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29화
식사 후 소연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고 있던 동천은 갑자기 짧은 신음성을 내질렀다.
“윽!”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아파요?”
동천은 인상을 쓰며 손을 저었다.
“아냐..그게 아니라. 그게 뭐랄까…뭔가 중요한 것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가슴이 아프더라고…에이씨! 알게 뭐야! 별것 아니겠지 뭐.”
소연은 아직 걱정이 가시지 않은 듯 동천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주인님이 자신을 째려보자 얼른 차를 마셨다. 동천은 별맛도 없는 차를 억지로 삼켰다. 고위층 인간들이 맛있다며 즐기니까 자신도 따라 하는 것이었다. 동천은 천성적으로 차(茶)와는 안 맞았다. 소연이 차를 싫어했으면 그 핑계로 자신도 안 먹겠다고 말을 했겠지만 어렸을 때 제법 차 맛을 알았던 소연은 오히려 다시 차를 마시게 되자 좋아서 매일마다 즐겼다.
절반 정도 마신 컵 속에는 녹색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동천의 얼굴이 물결을 따라 제멋대로 그려졌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동천은 어제 느꼈던 이상한 감정이 되살아난다고 생각했다.
“소연아.”
“왜요?”
컵 속을 들여다보던 동천은 컵을 장난하듯 이리저리 돌려가며 말했다.
“나 어제 이상한 꿈을 꿨다.”
비록, 꿈일지라도 어제 얘기가 나오자 소연은 다소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차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 때문에 소연의 양쪽 볼은 개구리처럼 부풀어올랐다. 동천은 피식! 웃고 그다음 말을 이었다.
“글쎄. 어제 내가 꿈을 꾸는데 누가 자꾸 내 옷을 벗기더라고…”
“푸우우-웃…!”
난데없이 찻물 세례를 맞은 동천은 입안에 약간 들어간 찻물을 뱉어내며 소리쳤다.
“우왁? 에퇘퇘! 이 씨발…! 너, 뭐 하는 짓이야? 죽고 싶어?”
깜짝 놀란 소연은 자신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찻물을 닦아내며 동천에게 허겁지겁 다가갔다.
“주인님. 괘..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용서해 주세요….”
동천은 소연이 당황해하며 자신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대자 힘껏 밀치며 소리쳤다.
“아파 이 계집애야!”
나가떨어진 소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큰 죄를 지은 양, 일어서서 동천의 눈치를 살폈다. 따끔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낸 동천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조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어…..”
소연은 동천의 발걸음에 맞춰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한껏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이 위기를 넘겨보려고 애썼다.
“죄..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요….”
그러나 소연의 말주변으로는 위기를 넘기기 힘들 것 같았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소연 대신 이 위기를 넘겨줄 사람이 나타났다.
-똑똑..!
“썅-! 누구야!”
동천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됐는지 최대한으로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던 시녀는 문밖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방금 부전주님께서 당도하셨는데요….”
순간 동천의 눈이 번뜩였다.
“뭐라고? 지금 어디 계시지?”
문밖의 시녀는 다소 안심이 됐는지 차근히 설명했다.
“문 앞에 당도하셨을 때 전갈을 받았으니 조금 후에나 들어오실 겁니다.”
“그래? 알았어. 꺼져도 돼.”
동천은 말을 마치고 조심스레 침대로 다가갔다. 평소 같으면 재빨리 달려서 갔겠지만, 지금은 아픈 게 장난이 아니라서 혹시 모를 통증(痛症)에 대비해서 천천히 걸어간 것이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동천은 모든 상황이 잘 이루어지자 숨을 한껏 들이켰다. 그리고는 계속 참았다. 얼마 안 가 동천의 얼굴이 벌겋게 물이 들어갔다.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동천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푸하~~! 헉헉…다시, 후읍!”
그렇게 두어 번을 반복하니 동천의 몸에 땀방울이 하나둘씩 맺히기 시작했다. 소연은 지금 자신의 주인님이 하는 행동이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방금 전의 잘못 때문에 무서워서 질문을 못했다. 그때 자신의 얼굴을 매만져 본 동천은 자신이 흘린 땀에 어느 정도 만족했는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얼굴 표정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온갖 인상을 마구 지었다.
“끙끙…아파…아파….”
소연은 질문을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동천이 그러는 사이에 부전주인 소진이 도착했다. 소진은 문밖에서 서 있던 시녀가 문을 열어주자 웃음 띤 얼굴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정면으로 소연이 보였다. 소진은 그녀에게 말했다.
“차도가 있으시더냐?”
이미 동천의 행동을 보았던 터라 소연은 솔직히 말씀드리기가 무척이나 곤란했다. 그렇다고 진실을 밝혔다간 자신이 위험했으므로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해주었다.
“땀을 좀….흘리시는 것 같습니다.”
소진은 약간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천에게 다가간 소진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동천의 팔목을 잡고 맥을 집었다. 맥(脈)을 집는 내내 소진의 갸웃거림은 쉽게 멈출 줄을 몰랐다.
“이상해…맥이 좀 빠르긴 해도 지금쯤은 차도가 있어야 할 텐데 정말로 이상하군.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난 거지?”
과연 약왕전의 부전주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소진이 역천의 그늘에 가려서 지금은 별 명성이 없지만, 그 솜씨는 무시할 바가 아니었다. 정확한 부전주의 진단 때문에 동천은 하는 수 없이 그만 눈을 떠야 했다.
“끄응…누, 누구…..”
소진은 증상에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의식을 회복한 동천을 놀랍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깨어나셨소?”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한 동천은 얼마 안 가 아는 척을 했다.
“아아..? 부전주님 이시군요.”
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동천은 힘없이 일어나며 희미하게 웃었다. 동천이 아픈 척을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다 진짜로 몸이 말이 아니었으니, 소진의 입장에서는 속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이 정도야….윽!”
소진은 재빨리 동천의 어깨를 잡고 다시 뉘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앉아있는 건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진은 처음에 동천을 진맥할 때, 동천의 잘 발달된 근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근골에 어울리지 않게 내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예전에 종가진(鍾假眞)이 가졌었던 의문과 똑같았다. 그러나 신성도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그보다 실력이 딸리는 소진이 그 이유를 알아낼 리가 없었다. 소진은 전주인 역천이 어떤 신기를 발휘해 소전주를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소전주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더욱더 자세히 알고 있을 전주에게 나중에 물어보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태가 안 좋으니 며칠 동안 침대에서 몸조리를 잘하셔야 할 겁니다. 제 말 잘 알아듣겠습니까?”
일이 자신의 뜻대로 잘 흘러가자 동천은 속으로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오냐, 자~알 알겠느니라…히히!’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므로 동천은 자신의 생각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속은 웃고 있어도 당연히 겉으로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동천은 예의 상 괜찮다고 몇 번 버티다가, 마지못해 자리에 눕는 척을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를 바라보는 소연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감탄이 서려있었다. 소진은 동천의 목까지 얇은 이불을 끌어올려 주고 한결 여유를 가졌다. 그 여유가 소진의 마음속 한구석에 남겨놓았던 의문을 생각게 하였다.
“그런데..혹시, 잠이 들었을 때 가위에 눌렸습니까?”
동천은 가위 근처엔 가본 적도 없는지라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러나 한 줄기 예감이 자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고개를 저으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동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울러 약간 어두운 표정을 내비쳤다.
“예..지금은 생각이 잘 안 나지만 아주 무서운 꿈을 꾼 것 같기는 해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소진은 그제서야 자신이 들어왔을 때 나타났던 동천의 증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의문이 풀리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환자를 앞에 두고 실실거릴 수는 없는지라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아닙니다. 방금 제가 들어올 때 땀을 많이 흘리시길래 한번 물어봤던 것이니 한 귀로 듣고 흘리시지요.”
동천은 안 그래도 그럴려고 했었다.
“예. 그러죠. 근데…제 사부님께서는 어디에 가셨는지요?”