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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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9)


비아스 마케로우는 눈을 떴다. 잠자리는 마치 젖은 빨랫더미 같았다. 무거운 머리를 힘겹게 들어 올린 비아스는 침대에 앉은 채 밖을 쳐다보았다. 바깥 공기는 놀랍도록 차가웠고 검은 밤 공기 속으로 더 검은 선들이 그어지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비아스는 바깥에 비가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은 열을 삼킨다. 강물과 바다, 그리고 내리쏟아지는 빗줄기는 나가의 눈에 우울한 불투명으로 보인다. 비아스는 창문을 열어놓았음을 깨닫고는 짧게 투덜거렸다. 약술 실험을 끝낸 다음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었고, 그 때문에 방 안의 기온이 안면을 방해할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창문을 닫아야겠지만 비아스는 왠지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을 감도는 차가운 공기는 묘하게 적대적이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정신적 파장이 들려왔다.

비아스는 움찔하며 그것에 집중했다. 잠시 후 비아스는 이를 갈며 벽 저편을 쏘아보았다. 카린돌 마케로우의 니름이었다. 아니, 니름이라기보다는 그저 강렬한 **‘감정’**이었다.

남자를 찍어 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아스의 비늘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하텐그라쥬의 모든 가임기 여성들의 공적을 쫓아낸 것은 그녀였지만, 이 불쾌한 비가 내리는 밤 그녀는 홀로 불쾌한 침대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카린돌은 일부러 날카로운 니름을 발해서 그런 비아스를 조롱하고 있었다.

“저것은 나를 약 올리기 위해 남자를 끌어들인 거야.”

비아스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린돌은 남자를 원했던 적이 없다. 그런데 그날 저녁, 오래간만에 찾아온 방문자 앞에서 카린돌은 비아스와 다른 여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소메로와 비아스, 그리고 두 명의 이모들은 남자를 유혹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따라서 느닷없이 나타난 카린돌이 남자의 옆에 털썩 주저앉을 때까지도 카린돌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카린돌은 당황하고 있는 다른 여자들을 무시하며 남자의 허리를 슬쩍 끌어당기며 닐렀다.

<귀엽게 생겼군.>

카린돌은 그대로 남자를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다른 여자들은 카린돌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에 놀라느라 어떤 대처를 할 수 없었다. 다만 장녀인 소메로만은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을 지으며 카린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그 미소에 동정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소메로에게 묻는 시선을 보내었다. 소메로는 부드러운 니름을 보내었다.

<화리트를 대신할 것이 필요한 것이겠지.>

“<설마 그렇게 혐오하던 남자가 화리트의 대신이 될 수……>”

<아니, 자식.>

“<아.>”

비아스는 정신적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모들도 그제야 알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소메로는 기품 있게 옷자락을 정돈하며 닐렀다.

<카린돌은 자식을 가지고 싶은 거야. 피로 이어졌던 유일한 가족이 없어졌으니까. 그러니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라. 비아스.>

비아스는 소메로의 설명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비 내리는 밤, 비아스는 카린돌이 과연 자식을 가지고 싶어서 남자를 끌고 간 것인지 단순히 자신을 약 올리기 위해 남자를 빼앗아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건물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카린돌의 의미 없는 감정어는 비아스에게 이렇게 니르는 것 같았다.

<사모 페이가 없어져도 넌 남자를 가질 수 없어. 네가 지금껏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사모 때문이 아니거든. 그건 너 자신의 문제였어. 화리트가 너를 어떻게 거부했는지 생각해 봐. 설마 사모가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니르지는 않겠지?>

비아스는 이것이 불합리한 망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카린돌이 밖으로 니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린돌이 비아스와 화리트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증오의 감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합리성을 따지기 어려운 것은 나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아스의 비늘들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다른 종족들이 들었다면 공포에 질릴 만한 소리였지만 비아스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은 잘 알고 있었다. 비아스는 자신이 카린돌에 대한 살의에 불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카린돌을 죽인다고’

생각의 그 지점에서, 비아스는 움찔하며 멈춰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내면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비아스는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심장도 뽑지 않은 남자를 죽이는 것과 성인 여자를 죽이는 일이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비아스는 카린돌을 죽였을 경우에 얻는 장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화리트 자신을 제외한다면 카린돌은 비아스가 화리트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카린돌은 그 사실에 대해 함구할 것이라고 암시했지만 그런 종류의 암시에 영속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카린돌을 제거하면 경쟁 상대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비아스는 그 가능성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자식을 가질 수 있어.”

‘그건 네 문제라니까. 누가 방해해서 그런 게 아니야.’

카린돌의 정신인지 비아스 자신 속에 있는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정신이 들려왔다. 비아스는 노하여 외쳤다.

“닥쳐! 사모 때문에 남자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어!”

‘사모가 없어진 지금도 네가 그렇게 홀로 침대에 앉아 있는 이유는 뭐지?’

“네년 때문이지, 카린돌 마케로우. 네년 때문이라고.”

누군지 구분할 수 없던 소리는 사라졌다. 우울한 차가움으로 가득한 어둠을 노려보며 비아스는 이를 갈았다.

“내 자식을 만들어주길 거부했던 꼬마는 죽었고, 내 남자를 빼앗아갔던 여자는 하텐그라쥬 밖으로 쫓겨났어. 내가 그렇게 했지. 너라고 예외가 될 것 같나. 카린돌?”

카린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비아스 속에 있는 살인자가 속삭였다.

‘아니. 예외가 되지.’

“어째서?”

‘화리트와 달리 카린돌에겐 심장이 없으니까. 전설 속의 <나가 살육자>처럼 꽁꽁 얼려서 깨버리는 방법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죽이지?’

비아스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길지 않았고,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의 내부를 향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심장이 없는 나가를 어떻게 죽이지?”


모든 나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루는 노련한 방랑자였다. 타고난 방랑자인 레콘들이라면 나가들이 적대적인 환경 하에서 방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긴 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계선 남쪽이라면, 나가들에겐 집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뭐 있느냐?” 산 것만을 먹기에 요리 도구 따위를 지참할 필요가 없고, 불규칙한 식사량과 식사 간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추위를 막아줄 불이나 옷 같은 것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나가 남자의 방랑은, 인간이나 레콘이 보기엔 방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손쉬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적대적인 환경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이나 지혜로움은 방랑자에게 요구되는 첫째 자질은 아니다. 방랑은 더 어려운 조건에서 수행했을 때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놀이나 운동 경기 같은 것이 아니다. 손 뻗어오거나 말 걸어오지 않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표지 삼아 떠도는 행위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고독을 견디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카루는 노련한 방랑자라고 할 수 있다.

노련한 방랑자답게, 카루는 가장 적절한 대처를 취했다. 카루는 애원했다.

<저 목에 겨누고 계신 칼부터 좀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그의 목을 겨누고 있는 여자는 평온한 니름을 보내어왔다.

<나는 암살자야.>

<알고 있습니다. 사모 페이시죠? 얼마 전에 하텐그라쥬에서 떠나왔습니다. 제 피가 이 칼에 묻으면 추적에 방해될 텐데요.>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더욱 치워주기 곤란한데.>

<예?>

<너는 나를 훔쳐보고 있었어. 지난 이틀 동안.>

카루는 노련한 방랑자의 자부심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사모는 계속 닐렀다.

<뭘 모르고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쫓아버릴 생각이었어. 하지만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알면서 따라온 것이군. 그건 정말 이상한데. 도와주러 따라온다는 것은 니름이 안 되고, 그럼 남는 건 방해하려는 의도인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쉬크톨이 단단한 까닭은 쇼자인테쉬크톨의 모든 방해물을 베어넘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야. 자, 이제 자신이 고귀한 임무의 방해물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보겠어?>

<입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제 피가 묻으면……>

<닦아내고 내 피를 다시 먹이면 돼. 쇼자인테쉬크톨의 편리한 점이지. 반드시 피붙이가 추적하기 때문에 피를 조달하는 것은 쉽지.>

아무렇게나 다루어지는 섬세한 슬픔. 사모의 니름 속에는 카루를 질리게 만드는 그런 것이 있었다. 카루는 애써 대범하게 닐렀다.

<아, 그렇군요. 그래서, 저를 어떻게 하실 거죠?>

<글쎄. 특별히 생각해 둔 바는 없어. 지금으로선 발목을 베는 것 정도가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돼. 발목이 다시 자라났을 때쯤이면 네가 무엇이든 나를 더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겠지.>

카루는 얼굴을 찡그리며 과장되게 슬퍼했다.

<오, 그러지 마세요. 1년 동안 절뚝거리란 니름입니까?>

<그럼 눈을 찔러줄까? 몇 개월이면 될 테니. 하지만 그건 더 불편할 텐데.>

카루는 하텐그라쥬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과 조금 더 농담을 나누고 싶었지만 곧 그 생각을 바꿔 먹었다. 쉬크톨의 검 끝이 얼굴 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루는 다급히 나가와 인간과 도깨비, 심지어 레콘까지도 위협을 잠시 멈추게 할 수 있는 마법의 니름을 꺼냈다.

<저 기억 안 나십니까?>

쉬크톨의 불길한 움직임이 멈췄다. 사모는 카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사모는 약간 자신 없는 어투로 닐렀다.

<페이 가문을 방문했었니? 미안하지만 나는 남자들과 그다지 깊이 사귀지 않아서 기억이 안 나는데.>

<저는 마케로우 가문의 방문자였습니다. 화리트를 호위해서 페이 가문에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아! 기억나는군. 스바치였던가?>

<스바치는 제 동행이었지요. 저는 카루입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카루. 하지만 아직 뭔가가 입증되진 않은 것 같아.>

카루는 조금 전 농담을 하면서 이미 대답할 니름을 준비해 두었다.

<먼저 좀 상관없게 들리는 니름을 하겠습니다. 당신과 륜 페이는 매우 각별한 남매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맞습니까?>

사모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걸 내가 인정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지?>

<제가 이 통탄할 만한 비극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수 있게 되죠.>

쉬크톨이 다시 올라왔고, 카루는 다급히 니름을 이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당신이 이 임무에 어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제기할 수 있죠.>

<불쾌한 의심이군. 하지만 의심하는 거야 네 자유겠지. 그래서?>

<그래서, 마케로우 가문은 당신이 성실히 임무를 수행할지 궁금해할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사랑하는 남동생을 죽이는 일이니까요.>

<암살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시하라는 부탁을 받은 거야?>

<그런 니름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자인테쉬크톨의 실행 여부를 의심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므로 그걸 인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카루가 바라는 바였다. 실제로 카루는 마케로우 가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으며 사모를 오해하게 한 카루의 니름 재주는 제법 훌륭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카루는 사모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카루.>

<어떤 생각이십니까?>

<네 머리를 잘라낸 다음 가지고 돌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럼 내 사랑하는 **‘남동생’**도 살릴 수 있고, 가문에 부과된 목숨값도 갚게 되고, 그 속임수를 보고할 감시자 또한 없어지는 거지.>

<제 머리를 어떻게……>

<칼자국을 심하게 내어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면 되겠지. 괜찮은 생각인 것 같지 않아? 어떻게 생각해, 카루?>

자신의 니름 재주를 저주하며, 카루는 그만 자신이 마케로우 가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니를 뻔했다. 하지만 그가 니르기 전 사모가 쉬크톨을 거둬들였다.

<별로 괜찮은 생각이 아냐.>

<제 생각에도 그렇군요.>

<감시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카루. 그러기로 하고 대가를 약속받았을 테니. 마케로우 가문은 자신이 당연히 받을 것을 의심함으로써 헛돈을 쓰게 되었군.>

한숨을 돌린 다음, 카루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남동생을 반드시 죽일 생각이시군요?>

<마케로우 가문이 그걸 원하잖아?>

<이건 제가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사랑하는 남동생이지 않습니까?>

섬광이 카루의 눈을 찔렀다. 사모는 고의적으로 쉬크톨을 칼집에 마찰시키며 뽑아내었고, 마찰열에 의해 순간적으로 뜨거워진 쉬크톨이 공기를 찢자 카루의 눈앞은 현란한 색채의 소용돌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색채가 사라졌을 때 카루는 쉬크톨의 검 끝이 자신의 왼쪽 눈 바로 앞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감시는 허락했지만 질문은 허락한 기억이 없어. 카루. 눈 하나로도 감시는 할 수 있을 테지?>

<제발……>

<이건 두 번째 경고야. 그리고 나는 세 번째 경고를 해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네가 유념해 둘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돼.>

쉬크톨이 돌아갔다. 정신을 짓누르던 공포가 사라진 후에야 카루는 사모의 동작들이 얼마나 매끄럽고 우아하며 단순한지에 대해 놀랄 수 있었다.

사모는 배낭을 들어 올린 다음 니름 없이 걸어갔다. 카루는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고, 그녀가 그것을 묵인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암살자와 동행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륜을 찾아낼 방법은 없었다. 쉬크톨을 든 암살자는 반드시 륜을 찾아낼 테니까. 그리고 혹 륜이 화리트의 대행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카루는 다른 누구보다도 암살자의 곁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조금 전 사모의 칼 놀림을 본 카루는 자신이 그녀를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카루는 사모로 하여금 그가 가지고 있는 의심, 즉 화리트의 살해자가 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동참하게끔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카루는 이틀 정도가 지나기 전까진 사모에게 니름을 걸지 말아야겠다고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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