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8장 – 열독 (12)
륜은 눈을 감은 채 사모를 생각했다.
오레놀의 요청대로 륜은 여신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륜에겐 극히 힘든 일이었다. 륜은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사모 페이가 하텐그라쥬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내라고 요구하기를 원했다. 당연히 륜은 자신의 신부에게도 같은 요구를 하고 싶었다.
륜에게 그 요구는 레콘의 멸망 저지, 두억시니들이 신을 잃은 이유, 그리고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암살 저지보다 중요했다. 미망이었다. 륜은 오레놀에게 감사했다. 륜은 어떤 논리로도 자신의 요구가 다른 세 요구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었다.
그랬기에 륜은 만다라 가운데서 사모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했다.
‘나는 사모에게 그런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오레놀은 륜에게 자신을 신에게 맞추라고 권했다. 그래서 륜은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나라는 것이 없었다면 사모는 누구 못지않게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소박한 것이지만 그것은 ‘나’가 사라진 우주에 대한 인식의 시작이었다. 내가 있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자기부정도, 자기 비하도 아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나’의 결여는 여전히 큰 문제였다. 왜냐하면 세상은 모두 ‘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륜은 그것에 거창한 ‘몰아(沒我)’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륜은 소박하게 생각했다.
‘당신에게, 그리고 사모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어요.’
그 순간, 시간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의 어느 순간들은 다른 순간들보다 훨씬 날카롭고, 그곳을 관통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매서운 상처를 남긴다. 바로 그런 감각이 무학당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휘감았다. 티나한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포효하고픈 욕망을 느꼈고 대선사는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두억시니들 또한 긴장하여 사지를 잔뜩 움츠렸다. 여차하면 펴기 위한 움츠림이었다. 그리고 마루나래는 사모가 누워 있는 방과 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공간이 확장되었다.
오레놀은 갑자기 륜이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 있다는 느낌을 받고 기겁했다. 다시 눈을 비빈 오레놀은 륜의 크기가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망막에 맺히는 륜의 크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인상은 여전히 륜이 저 먼 곳, 고함을 질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있다고 고집했다. 오레놀은 다른 사람들도 그런 느낌인지 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덕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티나한과 쥬타기 대선사는 그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보다 행동적인 티나한은 거의 반사적으로 오레놀에게 달려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걸음을 떼기 직전 티나한은 그 계획을 재고했다. 그의 이성은 계속해서 오레놀이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오레놀의 크기는 그대로였다. 만약 ‘실제로’ 오레놀이 겨우 몇십 센티미터 저편에 있는 거라면 티나한의 돌격은 오레놀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티나한은 그 시점에서 과연 무엇이 ‘실제’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티나한은 고민하다가 자신의 철창을 떠올렸다. 그것은 7미터였고 그곳에 있는 거의 모든 승려들의 몸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그러니까, 약 10분 전에는 그랬다는 의미다. 티나한은 철창을 조심스럽게 수평으로 든 다음 그것을 천천히 옆으로 돌려보았다.
시각적 이해는 티나한에게 철창이 곧 오레놀의 가슴에 닿을 거라고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리고 티나한의 이성은 그런 웃기는 생각 좀 하지 말라고 책망하고 있었다. 티나한의 팔이 더 움직였을 때 승자는 그의 이성으로 밝혀졌다.
철창은 닿지 않았다.
티나한이 하는 일을 보고 있던 오레놀 또한 그 사실에 당황했다. 티나한은 다시 여러 승려를 향해 철창을 뻗었고 어느 승려의 몸에도 철창은 닿지 않았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점점 대담해진 티나한은 싸움터에서나 용납될 매서운 동작으로 창춤을 췄다. 승려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몇몇은 비명까지 질렀다. 당장이라도 사제들의 목이 날아가고 살이 뭉개지며 피보라가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나 철창이 일으키고 있을 것이 분명한 매서운 바람조차 승려들에게 닿지 않았다. 한바탕 멋진 창춤을 춰 보인 티나한은 다시 창을 꼿꼿이 세워 들고는 조금 전의 상황에 대해 고민하며 륜을 바라보았다. ‘제발 던질 생각만은 말아 다오.’라고 빌고 있던 승려들은 그 모습에 안도했다.
륜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