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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8장 – 열독 (6)


새벽이 밤과 교대식을 갖는 하늘을 바라보며 케이건은 눈가를 비볐다.

바위는 차고 숲은 새벽잠 속에 옹알이를 반복하고 있다. 풀잎 끝에서 결로가 일어나고 있고 바람은 없다. 고매한 어둠이 낯을 붉히는 시간. 그림자들이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부푸는 시간. 사냥하기 좋은 시간이다.

케이건은 세운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하인샤 대사원을 둘러싼 숲을 내려다보았다. 대선사의 석굴이 뒤에 있었지만 대선사는 그곳에 없었다. 케이건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가올 강신을 대비하기 위해 쥬타기 대선사는 아래로 내려갔다. 하여, 케이건은 그곳을 독점한 채 며칠을 보낼 수 있었다.

사모를 하텐그라쥬로 돌려보낼 방법을 모색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케이건은 대부분의 시간을 엉뚱한 것에 할애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오로지 한 꽃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목적을 위해 며칠 동안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특히 륜이 안다면 분개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케이건은 괘념치 않았다.

분명히 작고 소박한 꽃이었다. 화분이나 정원에 안주하는 도발적이고 풍성한 꽃과는 종류가 다른 야생화였다. 케이건은 그 꽃잎의 모습과 색깔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떠올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케이건은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케이건은 자신이 왜 그런 혼란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두려웠다. 시간이라는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덮개가 감추고 있던 것이 사라지고 마침내 모든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을 때 케이건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눈을 비볐을 때 케이건은 산비탈을 뛰어 올라오는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했다. 케이건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티나한이 산길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레콘은 비탈진 길을 걸어 올라오느니 한 걸음에 수십 미터씩 성큼성큼 뛰어오르는 편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섯 번째 수족 같은 철창을 어깨에 걸어 두 팔로 붙잡은 채 티나한은 쿵쿵거리며 올라왔다. 크게 도약한 다음 케이건을 발견한 티나한은 허공에서 잠깐 한 손을 흔드는 재주까지 보였다. 쿵! 다시 땅에 내려선 티나한은 마지막 도약으로 바위 위에 뛰어올랐다.

“산사태 나겠소. 티나한.”

“이런 산에서 무슨 산사태가 며칠 동안 여기 있었는데 괜찮은 거야?”

“괜찮소.”

티나한은 어깨에 건 철창의 창촉 부분을 산 아래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지금 하계에서는 난리도 아냐. 네가 여기서 유유자적하게 달을 연모하고 바람과 노니는 동안 나는 별의별 향기롭지 못한 것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다고.”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티나한은 케이건 옆에 주저앉으며 철창을 무릎에 얹었다.

“그동안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지. 륜은 두억시니들을 통해 유해의 폭포와 이야기를 나눴어. 그거 참 신기하던데.”

티나한은 두억시니들이 사용한 수단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 유해의 폭포는 자기가 오해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륜에게 사과했어. 그리고 륜은 발자국 없는 여신을 만나게 되면 두억시니들이 왜 신을 잃었는지, 그리고 신을 되찾을 수는 있는지 물어봐 주기로 했지. 그 다음이 기가 막힌데, 륜은 그걸 물어봐 주는 대신 유해의 폭포에게 사모를 하텐그라쥬로 돌려보낼 방도를 궁리해 보라고 요청했지.”

케이건은 짧게 신음했다. 티나한은 덩달아 신음을 토하며 말했다.

“륜은 내버려두면 지금 사원을 찾아온 잡것들에게도 그걸 생각해 보라고 요구할 것 같더군. 오레놀과 내가 겨우 말렸어. 그리고 그 잡것들 말인데, 생각보다는 호호탕탕한 걸물들이 많다는 건 인정하겠어. 하지만 그 자들은 지금 무학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내려고 눈이 벌개져 있어. 내가 가끔 그놈들을 상대해 주며 온갖 해괴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는 헛소리들을 조금씩 떨궈주고 있지.”

티나한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했고 케이건은 오레놀의 생각이 아니냐고 묻지는 않았다. 티나한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놈들 중엔 지금 하인샤 대사원에서 사제왕을 만들 계획이 아닌가 의심하는 놈들도 있어. 어제는 말이야, 어떤 녀석이 내게 접근하더니 더없이 진지한 투로 자신을 사제왕의 오른팔로 써달라고 간청하더라고.”

케이건은 티나한이 그것을 원할 거라 생각했기에 피식 웃는 시늉을 해 보였다. 티나한은 그 웃음에 만족하며 더 크게 웃었다.

“웃기지? 그렇지?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줬어. 아마 그 녀석은 자기 추측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겠지. 무슨 추장인가였는데, 젠장.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군.”

“수고하셨소. 그렇다면 그 자들은 아직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군. 하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오. 누군가가 신을 죽이려 하고 다른 누가 그것을 막으려 한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어떤 이야기꾼의 재능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겠지.”

“그래. 그놈들은 그걸 몰라. 그리고 말이야. 오늘이 약속한 엿새째야. 하텐그라쥬에서 연락이 올 거야. 그러니 너도 내려와서 입회해야지?”

“그러겠소.”

“그런데, 흠흠.”

티나한은 헛기침을 한 다음 주의 깊게 질문했다.

“오랫동안 여기 있었는데, 뭐 좋은 생각 같은 것 떠올렸어?”

어떤 꽃 이름을 떠올리려고, 혹은 그것이 떠오르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었소라고 대답하는 대신 케이건은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나한은 되려 케이건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 어차피 쉬운 일이 아니야. 오레놀이 말해 줬는데 그 지랄 같은 쇼자인테쉬크톨은 절대로 번복될 수가 없다더군.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거라도 말이야. 그 빌어먹을 놈들은 그런 위험한 것을 왜 함부로 쓰는 거지?”

“나가들도 거의 쓰지 않소. 쓰지 않다 보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잊어버리고 비아스에게 휘둘린 것이겠지. 그리고 륜이 남자라는 것 때문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오해든 뭐든 남자가 죽는 건 크게 상관없다는 걸 거요.”

티나한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쳇. 나는 가끔 나가 남자들이 정말 즐거운 자들이라고 생각했어. 결혼이 없으니까, 거꾸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기 아내인 거나 마찬가지잖아. 게다가 우리처럼 아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도 없지. 하지만 역시 의무가 없으면 권리도 없는 것이군. 오해로 죽게 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니, 끔찍하군.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겠어.”

말을 끝낸 티나한은 케이건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그게 무슨 표정이냐는 듯이 마주 보았다. 케이건은 질문을 꺼냈다.

“당신, 신부 탐색을 할 생각이오?”

“응.”

“이상하군. 보통 레콘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걸로 아는데. 신부 탐색을 하든가 평생 숙원에 매달리든가. 당신은 하늘치 유적 발굴을 평생 숙원으로 선택한 거 아니오?”

티나한은 문득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케이건의 속을 보고 싶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티나한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했다.

“내가 왜 하늘치 등에 올라가려는 줄 알아?”

“왜 그러는 거요?”

“물론 그 유적이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내 소망은 그보다 좀 더 나아간 곳에 있지.”

“얼마나 더 나아간 곳이오?”

“나는 그 유적들 사이에 내 가정을 꾸밀 거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집이 될 것 같지 않아?”

케이건은 잠시 말을 잊은 채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기나긴 시간들을 관류하여 온 케이건조차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망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낯설음은 케이건을 꽤 당황하게 했다. 한참 동안 케이건은 비형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환호 작약했을 거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티나한이 초조해하기 시작할 무렵 케이건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확실히 좋은 점은 있겠군. 전망은 분명히 최고일 테고, 아내를 빼앗으려 덤비는 귀찮은 젊은 도전자도 피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 위에 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신과 당신 부인들은 그 위에서 굶어 죽을 텐데?”

“아, 그건 다 계획해 두었어. 하늘치 등의 면적을 고려해 본 결과 그 위에 쏟아지는 빗물만으로도 식수는 충분해. 유적이 있으니까 집을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일단 올라가기만 하면 권양기를 설치하든 줄 사다리를 매달든 해서 물자 보급도 가능할 거야. 어쩌면 그 등 위에 흙을 깔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해 봐! 하늘치 등 위의 집이야. 전 세계에서 내 집 혹은 하늘치 등 위를 구경하려고 찾아올걸? 그 자들에게 돈을 받고 하늘치 등 위를 구경시켜 주면 돼. 나는 부인들과 함께 그 자들을 상대로 여관업을 하면 되고, 쳇, 정 어려우면 도로 내려오면 그만이야.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무궁하잖아.”

케이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겨우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아직도 당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잘 모르겠소. 당신을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낭만적인 사람으로 분류해야 할지, 아니면 가장 미친 사람으로 분류해야 할지. 어쩌면 둘 다 해당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를 어느 쪽으로 분류하든 상관없어.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이건 절대로 비밀이야. 이 기막힌 계획을 다른 놈이 채가는 꼴은 절대로 못 봐.”

케이건은 온 세상에 대고 알려도 그런 정신 나간 계획을 탐낼 자는 없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곧 그 생각을 철회했다. 세상은 넓은 것이다. 어쨌든 신을 죽이려 드는 작자들도 있으니.

“비밀은 지키겠소. 하늘치 등 위를 오르고 다시 신부 탐색도 하려면 시간이 많이 부족하시겠소?”

티나한은 씩 웃었다.

“평생 할 만한 사업이지.”

그리고 케이건은 잠시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일출이 시작되며 동쪽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광선이 티나한을 찬란한 광휘로 물들였다. 황당하리만큼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완전히 경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케이건은 억지로 티나한에게서 시선을 돌린 다음 말했다.

“알겠소. 꼭 나늬 같은 아내들과 함께 하늘치 등 위에 당신의 가정을 꾸미길 기원하겠소 당신의 그 경탄스러울 정도로 도전적인 소망을 듣고 나니 지나치게 칙칙한 일들에 둘러싸여 지낸 지난 며칠 동안의 어두운 기분이 싹 가셨다는 것을 고백해야겠군. 그만 내려갑시다.”

티나한은 케이건의 덕담에 한껏 고무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새벽의 산길을 걸어 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보던 티나한이 말했다.

“여름이 다가오는 모양이군. 원추리가 피었어.”

무심히 말하던 티나한은 케이건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것에 의아해했다. 케이건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라고 했소?”

“원추리가 피었다고.”

티나한은 손을 뻗어 가리키며 말했다. 티나한의 손을 따라간 케이건은 그곳에 자라나 있는 산꽃을 발견했다. 1미터 남짓한 길이로 자라난 줄기를 풍성한 잎사귀가 감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꽃줄기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 끝에는 앙증맞지만 강인한 꽃들이 덩이져 매달려 있었다.

케이건은 무의식적으로 티나한의 말을 반복했다.

“원추리.”

“저 꽃 좋아해?”

티나한의 질문에 케이건은 고개를 돌렸다. 티나한을 한 번 바라보았지만 케이건은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조금 후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했던 사람을 알고 있소.”

그리고 케이건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오후, 뱀 단지에서 뱀들이 요동쳤다.

륜은 무학당에 남아 있기를 원했기에 사어를 읽기 위해 모여든 사람은 엿새 전과 똑같았다. 오레놀이 방바닥에 뱀들을 풀어놓자마자 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어를 이루었다. 쥬타기 대선사는 그 속도에 놀라며 사어를 읽었다.

“준비는 끝났소? 끝났다면 뱀을 집어넣으시오.”

케이건은 오레놀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한 다음 뱀 한 마리를 붙잡아 집어넣었다. 뱀들의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다행이군! 좋다. 이곳과 그곳의 시간차를 고려해 본 결과 우리는 당신들이 내일 일몰 후 한 시간 무렵에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쯤이면 이곳은 한밤중일 것이다. 수호자들이 모두 잠든다면 신부가 잠시 사라진 것을 깨달을 가능성이 적다. 내일 해질 무렵에 실행할 수 있다면 뱀을 집어넣어라.”

케이건은 다시 뱀을 집어넣었다. 축약된 사어가 그들의 행운을 바라며 말을 맺었다. 오레놀은 뱀 단지 안에 뱀을 모두 수거했다. 뱀 단지의 뚜껑을 막은 오레놀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륜에게 가서 알리겠습니다. 내일 일몰 무렵에 시작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대선사는 문득 티나한과 케이건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티나한, 케이건. 왜 그러시오? 뭐가 잘못 되었소?”

티나한이 먼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가 일몰이면 하텐그라쥬는 한밤중이라니?”

“아, 하텐그라쥬는 우리가 있는 곳보다 더 동쪽에 있소. 그래서 일출도 우리보다 빠르고 일몰도 빠르지.”

티나한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쥬타기 대선사는 설마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뱀 단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래서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지?”

“그 수호자의 말대로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이 모두 잠든다면 우리들이 잠시 여신을 불러내더라도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에게 탄로 날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수호자는 한계선 이남에 무수한 나가의 도시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군요. 하텐그라쥬는 밤이라도 다른 나가의 도시는 아직 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들처럼 보다 서쪽에 있는 도시들의 경우가 그렇지요.”

쥬타기 대선사는 당황했다.

“아뿔사, 그렇군! 세리스마는 하텐그라쥬를 위주로 생각한 거야.”

“그 수호자의 이름이 세리스마입니까?”

“그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우리는 그들에게 말을 걸 방법이 없어.”

오레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전 세계의 나가 수호자들이 잠들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시간대가 다르니까요. 어느 시간을 선택하더라도 똑같으니 세리스마께서는 이왕이면 저 침묵의 도시의 수호자들이 잠드는 시간이 낫다고 결정하신 것 아닐까요?”

오레놀의 말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들은 잠시 후 그것이 적절한 대답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화리트와 륜은—그리고 별로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모 페이도 모두 하텐그라쥬 출신이다. 따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 하텐그라쥬에 있는 자들이 의심을 품을 가능성도 가장 높다. 쥬타기 대선사는 안도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일몰 때로 합시다. 원래 계획은 비운암의 방 안에서 하는 것이었소. 륜이 추위를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륜에겐 이제 흑사자 모피가 있으니 무학당 마당에서 해도 무방할 것 같소.”

“방과 마당의 차이는 뭡니까.”

케이건의 질문에 대선사는 미소를 지었다.

“케이건. 이건 금세기에 다시 있을지 의심스러운 대사건일세. 신의 강림이니까! 따라서 사원의 학승들은 그것을 완벽히 관찰하기를 원하네. 그래서 내일은 몇몇 학식 높으신 스님들과 행자들이 참석할 걸세. 그러려면 마당이 좋겠지. 그 때문에 한 가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

“방문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군요.”

“맞아.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상상도 할 수 없어. 하지만 방문자들이 괜한 방해가 될지도 모르지. 무학당에서의 준비는 오레놀이 맡겠지만 그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줄 사람이 필요하네.”

티나한은 약간 걱정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 또한 신의 강림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케이건이 말했다.

“그건 제가 맡겠습니다.”

티나한은 안도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음. 케이건. 너는 그거 보고 싶지 않아? 여신이 강림하는 건데.”

“나는 그 자리에 없는 편이 더 좋을 거요. 티나한.”

“응? 왜?”

“나가의 여신을 내가 죽이려 들지도 모르니까.”

티나한은 당황했고 쥬타기 대선사와 오레놀 대덕은 그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당연히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나가들을 증오하는 남자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다. 대선사와 대덕, 그리고 티나한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차분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칼로 찌른다고 해서 여신이 죽을 리는 없으니까.”

케이건의 말에도 불구하고 쥬타기 대선사는 안심할 수 없었다. 대선사는 케이건의 눈빛을 읽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케이건. 우리는 내일 신을 죽이는 방법을 물어볼 거야. 어딘가에 숨어서 그 방법을 듣고 있다가 곧장 시험해 보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곤란할 것 같은데.”

“재미있는 생각이군요.”라고 말하는 케이건의 얼굴은 조금도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오레놀은 방문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보다 케이건을 억류하는 것을 선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케이건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손에서 힘 빼시오. 오레놀, 어울리지 않소. 격투라도 벌일 생각이오?”

“필요하다면 해야지요. 필요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필요하지 않소.”

“믿어도 됩니까, 케이건? 당신의 증오는 압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겐 나가들을 멸망시킬 권리가…….”

“권리라고 했소?”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오레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젊은 대덕을 바라보며 케이건은 거의 부드럽다 할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오레놀. 나에게는 나가를 멸종시킬 권리가 있소. 발자국 없는 여신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더 분명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소. 조금 전 산에서 내려오며 나는 그것을 깨달았소.”

오레놀은 질린 얼굴로 쥬타기 대선사를 돌아보았다. 대선사는 눈을 몹시 찌푸리고 있었다. 티나한이 뭐라 말하려 할 때 케이건은 담담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나는 내일 그 권리를 쓰지 않겠소.”

“……진심이십니까?”

“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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