다란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케로우······.>
륜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케로우라니? 륜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화리트가 특수 도서실의 사서를 난자한 다음 서가 뒤편에 숨겨 놓을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륜은 다시 무릎을 꿇은 다음 유벡스의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정신을 쏟아부었다.
어떤 정신의 흐름이 느껴졌다. 유벡스의 정신인 줄 알고 반가워하던 륜은, 그러나 잠시 후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특수 도서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공포가 되살아났다.
륜의 눈길은 사서의 시체를 향하고 있었지만 륜이 보고 있는 것은 요스비의 지독했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거의 무의식중에 륜은 유벡스의 몸이 숨겨져 있던 서가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은 눈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었다. 유벡스의 미약한 정신이 아니었다면 륜 또한 유벡스의 시체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륜이 그 은밀한 장소에 몸을 숨겼을 때 도서실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륜에겐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륜! 륜 페이!>
화리트의 이름이었다. 친구의 절절한 이름을 들은 순간 륜은 일어설 뻔했다. 그러나 친구의 이름을 이르기 직전, 륜은 자신이 도망자라는 사실과 유벡스의 마지막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륜은 다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서가에서 책 하나를 살짝 밀어 내었다. 그러자 책 사이로 틈이 생기며 문쪽을 훔쳐볼 수 있게 되었다.
문쪽에 서 있는 것은 화리트를 보았을 때 륜은 다시 일어서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화리트의 뒤편으로 수호자 한 명이 걸어오는 것을 본 륜은 다시 몸을 움츠렸다. 화리트의 뒤를 따라온 수호자는 두건을 깊숙이 내려 쓰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수호자의 옷만으로도 륜의 두려움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두려움에 빠진 륜은 자폐증을 일으킬 정도로 자신의 정신을 심하게 폐쇄했다.
그때, 륜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화리트의 뒤를 따라온 수호자가 문 옆쪽의 서가로 다가갔다. 수호자의 손이 서가 위쪽을 더듬었고 잠시 후 그 손엔 피 묻은 사이커 한 자루가 들려졌다. 륜이 혼란과 공포 때문에 굳어 있을 때, 수호자는 천천히 화리트의 뒤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수호자는 무방비하게 서 있던 화리트의 등을 향해 사이커를 휘둘렀다.
륜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그의 내부에서만 메아리쳤다. 륜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아직도 정신을 닫아 걸고 있었다.
사이커의 경이적인 예리함 때문에 화리트는 잠깐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 후 화리트는 힘없는 신음을 토하며 아래로 무너졌다. 동시에 그의 등에서 피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아직 심장을 가지고 있기에 화리트의 몸에선 무지스러운 기세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수호자는 옆으로 슬쩍 움직여 그 피를 피했다.
<왜……?>
화리트는 엎드린 채 이름을 발했다. 수호자는 빙긋 웃으며 화리트의 몸을 걷어찼고 그러자 화리트는 똑바로 눕게 되었다. 그 얼굴을 향해, 수호자는 천천히 두건을 들어 올렸다.
숨어 있던 륜과 화리트가 동시에 같은 이름을 외쳤다.
<비아스 마케로우!>
비아스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어리석은 동생아.>
<약을 쓸 줄 알았는데……………, 이런 단순한 방법을……>
<단순한 방법이 항상 최고지. 삶의 철학으로 삼으렴. 물론 그 철학을 오랫동안 지키긴 어렵겠구나.>
화리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보며 즐거워하던 비아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넌 그 녀석처럼 여러 번 내려칠 필요는 없겠군.>
화리트가 경련을 일으켰다.
<륜? 설마 륜을?>
<아니, 내가 이르는 건 특수 도서실의 꼬장꼬장한 사서 유벡스야. 약술 서적을 좀 찾아봐야겠다고 일렀더니 좋아하며 안내해주더군.>
<그럼 륜은?>
<륜 페이가 도망쳤다는 건 사실이야. 아까 홀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그 녀석이 도망치는 모습을 봤어. 지금쯤 탑 안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겠지.>
비아스는 거의 자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친절하게 대답하며 서가 위쪽을 다시 더듬었다. 그 위에서 커다란 양피지 뭉치 같은 것을 꺼낸 비아스는 책상 위에 그것을 펼치더니 그 위에 사이커를 놓고 양피지를 말았다. 그 다음 비아스는 입고 있던 수호자의 옷을 벗은 다음 그것을 뒤집었다. 그러자 수호자의 옷은 나가의 학자들이 즐겨 입는 외출복 비슷한 것이 되었다.
옷을 다시 입은 다음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 뭉치를 집어 들자 비아스는 고명한 약술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숨어 있던 륜은 마술을 보는 기분이었고 그것은 쓰러져 있던 화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아스는 쓰러진 동생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내었다.
<네 피는 정말 아름답군, 화리트. 못 잊을 것 같은데.>
<당신은…… 정상이 아니야. 비아스.>
<글쎄.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는 건 그쪽이야. 정상이 아닌 쪽이 누구인 것 같아?>
냉혹하게 대답한 비아스는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숨어 있던 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비아스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화리트의 입술에 키스했다. 화리트는 기겁하며 외쳤다.
<저리 치워!>
하지만 비아스는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똑바로 일어선 비아스는 혀로 입술을 핥은 다음 우아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일렀다.
<잘 있어, 동생.>
그리고 비아스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