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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20화


동천은 마부가 쓰러지자 지가 세게 때린 건 생각 안 하고 너무 약골이라고 빈정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길 옆으로 나 있는 굵직굵직한 나무들이 가지런히 놓여서 동천을 반겼다.

“히히! 하늘도 맑고, 내 마음도 맑고, 이제 소연이 년만 데려오면 만사 땡이로다! 으히히히!”

얼마나 걸어갔을까? 드디어 동천이 목표로 삼았던 사정화의 집이 보였다. 신나게 한 걸음에 내달려온 동천은 문 앞에 도착하자 있는 힘을 다해 문을 힘차게 걷어찼다.

-쾅-!

“히히히! 이것들…님……”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동천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소연에게 시선을 맞추던 사정화는 눈을 돌려 동천을 노려보았다. 눈으로도 식사를 할 수 있었다면 동천은 벌써 잡아 먹혔을 정도였다.

‘어째서..어째서! 어째서 저 년이 아직도 있는 거지? 왜..? 왜!’

요리조리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던 동천은 이미 벌어진 일이라 조금이라도 무마해 보려는 듯 이내 활발하게 웃으며 들어갔다.

“아이구! 아가씨, 여지껏 계셨네요? 헤헤, 제가 그때 아가씨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죠? 헤헤헤..”

사정화는 의외로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용기를 얻은 동천은 좀 더 싹싹하게 다가갔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수련을 하신다더니….”

사정화는 동천의 질문을 무시하고 옆에 있는 수련에게 말했다.

“수련아..”

수련은 간만에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아가씨.”

사정화는 다시 동천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문 잠궈…”

“예, 아가씨.”

수련은 깍듯이 명에 따랐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동천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동천은 사정화가 눈에 살기를 띠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동천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하..하. 아가씨…왜..왜 그러시는….헤헤…”

물러서는 동천의 등 뒤로 턱..! 하고, 무언가가 부딪혔다. 고개를 돌려보니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동천이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어서 주춤거릴 때 사정화가 말문을 열었다.

“동천, 넌 여전하구나.”

사정화가 말하는 저의(底意)를 몰랐던 동천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헤헤..제가 원래 그렇잖아요..”

사정화는 동천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넌, 좀 맞아야 해.”

“예?”

동천은 곧이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을 느꼈다…


사혼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세대에 두 개의 사혼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는 장로로 존재하고, 다른 하나는 부교주나 교주의 지위를 지닌 수라마가(修羅魔家)의 가주를 호위한다. 그렇다면 왜 장로들과 호위대라는 신분을 가진 두 개의 사혼대가 존재하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장로들은 바로 전대(前代)의 호위대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은 사부가 장로로 승격되면 자연히 수라마가의 가주를 호위하는 호위대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장로가 된 사혼대들은 교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머무르고 싶은 곳에서 무공 수련을 하고, 중대사가 벌어지면 한자리에 모여 앉아있다가 손 한번 들어주는 게 다였다. 암흑마교는 마교의 영향을 깊게 받아서 그런지 마교의 체계(體系)와 아주 유사했다. 이는 환마교와는 정 반대였다. 그래서 장로들은 열두 명이었다. 그 중 사혼대는 육장로부터 구장로로 정해져 있었다. 물론, 일혼이 육장로고 마지막 사혼이 구장로였다. 그런데 돌아다니길 꺼려하는 이들이 이례적으로 약왕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육장로와 팔장로였다.

육장로는 특별히 튀는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절대종사의 위엄이 서려있었고, 팔장로는 짝딸만한 키에 푸근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의 시야에 약왕전이 보이자 육장로인 일혼이 입을 열었다.

“음..여기도 오랜만에 와보는군.”

대형의 말이 끝나자 팔장로가 말을 받았다.

“한, 이십 년 만이지요?”

“그런 것 같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약왕전에 당도했다. 대낮 보초는 연호와 하련이었다. 연호는 왠 두 노친네가 꾸물거리며 다가오자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시켰다.

“신분을 밝히시오.”

육장로는 신분을 밝히는 대신 연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서 무형의 강기가 퍼져 나왔다. 연호는 평범하게 생긴 노인의 눈에서 줄기줄기 노도(怒濤)가 휘몰아쳐 자신의 몸을 짓누른다고 생각했다.

“흐으으….큭!”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사술(邪術)에라도 걸린 듯,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연호는 숨이 막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에 소리라도 마음껏 질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비명 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연호는 죽음을 직감했다. 그의 눈알이 서서히 돌아가는 순간 거짓말처럼 거대한 잠력이 거두어졌다. 연호는 바닥을 뒹굴며 마음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쿨럭! 헉헉헉…!”

새파란 안색으로 쓰러진 연호를 지나치며 육장로가 중얼거렸다.

“뼈대가 약하군…”

옆에 있던 하련은 쫄아서 감히 지나쳐가는 그들을 제지할 엄두도 못냈다. 다만 높으신 어른인데 자신들이 못 알아봤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잠시 멈추었다. 뭐라고 서로 중얼거리던 그들 중 팔장로가 다시 돌아왔다.

하련은 불안한 마음에 얼른 굽실거렸다.

“하명하실 일이라도…”

팔장로는 육장로와는 달리 만면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렇다네. 전주께 안내해주게.”

그들은 너무 오랜만이라 이곳 지리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소전주가 생각나는 것일까? 하련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이를 본 팔장로가 물었다.

“응? 왜 웃는가?”

하련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잠시 옛일이 생각나서 웃었던 겁니다.”

“그런가? 하지만 본 장로는 내 앞에서 누군가가 웃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다네..”

“예?”

팔장로는 의문을 표하는 하련에게 장난하듯 손을 저었다. 그런데 들리는 소리는 놀랍게도 폭음이었다.

-꽝!

“켁!”

하련은 줄 끊어진 연처럼 붕.. 떴다가 볼품없이 나동그라졌다. 팔장로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내 약전주의 얼굴을 봐서 약하게 손을 썼네.”

그러나 하련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이미 기절한 것이었다. 동천은 생각에서라도 도움을 못 주는 인간이었다. 한편, 이 사태를 얼이 빠져 보고 있던 연호는 장로라는 엄청난 신분의 늙은이가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잽싸게 나섰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팔장로는 껄껄 웃었다.

“좋아. 좋아. 아무래도 자네가 낫겠군. 어서 가보시게.”

연호는 다리가 후들거림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그들을 안내했다. 좌우를 둘러보며 연호를 뒤따르던 육장로는 담장을 둘러싼 담쟁이 넝쿨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이제야 어느정도 가는 길이 생각나는군..”

옆에서 팔장로가 맞장구를 쳤다.

“허허, 저도 생각이 납니다. 여기는 그대로군요.”

육장로는 무슨 생각에선지 연호를 불러세웠다.

“멈춰라.”

연호는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게 아닌지 미리 겁을 먹으며 몸을 돌렸다.

“무슨….”

재수 없게 여기서 죽는 줄 알았던 연호는 육 장로에게 뜻밖의 소릴 들었다.

“이제, 가도 좋다.”

연호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가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그..그럼…물러나겠습니다.”

연호가 서둘러 돌아가자 팔장로가 입을 열었다.

“대형. 가시지요.”

육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 걸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어가며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여기는 바뀌었네… 저기는 아직도 그대로네. 등등…

잠시 후…

“여기가 어디냐?”

“글쎄요…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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